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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1)

모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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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國風

모시毛詩’의 ‘’는 이 책의 명칭이고 ‘’는 시를 주석한 사람의 이다.
旣有 故題姓以別之 或云 小毛公 加毛詩二字라하고 又云 “所加 大題在下라하다
이미 3가 있었으므로 을 써서 구분한 것이다. 혹은 “소모공小毛公(모장毛萇)이 ‘모시毛詩’ 두 글자를 더했다.” 하고. 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덧붙였기에 큰 제목이 아래에 있다.” 하였다.
하면 竝大題在下 班固漢書․陳壽三國志題亦然이라
그리고 마융馬融노식盧植정현鄭玄삼례三禮(≪예기禮記≫․≪의례儀禮≫․≪주례周禮≫)를 주석한 것을 살펴보면, 모두 큰 제목인 국풍國風이 아래에 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제목도 그러하다.
國風 國者 總謂十五國이요 風者 諸侯之詩 從關雎至騶虞 二十五篇이니 謂之正風이라
국풍國風’의 ‘’은 15개국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고, ‘’은 제후국의 시이다. 〈관저關雎〉에서 〈추우騶虞〉까지 25편인데 이를 ‘정풍正風’이라 한다.
【疏】正義曰:詩國風, 舊題也. 毛字, 漢世加之.
정의왈正義曰:‘시국풍詩國風’이 원래의 제목이고 ‘’자는 한대漢代에 붙여진 것이다.
六藝論云 “河間獻王好學, 其博士毛公善說詩, 獻王號之曰 毛詩.” 是獻王始加毛也.
정현鄭玄의 ≪육예론六藝論≫에 “하간헌왕河間獻王이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박사 모공毛公이 ≪시경≫을 잘 해석하였으므로 헌왕獻王이 그것을 ‘모시毛詩’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헌왕獻王이 처음 ‘’자를 붙인 것이다.
漢書儒林傳云 “毛公, 趙人也, 爲河閒獻王博士.” 不言其名.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모공毛公은 조나라 사람으로 하간헌왕河間獻王박사博士가 되었다.” 하였는데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范曄後漢書云 “趙人毛長傳詩, 是爲毛詩.” 然則趙人毛公名爲長也.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 “조나라 사람 모장毛長이 ≪≫에 을 지었는데 이것을 ≪모시毛詩≫라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조나라 사람 모공毛公의 이름은 ‘’이다.
譜云“魯人大毛公, 爲詁訓傳於其家, 河閒獻王得而獻之, 以小毛公爲博士.”
정현鄭玄의 ≪시보詩譜≫에 “나라 사람 대모공大毛公이 그의 집에서 ≪고훈전詁訓傳≫을 지었는데 하간헌왕河間獻王이 그것을 얻어서 바치고 소모공小毛公박사博士로 삼았다.” 하였다.
然則大毛公爲其傳, 由小毛公而題毛也.
그렇다면 대모공大毛公(모형毛亨)이 그 을 지었고 소모공小毛公 때문에 ‘’로 제목한 것이다.
【疏】詩者, 一部之大名, 國風者, 十五國之總稱,
’는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고, ‘국풍國風’은 15를 총괄하는 명칭이다.
不冠於周南之上而退在下者, 按鄭注三禮․周易․․尙書, 皆大名在下, 孔安國․馬季長․盧植․王肅之徒, 其所注者, 莫不盡然.
국풍國風 두 자를〉 ‘주남周南’의 앞에 두지 않고 아래에 둔 것은 정현鄭玄삼례三禮․≪주역周易≫․≪중후中候≫․≪상서尙書≫를 주석하고서 전체의 큰 이름을 아래에 두었고, 공안국孔安國마계장馬季長노식盧植왕숙王肅의 무리들이 주석한 것이 모두 그러하다.
然則本題自然, 非注者移之. 定本亦然, 當以皆在, 足得摠攝故也.
