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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4)

상서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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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誓 第四
孔氏 傳 孔穎達 疏
武王 戎車 三百兩이요
[傳]兵車 百夫長所載 車稱兩이라 一車步卒七十二人으로 凡二萬一千人이니 擧全數
○車 音居 釋名云 古者聲如居하니 所以居人也 今曰車 聲近舍하니 車舍也
韋昭辯釋名云 古皆尺遮反이러니 從漢始有音居라하니라
虎賁 三百人이어늘
[傳]勇士稱也 若虎賁 言其猛也 皆百夫長이라
與受戰于牧野 作牧誓
牧誓
[傳]至牧地而誓衆이라
○牧 說文 作坶하고 云 地名이니 在朝歌南七十里라하니라
[疏]‘武王’至‘牧誓’
○正義曰:武王以兵戎之車三百兩‧虎賁之士三百人, 與受戰于商郊牧地之野, 將戰之時, 王設言以誓衆, 史敍其事, 作牧誓.
[疏]○傳‘兵車’至‘全數’
○正義曰:孔以虎賁三百人 與戎車數同, 王於誓時所呼有‘百夫長’, 因謂‘虎賁’ 卽是百夫之長, 一人而乘一車, 故云 “兵車, 百夫長所載.”也.
數車之法, 一車謂之一兩. 詩云 “百兩迓之”, 是車稱兩也.
風俗通說車有兩輪, 故稱爲兩. 猶屨有兩隻, 亦稱爲兩. 詩云 “葛屨五兩.” 卽其類也.
‘一車步卒七十二人’ 文也. 車有七十二人, 三百乘凡二萬一千人. 計車有七十二人, 三百乘當有二萬一千六百人,
孔略六百而不言, 故云 “擧全數.” 顧氏亦同此解. 孔旣用司馬法一車七十二人, 又云 “兵車, 百夫長所載.”
又下傳以百夫長爲‘卒’, 是實領百人, 非惟七十二人.
, 天子六軍, 出自六鄕, 凡起徒役, 無過家一人,
故一鄕出一軍, 鄕爲正, 遂爲副. 若鄕遂不足, 則徵兵于邦國,
則司馬法六十四井爲甸, 計有五百七十六夫, 共出長轂一乘,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至於臨敵對戰布陳之時, 則依六鄕軍法, 五人爲伍, 五伍爲兩, 四兩爲卒, 五卒爲旅, 五旅爲師, 五師爲軍.
故左傳云 又云 非直人數如此, 車數亦然.
故周禮云 “乃會車之卒伍.” 鄭云 “車亦有卒伍.” 左傳“戰于繻葛.” 杜注云 “車二十五乘爲偏.”
是車亦爲卒伍之數也. 則一車七十二人者, 自計元科兵之數. 科兵旣至, 臨時配割, 其車雖在, 其人分散.
前配車之人, 臨戰不得還屬本車, 當更以虎賁甲士配車而戰. 孔擧七十二人, 元科兵數者, 欲總明三百兩人之大數.
云“兵車 百夫長所載”者, 欲見臨敵實一車有百人, 旣‘虎賁’與車數相當, 又經稱“百夫長.” 故孔爲此說.
[疏]○傳‘勇士’至‘夫長’
○正義曰:周禮虎賁氏之官, 其屬有虎士八百人, 是虎賁爲‘勇士稱’也.
若虎之賁走逐獸, 言其猛也. 此虎賁, 必是軍內驍勇選而爲之, 當時謂之‘虎賁’.
樂記云 “虎賁之士說劍.” 謂此也. 孔意‘虎賁’卽是經之‘百夫長’, 故云 “皆百夫長”也.


