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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4)

상서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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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 제12권 周書
洪範 第六
孔氏 傳 孔穎達 疏
武王 勝殷하여 殺受하고 立武庚하시다
[傳]不放而殺이나 紂自焚也 武庚 紂子 以爲王者後 一名祿父
以箕子歸 하다
[傳]歸鎬京하여 箕子作之
○鎬 本又作鄗 武王所都也
[疏]‘武王’至‘洪範’
○正義曰:武王伐殷, 旣勝, 殺受, 立其子武庚爲殷後, 以箕子歸鎬京, 訪以天道, 箕子爲陳天地之大法, 敍述其事, 作洪範.
此惟當言箕子歸耳, 乃言殺受, 立武庚者, 序自相顧爲文. 上武成序云 “武王伐.” 故此言勝之,
下微子之命序云 “黜殷命, 殺武庚.” 故此言立之, 敍言此以順上下也.
[疏]○傳‘不放’至‘祿父’
○正義曰:放桀也. 湯放桀, 此不放而殺之者, 紂自焚而死也.
殷本紀云 “紂兵敗, 紂走入登鹿臺, 衣其寶玉衣, 赴火而死. 武王遂斬紂頭, 懸之太白旗.”是也.
泰誓云 “取彼凶殘.” 則志在於殺也. 死猶斬之, 則生亦不放. 傳據實而言之耳.
本紀云 “封紂子武庚祿父以續殷祀.” 是“以爲王者後”也. 本紀武庚祿父雙言之,
伏生尙書傳云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是一名祿父也. 鄭云 “武庚字祿父.”
春秋之世, 有齊侯祿父‧蔡侯考父‧季孫行父, 父亦是名, 未必爲字, 故傳言“一名祿父.”
[疏]○傳‘歸’至‘作之’
○正義曰:上篇云 “至于豐”者, 文王之廟在豐, 至豐先告廟耳. 時王都在鎬, 知歸者, 歸鎬京也.
此經文旨異於餘篇, 非直問答而已, 不是史官敍述, 必是箕子旣對武王之問, 退而自撰其事, 故傳特云 “箕子作之.”
書傳云 “武王釋箕子之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問洪範.”
案此序云 “勝殷, 以箕子歸.” 明旣釋其囚, 卽以歸之, 不令其走去而後來朝也.
又朝鮮去周, 路將萬里, 聞其所在, 然後封之, 受封乃朝, 必歷年矣, 不得仍在十三祀也.
宋世家云 “旣作洪範, 武王乃封箕子於朝鮮.” 得其實也.
洪範
[傳]洪 法也 言天地之大法이라
[疏]‘洪範’
○正義曰:此經開源於首, 覆更演說, 非復一問一答之勢, 必是箕子自爲之也.
發首二句, 自記被問之年, 自‘王乃言’至‘彛倫攸敍’, 王問之辭.
自‘箕子乃言’至‘彛倫攸敍’, 言禹得九疇之由. 自‘初一曰’至‘威用六極’, 言禹第敍九疇之次.
自‘一五行’已下, 箕子更條說九疇之義. 此條說者, 當時亦以對王, 更復退而修撰, 定其文辭, 使成典敎耳.
[疏]○傳‘洪大’至‘大法’
○正義曰:‘洪 大’‧‘範 法’ 皆釋詁文.