그렇다면 본제목을 아래에 두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주석한 사람이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정본定本도 또한 그러하니, 본디 ‘’의 아래에 두어야 충분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班固之作漢書, 陳壽之撰國志, 亦大名在下, 蓋取法於經典也.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와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도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아래에 있으니, 이는 경전에서 법을 취한 것이다.
【疏】言國風者, 國是之界, 詩以當國爲別, 故謂之國風. 其雅則天子之事, 政敎刑於四海, 不須言國也.
국풍國風’이라 한 것은, (나라)은 풍화風化의 경계이고, 는 시가 지어진 나라[당국當國]로 구별하기 때문에 ‘국풍國風’이라 한 것이다. ‘’는 천자天子의 일로 정치와 교화가 천하에 모범이 되므로 ‘’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周․召, 風之正經, 固當爲首. 自衛以下十有餘國, 編此先後, 舊無明說, 去聖久遠, 難得而知.
‘주남’과 ‘소남’은 ‘국풍國風’의 정경正經이므로 본디 처음이 되어야 하지만, 위풍衛風 이하 10여 국풍國風은 이들을 엮어 선후를 정한 것이 예부터 분명한 설명이 없고 공자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알기가 어렵다.
欲言先後爲次, 則齊哀先於衛頃, 鄭武後於檜國, 而衛在齊先, 檜處鄭後, 是不由作之先後.
선후先後로 순서를 삼았다고 하자니, 애공哀公경공頃公보다 먼저이고 무공武公회국檜國보다 나중인데도 ‘’가 ‘’보다 앞에 있고 ‘’가 ‘’의 뒤에 있으니, 이것은 지어진 선후先後를 따른 것이 아니다.
欲以國地爲序, 則鄭小於齊, 魏狹於晉, 而齊後於鄭, 魏先於唐, 是不由國之大小也.
영토를 가지고 순서를 삼았다고 하자니 보다 작고 보다 협소한데도 ‘’가 ‘’의 뒤에 있고 ‘’가 ‘’의 앞에 있으니, 이것은 영토의 크기를 따른 것도 아니다.
欲以采得爲次, 則雞鳴之作, 遠在緇衣之前, 鄭國之風, 必處檜詩之後, 何當後作先采, 先作後采乎, 是不由采得先後也.
채록된 것으로 순서를 삼았다고 하자니, 〈계명雞鳴〉이 지어진 시기가 〈치의緇衣〉보다 훨씬 앞에 있으니 정풍鄭風이 반드시 회풍檜風의 뒤에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나중에 지어진 것을 먼저 채록하고 먼저 지어진 것을 나중에 채록하였는가? 이것은 채록한 선후를 따른 것도 아니다.
【疏】二三擬議, 悉皆不可, 則諸國所次, 別有意焉.
이리저리 생각해보아도 모두 해당되지 않으니, 그렇다면 국풍國風의 차례는 따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蓋跡其先封善否, 參其詩之美惡, 驗其時政得失, 詳其國之大小, 斟酌所宜, 以爲其次.
아마도 먼저 봉해진 것의 선부善否를 추적하고 그 시의 미악美惡을 참작하며, 그 당시 정사政事득실得失을 징험해보고 그 나라의 대소大小를 상고하여 순서의 마땅한 것을 짐작하여 그 순서로 삼았을 것이다.
邶․鄘․衛者, 商紂畿內千里之地, 柏舟之作, 之時.
나라 주왕紂王경기京畿 천리 안에 있고 〈패풍 백주邶風 柏舟〉가 지어진 시기는 이왕夷王의 때이다.
는〉 강숙康叔이 남겨준 공적과 무공武公의 훌륭한 덕이 있었으며, 어머니가 같은 아우로서의 배경과 에 들어가 이룬 공로가 있었다.
則滅而復興, 徙而能富, 土地旣廣, 詩又早作, 故以爲變風之首.
문공文公은 멸망한 나라를 다시 부흥하고 〈초구楚丘로〉 옮겨 다시 부강하게 하였으며 영토가 넓은데다 도 이른 시기에 지어졌으므로 변풍變風의 처음이 된다고 여겼다.
