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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4)

상서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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祀于周廟하실새 邦甸侯衛駿奔走하여 執豆籩하고
[傳]四月丁未 祭告后稷以下‧文考文王以上七世之祖 駿 大也
邦國甸‧侯‧衛服諸侯 皆大奔走於廟執事하니라
○豆 本又作梪
越三日庚戌 柴望하사 大告武成하시다
[傳]燔柴郊天하고 望祀山川하니 先祖後郊 自近始
[疏]‘惟一’至‘武成’
○正義曰:此歷敍伐紂往反祖廟告天時日, 說武功成之事也.
‘一月壬辰 旁死魄’, 謂伐紂之年周正月辛卯朔, 其二日是壬辰也.
‘翼日癸巳 王朝步自周 于征伐商’, 謂正月三日, 發鎬京始東行也.
其月二十八日戊午渡河. 泰誓序云 “一月戊午, 師渡孟津.” 泰誓中篇云 “惟戊午, 王次于河朔.” 是也.
二月辛酉朔, 甲子殺紂, 牧誓云 “時甲子昧爽, 乃誓.” 是也. 其年閏二月庚寅朔, 三月庚申朔, 四月己丑朔.
‘厥四月 哉生明 王來自商 至于豐’, 謂四月三日, 月始生明, 其日當是辛卯也.
‘丁未 祀于周廟’, 四月十九日也. ‘越三日庚戌 柴望’, 二十二日也. 正月始往伐, 四月告成功, 史敍其事, 見其功成之次也.
漢書律曆志引武成篇云 “惟一月壬辰旁死魄, 若翼日癸巳, 武王乃朝步自周, 于征伐紂,
越若來二月, 旣死魄, 越五日甲子, 咸劉商王紂, 惟四月旣旁, 越六日庚戌, 武王燎于周廟.
於周廟.” 與此經不同. 彼是焚書之後, 有人僞爲之.
漢世謂之逸書, 其後又亡其篇. 鄭玄云 “武成逸書, 建武之際亡.” 謂彼僞武成也.
[疏]○傳‘此本’至‘死魄’
○正義曰:將言武成, 遠本其始.
‘此本說始伐紂時 一月 周之正月’, 是建子之月, 殷十二月也. 此月辛卯朔, 朔是死魄, 故“月二日, 近死魄.” 魄者, 形也.
謂月之輪郭, 無光之處, 名魄也. 朔後明生而魄死, 望後明死而魄生.
律曆志云 “死魄, 朔也, 生魄, 望也.” 顧命云 “惟四月哉生魄.” 傳云 “始生魄, 月十六日也.”
月十六日爲始生魄, 是一日爲始死魄, 二日近死魄也. 顧氏解死魄與小劉同.
大劉以三日爲始死魄, 二日爲旁死魄. 旁死魄無事, 而記之者, 與下日爲發端, 猶今之將言日, 必先言朔也.
[疏]○傳‘翼明’至‘孟津’
○正義曰:‘翼 明’, 釋言文. 釋宮云 “堂上謂之行, 堂下謂之步.” 彼相對爲名耳. 散則可以通, 故步爲行也.
周去孟津千里, 以正月三日行自周, 二十八日渡孟津, 凡二十五日, 每日四十許里, 時之宜也.
詩云 “于三十里.” 毛傳云 “師行三十里.” 蓋言其大法耳.
[疏]○傳‘其四’至‘互言’
○正義曰:‘其四月’, 此伐商之四月也.
‘哉 始’ 釋詁文. 顧命傳以‘哉生魄’爲十六日, 則‘哉生明’爲月初矣. 以三日月光見, 故傳言 “始生明, 月三日.”也.
此經無日, 未必非二日也. ‘生明’‧‘死魄’ 俱是月初, 上云‘死魄’, 此云‘生明’, 而魄死明生互言耳.
[疏]○傳‘倒載’至‘文敎’
○正義曰:樂記云, “武王克殷, 濟河而西, 車甲釁而藏之府庫, 倒載干戈, 包之以虎皮, 天下知武王之不復用兵也.