武王나라를 쳐서 승리하신 다음, 를 죽이고 〈그 아들〉 武庚을 세우셨다.
추방하지 않고 죽였다 했지만, 사실은 가 스스로 분신자살한 것이다. 武庚의 아들인데, 王者後嗣로 삼았다. 일명 ‘祿父’라고도 한다.
箕子가 〈鎬京으로〉 돌아와서 〈洪範〉을 지었다.
鎬京으로 돌아와서 箕子가 〈〈洪範〉을〉 지었다.
가 어떤 에는 또 로 되어 있는데, 武王이 도읍을 세운 곳이다.
書序의 [武王]에서 [洪範]까지
正義曰武王나라를 쳐 이미 승리하고 나서 를 죽이고 그 아들 武庚을 세워 나라의 후사로 삼았고, 箕子鎬京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찾아가서 天道를 물으니, 箕子天地大法을 진술하고 그 일을 서술하여 〈洪範〉을 지었다.
여기서는 오직 箕子가 돌아온 일만을 말했어야 하는데, 이에 를 죽이고 武庚을 세운 일을 말한 것은, 書序는 〈위아래를〉 서로 고려해서 글을 만들기 때문이다. 위에 있는 〈武成〉의 書序에서 “武王나라를 쳤다.”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승리함’을 말하였고,
아래에 있는 〈微子之命〉의 書序에서 “나라의 天命을 퇴출시키고 武庚을 죽이셨다.”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세웠음’을 말한 것이니, 書序에서 이것을 말해서 위와 아래의 문세를 순하게 한 것이다.
의 [不放]에서 [祿父]까지
正義曰을 추방하였다. 을 추방하였는데, 여기서 〈武王를〉 추방하지 않고 죽였다는 것은, 사실은 가 스스로 분신해서 죽은 것이다.
史記≫ 〈殷本紀〉에 “의 군사가 패하자, 는 달음질쳐 들어가 鹿臺로 올라가서 寶玉으로 꾸민 옷을 입고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武王이 결국 의 머리를 베어 太白旗에 매달았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泰誓〉에 “그 凶殘한 자를 잡음으로써 〈우리의 정벌하는 길이 크게 펼쳐진다면 임금에 비하여 빛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본래의 뜻이 〈를〉 죽이려는 데에 있었다. 죽었어도 오히려 〈그의 머리를〉 베었으니, 살았어도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은 사실에 의거해서 말했을 뿐이다.
殷本紀〉에 “의 아들 武庚祿父를 봉하여 나라 제사를 계속 지내게 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王者後嗣로 삼은 것이다. 〈殷本紀〉는 ‘武庚祿父’라고 쌍으로 말하였지만,
伏生의 ≪尙書大傳≫에 “武王을 쳐서 승리하고 나서 公子 祿父로 뒤를 잇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일명 祿父였던 것이다. 鄭玄은 “武庚祿父이다.”라고 하였는데,
春秋의 세대에 齊侯 祿父蔡侯 考父季孫 行父가 있었으므로, 도 바로 이름이니, 꼭 ‘’라고 할 것은 못된다. 그러므로 에서 “일명 祿父이다.”라고 한 것이다.
의 []에서 [作之]까지
正義曰:윗편(〈武成〉)에서 “에 이르렀다.”라고 한 것은 文王의 사당이 에 있기 때문에 에 이르러서 먼저 사당에 고한 것이다. 이때 王都에 있었으니, ‘돌아간 것’이 ‘鎬京으로 돌아간 것’임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經文의 내용은 여타의 과 달라서 직접 문답한 것이 아닐뿐더러, 史官이 서술한 것도 아니니, 필시 箕子武王의 물음에 답한 뒤에 물러가서 스스로 그 일을 찬술한 것이기 때문에 에서 특별히 “箕子가 지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尙書大傳≫에는 “武王箕子의 수감을 풀어주니, 箕子나라가 풀어준 것을 언짢게 여기어 朝鮮으로 달아났는데, 武王이 그 소식을 듣고 그대로 朝鮮을 가지고 봉해주었다.
箕子는 이미 나라의 封爵을 받았으니, 신하로서 행해야 할 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13(년)에 와서 朝見하자, 武王이 그 朝見으로 인하여 洪範을 물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이 書序에 “나라를 쳐서 승리하고, 箕子가 〈鎬京으로〉 돌아와서”라고 한 것은, 이미 그 수감을 풀어주자 즉시 돌아온 것이지, 그가 달아난 뒤에 와서 朝見하게 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朝鮮에서 나라를 가자면 길은 萬里나 되는데다, 〈武王이〉 그가 있는 곳을 들은 뒤에 봉해주었고 〈箕子가〉 封爵을 받고서 朝見하자면 반드시 여러 해가 걸렸을 것이니, 이내 13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史記≫ 〈宋世家〉에 “箕子가 이미 〈洪範〉을 짓고 나자, 武王이 곧 箕子朝鮮에 봉했다.”라고 한 것이 그 실상을 얻은 것이다.
의 뜻이요, 의 뜻이니, 天地大法을 말한 것이다.
篇題의 [洪範]
正義曰:이 은 첫머리에 始端을 전개하고 다시 부연 설명하여, 一問一答語勢가 아니니, 필시 箕子가 스스로 지은 것이다.
첫머리의 두 문구는 스스로 질문을 받은 해를 기록한 것이고, ‘王乃言’에서 ‘彛倫攸敍’까지는 의 묻는 말이다.
箕子乃言’에서 ‘彛倫攸敍’까지는 九疇를 얻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初一曰’에서 ‘威用六極’까지는 九疇의 차서를 순서대로 펼친 점을 말한 것이다.
一五行’ 이하는 箕子가 다시 九疇의 뜻을 조목별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 조목별로 설명한 것은 당시에 또한 에게 대답하고 다시 물러와서 修撰하여 그 文辭를 정하여 典敎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의 [洪大]에서 [大法]까지
正義曰:[ ]‧[ ] 모두 ≪爾雅≫ 〈釋詁〉의 글이다.


역주
역주1 作洪範 : ≪尙書注疏考證≫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洪範〉 書序의 傳에서는 “箕子가 〈洪範을〉 지었다.”라고 하였고, 疏에서는 “이것은 史官이 敍述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陳雅言은 “夏僎이 ‘옛날에 史官은 임금의 언어와 행동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武王이 箕子를 방문한 것은 여간 큰일이 아닌데, 史官이 기록하지 않고 箕子가 스스로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극히 옳다. 만일 孔安國의 말대로라면 ‘惟十有三祀’의 1句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있지만, ‘王訪于箕子’의 1句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라고 했다. 상고하건대, 孔疏는 본디 잘못된 것이거니와, 陳雅言이 孔安國을 비방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 〈洪範〉은 본디 箕子가 지은 것이다. 대개 ‘惟十有三祀’에서 ‘箕子乃言曰’까지는 모두 史官이 서술한 것이고, 그 아래는 곧 箕子가 진술한 〈洪範〉에 의거해서 서술했을 뿐이니, 모두 史官의 史筆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洪範序傳箕子作之 疏不是史官敍述 ○陳雅言曰 夏僎謂古者史官於人君言動 無所不書 豈有武王訪箕子 其事如此之大 史官不錄 而箕子自錄之理 此說極是 且如孔說 則於惟十有三祀一句 雖說得通 而於王訪于箕子一句 說不通矣 按孔疏固非 而陳雅言之非孔 亦非也 洪範固箕子所作 蓋自惟十有三祀 至箕子乃言曰 皆史官所敍 其下卽據箕子所陳之範述之耳 非盡出于史官之筆也]
역주2 (紂)[殷] : 저본에는 ‘紂’로 되어 있으나, 〈武成〉의 書序에 의거하여 ‘殷’으로 바로잡았다.

상서정의(4)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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