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傳]周公歸政之明年에 淮夷奄又叛하니 魯征淮夷하여 作費誓하고 王親征奄하여 滅其國하고 五月還至鎬京이라
疏
○正義曰:以洛誥言歸政之事, 多士之篇次之, 多士是歸政明年之事, 故知此篇亦歸政明年之事. 事猶不明, 故取費誓爲證.
以成
政之序言 “成王東伐淮
夷.” 費誓之篇言 “淮夷․徐戎竝興.”
俱言‘淮夷’, 明是一事, 故言“魯征淮夷, 作費誓, 王親征奄, 滅其國.” 以明二者爲一時之事也.
上序言“成王伐淮夷”, 而此傳言 “魯征淮夷”者, 當時淮夷徐戎竝起爲亂.
所以成王政之序與費誓之經, 竝言‘淮夷’, 爲此故也.
傳言 “五月還至鎬京”, 明此‘宗周’, 即鎬京也. 禮記祭統 衛孔悝之鼎銘云 “即宮於宗周.” 彼‘宗周’, 謂洛邑也.
是洛邑亦名宗周, 知此是鎬京者. 成王以周公歸政之時, 暫至洛邑, 還歸處西都, 鎬京是王常居, 知“至于宗周”, 至鎬京也.
且此與周官同時事也.周官序云 “還歸在豐.” 經云 “歸于宗周.” 豐․鎬相近, 即此‘宗周’, 是鎬京也.
5월 정해일丁亥日에 성왕成王이 엄奄나라로부터 와서 종주宗周(호경鎬京)에 이르시었다.
傳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정권을 돌려준 이듬해에 회이淮夷와 엄奄나라가 또 반역을 하니, 노후魯侯는 회이淮夷를 정벌하여 〈비서費誓〉를 짓고, 왕王은 친히 엄奄나라를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5월에 돌아와 호경鎬京에 이르렀다.
疏
○정의왈正義曰:〈낙고洛誥〉가 정권을 돌려준 일을 말하였고, 〈다사多士〉편이 다음에 놓였는데 〈다사多士〉가 바로 정권을 돌려준 다음해의 일이기 때문에 이 편 또한 정권을 돌려준 이듬해의 일이란 점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일이 오히려 분명치 않기 때문에 〈비서費誓〉를 취해서 입증을 한 것이다.
〈성이정成以政〉의 서서書序에 “성왕成王이 동쪽으로 회이淮夷를 쳤다.”라고 말하고, 〈비서費誓〉편에 “회이淮夷와 서융徐戎이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여
모두 ‘회이淮夷’를 말한 것이 이 한 가지 일을 밝혔기 때문에 “노후魯侯는 회이淮夷를 정벌하여 〈비서費誓〉를 짓고, 왕王은 친히 엄奄나라를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했다.”라고 말하여 두 가지는 한 때의 일임을 밝혔다.
윗 서문에서 “성왕成王은 회이淮夷를 쳤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전傳에서는 “노후魯侯가 회이淮夷를 정벌했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에 회이淮夷와 서융徐戎이 함께 일어나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노魯나라가 두 나라와 서로 가까웠으므로 생각을 짜내어 두 나라를 함께 치려고 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칠 것을〉 가지고 군사들에게 맹서하였던 것이다.
다만 성왕成王은 노후魯侯가 능히 홀로 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할까 싶었기 때문에 다시 친히 가서 정벌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성왕정成王政〉의 서문과 〈비서費誓〉의 경문經文이 함께 ‘회이淮夷’를 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傳에서 “5월에 돌아와 호경鎬京에 이르렀다.”라고 말한 것은 이 ‘종주宗周’가 곧 호경鎬京임을 밝힌 것이다.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위衛나라 공회孔悝의 정명鼎銘에 ‘종주宗周의 거처에도 수행하여’라 했다.”라고 하였는데, 저 종주宗周는 낙읍洛邑을 이른 것이다.
이 낙읍洛邑 또한 종주宗周를 명칭한 것이니, 여기가 바로 호경鎬京이란 점을 〈공안국이〉 알았던 것이다. 성왕成王은 주공周公이 정권을 돌려줄 때에 잠시 낙읍洛邑에 이르렀다가 돌아와 서도西都에 처하였으니, 호경鎬京이 바로 왕王이 항시 거처한 곳이었으므로 “〈돌아와〉 종주宗周에 이르렀다.”라는 것은 호경鎬京에 이르렀음을 〈공안국이〉 알았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주관周官〉과 더불어 동시의 일이다. 〈주관周官〉의 서서書序에 “돌아와 풍읍豐邑에 계셨다.”라고 하고, 경문經文에 “종주宗周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는데, 풍읍豐邑과 호경鎬京은 서로 가까웠으니, 곧 여기의 ‘종주宗周’는 바로 호경鎬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