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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1)

논어주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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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주소(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原注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조청대부朝請大夫수국자좨주守國子祭酒상주국上柱國賜紫金魚袋臣형병邢昺等奉勅校定
原注
曰:案漢書예문지藝文志云 “논어論語者, 공자孔子應答弟공자‧時人, 及弟공자相與言而接聞於夫공자논어也.
當時弟子各有所記, 夫子旣卒, 門人相與輯而,
故謂之논어論語.”
然則夫子旣終, 已絶, 弟子恐離居已後, 各生異見, 而聖言永滅,
故相與논어撰, 因採時賢及古明王之논어, 合成一法, 謂之논어論語也.
정현鄭玄云 “중궁仲弓‧子游‧子夏等. 論者, 綸也, 輪也, 理也, 次也, 撰也.”
以此書可以經綸世務, 故曰綸也, , 故曰輪也,
蘊含萬理, 故曰理也, 篇章有序, 故曰次也, 群賢集定, 故曰撰也.
정현鄭玄 주례주周禮注云 “答述曰語.” 以此書所載, 皆중니仲尼應答弟子及時人之辭, 故曰語.
而在論下者, 必經論撰然後載之, 以示非也.
以其口相傳授, 故經焚書而獨存也.
[疏]興, 傳者則有三家.
노논어魯論語者, 노논어人所傳, 卽今所行篇次是也.
상산도위常山都尉공분龔奮장신소부長信少府하후승夏侯勝승상丞相위현韋賢태자태부위현성玄成노논어부경扶卿태자태부太子太傅하후건夏侯建전장군前將軍소망지蕭望之並傳소망지, 各自名家.
제논어齊論者, 제인齊人所傳, 別有문왕問王지도知道二篇, 凡二十篇. 其二十篇中, 章句頗多於노논어魯論.
창읍중위昌邑中尉왕길王吉소부少府송기낭야琅邪왕경王卿어사대부御史大夫공우貢禹상서령尙書令오록충종五鹿充宗교동膠東용생庸生並傳之, 唯왕길王吉名家.
고논어古論語者, 出自공씨孔氏壁中, 凡二十一篇.
有兩자장子張篇, 次不與‧魯논어同.
공안국孔安國爲傳, 후한後漢마융馬融亦注之.
안창후安昌侯장우張禹노논어魯論하후건夏侯建, 又從용생庸生왕길王吉제논어齊論, 擇善而從, 號曰장후론張侯論, 最後而行於世.
장우논어성제成帝,
후한後漢포함包咸주씨周氏並爲章句, 列於學官.
정현鄭玄노논어魯論장우포함주씨之篇章, 考之제논어고논어, 爲之注焉.
이부상서吏部尙書하안何晏집해공안국孔安國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陳群‧王肅‧주씨生烈之說, 幷下己意, 爲집해集解, 정시正始中上之, 盛行於世,
今以爲主焉.
序者, 하안何晏次序傳授訓說之人, 집해集解之意.
논어서논어論語而作, 故曰논어서論語序.
敍曰
중루교위中壘校尉유향劉向노논어魯論語二十篇공자孔子공자記諸善言也공자태자태부하후승夏侯勝 전장군前將軍소망지蕭望之 승상丞相위현韋賢공자위현성玄成等傳소망지라하니라
[疏]‘敍曰’至‘傳之’
○正義曰:此敍노론魯論之作及傳授之人也.
敍與序音義同.
曰者, 發語辭也.
한서漢書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云 “중루교위中壘校尉掌北軍중루교위門內, 外掌西域.” 안사고顔師古曰 “掌北軍중루교위門之內而又外掌西域.”
유향劉向者, 고조高祖少弟원왕元王之後, 벽강辟彊之孫, 之子.
자정子政, 本名갱생更生, 성제成帝卽位, 갱생.
數上疏言得失, 以유향중루교위中壘校尉.
유향爲人簡易, 專精思於經術.
성제成帝詔校經傳諸子詩賦, 每一書已, 유향輒條其篇目, 撮其指意, 별록而奏之, 著별록別錄신서新序.
此言 “노논어魯論語二十篇, 皆공자孔子공자記諸善言也.” 蓋出於彼,
하안何晏引之.
則直言曰言, 答述曰語, 則言語可通,
故此論夫子之語而謂之善言也.
[疏]백관공경표又云 “태자태부太子太傅, 古백관공경표, 秩二千石.”
하후승전云 “하후승전夏侯勝, 字장공長公, 동평인東平人,
少好學. 爲學精熟, 善說禮服, 徵爲박사博士.
선제宣帝立, 太后省政, 하후승상서尙書授太后,
장신소부長信少府. 坐議廟樂事下獄, 繫再更冬,
會赦, 出爲간대부諫大夫.
上知하후승素直, 復爲장신소부長信少府, 遷태자태부太子太傅.
受詔撰상서尙書논어論語說, 賜黃金百斤.
年九十卒官, 賜冢塋, 葬평릉平陵.
太后賜錢三百萬, 爲하후승素服五日, 以報師傅之恩, 儒者以爲榮.
始, 하후승每講授, 常謂諸生曰 ‘士病不明經術,
經術苟明, 其取如俛拾地芥耳.
學經不明, 不如親耕.’”
[疏]백관공경표又云 “전장군‧後‧左‧右전장군將軍, 皆백관공경표, 因之, 位上백관공경표, 金印紫綬.
不常置, 或有前‧後, 或有左‧右, 皆掌兵及四夷.”
소망지전云 “소망지전蕭望之, 字장천長倩, 동해東海난릉蘭陵人也.
好學제시齊詩, 事同縣후창后倉, 又從하후승夏侯勝, 問논어論語‧禮服.
爲郞, 累遷간대부諫大夫.
後代병길丙吉어사대부御史大夫, 左遷爲태자태부太子太傅.
선제宣帝寢疾, 選大臣可屬者, 引소망지禁中, 拜소망지望之전장군前將軍.
원제元帝卽位, 爲홍공弘恭‧石顯等所害, 飮鴆自殺.
天子聞之, 驚拊手, 爲之卻食涕泣, 哀左右.
