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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5)

상서정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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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在高宗하얀 舊勞于外하사 爰曁小人이러시니
[傳]武丁이니 其父小乙 使之久居民間하여 勞是稼穡하여 與小人出入同事
作其卽位하사 乃或하고 三年 不言하시니
[傳]武丁起其卽王位하니 則小乙死 乃有信默하고 三年不言이라 言孝行
其惟不言하시나 言乃雍하시며 不敢荒寧하사
[傳]在喪則其惟不言이나 喪畢發言하면 則天下和 亦法中宗하여 不敢荒怠自安이라
嘉靖殷邦하사 至于 無時或怨하니
[傳]善謀殷國하니 至于小大之政 人無是有怨者 言無非
肆高宗之享國 五十有九年이시니이다
[傳]高宗爲政 小大無怨이라 亦享國永年이라
[疏]‘其在’至‘九年’
○正義曰:其殷王高宗, 父在之時, 久勞於外, 於時與小人同其事. 後爲太子, 起其卽王之位, 乃有信默, 三年不言.
在喪其惟不言, 喪畢發言, 言得其道, 乃天下大和. 不敢荒怠自安, 善謀殷國, 至於小大之政, 莫不得所.
其時之人, 無是有怨恨之者. 故高宗之享殷國五十有九年. 亦言不逸得長壽也.
[疏]○傳‘武丁其’至‘同事’
○正義曰:‘舊’, 久也. 在卽位之前, 而言久勞於外, 知是其父小乙使之久居民間, 勞是稼穡, 與小人出入同爲農役, 小人之艱難事也.
太子使與小人同勞, 此乃非常之事, 不可以非常怪之. 於時蓋未爲太子也, 殷道雖質, 不可旣爲太子, 更得與小人雜居也.
[疏]○傳‘武丁起’至‘行著’
○正義曰:以上言久勞於外, 爲父在時事, 故言“起其卽王位, 則小乙死”也. ‘亮’, 信也, ‘陰’, 默也.
‘三年不言’, 以舊無功, 而今有, 故言‘乃有.’ 說此事者, 言其孝行著也.
禮記喪服四制引書云 “‘高宗諒闇, 三年不言.’ 善之也. 王者莫不行此禮, 何以獨善之也.
曰, 高宗者, 武丁, 武丁者, 殷之賢王也. 繼世卽位, 而慈良於喪. 當此之時, 殷衰而復興, 禮廢而復起.
故載之於書中而高之, 故謂之高宗. 三年之喪, 君不言也.” 是說此經‘不言’之意也.
[疏]○傳‘在喪’至‘自安’
○正義曰:鄭玄云 “其不言之時, 時有所言, 則群臣皆和諧.” 鄭玄意謂此“言乃雍”者, 在三年之內, 時有所言也.
孔意則爲出言在三年之外, 故云 “在喪其惟不言, 喪畢發言, 則天下大和.”
知者, 說命云 “王宅憂, 亮陰三祀. 旣免喪, 其惟不言.” 除喪猶尙不言, 在喪必無言矣, 故知喪畢乃發言也.
高宗不敢荒寧, 與中宗正同, 故云 “亦法中宗, 不敢荒怠自安.”
殷家之王, 皆是明王, 所爲善事, 計應略同. 但古文辭有差異, 傳因其文同, 故言 “法中宗”也.
[疏]○傳‘善謀’至‘無非’
○正義曰:釋詁云 “嘉, 善也, 靖, 謀也.” ‘善謀殷國’, 謀爲政敎, 故至於小大之政, 皆允人意.
人無是有怨高宗者, 言其政無非也. 鄭云 “小大, 謂萬人, 上及群臣, 言人臣小大皆無怨王也.”