武王戎車(兵車)가 300()이었고,
兵車百夫長이 타는 것인데, 를 ‘’이라고 칭하였다. 한 대의 수레에 딸린 步卒은 72명으로 〈300이면〉 대략 2만 1천명이니, 〈步卒의〉 전체 숫자를 든 것이다.
이 ‘’이다. ≪釋名≫ 〈釋車〉에 “옛날에는 聲音이 ‘’와 같았으니, 사람을 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고, 지금 ‘’라고 하는 것은 聲音에 가까우니 車舍(수레 집)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韋昭의 ≪辯釋名≫에 “옛날에는 모두 反切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때부터 비로소 을 ‘’라 했다.”라고 하였다.
虎賁이 300명이었는데,
虎賁은〉 勇士의 칭호이다. 마치 범이 날래게 달려 짐승을 쫓는 것과 같으니, 그 용맹을 말한 것이다. 〈虎賁은〉 모두 百夫長이다.
()와 牧野에서 싸웠다.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牧誓〉를 지었다.
’이란 땅에 이르러서 군중에게 서계한 것이다.
은 ≪說文解字≫에 ‘’로 적고 “땅 이름이니, 朝歌의 남쪽 70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라고 하였다.
書序의 [武王]에서 [牧誓]까지
正義曰武王兵戎의 수레 300虎賁의 군사 300을 데리고 나라 교외의 ‘’이란 땅의 들에서 싸웠는데, 싸우려고 할 때에 이 말을 만들어서 군중에게 서계하였으니, 사관이 그 일을 서술하여 〈牧誓〉를 지었다.
의 [兵車]에서 [全數]까지
正義曰孔安國은, ‘虎賁 300’이 戎車의 숫자와 동일하고, 誓戒할 때 호명한 것에 ‘百夫長’이 들어있으므로 ‘虎賁’이 바로 百夫長이라고 생각하여 한 사람이 한 대의 수레를 타기 때문에 “兵車百夫長이 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레를 세는 법은 1를 ‘1’이라 말한다. ≪詩經≫에서 “100으로 맞이한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수레를 ‘’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風俗通義≫에서 “수레에는 두 개의 바퀴가 있다.[兩輪]”라고 설명했기 때문에 〈수레를〉 ‘’이라 칭하였고, 신에 두 짝이 있어 또한 ‘’이라 칭하는 것과 같다. ≪詩經≫ 〈齊風 南山〉에 “칡신은 다섯 켤레이며.”라고 하였으니 곧 그러한 이다.
[一車步卒七十二人] ≪司馬法≫의 글이다. 수레 한 대에 72명이 소속되므로 300대면 대략 2만 1천 명이다. 정확히 계산하면 수레 한 대에 〈步卒〉 72명이 소속되므로 300대면 당연히 2만 1천 600명인데,
孔安國은 600명은 생략하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의 수를 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顧氏도 이와 같이 풀이하였다. 공안국이 이미 ≪司馬法≫의 “수레 한 대에 〈보졸〉 72명이 소속된다.”라는 내용을 인용한 뒤에 또 다시 “兵車百夫長이 타는 것이다.”라고 하고,
또 아래의 에서 百夫長을 ‘군졸의 장수[卒帥]’라고 하였는데 이가 실제로 100명을 거느리니, 72명뿐만이 아니다.
周禮≫와 ≪司馬法≫에 의하면, 天子의 6은 6으로부터 나왔고, 부역할 때에는 한 집에서 한 사람 이상을 징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에서 1을 내놓는데, 에서 내놓은 군병은 正軍, 에서 내놓은 군병은 副軍으로 명명하였다. 만일 에서 내놓은 군병이 부족할 때에는 邦國에서 군병을 징발하였다.
司馬法≫에서는 64으로 편성하였으니, 계산하면 의 구성원은 576였으며, 그들이 공동으로 長轂 1대, 甲士 3명, 步卒 72명을 내놓았다.
적과 대전하기 위하여 진을 칠 때에는 六鄕軍法에 의하여 5명으로 를, 5을, 4으로 을, 5를, 5를, 5을 편성하였다.
그러므로 ≪春秋左氏傳≫에 “을 앞에, 를 뒤에 배치한다.”라고 하고, 또 “에는 1, 에는 2이 있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숫자가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수레의 숫자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周禮≫ 〈夏官 司右〉에 “수레의 를 회합한다.”라고 하였는데, 鄭玄은 “수레에도 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桓公 5년 조에 “繻葛(수갈)이란 땅에서 싸웠다.”라고 하였는데, 杜預에 “수레 25대를 한 偏隊로 만든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수레에도 의 숫자가 있었다. ‘수레 한 대에 72명’이란 것은 元科兵의 숫자를 계산한 것이다. 科兵이 일단 도착하였으면 임시로 분할하기 때문에 그 수레는 비록 그대로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분산되게 마련이다.
앞서 수레에 배정된 사람이 전장에 나아갈 때에는 본래 타고 온 수레에 도로 배속될 수 없으니, 응당 다시 虎賁甲士로써 수레에 배속되어 싸워야 했다. 孔安國이 거론한 ‘72명’은 元科兵의 숫자이니 300에 실린 인원의 총수를 다 밝히려고 한 것이다.
兵車百夫長이 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적과 교전할 당시 한 수레에 소속된 100명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니, 이미 虎賁이 수레의 숫자와 서로 걸맞고 또 經文에 “百夫長”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孔安國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의 [勇士]에서 [夫長]까지
正義曰:≪周禮≫ 〈夏官 敍官〉에 虎賁氏의 관직제도를 보면 그 소속에 虎士 800명이 있으니, 여기의 ‘虎賁’은 勇士의 칭호이다.
마치 범이 날래게 달려 짐승을 쫓는 것과 같으니, 그 용맹을 말한 것이다. 여기의 ‘虎賁’은 필시 군병 내에서 驍勇한 자가 뽑혀서 되었을 것이니, 당시에 이를 ‘虎賁’이라 이른 것이다.
禮記≫ 〈樂記〉에 “虎賁의 용사는 검을 풀어놓았다.”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공안국은 ‘虎賁’이 바로 이 經文의 ‘百夫長’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모두 百夫長이다.”라고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 ≪史記集解≫에는 없다.
역주2 司馬法 :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 田穰宜의 著書이다.
역주3 (師)[帥] : 저본에 ‘師’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는 ‘師’가 ‘帥’로 되어 있으니, 고치는 것이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帥’로 바로잡았다.
역주4 周禮(大)[及]司馬法 : ≪欽定四庫全書考證≫에는 ‘原本大訛及’이라 하고 ‘及’을 ‘大’로 고쳤는데, 문의로 보아 原本의 ‘及’이 맞다. 인용문이 ≪周禮≫와 ≪司馬法≫의 글이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역주5 先偏後伍 : ≪春秋左氏傳≫ 桓公 5년 조에 “魚麗(리)陣을 칠 때에 兵車를 앞에다가, 步兵을 뒤에다가 배치하되 병거와 병거 사이를 보병으로 채워서 빈틈이 없게 했다.[爲魚麗之陳 先偏後伍 伍承彌縫]”란 말이 보인다.
역주6 廣有一卒 卒偏之兩 : ≪春秋左氏傳≫ 宣公 12년 조에 “楚나라 임금의 親衛軍을 나누어 左右 2廣(1廣은 15乘)으로 편성하였는데, 廣에는 1卒(兵車 30乘)이 있고, 卒에는 2偏(1偏은 15乘)이 있다.[其君之戎 分爲二廣 廣有一卒 卒偏之兩]”란 말이 보인다.

상서정의(4)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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