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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6)

상서정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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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聖이라도 罔念하면 作狂하고 惟狂이라도 克念하면 作聖하나니
[傳]惟聖人이라도 無念於善이면 則爲狂人이요 惟狂人이라도 能念於善이면 則爲聖人이라
言桀紂非實狂愚 以不念善이라 滅亡이라
[傳]天以湯故 五年須暇湯之子孫하여 冀其改悔언만 而紂大爲民主하여 肆行無道하니 事無可念이요 言無可聽이라
服喪三年 還師二年이라
[疏]‘乃惟’至‘念聽’
○正義曰:更說紂亡之由. 乃惟汝商之後王紂, 逸豫其過, 縱恣無度.
紂謀其爲政, 不能絜進於善, 惟行惡事, 天惟下是喪亡以禍之.
惟聖人無念於善, 則爲狂人. 惟狂人能念於善, 則爲聖人. 紂雖狂愚, 冀其念善也.
計紂爲惡, 早應誅滅, 天惟以成湯之故, 故積五年須待閒暇湯之子孫.
緩多年, 冀其改悔, 而紂大爲民主, 肆行無道, 事無可念, 言無可聽, 由是天始改意, 故誅滅之.
[疏]○傳‘惟聖’至‘滅亡’
○正義曰:‘聖’, 上智之名, ‘狂’者, 下愚之稱. 孔子曰 “惟上智與下愚不移.”
是聖必不可爲狂, 狂必不能爲聖, 此事決矣.
而此言 “惟聖人無念於善, 則爲狂人. 惟狂人能念於善, 則爲聖人”者,
方言天須暇於紂, 冀其改悔, 說有此理爾, 不言此事是實也.
謂之爲聖, 寧肯無念於善. 已名爲狂, 豈能念善. 中人念與不念, 其實少有所移, 欲見念善有益, 故舉狂聖極善惡者言之.
[疏]○傳‘天以’至‘二年’
○正義曰:湯是創業聖王, 理當祚胤長遠, 計紂未死五年之前, 已合喪滅.
但紂是湯之子孫, 天以湯聖人之故, 故五年須待閑暇湯之子孫, 冀其改悔, 能念善道.
而紂大爲民主, 肆行無道, 所爲皆惡事, 無可念者, 言皆惡言, 無可聽者, 由是天始滅之.
五年者, 以武王討紂, 初立即應伐之, 故從武王初立之年, 數至伐紂爲五年.
文王受命九年而崩, 其年武王嗣立. 服喪三年, 未得征伐.
十一年服闋, 乃觀兵於孟津, 十三年方始殺紂. 從九年至十三年, 是五年也.
然服喪三年, 還師二年, 乃事理宜然, 而云以湯故須暇之者, 以殷紂惡盈, 久合誅滅.
逢文王崩, 未暇行師, 兼之示弱, 凡經五載.
聖人因言之以爲法教爾. 其實非天不知紂狂, 望其後改悔, 亦非曲念湯德, 延此歲年也.


성인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狂人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되나니,
성인聖人이라도 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狂人이라도 능히 을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되는 법이다.
는 실제로 광우狂愚한 것이 아니라 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滅亡했음을 말한 것이다.
하늘이 5년 동안을 〈임금의〉 자손에게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어서 〈회개悔改하기를 바랐건만 가〉 크게 백성의 군주가 되어 〈마구 무도無道를 자행하였으니〉 생각할 만 것과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하늘이 임금 때문에 임금의 자손에게 5년 동안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어서 회개悔改하기를 바랐건만, 가 크게 백성의 임금이 되어 마구 무도無道를 자행하였으니, 하는 일은 〈모두 악한 일이어서〉 생각할 만한 것이 없고, 내뱉은 말은 〈모두 악한 말이어서〉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무왕武王은 3년 동안 〈문왕文王의〉 복을 입었고, 회군回軍해 있은 지 2년이었다.