長子소급嗣爲관내후關內侯.”
[疏]백관공경표又云 “상국相國승상丞相, 皆백관공경표, 金印紫綬, 掌승상天子, 助理萬機.” 응소應劭曰 “승상, 承也, 상국, 助也.”
有左右, 고제高帝卽位, 置一승상丞相.
十一年, 更名상국相國, 綠綬.
효혜제孝惠고후高后置左右丞相, 문제文帝二年, 一丞相, 애제哀帝원수元壽二年, 更名대사도大司徒.”
위현전曰 “위현전韋賢, 字장유長孺, 추현人也.
위현爲人質朴少欲,
篤志於學, 兼通상서尙書, 以敎授, 號稱추로대유鄒魯大儒.
徵爲박사博士‧給事中, 進授소제昭帝, 稍遷광록대부光祿大夫.
선제宣帝卽位, 以先선제師, 甚見尊重.
본시本始三年, 代채의蔡義爲丞相, 封扶陽侯.
年七十餘, 爲相五歲.
지절地節三年, 以老病乞骸骨, 賜黃金百斤, 罷歸, 加賜第一區.
丞相致仕, 自위현始.
年八十二薨, 諡曰절후節侯.
소옹위현성玄成, 字소옹少翁, 復以明經, 歷位至丞相. 諺曰 ‘遺子黃金滿籝, 不如一經.’
위현성玄成爲相七年, 건소建昭三年薨, 諡曰공후共侯.”
此四人, 皆傳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二十二篇이니 其二十篇中에도 章句頗多於노논어魯論이라
낭야琅邪왕경王卿교동膠東용생庸生 창읍중위昌邑中尉왕길王吉 皆以敎授하니라
[疏]‘齊論’至‘敎授’
○正義曰:此敍제논어齊論語之興及傳授之人也.
제논어齊論語凡二十二篇, 其二十篇篇名, 與노논어魯論正同, 其篇中章句, 則頗多於노논어魯論.
篇者, 積章而成, 篇, 徧也,
言出情鋪事, 明而徧者也.
積句以成章, 章者, 明也,
摠義包體, 所以明情者也.
句必聯字而言, 句者, 局也.
聯字分疆, 所以局言者也.
낭야琅邪교동膠東, 郡國名.
왕경王卿, 천한天漢元年, 由제남태수濟南太守, 爲어사대부御史大夫.
용생庸生. 용생, 蓋古謂有德者也.
창읍중위昌邑中尉者, 백관공경표云 “諸侯王, 고제高帝初置, 金璽盭綬, 掌治其國. 有태부太傅輔王, 내사內史治國民, 창읍중위中尉掌武職, 승상丞相중관衆官.
경제景帝중원五年, 改丞.
성제成帝수화綏和元年, 省내사內史, 更治民, 如郡태수太守, 중위中尉如郡도위都尉.”
왕길전云 “왕길전王吉, 字자양子陽, 낭야琅邪고우臯虞人也.
少好學明經,
以郡吏擧孝廉爲郞, 補약로우승若盧右丞, 遷형양령熒陽令,
擧賢良, 爲창읍昌邑중위中尉.”
此三人, 皆以제논어齊論語敎授於人也.
故有노논어魯論하고제논어齊論하니라
[疏]‘故有魯論有齊論’
○正義曰:旣敍노논어魯論제논어齊論之作及傳述之人, 乃以此言結之也.
노공왕魯共王 嘗欲以공자孔子宅爲宮하야타가고문논어古文論語하니라
[疏]‘魯共’至‘論語’
○正義曰:此敍得고론古論之所由也.
嘗, 曾也. 壞, 毁也.
노공왕魯共王時, 曾欲以공자孔子宅爲宮, 乃毁之, 於壁中故得此고문논어古文論語也.
경십삼왕전曰 “노공왕魯共王유여, 경제景帝子, 정희程姬所生.
효경제孝景전원二年, 立爲淮陽노왕, 전원三年, 徙노왕노왕,
二十八年薨. 諡曰공왕共王.
初好治宮室, 壞공자孔子舊宅以廣其宮, 聞鍾磬琴瑟之音, 遂不敢復壞.
於其壁中得古文효경傳.” 卽謂此논어論語효경孝經爲傳也.
무제武帝동방삭東方朔云 “傳曰 ‘時然後言, 人不厭其言.’”
성제成帝적방진翟方進策書云 “傳曰 ‘.’”
世通謂논어論語효경孝經爲傳.
논어論語효경孝經非先王之書, 是공자孔子所傳說, 故謂之傳, 所以異於先王之書也.
言古文者, 科斗書也, 所謂창힐倉頡本體,
所用之. 以今所不識,
是古人所爲, 故名古文.
形多頭麤尾細, 狀復團圓, 似水蟲之科斗, 故曰科斗也.
제론齊論문왕問王지도知道하니 多於노론魯論二篇이라
고론古論亦無此二篇이나요왈堯曰下章자장子張問以爲一篇하야 有兩자장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라
篇次不與제론노론魯論하니라
[疏]‘齊論’至‘魯論同’
○正義曰:此辨三논어篇章之異也.
제론齊論문왕問王지도知道, 多於노론魯論二篇, 所謂제논어齊論語二十二篇也.
고론古論亦無此문왕問王지도知道二篇, 非但노론魯論無之, 고론古論亦無也.
고론古論亦無此二篇, 而分요왈堯曰下章자장子張問以爲一篇, 有兩자장子張, 凡二十一篇.
여순如淳요왈 “分요왈堯曰篇後子張問 何여순可以종정從政以下爲篇, 名요왈종정從政. 其篇次又不與제론노론魯論同.” 신론新論云 “文異者, 四百餘字.”
안창후安昌侯장우張禹本受노론魯論하고 兼講제설齊說하야 善者從之하고 號曰장후론張侯論이라하니 爲世所貴하니라
포씨包氏주씨周氏章句出焉이라
[疏]‘安昌侯’至‘出焉’
○正義曰:此言장우張禹제론노론魯論之善者從之, 爲世所重, 포씨주씨포씨爲章句, 訓說此장후논어張侯論語也.