散軍而郊射. 左射, 貍首. 右射, 騶虞, 而貫革之射息也.” 是‘偃武修文’之事, 故傳引之.
郊射是禮射也. 王制論四代學名云 “虞謂之庠, 夏謂之序.” 故言“設庠序, 修文敎”也.
[疏]○傳‘山南’至‘乘用’
○正義曰:釋山云:“山西曰夕陽, 山東曰朝陽.” 李巡曰 “山西暮乃見日, 故曰夕陽, 山東朝乃見日, 故云朝陽.”
陽以見日爲名, 故知“山南曰陽.” 杜預云 “桃林之塞, 今農華陰縣潼關是也.” 是在華山東也.
指其所往謂之歸, 據我釋之則云‘放’, ‘放牛’‧‘歸馬’ 互言之耳. 華山之旁, 尤乏水草, 非長養牛馬之地, 欲使自生自死.
此是戰時牛馬, 故放之, 示天下不復乘用. 易繫辭云 “服牛乘馬.” ‘服’‧‘乘’俱是用義, 故以‘服’總牛馬.
[疏]○傳‘四月’至‘執事’
○正義曰:以‘四月’之字, 隔文已多, 故言“四月丁未”. 此以成功設祭, 明其徧告群祖, 知告后稷以下.
后稷則始祖, 以下, 容毁廟也. 天子七廟, 故云“文考文王以上七世之祖.” 見是周廟皆祭之, 故經總云‘周廟’也.
‘駿 大’, 釋詁文. 周禮六服侯‧甸‧男‧采‧衛‧要, 此略擧邦國在諸侯服, 故云 “甸‧侯‧衛” 其言不次.
詩頌云 “駿奔走在廟.” 故云 “皆大奔走於廟執事.”也.
○‘越三日庚戌’
○正義曰:召誥云‘越三日’者, 皆從前至今爲三日, 此從丁未數之, 則爲四日,
蓋史官不同, 立文自異, 或此‘三’當爲‘四’, 由字積.


丁未日나라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 邦國甸服侯服衛服의 제후들이 매우 분주하게 다니며 제기를 나르는 등 제사 일을 도왔고,
4 丁未日后稷 이하 文考 文王 이상 7의 조상에게 고유제를 지냈다. ‘駿’은 의 뜻이다.
邦國甸服侯服衛服 諸侯들이 모두 사당에서 매우 분주하게 일을 집행하였다.
가 어떤 에는 또 로 되어 있다.
사흘이 지난 庚戌日에는 柴祭望祭를 지내어 무공이 이루어졌음을 〈하늘과 山川에〉 크게 고하셨다.
나무를 불태워서 하늘에 郊祭를 지내고, 멀리 바라보며 山川에 제사를 지냈으니, 조상에게 먼저 제사 지내고 교제를 뒤에 지낸 것은 가까운 데부터 시작한 것이다.
의 [惟一]에서 [武成]까지
正義曰:여기서는 를 치러 갔다 돌아와서 사당에 제사 지내고 하늘에 고한 時日을 차례로 적어서 武功이 이루어진 일을 말하였다.
一月壬辰 旁死魄(1월에서 초하룻날에 가까운 곧 日辰壬辰이 든 이튿날)”이라고 한 것은 를 친 해인 나라 正月에서 日辰辛卯가 든 초하루, 바로 그 이튿날인 日辰壬辰이 든 날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翼日癸巳 王朝步自周 于征伐商(그 다음 날인 癸巳日에 왕께서 아침에 (鎬京)로부터 가시어 나라를 정벌하셨다.)”이라고 한 것은 正月 사흗날 鎬京을 출발하여 비로소 동쪽으로 갔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달 스무 여드렛날 戊午에 황하를 건넜으니, 〈泰誓〉의 書序에 “1 戊午日에 군사가 孟津을 건넜다.”라고 하고, 〈泰誓〉의 中篇에 “戊午日이 황하 북쪽에 머물렀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2 日辰辛酉가 든 초하루에서 세어가 日辰甲子가 든 날에 를 죽였으니, 〈牧誓〉에 “때는 甲子日 이른 새벽, 〈왕께선 일찍이 나라의 교외인 牧野에 이르시어 군사들에게〉 誓戒하셨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해 2은 초하루가 庚寅이 든 날이고, 3은 초하루가 庚申이 든 날이고, 4은 초하루가 己丑이 든 날이었다.