의 [현인乃惟]에서 [念聽]까지
정의왈正義曰:다시 가 망한 이유를 말씀하였다. “너희 나라 후왕後王가 지나친 안일만을 일삼아 법도 없이 자행하였다.
가 그 정사를 도모한 것이 〈에〉 깨끗하게 진취하지 못하고 악한 일만을 행하자, 하늘이 이 상망喪亡을 내려 를 입혔다.
성인聖人일지라도 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狂人일지라도 능히 을 생각하면 장람인聖人이 되는 법이다. 는 비록 광우狂愚하지만 그가 을 생각하기를 바랐다.
을 한 것을 따지면 응당 일찍이 주멸誅滅하여야 했지만, 하늘은 성탕成湯의 까닭 때문에 임금의 자손에게 5년 동안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었다.
여러 해를 늦춰주어 회개悔改하기를 바랐건만, 가 크게 백성의 임금이 되어 마구 무도無道를 자행하였으므로 하는 일은 〈모두 악한 일이어서〉 생각할 만한 것이 없고, 내뱉은 말은 〈모두 악한 말이어서〉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비로소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주멸誅滅한 것이다.”
의 [惟聖]에서 [멸망滅亡]까지
정의왈正義曰:‘’은 상지上智의 명칭이고, ‘’은 하우下愚의 호칭이다. 공자孔子는 “오직 상지上智하우下愚만이 변화시킬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인聖人이 반드시 광인狂人이 될 수 없고, 광인狂人이 반드시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이 일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성인聖人일지라도 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狂人일지라도 능히 을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된다.”라고 한 것은
바야흐로 하늘이 에게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어서 회개悔改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니, 이럴 이치가 있음을 말한 것이지 이 일이 바로 사실임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미 성인聖人이라 이른 이상 어찌 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이미 광인狂人이라 명명한 이상 어찌 능히 을 생각하겠는가. 중등 가는 사람은 생각하든 생각 안 하든 실제로 조금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을 생각하면 이익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에 극도로 성인聖人과 극도로 광인狂人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의 [天以]에서 [이년二年]까지
정의왈正義曰임금은 바로 창업創業성왕聖王이기 때문에 이치상 응당 복조福祚와 자손이 장원長遠해야 했을 것이나, 〈의 악행을〉 따지면 가 아직 죽기 5년 전에 벌써 상멸喪滅하여야 했다.
다만 가 바로 임금의 자손인지라, 하늘이 임금이 성인聖人인 까닭으로 임금의 자손에게 5년 동안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어서 회개하여 능히 선도善道를 생각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는 크게 백성의 임금이 되어 무도無道를 자행하였으니, 하는 짓이 모두 한 일이라 생각할 만한 것이 없고, 말이 모두 한 말이라 들을 만한 것도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비로소 멸망시킨 것이다.
‘5년’이란 것은, 무왕武王를 성토하고 초립初立(처음 즉위함)하여 곧바로 정벌하였으므로 무왕武王초립初立한 해로부터 를 친 해까지 세어 가면 5년이 된다.
그런데 문왕文王이 천명을 받은 지 9년 만에 승하하고 그 해에 무왕武王이 문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복상服喪 3년 동안에는 정벌을 할 수가 없다.
11년에 복상服喪을 마치고는 맹진孟津에서 군사를 사열하고, 13년에 비로소 를 죽였다. 9년으로부터 13년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5년이다.
그러나 복상服喪 3년과 회군 2년은 바로 사리의 당연한 것이거니와 “임금의 까닭으로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었다.”고 한 것도 은주殷紂이 찼기 때문에 이미 주멸誅滅하기에 합당하였다.
하지만 문왕文王의 승하를 만났으니 행군할 겨를이 없었고, 겸하여 약세弱勢를 보여주기 위해 〈맹진孟津에서 회군해 있는 기간도 있고 해서〉 모두 5년을 경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인聖人(주공周公)이 따라서 말씀하여 법교法教로 삼은 것일 뿐이지, 기실은 하늘이 을 몰라서 그 뒤 회개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고, 또한 임금의 을 곡진히 생각하여 이 세년歲年을 늘려준 것도 아니었다.