장우전曰 “장우전張禹, 字자문子文, 하내河內지현人也.
패군沛郡시수施讎, 왕양王陽용생庸生논어論語.
旣皆明習, 擧爲군문학郡文學, 久之試爲박사博士.
초원初元中立皇太子, 令장우授太子논어論語.
由是遷광록대부光祿大夫, 數歲出爲동평내사東平內史.
성제成帝卽位, 徵장우以師, 賜爵관내후關內侯급사중給事中상서尙書급사중.
하평河平四年, 代왕상王商승상丞相, 封안창후安昌侯.
爲相六歲, 乞骸就第.
건평建平二年薨, 諡曰절후節侯.”
장우本受노론魯論하후건夏侯建, 又從용생庸生왕길王吉제론齊論,
故兼講제설齊說也.
장우전又云 “始魯부경扶卿하후승夏侯勝왕양王陽‧蕭望之‧韋玄成, 皆說논어論語, 篇第或異.
장우先事왕양王陽, 後從용생庸生, 采獲所安.
最後出而尊貴, 諸儒爲之논어曰 ‘欲논어, 念장우文.’
由是學者多從장씨張氏, 餘家浸微.” 是其善者從之, 號曰장후론張侯論, 爲世所貴之事.
후한서後漢유림전儒林傳云 “포함包咸, 字자량子良, 회계會稽곡아曲阿人也.
少爲諸生, 노시魯詩논어論語, 擧孝廉, 除낭중郞中.
건무建武中入授皇太子논어論語, 又爲其논어장구章句,
간의대부諫議大夫. 영평永平五年, 遷대홍려大鴻臚.”
周氏, 不詳何人.
章句者, 訓解科段之名.
포씨包氏주씨周氏장후론張侯論爲之章句, 訓解以出其義理焉.
不言名而言두씨者, 蓋爲章句之時, 義在謙退, 不欲顯題其名, 但欲춘추경전집해之私族, 故直云두씨而已, 若두원개杜元凱춘추경전집해集解춘추경전집해春秋謂之두씨杜氏也.
或曰 “以하씨何氏, 故沒其名, 但言포씨包氏, 連言주씨周氏耳.”
고론古論박사博士공안국孔安國爲之訓解 而世不傳이라
순제順帝하야 남군태수南郡남군태수마융馬融 亦爲之訓說하니라
[疏]‘古論’至‘訓說’
○正義曰:此敍訓說고문논어古文論語之人也.
사기史記공자세가世家, 공안국安國, 공자세가孔子十一공자세가孫, 爲무제武帝박사博士.
노공왕魯共王공자孔子舊宅, 壁中得古文우서夏商周之우서及傳논어論語효경孝經, 悉還공씨孔氏,
공안국安國承詔作서전書傳, 又作고문효경전古文孝經傳, 亦作논어훈해論語訓解.
석고釋詁云 “訓, 道也.” 然則道其義, 석고其理, 謂之訓解.
以傳述言之曰傳, 以釋理言之曰訓解, 其實一也.
무제武帝末年遭巫蠱事, 經籍道息, 故世不傳.
自此공안국安國후한, 至후한後漢순제順帝時, 有남군태수南郡太守마융馬融亦爲고문논어훈설古文論語訓說.
후한서後漢효순황제기효순황제기孝順皇帝, 諱, 안제安帝之子也.”
지리지地理志云 “남군南郡, 置,
고제高帝중원年, 更爲임강군臨江郡, 五年復故. 경제景帝二年, 復爲임강군臨江郡, 중원二年復故, 屬형주荊州.”
백관공경표云 “郡守, 백관공경표, 掌治其郡, 秩二千石.
경제景帝중원二年, 更名太守.”
마융전云 “마융전馬融, 字계장季長, 부풍扶風무릉茂陵人也.
爲人美辭貌, 有俊才,
博通經籍, 영초永初中爲교서랑校書郞.
양가陽嘉二年, 拜의랑議郞, 양상梁商表爲종사중랑從事中郞, 轉무도태수武都太守,
三遷爲남군태수南郡太守.
효경孝經논어論語‧詩‧易‧尙書‧三禮.
年八十八, 연희九年, 卒於家.”
漢末 대사농大司農정현鄭玄노론魯論篇章하야 考之제론고론하야 爲之註하니라
[疏]‘漢末’至‘之註’
○正義曰:言정현鄭玄亦爲논어論語之注也.
鄭玄, 字강성康成, 북해北海고밀현高密縣人. 師事마융馬融.
대사농大司農徵不起, 居家敎授.
후한後漢환제‧靈時, 故云후한末.
‧尙위서‧三禮‧논어論語‧尙위서大傳‧오경五經위서候, 箋모시毛詩, 作모시보毛詩譜.
作注之時, 就노론魯論篇章, 謂二十篇也. 復考校之以제론齊論고론古論, 擇其善者而爲之註.
註與注音義同.
近故 사공司空진군陳群 太常왕숙王肅 博士주생렬周生烈 皆爲의설義說하니라
[疏]‘近故’至‘義說’
○正義曰:此敍時注說논어論語之人也.
年世未遠, 人已歿故, 是近故也.
司空, 古官三公也.
백관공경표云 “봉상奉常, 백관공경표, 掌宗廟禮儀.
경제景帝중원六年, 更名태상太常.”
박사博士, 백관공경표, 掌通古今.”
위지魏志云 “진군전陳群字長文, 영천潁川허창許昌人也.
태조太祖진군사공서조속司空西曹屬,
문제文帝卽位, 遷상서복야尙書僕射. 명제明帝卽位, 進封영음후潁陰侯, 頃之爲사공司空.
청룡靑龍四年薨.”
왕숙전王肅자옹子邕, 동해東海난릉蘭陵人.
衛將軍太常蘭陵景侯, 감로甘露元年薨.
모시주상서尙書상복喪服논어論語孔子家논어, 述모시주毛詩注, 作성증론聖證論정현鄭玄.” 周生烈,
돈황燉煌人.
칠록七錄云 “字문일文逸 本姓
박사博士시중侍中.”
此二人皆爲논어의설論語義說.
謂作注而說其義, 故云義說.