厥四月 哉生明 王來自商 至于豐(4월 달이 밝아지기 시작할 곧 사흗날 왕께서 나라로부터 돌아오시어 땅에 이르러)”이라고 한 것은 〈厥四月 哉生明은〉 4월 사흗날 달이 비로소 밝은 빛을 내는 것을 이르는데, 그 날이 바로 辛卯가 든 날에 해당한 것이다.
丁未 祀于周廟(丁未日나라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라고 한 〈丁未는〉 4 열아흐렛날이다. “越三日庚戌 柴望(사흘이 지난 庚戌日에는 柴祭望祭를 지내어)”이란 〈越三日庚戌은〉 스무이튿날이다. 正月에 비로소 가서 정벌하고, 4에 공을 이룬 것을 고하였으니,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그 공이 이루어진 차례를 보인 것이다.
漢書≫ 〈律曆志〉에 인용된 〈武成〉편의 “1월에서 초하룻날에 가까운 곧 日辰壬辰이 든 이튿날의 그 다음 날인 癸巳日에 무왕이 아침에 (鎬京)로부터 가시어 를 정벌하였고,
2 이미 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든 닷샛날인 甲子日나라 를 죽였고, 4 이미 달의 검은 부분이 커지기 시작한다는 곧 열엿샛날에 가까운 엿샛날인 庚戌日武王나라 宗廟燎祭를 지냈고,
다음 날인 辛亥日天位에 제사를 지냈고, 닷샛날인 乙卯日에 여러 나라들과 함께 나라 宗廟에 〈獻馘祭를〉 지냈다.”란 것은 여기의 經文과 동일하지 않다. 저 ≪漢書≫의 것은 바로 焚書사건 뒤에 어떤 사람이 위작한 것이다.
漢代에는 그것을 ‘逸書’라고 하였는데, 뒤에 또 그 을 망실하였다. 鄭玄이 “〈武成〉은 逸書인데, 建武(後漢 光武帝의 첫 번째 연호) 연간에 망실되었다.”라고 한 것은 저 위작의 〈武成〉을 말한 것이다.
의 [此本]에서 [死魄]까지
正義曰:장차 武功이 이루어진 점을 말하기 위하여 멀리 그 비로소 〈를 친 때를〉 기점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此本說始伐紂時 一月 周之正月] 〈나라의 正月은〉 北斗星의 자루가 子方을 가리키는 달로 곧 나라의 12이다. 이 달은 辛卯가 든 날이 초하루인데, 초하루에는 바로 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 달 이튿날은 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드는 초하루에 가깝다.”라고 한 것이다. ‘’이란 것은 바로 형태이다.
달의 윤곽에 빛이 없는 부분을 이르니, 그것을 ‘’이라 명명하였다. 초하루 이후에는 달의 윤곽에 밝은 부분이 생겨나고 검은 부분이 줄어들며, 보름 이후에는 밝은 부분이 줄어들고 검은 부분이 생겨난다.
漢書≫ 〈律曆志〉에 “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기는 초하루이고, 검은 부분이 커지기 시작하는 시기는 보름이다.”라고 하였다. 〈顧命〉에 “4월 달의 검은 부분이 커지기 시작하는 날에”라고 하였는데, 에서 “달의 始生魄(달의 검은 부분이 커지기 시작하는 날)은 그 달 열엿샛날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열엿샛날이 始生魄이 되므로, 이 초하룻날은 始死魄(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초하루에 가까운 날)이 되고, 그 이튿날은 近死魄(死魄에 가까운 날)이 된다. 顧氏(顧彪)가 ‘死魄’을 풀이한 것은 小劉(劉炫)와 같았다.
