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書注疏 제16권 周書
多士 第十六
孔氏 傳 孔穎達 疏
傳
[傳]殷大夫士가 心不則德義之經이라 故로 徙近王都敎誨之라
疏
○正義曰:成周之邑旣成, 乃遷殷之頑民, 令居此邑. ‘頑民’, 謂殷之大夫士從武庚叛者, 以其無知, 謂之‘頑民’.
民性安土重遷, 或有怨恨, 周公以成王之命誥此衆士, 言其須遷之意. 史敍其事, 作多士.
疏
○正義曰:周之成周, 於漢爲洛陽也. 洛邑爲王都, 故謂此爲‘下都’. 遷殷頑民, 以成周道, 故名此邑爲成周.
疏
○正義曰:經云 “商王士”‧“殷遺多士”, 皆非
, 謂之‘頑民’, 知是殷之大夫士也.
經止云‘士’, 而知有大夫者, 以經云 “迪簡在王庭, 有服在百僚.” 其意言將任爲王官, 以爲大臣,
不惟告士而已, 故知有大夫也. ‘士’者, 在官之總號, 故言‘士’也. ‘心不則德義之經’, 僖二十四年 左傳文,
經云 “移爾遐逖, 比事臣我宗多遜.” 是言“徙近王都敎誨之”也.
漢書地理志及賈逵注左傳, 皆以爲 “遷邶鄘之民於成周, 分衛民爲三國.” 計三國俱是從叛, 何以獨遷邶鄘.
邶鄘在殷畿三分有二, 其民衆矣, 非一邑能容. 民謂之爲‘士’, 其名不類, 故孔意不然.
傳
〈成周는 지금(唐나라)의〉 洛陽이니 下都이다.
傳
殷나라 大夫와 士가 진심으로 德義의 經常을 법 삼지 않기 때문에 王都 부근으로 이주시켜 가르쳤다.
序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多士〉를 지었다.
傳
고할 대상이 여러 士들이었기 때문에 〈多士로〉 편명을 한 것이다.
疏
○正義曰:成周의 邑이 이미 이루어지자, 殷나라의 頑民들을 옮겨 이 邑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頑民’은 殷나라의 大夫와 士로서 武庚을 따라 반역한 자들을 이르는데, 無知하기 때문에 ‘頑民’이라 이른 것이다.
民性은 고향에서 편히 지내며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싫어하여 더러 원한을 가지므로 周公이 成王의 命을 가지고 이 여러 士들에게 고하였으니, 필수적으로 옮겨야 할 뜻을 말한 것이다.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多士〉를 지었다.
疏
○正義曰:周나라의 成周는 漢나라 때에 洛陽이 되었다. 洛邑이 王都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일러 ‘下都’라고 한 것이다. 殷나라의 頑民을 옮겨 周道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邑을 ‘成周’라고 명명한 것이다.
疏
○正義曰:經에서 말한 ‘商王士’와 ‘殷遺多士’는 모두 民事(士)가 아니고 ‘頑民’을 이른 것이니, 〈그래서 孔安國은〉 이것이 殷나라의 大夫와 士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經에는 ‘士’라고만 말했는데 大夫가 있음을 〈공안국이〉 알았던 것은 經에 “迪簡在王庭 有服在百僚(계도하여 선발해서 商나라 王의 조정에 두니, 일을 맡은 이가 여러 관직에 있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니, 그 뜻은 장차 王의 관원으로 임용하여 大臣을 시켜줄 일을 말한 것이고,
士에게만 고한 것이 아닐 뿐이기 때문에 大夫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士’란 것은 벼슬에 있는 자의 총칭이기 때문에 ‘士’라고 말한 것이다. ‘心不則德義之經’은 ≪春秋左氏傳≫ 僖公 24년 조의 글인데, 이를 인용해서 ‘頑民’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經에 “移爾遐逖 比事臣我宗多遜(너희들을 먼 곳으로 옮겨서 京師를 가까이 하여 服事하고 우리 宗周에 신하 노릇 하여 공손한 도리를 많이 하게 하였노라.)”이라고 하였으니, 이래서 〈공안국은〉 “王都 부근으로 이주시켜 가르쳤다.”라고 말한 것이다.
≪漢書≫ 〈地理志〉 및 賈逵가 ≪春秋左氏傳≫을 주석한 곳에서 모두 “邶나라와 鄘나라의 백성들을 成周로 옮기고, 衛나라 백성들을 나누어 세 나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따져보면 세 나라가 모두 〈武庚을〉 따라서 반역을 하였는데, 어떻게 유독 邶나라와 鄘나라의 백성들만 옮겼을까.
邶나라와 鄘나라는 殷나라의 畿甸에 있어 3분의 2를 차지했으므로 그 백성들이 많아서 1邑으로는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을 ‘士’라 이른 것은 그 이름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공안국의 생각이 그렇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