旣以衛國爲首, 邶․鄘則衛之所滅, 風俗雖異, 美刺則同, 依其作之先後, 故以邶․鄘先衛也.
위풍衛風을 처음이 된다고 여겼으나, 가 멸망시킨 나라로 풍속은 비록 다르지만 찬미와 풍자는 같기 때문에 지어진 선후에 따라 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의 앞에 둔 것이다.
【疏】周則, 政遂微弱, 化之所被, 才及郊畿, 詩作後於衛頃, 國地狹於千里.
평왕平王동천東遷한 이후로 정치가 마침내 미약해져서 교화가 미치는 곳이 겨우 경기京畿에 그쳤으며 시가 경백頃伯 시기보다 뒤에 지어졌고 영토가 천리도 되지 못하였다.
徒以天命未改, 王爵仍存, 不可過於後諸侯, 故使次之於衛也. 鄭以, 列爲大國.
다만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아 왕작王爵은 보존되었으나 훗날의 제후諸侯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므로 위풍衛風의 다음에 두었다. 태사백太史伯의 계책으로 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환공桓公사도司徒가 되어 주의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고 무공武公평왕平王을 보좌하여 능히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니, 여왕厲王선왕宣王의 친척이었고 〈치의緇衣〉의 찬미가 있었다. 그 땅이 비록 협소하였으나 나라의 친척인데다 공이 있었으므로 왕풍王風의 다음에 둔 것이다.
, 世有衰德, , , 辭有怨刺, 篇無美者,
이성異姓제후諸侯로 대대로 쇠덕衰德이 있어서 애공哀公황음荒淫의 풍도가 있었고 양공襄公조수鳥獸와 같은 행실이 있었으며, 시어詩語에 원망과 풍자가 있고 시편詩篇에 아름다운 것이 없다.
又以, 國土仍大, 故使之次鄭也.
그러나 또 태사太師의 후예로 영토가 넓었으므로 정풍鄭風의 다음에 둔 것이다.
【疏】魏國雖小, 儉而能勤, 踵虞舜之舊風, 有夏禹之遺化.
는 비록 작지만 검소하고 근면하여 임금의 옛 풍도를 따르고 임금의 남겨진 교화를 보존하였다.
, 美其詩音云 “大而婉, 儉而易, 行以德輔, 此則明主也.” 故次於齊.
그리하여 계찰季札이 음악을 듣고 그 나라의 시와 음악을 찬미하여 “장대하면서도 부드럽고 검소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며 덕 있는 재상에게 맡기니 이분은 성명聖明한 군주이다.” 하였으니, 제풍齊風의 다음에 두었다.
唐者, 之後, 雖爲大國, , , 故次於魏下.
숙우叔虞의 후예로 비록 대국大國이지만 소공昭公오대五代 동안 다투었고 헌공獻公의 뒤로는 많은 사람이 죽는 재앙이 잦았다. 그러므로 위풍魏風의 다음에 두었다.
秦以, , 穆公遂霸西戎, 卒爲强國, 故使之次唐也.
진중秦仲 때에 나라가 비로소 커졌고 양공襄公 때에 비로소 천자의 명을 받아 제후가 되었으며, 목공穆公이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므로 당풍唐風의 다음에 두었다.
陳以, 食侯爵之地, 但以民多淫昏, 國無令主, 故使之次秦也.
삼각三恪의 존귀함으로 후작侯爵의 지위에 봉해졌지만, 다만 백성들이 대부분 사리에 어두워 음란하고 나라에 훌륭한 군주가 없었다. 그러므로 진풍秦風의 다음에 두었다.
檜則其君淫恣, 曹則小人多寵, 國小而君奢, 民勞而政僻, , 國風次之於末, 宜哉.
는 그 임금이 음란하고 방탕하였으며, 는 소인들이 총애를 받았고 나라가 작은데도 임금이 사치하였으며 백성들이 수고롭고 정사가 바르지 않았으므로 계찰季札이 평하지 않았으니 ‘국풍國風’의 끝에 둔 것이 마땅하다.