前世傳師說 雖有異同이라도 不爲訓解러니 中間爲之訓解
至于今多矣 所見不同하니 互有得失하니라
[疏]‘前世’至‘得失’
○正義曰:將作논어집해論語集解, 故須言先儒有得失不同之說也.
據今而道往古, 謂之前世.
上敎下曰傳, 下承上曰受, 謂장우張禹以上至하후승夏侯勝以來, 但師資誦說而已, 雖說有異者同者, 皆不著篇簡以爲傳注訓解.
中間爲之논어훈해訓解, 謂自古至今中間, 포씨包氏포씨等爲此논어훈해論語訓解,
有二十餘家, 故云至于今多矣.
以其趣舍各異, 故得失互有也.
논어집해諸家之善하야 記其姓名하고 有不安者 頗爲改易하고 名曰논어집해論語集解라하니라
[疏]‘今集’至‘集解’
○正義曰:此敍집해集解之體例也.
今謂하안何晏時.
諸家謂공안국孔安國‧包咸‧周氏‧馬融‧鄭玄‧陳群‧王肅‧周生烈也.
集此諸家所說善者而存之, 示無勦說,
故各記其姓名, 注言包曰‧馬曰之類是也.
注但記其姓, 而此連言名者, 以著其姓所以名其人. 非謂名字之名也.
有不安者, 謂諸家之說於義有不安者也.
頗爲改易者. 言諸家之善則存而不改, 其不善者頗多爲改易之.
注首不言包曰‧馬曰, 及諸家說下言一曰者, 皆是하씨何氏自下己言, 改易先儒者也.
名曰論語集解者, 하씨何氏注解旣畢, 乃自題之也.
두씨杜氏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謂之집해集解者, 謂聚집해춘추좌씨전爲之作집해也. 此乃聚집해諸家義理, 以집해논어집해論語, 言同而意異也.
광록대부光祿大夫관내후關內侯손옹孫邕 광록대부光祿大夫정충鄭沖 산기상시散騎常侍중령군中領軍안향정후安鄕亭侯조희曹羲 시중侍中순의荀顗 상서尙書부마도위駙馬都尉관내후關內侯하안何晏等上하노라
[疏]‘光祿’至‘等上’
○正義曰:此敍同집해集解之人也.
백관공경표云 “大夫掌論議,
태중대부太中大夫태중대부中大夫‧諫태중대부大夫, 皆無員, 多至數十人.
태초太初元年, 更名중대부中大夫광록대부光祿大夫, 秩比二千石광록대부光祿.”
無印綬, 爵級十九曰관내후關內侯. 안사고顔師古曰 “言有관내후號而居경기京畿, 無國邑.”
孫邕, 字종유宗儒, 낙안樂安청주靑州人也.
진서晉書정충전鄭沖문화文和, 형양熒陽개봉開封人也.
起自寒微,卓爾立操. 문제文帝진류태수子, 命爲문학文學, 累遷상서랑尙書郞, 出補진류태수陳留진류태수.
조상曹爽引爲종사중랑從事中郞, 轉산기상시散騎常侍광록훈光祿勳.”
백관공경표又云 “시중侍中산기중상시散騎中常侍, 皆加백관공경표.” 응소應劭曰 “入시중天子, 故曰시중侍中.” 진작晉灼曰 “문제文帝산기중상시散騎산기중상시中常侍, 爲산기상시散騎常侍也.”
又曰 “所加, 或列侯‧將軍‧백관공경표大夫‧將都尉‧상서尙書‧太醫‧太宮令, 至낭중郞中, 亡員, 多至數十人.”
여순如淳曰 “將, 謂都낭중將以下也, 自列侯, 下至낭중郞中, 皆得有산기散騎중상시中常侍也.”
又曰 “시중侍中중상시中常侍, 得入禁시중, 산기散騎, 並乘輿車.” 안사고顔師古曰 “並音步浪反.
騎而散從, 無常職也.”
此言중령군中領軍者, 백관공경표無文.
安鄕정후亭侯者, 不在爵級二十之數, 蓋漢末及정후亭侯‧列정후之倫也.
조상羲, 패국沛國초현人, 宗室조상曹爽之弟.
순욱顗, 字경천景倩, 순욱荀彧之子, 순선之弟也.
함희咸熙中爲사공司空.
백관공경표又云 “소부少府, 백관공경표, 屬백관공경표상서尙書.
성제成帝건시建始四年, 初置상서尙書, 員五人.”
부마도위駙馬都尉부마도위駙馬,
무제武帝初置, 秩比二千石.” 안사고顔師古曰 “駙, 副也, 非正駕車, 皆爲副馬.
一曰 ‘駙, 近也, 疾也.’”
하진晏 字평숙平叔, 남양南陽완현人也. 하진何進之孫, 하함之子.
조상曹爽秉政, 以하안상서尙書, 又상서公主.
著述凡數十篇.
정시正始中, 此五人共上此논어집해論語集解也.


原注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조청대부朝請大夫 수국자좨주守國子祭酒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형병邢昺 등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교정校定하였다.
原注
정의왈正義曰:《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고찰하건대 “《논어論語》는 공자孔子께서 제자弟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應答하신 말씀과 부자夫子께 직접 들은 말씀을 제자들이 서로 말한 것들을 〈수록한 것이다.〉
당시에 제자들이 각기 기록해두었던 것을 부자께서 별세하신 뒤에 문인들이 함께 그 기록들을 수집收輯하여 논찬論纂하였다.
그러므로 책명冊名을 《논어論語》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자夫子께서 별세하신 뒤에 미언微言이 이미 끊어졌으니, 제자들이 서로 헤어진 뒤에 각각 이견異見이 생겨 성인聖人의 말씀이 영원히 멸절滅絶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논찬論撰하면서 당시의 현인賢人 및 옛 명왕明王들의 말을 뽑아 모아 하나의 으로 만들고서 이를 《논어論語》라 한 것이다.