大劉(劉焯)는 사흗날을 始死魄으로 여기고, 이튿날을 旁死魄(달의 검은 부분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초하루에 가까운 이튿날)으로 여겼다. 旁死魄에는 〈적을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하는 자가 아래의 사흗날과 더불어 단서를 꺼냈으니, 지금 장차 날짜를 말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초하루를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의 [翼明]에서 [孟津]까지
正義曰:[ ] ≪爾雅≫ 〈釋言〉의 글이다. ≪爾雅≫ 〈釋宮〉에 “의 위를 걷는 것을 ‘’이라 이르고, 의 아래를 걷는 것을 ‘’라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저 ≪爾雅≫에서는 상대해서 〈다르게〉 이름했을 뿐이다. 散文일 경우에는 통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의 뜻으로 쓴다.
(鎬京)에서 孟津을 가는 거리는 1,000리인데, 正月 사흗날 (鎬京)로부터 가서 28일에 孟津을 건넜으므로 25일이 걸린 것이니, 매일 40여 리를 행군한 것은 시의적절한 셈이다.
詩經≫ 〈小雅 六月〉에 “하루에 30리를 갔다.”라고 하였는데, 毛傳에서 “군사가 하루에 30리를 행군했다.”라고 하였으니, 아마 큰 법칙을 말했을 뿐이리라.
의 [其四]에서 [互言]까지
正義曰:[其四月] 이는 나라를 정벌한 4월이다.
[ ] ≪爾雅≫ 〈釋詁〉의 글이다. 〈顧命〉의 에서 ‘哉生魄’을 열엿새로 여겼으니, ‘哉生明’은 月初가 된 셈이다. 사흗날 달빛이 나타나기 때문에 에서 “‘始生明’은 그 달 사흗날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經文에 날짜가 적혀있지 않으니, 꼭 이튿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生明’과 ‘死魄’은 모두 月初인데, 위에서는 ‘死魄’이라 하고, 여기서는 ‘生明’이라 해서 ‘검은 부분이 줄어든 것’과 ‘밝은 빛이 생긴 것’을 互言했을 뿐이다.
의 [倒載]에서 [文敎]까지
正義曰:≪禮記≫ 〈樂記〉에 “武王나라를 정벌하여 승리한 다음 黃河를 건너 서쪽으로 와서 兵車와 갑옷은 수선해서 府庫에 간직하였고, 干戈는 거꾸로 싣고 虎皮로 쌌기 때문에 天下 사람들이 武王이 다시는 用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군대를 해산시키고 郊學에서 射藝를 익혔다. 東學에서 射藝를 익힐 때에는 貍首詩를 노래하고, 西學에서 射藝를 익힐 때에는 騶虞詩를 노래하였으며, 갑옷과 투구 등을 뚫기 위한 전술적인 활쏘기는 그만두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력을 거두고 文敎를 닦는 일’이기 때문에 에서 인용한 것이다.
郊學에서 射藝를 익히는 것은 바로 의 절차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면서 행하는 활쏘기이다. ≪禮記≫ 〈王制〉에서 〈四代의 학교 이름을 논하기를 “나라에서는 ‘’이라 이르고, 나라에서는 ‘’라 일렀다.”라고 했기 때문에 “‘’이란 학교와 ‘’란 학교를 설립하여 文敎를 닦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의 [山南]에서 [乘用]까지
正義曰:≪爾雅≫ 〈釋山〉에 “산 서쪽을 ‘夕陽’이라 하고, 산 동쪽을 ‘朝陽’이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李巡은 “산 서쪽은 저물녘에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夕陽’이라 하고, 산 동쪽은 아침에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朝陽’이라 한다.”고 하였다.
은 해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명명했기 때문에 산 남쪽이 ‘’이라는 것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杜預는 “桃林塞地는 지금의 弘農郡 華陰縣 潼關이 이곳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華山의 동쪽에 있었다.