【疏】豳者, 周公之事, 欲尊周公, 使專一國, 故次於衆國之後, 小雅之前, 欲兼其上下之美, 非諸國之例也.
주공周公의 일을 노래한 것이다. 〈주공周公왕조王朝경사卿士이므로 오로지 한 나라의 이름으로 명명할 수 없는데〉 주공周公을 높이고자 하여 오로지 한 나라로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국풍國風의 뒤와 소아小雅의 앞에 두어 국풍國風소아小雅의 아름다움을 겸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열국列國의 예가 아니다.
鄭譜, 王在豳後者, 退就雅․頌, 竝言王世故耳. 諸國之次, 當是大師所第, 孔子刪定, 或亦改張.
정현鄭玄의 ≪시보詩譜≫에서 왕풍王風빈풍豳風의 뒤에 둔 것은, 뒤로 물려 의 앞에 두어 의 시대와 아울러 말한 것일 뿐이다. 여러 나라 국풍의 차서次序는 본디 태사太師가 정했고 공자孔子산정刪定하거나 바꾸기도 하였다.
襄二十九年左傳 “魯爲季札徧歌周樂, 齊之下卽歌豳歌秦, 然後歌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9년에 “나라가 계찰季札을 위해서 주악周樂을 두루 노래할 때에, 나라 다음에 을 노래하였고 다음에 를 노래하였다.”라고 하였다.
杜預云 “於詩, 豳第十五, 秦第十一, 後仲尼刪定, 故不同.” 杜以爲今所第, 皆孔子之製, 孔子之前, 則如左傳之次. 鄭意或亦然也.
두예杜預가 “차서次序빈풍豳風15이고 진풍秦風11인 것은 나중에 공자孔子산정刪定하였기 때문에 차서次序가 다르다.” 하여, 두예杜預는 지금의 차서次序는 모두 공자孔子가 정한 것이어서 공자孔子 이전에는 ≪좌전左傳≫의 차서次序와 같다고 여겼는데, 정현鄭玄의 생각도 그러한 듯하다.
云 “無筭樂.” 注云 “燕樂亦無數, 或間或合, 盡歡而止. 春秋襄二十九年, 吳公子札來聘, 請觀於周樂, 此國君之無筭也.”
의례儀禮≫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음악에 정해진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에 “주연酒宴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정해진 수가 없으니, 번갈아 하기도 하고 합주를 하기도 하여 한껏 즐긴 뒤에 그만둔 것이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9년에 공자 계찰公子 季札내빙來聘하여 주악周樂을 청해 들었는데 이때에 국군國君이 정해진 수 없이 연주한 것이다.” 하였다.
以其徧歌, 謂之無數, 不以次爲無筭也.
그렇다면 두루 연주한 것은 ‘수없이 많이 했다.’는 것이지, 차서가 없는 것을 ‘무산無筭’이라 한 것은 아니다.
역주
역주1 毛詩……謂之正風 : 陸德明, ≪經典釋文≫ 〈毛詩音義〉에 나온다.
역주2 齊魯韓三家 : 漢나라 때에 ≪詩經≫을 전한 齊․魯․韓의 세 派를 가리킨다. ≪漢書≫ 〈藝文志〉에 “漢나라가 흥기하자, 魯의 申公이 ≪詩經≫의 訓詁를 지었고, 齊의 轅固와 燕의 韓生도 모두 傳을 지었는데, 이들 三家가 모두 學官의 반열에 있게 되었다.” 하였다.
역주3 河間獻王 : 漢나라 景帝의 아들 劉德이다.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金帛으로써 古書를 많이 구입하였고, 入朝하여 雅樂을 드리니 武帝가 “이 사람이 儒行을 지녔다.” 하고 宗正을 제수하였으며 諡號를 獻이라 하였다.
역주4 馬融……三禮 : 漢나라 때 馬融이 ≪周禮≫를 주석하고 盧植이 ≪禮記≫를 주석하고, 鄭玄이 ≪儀禮≫를 주석한 일을 말한다.