정현鄭玄은 “중궁仲弓자유子游자하子夏 등이 찬정撰定한 것인데, 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책으로 세상일을 경륜經綸할 수 있기 때문에 ‘’이라 하고, 원전圓轉(완곡 함축)이 무궁無窮하기 때문에 ‘’이라 하고,
온갖 이치를 온축蘊蓄하였기 때문에 ‘’라 하고, 편장篇章에 순서가 있기 때문에 ‘’라 하고, 여러 현인賢人들이 모여 찬정撰定하였기 때문에 ‘’이라 한 것이다.
정현鄭玄의 《주례주周禮注》에 “답술答述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책에 실린 것이 모두 중니仲尼께서 제자 및 당시 사람들의 물음에 응답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라 한 것이다.
’자를 ‘’자 아래에 놓은 것은 반드시 논찬論撰을 거친 뒤에 그 말씀을 기재記載하여 망류妄謬가 없음을 보인 것이다.
논어論語》는 입으로 서로 전수傳授하였기 때문에 분서焚書을 거치고도 홀로 보존되었다.
나라가 건국된 뒤에 《논어論語》를 학파學派가 셋이 있었다.
노논어魯論語》는 노인魯人이 전한 것으로 바로 지금 통행하는 편차篇次가 그것이다.
상산도위常山都尉 공분龔奮, 장신소부長信少府 하후승夏侯勝, 승상丞相 위현韋賢과 그 아들 위현성韋玄成, 노인魯人 부경扶卿, 태자태부太子太傅 하후건夏侯建, 전장군前將軍 소망지蕭望之가 모두 《노논어魯論語》를 전하여 각각 명가名家가 되었다.
제논어齊論語》는 제인齊人이 전한 것으로 별도로 〈문왕問王〉과 〈지도知道〉 두 편이 있으니 모두 22편이고, 그 20편 중에도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자못 많다.
창읍중위昌邑中尉 왕길王吉, 소부少府 송기宋畸, 낭야琅邪 왕경王卿, 어사대부御史大夫 공우貢禹, 상서령尙書令 오록충종五鹿充宗, 교동膠東 용생庸生이 모두 《제논어齊論語》를 전하였으나, 유독 왕길王吉만이 명가가 되었다.
고논어古論語》는 공씨孔氏벽중壁中에서 나왔는데, 모두 21편이다.
두 〈자장子張〉편이 있고, 편차編次의 《논어論語》와 같지 않다.
공안국孔安國을 내고, 후한後漢 마융馬融를 달았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하후건夏侯建에게 《노논어魯論語》를 수학受學하고 또 용생庸生왕길王吉에게 《제논어齊論語》를 수학하고서 좋은 것을 선택해 책으로 엮어 ‘《장후론張侯論》’이라 하였는데, 이 책은 가장 뒤에 나와 나라 때에 유행하였다.
장우張禹는 이 《논어論語》를 성제成帝에게 전수하였다.
후한後漢포함包咸주씨周氏가 모두 장구章句(注釋)를 붙여 학관學官(學校)에 배치하였다.
정현鄭玄장우張禹포함包咸주씨周氏가 정한 《노논어魯論語》의 편장篇章에 의거하고 《제논어齊論語》와 《고논어古論語》를 참고하여 주석을 붙였다.
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하안何晏공안국孔安國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진군陳群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 등의 을 모으고 자기의 견해를 붙여 《집해集解》를 만들어 정시正始 연간에 조정朝廷에 올렸는데,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지금도 이 《집해集解》를 로 삼는다.
’는 하안何晏훈설訓說을 전수한 사람과 자신이 《집해集解》를 지은 뜻을 차례로 서술한 것이다.
는 《논어論語》를 위해 지었기 때문에 〈논어서論語序〉라 한 것이다.
서술敍述한다.
나라 중루교위中壘校尉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노논어魯論語》 20편은 모두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선언善言을 기록한 것인데, 태자태부太子太傅 하후승夏侯勝, 전장군前將軍 소망지蕭望之, 승상丞相 위현韋賢과 그의 아들 위현성韋玄成 등이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敍曰]에서 [傳之]까지
○正義曰:이것은 《노론魯論》이 지어진 배경과 전수傳授한 사람을 서술敍述한 것이다.
’는 ‘’와 (뜻)가 같다.
’은 발어사發語辭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를 고찰하건대 “중루교위中壘校尉북군北軍누문壘門(軍門) 안을 관장하고, 밖으로 서역西域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 에 “북군北軍누문壘門 안의 일을 관장하고 또 밖으로 서역西域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다.
유향劉向 고조高祖의 아우 원왕元王후예後裔벽강辟彊의 손자이고 의 아들이다.
자정子政이고 본명本名갱생更生이었는데, 성제成帝가 즉위한 뒤에 이름을 ‘’으로 바꾸었다.
자주 상소上疏하여 득실得失을 말하니, 성제成帝유향劉向중루교위中壘校尉로 삼았다.
유향劉向은 사람됨이 대범하고 까다롭지 않아[簡易] 오로지 경학經學만을 깊이 연구하였다.
성제成帝조서詔書를 내려 경전經傳제자諸子시부詩賦교감校勘하게 하니, 한 책의 교감을 마칠 때마다 유향劉向은 번번이 그 책의 편목篇目을 조목별로 나누어 열기列記하고 그 뜻을 요약해 기록하여 상주上奏하고서 《별록別錄》과 《신서新序》를 지었다.
에 “《노논어魯論語》 20편은 모두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선언善言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유향劉向에게서 나온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하안何晏이 인용한 것이다.
대문對文에는 직접 말하는 것을 ‘’이라 하고, 대답하는 것을 ‘’라 하지만, 산문散文에는 ‘’과 ‘’를 통용通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부자夫子의 말씀[語]을 하면서 ‘선언善言’이라고 한 것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태자태부太子太傅고대古代관명官名으로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하후승전夏侯勝傳〉에 “하후승夏侯勝장공長公이고 동평인東平人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예복禮服(喪服)에 대해 강설講說을 잘하니, 조정이 불러들여 박사博士로 삼았다.
곽광郭光장안세張安世창읍왕昌邑王폐출廢黜하고〉 선제宣帝를 세우고는, 〈곽광郭光은 ‘군신群臣동궁東宮(太后)에게 정사政事주달奏達하고 태후가 정사를 살피니, 응당 경술經術(經學)을 알아야 한다.’고 여겨, 태후께 아뢰어〉 하후승夏侯勝으로 하여금 태후에게 《상서尙書》를 가르치게 하였다.