가는 바를 가리켜 ‘’라 이르고, 나에 의거하여 그를 풀어주면 ‘(놓아보냄)’이라 이르니, 放牛歸馬互言했을 뿐이다. 華山의 곁에는 워낙 水草가 모자라, 소와 말을 기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제 스스로 살고 제 스스로 죽게 하려 한 것이다.
이는 바로 전시에 사용한 소와 말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놓아 보내서, 다시는 타거나 사용하지 않을 것을 천하에 보였다. ≪周易≫ 〈繫辭傳 〉에 “소를 부리고 말을 탄다.”라고 하였으니, 은 모두 의 뜻이기 때문에 으로써 소와 말을 총괄하였다.
의 [四月]에서 [執事]까지
正義曰:‘四月’이란 글자가 문장을 사이에 두고 이미 많기 때문에 〈‘四月’을 붙여서〉 “四月 丁未에”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공을 이루고 제사를 베풀어 두루 여러 조상에게 고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后稷 以下에 고한 것임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后稷始祖이므로 〈영원히 모셨지만〉 以下는 혹 사당이 헐린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天子는 7이기 때문에 “文考 文王 이상 7의 조상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나라 宗廟에 모두 제사를 지냄을 보인 것이기 때문에 經文에서 총괄적으로 ‘나라 사당’이라고 한 것이다.
[駿 ] ≪爾雅≫ 〈釋詁〉의 글이다. ≪周禮≫ 〈秋官 大行人〉에 6侯服甸服男服采服衛服要服이지만, 여기서는 諸侯들의 에 있는 邦國만을 대략 들었기 때문에 “甸服侯服衛服”이라고 한 것인데, 그 말이 차서대로 된 것은 아니다.
詩經≫ 〈周頌 淸廟〉에 “매우 분주하게 와서 종묘 안에서 〈제사를 돕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모두 종묘에서 분주하게 일을 집행했다.”라고 한 것이다.
의 [越三日庚戌]
正義曰:〈召誥〉에서 말한 ‘越三日’이란 것들은 모두 前日부터 今日까지가 3일이 되고, 여기는 丁未日부터 세어 오면 4일이 되니,
아마 史官이 동일하지 않아서 각각 立文을 다르게 하였는지, 아니면 혹 이 ‘’자는 응당 ‘’자가 되어야 하는데, 글자의 획이 쌓여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역주
역주1 丁未 : 여기서는 4월 19일이다.
역주2 生魄 : 달의 검은 부분이 커지기 시작한다는 곧 음력 매월 열엿샛날을 일컫는 말이다.
역주3 惟四月旣旁生魄……乃以庶國祀[馘]於周廟 : 위의 越若……王紂와 함께 顔師古는 “≪今文尙書≫의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今文尙書≫에 보이지 않는다. 朱子도 “顔師古는 어디에 상고했는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朱子語類≫)
역주4 [馘] : 저본에 없으나, ≪漢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祀馘’에 대하여 顔師古는 “馘을 宗廟에 바치면서 고하는 제사이다.”라고 하였다. 馘은 베어낸 왼쪽 귀이다.
역주5 (宏)[弘] : 저본에는 ‘宏’으로 되어 있으나, 淸나라 高宗 乾隆帝 愛新覺羅弘曆의 ‘弘’자를 피하여 ‘宏’으로 바꾼 것이므로 ‘弘’으로 되돌려놓았다.
역주6 (與誤)[誤與] : 저본에는 ‘與誤’로 되어 있으나, “‘與誤’ 2자는 도치되었다.”라고 한 浦鏜의 설에 의거하여 ‘誤與’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盧文弨는 “‘與’는 ‘畫’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 ‘四’는 ‘亖’로 썼으니, ‘三’자와 함께 모두 획을 쌓아 만든 글자이다.”라고 하여 ‘與’를 ‘畫’의 오자로 보았다. 노문초의 견해를 따르면 ‘由字積畫誤’는 ‘획을 쌓아 만든 글자이기 때문에 〈亖가 三으로〉 잘못된 것이다.’로 풀이할 수 있다.

상서정의(4)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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