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旣伐叛人三監之管叔‧蔡叔等, 以殷餘民國康叔爲衛侯, 周公以王命戒之, 作康誥‧酒誥‧梓材三篇之書也.
其酒誥‧梓材亦戒康叔, 但因事而分之. 然康誥戒以德刑, 又以化紂嗜酒, 故次以酒誥, 卒若梓人之治材爲器, 爲善政以結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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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此序亦與上相顧爲首引. 初言“三監叛”, 又言“黜殷命”, 此云 “旣伐管叔‧蔡叔”.
言“以殷餘民”, 圻內之餘民, 故云 “以三監之民, 國康叔爲衛侯.” 然古字 ‘邦’‧‘封’同.
故漢有上邦‧下邦縣, ‘邦’字, 如‘封’字. 此亦云 “邦康叔”, 若分器序云 “邦諸侯”, 故云 “國康叔”.
竝以三監之地封之者, 周公懲其數叛, 故使賢母弟主之. 此始一叛而云 “數叛”者, 以六州之衆, 悉來歸周,
殷之頑民, 叛逆天命, 至今又叛. 據周言之, 故云 “數叛”. 故多方云 “爾乃不大宅天命, 爾乃屑播天命.”
以不從天命, 故云“叛”也. 古者大國不過百里. 周禮上公五百里, 侯四百里,
費誓注云, “伯禽率七百里之內附庸諸侯.” 則魯猶非七百里之封. 而康叔封千里者, 康叔時爲方伯, 殷之圻內諸侯竝屬之, 故得總言‘三監’.
且其實地不方平, 計亦不能大於魯也. 故左傳云 “宋‧衛, 吾匹也.” 又曰 “寡君未嘗後衛君.”
且言千里, 亦大率言之耳. 何者. 邢在襄國, 河內卽東圻之限, 故以賜諸侯.
西山, 卽有黎‧潞‧河‧濟之西, 以曹地約有千里也. 以此鄭云 “初封於衛, 至子孫而竝邶‧鄘也.”
其地理志 邶‧鄘之民皆遷, 分衛民於邶‧鄘, 故異國而同風, 所以詩分爲三, 孔與同否未明也.
旣三年滅三監, 七年始封康叔, 則於其間, 更遣人鎭守, 自不知名號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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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반역한 사람인 三監의 管叔‧蔡叔 등을 토벌하고 나서 殷나라의 남아 있는 백성들로써 康叔을 봉하여 衛侯를 삼으니, 周公이 王命으로써 경계하여 〈康誥〉‧〈酒誥〉‧〈梓材〉 3篇의 글을 지었다.
〈酒誥〉‧〈梓材〉 또한 康叔을 경계한 것인데, 다만 일에 따라서 〈篇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나 〈康誥〉는 德과 刑을 가지고 경계하였고, 또 紂에게 물들어 술을 즐겼기 때문에 〈酒誥〉를 〈〈康誥〉의 다음에〉 놓았으며, 끄트머리에 가서는 마치 梓人이 재목을 다듬어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善政을 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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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이 書序 또한 윗글과 서로 고려해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三監’이 배반했다.”라고 말하였고, 또 “殷나라의 천명을 퇴출했다.”라고 말하였으며, 여기서는 “이미 管叔과 蔡叔을 토벌했다.”라고 하였다.
“殷나라의 남아 있는 백성들로써”라고 말한 것은 圻內의 남아 있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孔安國은〉 “三監의 백성들로써 康叔을 봉하여 衛侯로 삼았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옛 문자에는 ‘邦’과 ‘封’이 같았다.
그러므로 漢나라 때에 ‘上邦縣’과 ‘下邦縣’이란 것이 있었으니, ‘邦’자는 ‘封’자와 같은 뜻이다. 여기서 또한 “康叔을 봉했다.”라는 것은 〈分器〉의 書序에 “諸侯를 봉했다.”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康叔을 봉했다.”라고 한 것이다.
아울러 三監의 땅으로써 〈康叔을〉 봉한 것은 周公이 그들이 자주 반역을 하는 것을 징계하였기 때문에 어진 同母弟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한 번 반역을 하였건만, “자주 반역을 했다.”라고 한 것은 六州의 민중이 모두 와서 周나라에 귀속하였는데,
殷나라의 완악한 백성들만이 天命을 叛逆하고, 지금 또 반역을 하였기 때문이다. 周나라에 의거해서 말하기 때문에 “자주 반역을 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多方〉에서 “너희는 天命을 크게 편안히 여기지 않으니, 이는 너희들이 바로 천명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天命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반역을 했다.”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는 大國이 100리에 불과하였다. ≪周禮≫에서 上公은 500리, 侯는 400리라고 하였으나, 孟軻〈의 말에는〉 믿지 못할 바가 있다.
〈費誓〉의 注에 “伯禽이 700리 안의 附庸諸侯를 거느렸다.”라고 하였으니, 魯나라도 외려 700리의 封地가 아니었는데, 康叔이 1,000리에 봉해진 것은 康叔이 이때에 方伯이 되었으므로, 殷나라의 圻內 諸侯가 아울러 속하였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三監’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실제로는 땅이 방정하고 평평하지 않으니, 계산하면 또한 魯나라보다 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春秋左氏傳≫ 〈襄公 27년 조에〉 “宋나라와 衛나라는 우리들과 동격의 나라이다.”라고 하고, 또 〈襄公 7년 조에〉 “〈제후의 회합에서〉 저희 임금께서는 일찍이 衛나라 임금의 뒤가 되어 〈계단을 오른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동등하게 나란히 올라갔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1,000라고 말한 것은 또한 대략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어째서일까. 邢나라는 襄國에 있고 河內는 곧 東圻의 경계이기 때문에 諸侯에게 주었던 것이다.
西山이 곧 黎水‧潞水‧河水‧濟水의 서쪽을 보유한 것은 曹나라의 땅이 대략 1,000리를 점유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鄭玄이 “처음에 衛나라에 봉해졌다가 자손에 이르러서 邶‧鄘을 병합했다.”라고 한 것이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邶‧鄘의 백성들이 모두 옮겨가자 衛나라 백성들을 邶‧鄘에 나누어 배정하였기 때문에 나라는 다르나 풍속은 같았다. 그래서 ≪詩≫에서 나누어 셋으로 만든 것인데, 孔安國이 그렇게 보았는지는 분명치 못하다.
이미 3년 만에 三監을 멸하고 7년 만에 비로소 康叔을 봉하였으니, 그 사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서 鎭守하였을 것인데 그 名號를 알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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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曰:≪春秋左氏傳≫ 定公 4년 조에서 祝佗가 “〈康誥〉로써 명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孔安國〉이 “康叔을 명한 誥이다.”라고 한 것이다.
‘康’이 圻內의 나라 이름임을 〈공안국이〉 안 것은 管‧蔡‧郕‧霍이 모두 나라 이름이었기 때문이니, ‘康’ 또한 나라 이름이면서 圻內에 있었다.
馬融과 王肅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 오직 鄭玄만이 ‘康’을 謚號로 여긴 것은 ≪史記≫ 〈世家〉에서 “康伯을 낳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공안국은 ‘康伯’을 號謚로 여겼으나 ‘康叔’의 康을 외려 나라로 여겨서 號謚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