장신소부長信少府승천升遷하였으나 묘악廟樂을 의논한 일에 연좌되어 에 갇혀 두 해 겨울을 보냈다.
사면을 받고 출사出仕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선제宣帝하후승夏侯勝이 본디 잘못이 없었음을 알고서 다시 장신소부長信少府로 삼았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승천升遷시켰다.
하후승夏侯勝조서詔書를 받들어 《상서尙書》와 《논어論語》의 주설注說을 지으니, 황금黃金 100을 하사하였다.
나이 90세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죽으니, 나라에서 묘지墓地를 내려 평릉平陵에 장사 지냈다.
태후가 300만 을 내리고 하후승夏侯勝을 위하여 5일 동안 소복素服을 입어 사부師傅의 은혜에 보답하니, 유자儒者들이 이를 영예榮譽로 여겼다.
당초에 하후승夏侯勝경전經傳강설講說하여 전수傳授할 때마다 항상 제생諸生들에게 ‘선비는 경술經術에 밝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한다.
경술이 밝아지면 청자靑紫(公卿)를 취하는 것이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쉽다.
을 배우고도 경술에 밝지 못하면 〈학문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전장군前將軍후장군後將軍좌장군左將軍우장군右將軍은 모두 나라 말기의 관명官名인데, 나라가 그 관명官名을 그대로 인습하였으니, 지위는 상경上卿이고 자주색 인끈으로 꿴 황금인장黃金印章을 찼다.
나라는 이 관직을 항상 두지 않고, 혹은 의 장군만을 두기도 하고 혹은 의 장군만을 두기도 하였는데, 모두 병사兵事사이四夷의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에 “소망지蕭望之장천長倩이고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제시齊詩》 배우기를 좋아하여 동현同縣후창后倉사사師事하고, 또 하후승夏侯勝에게 《논어論語》와 예복禮服을 물었다.
사책射策갑과甲科에 합격하여 이 되고, 누차 승진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뒤에 병길丙吉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좌천左遷되었다.
선제宣帝가 병이 깊어 대신大臣 중에 후사後事를 부탁할 만한 자들을 선발해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일 때에 미쳐 소망지蕭望之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았다.
원제元帝가 즉위한 뒤에 환시宦侍 홍공弘恭석현石顯 등의 박해를 받아 짐독鴆毒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천자天子는 그가 죽었단 말을 듣고 놀라 손을 치며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리니 애통해하는 모습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장자長子 소급蕭伋이 뒤를 이어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상국相國승상丞相은 모두 나라의 관명官名인데 모두 자주색 인끈으로 꿴 황금인장黃金印章을 차고서, 천자天子를 받들어 모시며 정무政務보좌輔佐해 처리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는데, 응소應劭에 “(받듦)이고, (도움)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나라는 승상丞相을 두었으나, 나라는 고제高帝가 즉위하면서부터 한 승상만을 두었다.
고제高帝 11년(B.C. 196)에 이름을 상국相國으로 바꾸고서 녹색綠色의 인끈을 사용하게 하였다.
효혜제孝惠帝고후高后 때에 좌‧우의 승상을 두었는데, 문제文帝 2년(B.C. 178)에 다시 한 승상만을 두었고,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B.C. 1)에 이름을 대사도大司徒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위현전韋賢傳〉에 “위현韋賢장유長孺이고 나라 추현鄒縣 사람이다.
위현韋賢은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욕심이 적었다.
학문에 전념하여 《》와 《상서尙書》에 정통精通하고 학도學徒에게 《》를 가르치니, 사람들은 그를 ‘추로대유鄒魯大儒’라고 호칭하였다.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가 박사博士급사중給事中이 되어 소제昭帝에게 나아가 《》를 가르쳤고, 점차 승진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다.
선제宣帝가 즉위하여서는 선제先帝사부師傅라 하여 매우 존경하였다.
본시本始 3년(B.C. 71)에 채의蔡義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부양후扶陽侯해졌다.
이때 위현韋賢의 나이 70여 세이고, 승상이 된 지 5년이었다.
지절地節 3년(B.C. 67)에 늙어서 질병이 많다는 이유로 사직辭職을 청하니 황금黃金 100하사下賜하고 물러나 돌아가게 하고는 가옥家屋 한 채를 내렸다.
승상이 치사致仕하는 일은 위현韋賢으로부터 비롯하였다.
82세에 죽으니, ‘절후節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위현韋賢의 막내아들 위현성韋玄成소옹少翁인데, 그도 명경明經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오르니, 의 속담에 ‘자식에게 황금黃金을 광주리 가득 물려주는 것이 한 경전經傳을 물려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생겼다.
위현성韋玄成이 승상이 된 지 7년째 되는 건소建昭 3년(B.C. 36)에 죽으니, ‘공후共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네 사람은 모두 《노논어魯論語》를 전하였다.
제논어齊論語》는 22편인데, 그 20편 중에도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자못 많다.
낭야琅邪 왕경王卿교동膠東 용생庸生창읍중위昌邑中尉 왕길王吉이 모두 《제논어齊論語》로써 학도學徒들을 가르쳤다.
[齊論]에서 [敎授]까지
○正義曰:이것은 《제논어齊論語》가 지어진 배경과 전수傳授한 사람을 서술敍述한 것이다.
제논어齊論語》는 모두 22편인데, 그 20편의 편명篇名은 《노논어魯論語》의 편명과 같으나, 그 안에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매우 많다.
이 쌓여 이루어지니, (많은 사항을 두루 하여 으로 엮음)이다.
감정을 표출表出해 사실을 서술하되 명확하게 기술하여 (篇)을 이룬다는 말이다.
가 쌓여 을 이루니, (밝힘)이다.
각구各句의 뜻을 포괄해 뜻을 밝히는 것이다.
는 반드시 글자를 연결하여 말을 만드니, 이다.
글자를 연결하여 경계를 나누어 말을 국한局限하는 것이다.