역주5 中候 : 漢代 讖緯書 중의 일종으로 18篇이다. ≪尙書≫의 문체를 모방하여 고대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린 상서로운 징조와 부응을 기술한 책이다.
역주6 第下 : ‘周南關雎訓詁傳第一’의 ‘第’자를 가리킨다.
역주7 風化 : 敎育이나 政治의 힘으로 風習을 잘 敎化하는 일을 말한다.
역주8 夷王 : 周의 9대왕으로, 이름은 燮이고 재위 기간은 B.C.895~879이다.
역주9 康叔之餘烈 : 康叔은 周 武王의 아우로서 이름은 封이다. 처음 康에 봉하였으므로 康叔이라고 한다. 주공이 武庚을 베고 나서 殷나라의 遺民을 강숙에게 맡겨서 衛君으로 삼으니, 康叔이 능히 그 백성을 화합시켰다. ≪史記 卷37 衛康叔世家≫
역주10 武公之盛德 : 武公은 衛나라 11대 군주로서, 95세의 나이에도 늙었다고 자처하지 않고 경계하는 箴을 지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신하들에게 “내가 늙었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경히 하는 마음으로 서로들 나를 경계하라.[無謂我老耄而舍我 必恭恪於朝夕 以交戒我]” 하였는데, ≪詩經≫ 〈大雅 抑〉이 바로 그것이다. ≪國語 楚語 上≫
역주11 母弟之戚 : 康叔은 주공의 同母弟이다.
역주12 入相之勳 : 衛 武公 42년 犬戎이 周 幽王을 죽이자 周 平王을 輔佐하여 犬戎을 평정하였다.
역주13 文公 : 전국시대에 衛나라가 狄에 멸망당하여 文公이 漕邑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고 거친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지내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재물을 모으고 백성들을 가르쳐 마침내 위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閔公 2년≫
역주14 平王東遷 : 周 幽王이 무도하여 犬戎에게 살해되자 그의 아들 平王이 서쪽 鎬京으로부터 동쪽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하는데, 이전을 西周라 하고 이후를 東周라 한다.
역주15 史伯之謀 : 周나라의 太史인 太史伯이 鄭 桓公에게 도망할 곳을 일러 준 계책을 일컫는다. 幽王 때에 왕실에 일이 많게 되자 제후들 중에 배반하는 자가 있었는데, 정 환공이 도망할 곳을 묻자, 태사백은 雒水의 동쪽, 河水와 濟水의 남쪽이 살 만하다고 알려 주었고, 이에 정 환공은 정 나라를 낙수의 동쪽에 세우게 되었다. ≪史記 卷42 鄭世家≫
역주16 桓爲司徒……緇衣之美 : 鄭나라는 厲王의 아들 宣王이 異母弟인 友를 封한 나라로, 桓公과 武公이 周나라의 司徒가 되어 직책을 잘 수행했으므로 주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 것을 가리키는데, 〈鄭風 緇衣〉에 “치의의 걸맞음이여, 해지면 내 또다시 만들어주리라.[緇衣之宜兮 予又改爲兮]” 하였다. ≪史記 卷42 鄭世家≫
역주17 齊則異姓諸侯 : 齊는 周 武王을 도와 殷의 폭군인 紂를 멸망시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여 仁政을 베풀게 한 어진 宰相인 姜太公에게 封한 나라이다.
역주18 哀公有荒淫之風 : 〈齊風 鷄鳴〉에 哀公이 荒淫하고 게을러서, 賢妃가 닭이 울어 朝臣들이 모이겠으니 어서 일어나라고 경계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역주19 襄公有鳥獸之行 : 文姜은 노나라 桓公의 부인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18년에 “桓公이 文姜과 齊나라에 갔을 때, 文姜이 오라비인 襄公과 간통한 것을 꾸짖자 文姜이 襄公에게 고하여 桓公이 피살되었다.”는 내용이 있고, 이 사실은 〈齊風 南山〉에 풍자되어 있다.