高宗 때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 밖의 민간에서 노역하며 小人(小民)들과 함께 지내다가
高宗은〉 武丁이니, 그 아버지인 小乙이 그로 하여금 오랜 기간 민간에 살며 稼穡에 노역을 하여 小人(小民)들과 더불어 드나들면서 농사일을 함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일어나 즉위하사 〈아버지 상을 당하여 居喪 중에 冢宰를〉 믿어 〈일임하고서〉 침묵을 지키고 3년을 말하지 않으셨는데,
武丁이 일어나 王位에 오르니 小乙이 죽었다. 〈그래서 居喪 중에 冢宰를〉 믿어 〈정무를 일임하고서〉 침묵을 지키고 3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孝行이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居喪 에는〉 말씀 없이 조용히 지내셨으나 〈免喪 에는〉 말씀을 했다 하면 〈천하가〉 화평하였으며, 감히 거칠고 안일하지 아니하시어
거상 중에는 말씀하지 않았으나 면상 후에는 말씀을 하였다 하면 천하가 화평하였다. 또한 中宗을 본받아서 감히 거칠고 태만하여 스스로 안일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를 아름답고 편안하게 다스려서 크고 작은 정사에 이르기까지 이에 혹시라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나라를 잘 도모해서 크고 작은 정사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곧 잘못이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高宗이 나라를 향유한 기간이 59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高宗이 정사를 함에 있어서 작고 큰 것을 막론하고 원망을 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오랜 기간 나라를 향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 [其在]에서 [九年]까지
正義曰나라 高宗은 아버지가 계실 때에 오랜 동안 밖에서 노역하였는데, 이때에 小人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하였다. 뒤에 太子가 되어 일어나 왕위에 올라서는 이에 〈冢宰를〉 믿어 〈정무를 일임하고서〉 침묵을 지키고 3년을 말하지 않았다.
거상 중에는 말씀하지 않았으나 이 끝나고 나서 말씀을 하면 말씀이 그 도리를 얻었으므로 이에 천하가 크게 화평하였다. 감히 거칠고 태만하여 스스로 안일을 취하지 않고, 나라를 잘 도모하였기 때문에 작고 큰 정사에 이르기까지 그 처소를 얻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당시 사람들 중에 원한을 가진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高宗나라를 향유한 기간이 59년이었다고 하였으니, 또한 안일하지 않음이 長壽를 얻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의 [武丁其]에서 [同事]까지
正義曰:‘’는 의 뜻이다. 즉위하기 전에 오랜 기간 밖의 민간에서 노역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小乙이 그로 하여금 오랜 기간 밖의 민간에 살며 稼穡에 노역을 하여 小人(小民)들과 더불어 드나들면서 농사일을 함께하도록 한 것이 小人의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을 〈孔安國은〉 알았던 것이다.
太子가 가사 小人들과 더불어 노역을 함께하였다면 이것은 바로 비상한 일이니, 비상한 일을 가지고 괴이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마 아직 太子가 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나라의 가 아무리 질박했다 하더라도 이미 太子가 된 몸으로는 다시 小人들과 더불어 섞여 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의 [武丁起]에서 [行著]까지
正義曰:이상에서 말한 오랜 기간 밖의 민간에서 노역한 것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나 王位에 오르니 小乙이 죽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은 의 뜻이고, ‘’은 의 뜻이다.
‘3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에는 이 없었는데 이제는 있기 때문에 ‘乃有’라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을 말한 것은 그 孝行이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禮記≫ 〈喪服四制〉에서 ≪≫의 “‘高宗이 〈居喪 중에 冢宰를〉 믿어 〈정무를 일임하고서〉 침묵을 지키고 3년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는 대목을 인용하여 〈‘高宗이……3년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였으니,〉 칭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王者는 이 를 행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유독 〈高宗만을〉 칭찬하였을까.
이르건대, 高宗武丁이고 武丁나라의 어진 이었다. 세대를 이어 즉위하여 慈良한 마음을 다하였다. 이때에 나라의 이 쇠퇴했다가 다시 흥기하고 가 폐기되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러므로 ≪≫ 속에 기재해서 높였기 때문에 高宗이라 일렀다. 3년의 에 임금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 ‘말하지 않은’ 뜻을 말한 것이다.
의 [在喪]에서 [自安]까지
正義曰鄭玄은 “말씀하지 않을 때에 때로 말씀하신 바가 있으면 신하들이 모두 和諧했다.”라고 하였으니, 鄭玄의 생각은 아마 이 “말씀을 했다 하면 天下가 화평하였다.”는 것을 3년 안에 때로 말씀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여긴 것이리라.
그러나 孔安國의 생각은 말씀한 것이 3년 밖에 있었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거상 중에는 말씀하지 않았으나 면상 후에는 말씀을 하였다 하면 천하가 크게 화평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이 점을 안 것은 〈說命〉에 “(高宗)이 居喪 중에 〈冢宰를〉 신임하여 〈정무를 일임하고서〉 침묵을 지키고 3년 동안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미 을 마치고 나서도 〈정사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을 면하고도 오히려 말씀하지 않았다면 거상 중에 있어서는 반드시 말씀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居喪이 끝나고 나서 말씀한 것임을 〈孔安國이〉 알았던 것이다.
高宗은 감히 거칠고 안일하지 아니한 태도가 中宗과 꼭 닮았기 때문에 “또한 中宗을 본받아서 감히 거칠고 태만하여 스스로 안일을 취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다.
나라의 은 모두 명철한 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 훌륭한 일은 응당 대충 같았을 것이다. 다만 옛 文辭에 차이가 있을 뿐이니, 은 그 글의 같음을 따랐기 때문에 “中宗을 본받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의 [善謀]에서 [無非]까지
正義曰:≪爾雅≫ 〈釋詁〉에 “‘’는 의 뜻이고, ‘’은 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善謀殷國’은 政敎를 잘 도모했기 때문에 작고 큰 정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민들의 뜻에 딱 맞았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 중에 高宗을 원망한 자가 없었던 것은 그 정사에 잘못이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鄭玄은 “‘小大’는 萬人으로부터 위로 신하들까지 미침을 이르니, 작고 큰 신하들이 모두 을 원망한 이가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 蔡傳은 아직 즉위하지 못했을 때[未卽位之時]로 보았다.
역주2 亮陰(암) : 蔡傳은 天子의 居喪室로 보았다.
역주3 (者)[著] : 저본에는 ‘者’로 되어 있으나, 宋兩浙東路茶鹽司本‧汲古閣本에 의거하여 ‘著’로 바로잡았다.
역주4 小大 : 蔡傳은 ‘大小人’으로 보았다.

상서정의(5) 책은 2020.12.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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