낭야琅邪교동膠東군국郡國의 이름이다.
왕경王卿천한天漢 원년元年(B.C. 100)에 제남태수濟南太守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용생庸生은 이름이 이니, 은 아마도 옛날에 유덕자有德者를 지칭하는 말이었던 듯하다.
창읍중위昌邑中尉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제후왕諸侯王고제高帝가 처음 설치하고서 황금 인새印璽와 황록색 수대綬帶를 주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그 밑에 을 보필하는 태부太傅, 국민을 다스리는 내사內史, 무관武官을 맡아 다스리는 중위中尉, 중관衆官을 통솔하는 승상丞相이 있었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B.C. 145)에 승상의 명칭을 ‘’으로 바꾸었다.
성제成帝 수화綏和 원년元年(B.C. 9)에 내사內史를 없애고 다시 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태수太守와 같고, 중위中尉도위都尉와 같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왕길王吉자양子陽이고 낭야琅邪 고우臯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술經術에 밝았다.
군리郡吏로서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이 되어, 약로우승若盧右丞보임補任되었다가 형양령熒陽令으로 승차陞差하였다.
현량賢良에 천거되어 창읍昌邑중위中尉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세 사람은 모두 《제논어齊論語》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노논어魯論語》와 《제논어齊論語》가 있게 되었다.
[故有魯論有齊論]
○正義曰:이미 《노논어魯論語》와 《제논어齊論語》가 지어진 배경과 전술傳述한 사람을 서술하고서 이 말로 종결終結한 것이다.
노공왕魯共王 때에 일찍이 공자孔子구택舊宅궁전宮殿을 지으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허물다가 《고문논어古文論語》를 얻었다.
[魯共]에서 [論語]까지
○正義曰:이것은 《고론古論》을 얻게 된 연유를 서술한 것이다.
이고, (撤去)이다.
노공왕魯共王 때에 일찍이 공자孔子구택舊宅궁전宮殿을 지으려고 구택을 철거하다가 속에서 이 《고문논어古文論語》를 얻었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경십삼왕전景十三王傳〉에 “노공왕魯共王 유여劉餘경제景帝의 아들로 정희程姬의 소생이다.
효경제孝景帝 전원前元 2년(B.C. 155)에 회양왕淮陽王으로 봉해졌다가 전원前元 3년(B.C. 154)에 노왕魯王으로 옮겼다.
에 봉해진 지 28년이 되던 해에 죽으니, 시호諡號공왕共王이라 하였다.
공왕共王은 본래 궁실宮室을 짓기 좋아하여, 궁실을 확장하기 위해 공자孔子구택舊宅을 철거하다가 종경鍾磬금슬琴瑟 소리를 듣고서 감히 더 이상 철거하지 못하였다.
속에서 고문古文으로 쓰인 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이라 한 것이다.
무제武帝동방삭東方朔에게 이르기를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때가 된 뒤에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라고 하였고,
성제成帝적방진翟方進에게 준 책서策書에 “(《효경孝經》 〈제후장諸侯章〉)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은 것이 존귀尊貴한 지위를 길이 지키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이에서 나라 때는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모두 ‘’으로 칭한 것을 알 수 있다.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은 선왕先王서적書籍이 아니고 공자孔子가 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라 이른 것이니, 선왕의 서적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고문古文’은 과두서科斗書(蝌蚪文字)이니, 이른바 ‘창힐倉頡(蒼頡)의 본체本體’이다.
나라 때 사용하던 문자로 지금은 아는 이가 없다.
이 문자는 고인古人이 만든 것이므로 ‘고문古文’이라고 칭한 것이다.
자형字形이 대체로 머리는 크고 꼬리는 가늘며 모양이 둥글어 수충水蟲과두科斗(올챙이)와 같기 때문에 ‘과두科斗’라 한 것이다.
제론齊論》에는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론魯論》보다 두 편이 더 많다.
고론古論》에도 이 두 편이 없으나 〈요왈堯曰〉편 하장下章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서 두 〈자장子張〉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다.
편차篇次도 《제론齊論》‧《노론魯論》과 같지 않다.
[齊論]에서 [魯論同]까지
○正義曰:이것은 3논어論語》의 편장篇章의 다름을 분변한 것이다.
제론齊論》에는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어 《노론魯論》보다 두 편이 더 많으니, 이른바 ‘《제논어齊論語》는 22편’이란 것이다.
고론古論》에도 이 〈문왕問王〉과 〈지도知道〉 두 편이 없으니, 《노론魯論》에만 이 두 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론古論》에도 없다.
고론古論》에도 이 두 편이 없으나, 〈요왈堯曰〉편 하장下章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으로 만들어서 두 〈자장子張〉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다.
여순如淳은 “〈요왈堯曰〉편 후미의 ‘자장문子張問 하여가이종정何如可以從政’ 이하를 나누어 한 편으로 만들고서 편명篇名을 〈종정從政〉이라 하였는데, 그 편차篇次도 《제론齊論》‧《노론魯論》과 같지 않다.”고 하였고,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 “글자가 다른 것이 400여 자이다.”라고 하였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는 본래 《노론魯論》을 수학受學하였는데, 제설齊說(《齊論》)까지 겸강兼講하여 완선完善한 것을 취해 책으로 엮고 《장후론張侯論》이라 칭하니, 세상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다.
포씨包氏주씨周氏장구章句가 나왔다.
[安昌侯]에서 [出焉]까지
○正義曰:이것은 장우張禹가 《제론齊論》과 《노론魯論》에서 완선完善한 것을 취해 책으로 엮어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은 일과, 포씨包氏주씨周氏을 나누고 를 끊어 이 《장후논어張侯論語》를 훈설訓說(訓解)한 것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 〈장우전張禹傳〉에 “장우張禹자문子文이고, 하내河內 지현軹縣 사람이다.
패군沛郡 시수施讎에게 《》을 배우고, 왕양王陽(王吉)과 용생庸生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배운 것을 다 밝게 익힌 뒤에 천거薦擧군문학郡文學이 되었고, 오랜 뒤에 시험에 응시하여 박사博士가 되었다.