역주20 大師之後 : 齊나라에 봉해진 姜太公은 渭水 물가에서 낚시질하다가 周 文王을 만나 太師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역주21 季札觀樂 : 계찰은 춘추시대 吳나라 왕 壽夢의 넷째 아들로, 왕위도 사양하여 賢者로 칭송받은 인물인데, 延陵에 봉해졌으므로 延陵季子 혹은 줄여서 계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列國에 사신으로 나가서 풍속을 살피며 叔向이나 子産 등 賢大夫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맺었는데, 특히 노나라에 갔을 적에 주나라의 음악을 듣고 관찰하며 정확하게 비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春秋左氏傳 襄公 29년≫
역주22 叔虞 : 周 成王의 아우이다. 周 成王이 오동나무의 잎을 오려 珪의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아우 叔虞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너를 封하겠다.”고 하자, 史佚이 날짜를 가려서 정식으로 봉하기를 청하였다. 성왕이 “이는 농담이었다.”고 하자, “天子는 농담이 있을 수 없다.” 하고 숙우를 唐에 봉하도록 했다. ≪史記 卷39 晉世家≫
역주23 昭公則五世交爭 : 晉 文侯의 아들 昭侯가 왕이 되어 文侯의 동생 成師를 曲沃에 봉하여 桓叔으로 삼은 뒤, 晉大夫 潘父가 昭侯를 시해하고 桓叔을 맞아들이려 함으로써 오랜 분란이 시작되어, 孝侯, 鄂侯, 哀侯, 小子侯, 晉侯를 이어 환숙의 손자인 武公이 왕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史記 卷39 晉世家≫
역주24 獻後則喪亂弘多 : 桓叔의 손자로 武公의 뒤를 이은 獻公은 大夫 士蔿의 건의를 받아들여 晉나라의 公子들을 모두 살해하고 성을 쌓아 都邑으로 삼고 絳이라 하였다. ≪史記 卷39 晉世家≫
역주25 秦仲始大 : 西戎을 토벌한 공으로 諸侯에 봉해지고 영토를 확장한 秦 襄公의 할아버지로, 舜임금의 신하인 伯益의 19세손인 非子의 증손이다. ≪詩經≫ 〈秦風 車鄰〉 毛序의 ‘疏’에 “秦仲을 찬미한 詩이다. 秦仲의 나라가 비로소 크게 되었고, 또 車馬와 禮樂과 侍御의 아름다움이 있게 되었다.[美秦仲也 秦仲之國始大 又有車馬禮樂侍御之好焉]” 하였다.
역주26 襄公始命 : 양공이 처음으로 사냥을 즐겼다는 이야기이니, ≪詩經≫ 〈秦風 駟驖〉 毛序의 ‘疏’에 “襄公을 찬미한 詩이다. 비로소 천자의 命을 받아 제후가 되어서 사냥의 일과 園囿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美襄公也 始命 有田狩之事 園囿之樂焉]” 하였다.
역주27 三恪之尊 : 周 武王이 천하를 평정한 뒤에 虞․夏․殷 三代의 후손을 陳․杞․宋에 봉하고 三恪이라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5년≫
역주28 季札之所不譏 : 季札이 周南과 召南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며, 이 이후에 檜의 음악을 연주하자 “檜 이하는 평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9년≫
역주29 鄕飮酒 : 尊賢과 養老를 목적으로 베푸는 酒宴이다. ≪周禮≫ 〈鄕大夫〉에 의하면 鄕學에서 3년 동안을 수업한 사람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임금에게 천거할 때 그를 송별하기 위하여 鄕老 및 鄕大夫가 餞別의 잔치를 베풀었다. ≪儀禮≫ 〈鄕飮酒禮〉와 ≪禮記≫ 〈鄕飮酒義〉는 그 내용이 ≪周禮≫ 〈鄕大夫〉와 비슷하다.
역주30 (數)[不]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不’로 번역하였다.

모시정의(1) 책은 2019.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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