역주
역주1 五年 : 孔傳은 武王의 服喪 3년과 回軍 2년을 합한 숫자로 보았는데, 蘇軾은 이를 따랐고, 林之奇는 武王이 아직 殷紂를 정벌하기 전 5년으로 보았으며, 呂祖謙은 “‘5년’은 武王과 周公만이 알 일이니, 說者가 억지로 세월을 끌어 그 숫자를 맞추는 것은 또한 천착한 짓이다.”라고 일축하였고, 蔡傳도 “‘5년’은 반드시 실제의 햇수를 가리켜 말한 것일 터이니, 孔氏(孔安國)가 세월을 억지로 끌어대어 부합시킨 것은 옳지 않다.[五年 必有指實而言 孔氏牽合歲月者 非是]”라고 하였다.
역주2 天惟五年 須暇之子孫 : 袁仁(≪尙書砭蔡編≫)은 “蔡註에서 5년을 紂에게 해당시킨 것은 잘못이다. 5년은 武庚에 입각해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자손에게 기회를 주어서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다.’고 하였으니, 위로 6년이라 하지도 않고 아래로 4년이라 하지도 않고서 오직 5년이라고만 한 데에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연한이었을 것이다. 살펴보면 武王 13년에 殷나라를 쳐서 승리하였고, 殷나라를 쳐서 승리한 지 2년 만에 王에게 질병이 걸렸다. ≪逸周書≫에 ‘武王이 殷나라를 쳐서 승리하고 나서 紂王의 아들 禄父를 세워 商나라의 제사를 지키게 하고는 三監을 설치하여 殷나라를 감시하게 하였으니, 이때에는 殷나라의 제사가 외려 끊어지지 않았다. 武王이 승하[崩]하자, 三監이 殷나라의 세력을 끼고 배반하였다. 成王 원년 6월에 武王을 畢 땅에 장사 지내고, 2년 후에 군사를 일으켜 東征하여 三叔을 주살하였고, 紂王의 아들 禄父가 패배하여 도망갔으므로, 殷나라의 제사가 비로소 끊어졌다. 商나라를 쳐서 승리한 해부터 이에 이르기까지가 무릇 5년이었는데, 아마 이 당시에는 외려 殷나라의 國號를 고치지 않고 있다가 微子를 봉함에 이르러 비로소 宋나라로 고쳐 칭했다.’고 한다.[注以五年爲紂 非也 五年就武庚説 故曰須暇之子孫 夫上不曰六 下不曰四 而惟曰五年 有的㨿矣 按武王十有三年克殷 克殷二年王有疾 逸周書云 武王克殷 乃立王子禄父 俾守商祀 設三監俾監殷 是殷祀猶未絶也 武王崩 三監挾殷以畔 成王元年六月 葬武王于畢 二年作師東征 降辟三叔 王子禄父北奔 殷祀始絶 自克商至此 凡五年 蓋當時猶未改殷號 至封微子 始改稱宋云]”라고 하였다.
역주3 須暇之子孫……罔可念聽 : 蔡傳은 “紂에게 기다려주고 여가를 주어서 능히 생각하여 크게 백성의 군주가 되기를 바랐건만 紂에게 생각할 만한 것이 없고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須待暇實於紂 覬其克念大爲民主 而紂無可念可聽者]”라고 풀이하였다.
역주4 (正)[王] : 저본에는 ‘正’으로 되어 있으나, 嘉靖本․汲古閣本․武英殿本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誕)[縱] : 저본에는 ‘誕’으로 되어 있으나, 諸本에 의거하여 ‘縱’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君)[者] : 저본에는 ‘君’으로 되어 있으나, 諸本에 의거하여 ‘者’로 바로잡았다.

상서정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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