초원初元 황태자皇太子를 세우고서 장우張禹로 하여금 태자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광록대부光祿大夫승천升遷하였고, 몇 해 뒤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동평내사東平內史가 되었다.
성제成帝가 즉위하여 장우張禹를 불러들여 사부師傅로 삼고서 관내후關內侯작위爵位를 내리고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상서尙書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하평河平 4년(B.C. 25)에 왕상王商의 뒤를 이어 승상丞相이 되고 안창후安昌侯해졌다.
승상이 된 지 6년째 되던 해에 사직辭職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건평建平 2년(B.C. 5)에 죽으니 ‘절후節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라고 하였다.
장우張禹는 본래 하후건夏侯建에게 《노론魯論》을 수학受學하였는데, 또 용생庸生왕길王吉에게 《제론齊論》을 수학하였다.
그러므로 제설齊說(《齊論》)까지 겸강兼講한 것이다.
장우전張禹傳〉에 또 “당초에 노인魯人 부경扶卿하후승夏侯勝왕양王陽소망지蕭望之위현성韋玄成 등이 모두 《논어論語》를 해설解說하였는데, 편차篇次가 조금 달랐다.
장우張禹는 먼저 왕양王陽(王吉)을 사사師事하고 뒤에 용생庸生에게 수학하고서 소안所安(타당하고 완전히 좋은 것)만을 채록採錄하였다.
가장 뒤에 나온 책이어서 존귀尊貴하게 여겨져서 제유諸儒들이 ‘《논어論語》를 배우려면 장우張禹의 글을 염송念誦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學者들이 장씨張氏의 《논어論語》를 취하니, 나머지 사람들의 《논어論語》는 점차 쇠미衰微해졌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완선完善한 것만을 취해 《장후론張侯論》이라 칭하니, 세상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에 “포함包咸자량子良이고, 회계會稽 곡아曲阿 사람이다.
소년少年제생諸生이 되어 《노시魯詩》와 《논어論語》를 학습하여,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에 제수되었다.
건무建武 황궁皇宮으로 들어가 황태자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고, 또 《논어장구論語章句》를 지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가 영평永平 5년(62)에 대홍려大鴻臚승천升遷하였다.”라고 하였다.
[周氏] 누구인지 미상未詳이다.
[章句] 글에 단락을 지어 훈해訓解한 것을 이르는 명칭이다.
포씨包氏주씨周氏는 《장후론張侯論》에 장구章句하고 훈해訓解하여 그 의리義理를 드러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만을 말한 것은 아마도 장구를 정할 때에 겸양의 뜻으로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 장구를 일족一族에게만 전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 만을 말한 것인 듯하니, 두원개杜元凱(杜預)가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를 짓고서 ‘두씨杜氏’라고 한 것과 같다.
혹자或者는 “하씨何氏(何晏)는 〈아버지의 이름이 이므로〉 ‘’을 하여 포함包咸의 이름은 쓰지 않고 다만 ‘포씨包氏’라고만 말하였기 때문에 〈주씨周氏까지 이름을 말하지 않고〉 연이어 주씨周氏라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고론古論》은 오직 박사博士 공안국孔安國만이 훈해訓解를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 남군태수南郡太守 마융馬融이 또 《고론古論》의 훈설訓說을 지었다.
[古論]에서 [訓說]까지
○正義曰:이것은 《고문논어古文論語》를 훈설訓說한 사람을 서술한 것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안국孔安國공자孔子의 11세손으로 무제武帝 때의 박사博士였다.
이때 노공왕魯共王공자孔子구택舊宅철거撤去하다가 속에서 고문古文으로 된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 및 《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의 을 얻었는데, 이 서적書籍들을 모두 공씨孔氏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공안국孔安國조서詔書를 받들어 《서전書傳》을 짓고, 또 《고문효경전古文孝經傳》과 《논어훈해論語訓解》를 지었다.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일러줌)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뜻을 일러주고 그 이치를 해석하는 것을 ‘훈해訓解’라 한다.
전술傳述하는 것을 ‘’이라 하고, 이치를 해석하는 것을 ‘훈해訓解’라 하지만 실상은 하나이다.
무제武帝 말년에 무고옥사巫蠱獄事를 만나서 경적經籍의 길이 종식終熄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다.
공안국孔安國이 죽은 뒤로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 남군태수南郡太守 마융馬融이 또 《고문논어훈설古文論語訓說》을 지었다.
후한서後漢書》 〈효순황제기孝順皇帝紀〉를 고찰하건대 “효순황제孝順皇帝이니 안제安帝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군南郡나라 때 설치한 고을이다.
고제高帝 원년元年(B.C. 206)에 군명郡名임강군臨江郡으로 바꾸었다가 5년에 옛 이름으로 회복시켰고, 경제景帝 2년(B.C. 155)에 다시 임강군臨江郡으로 바꾸었다가, 중원中元 2년(B.C. 148)에 옛 이름으로 회복시키고 형주荊州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군수郡守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그 을 다스리는 일을 관장하고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이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2년(166)에 그 이름을 태수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마융전馬融傳〉에 “마융馬融계장季長이고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사람됨이 언어言語자태姿態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경적經籍에 널리 통달하여 영초永初 연간에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양가陽嘉 2년(133)에 의랑議郞에 제수되었는데, 장군將軍 양상梁商표문表文을 올려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았다가 무도태수武都太守전직轉職시켰다.
세 번 옮겨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
효경孝經》‧《논어論語》‧《》‧《》‧《상서尙書》‧삼례三禮를 달았다.
연희延熹 9년(166)에 88세의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한말漢末대사농大司農 정현鄭玄이 《노론魯論》의 편장篇章에 의거해 《제론齊論》과 《고론古論》을 참고하여 주석註釋을 내었다.
[漢末]에서 [之註]까지
○正義曰:정현鄭玄 또한 《논어論語》의 를 낸 것을 말한 것이다.
[鄭玄] 강성康成이고,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 사람으로 마융馬融사사師事하였다.
대사농大司農으로 불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집에서 기거起居하며 후생後生들을 가르쳤다.
후한後漢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이기 때문에 ‘한말漢末’이라 한 것이다.
》‧《상서尙書》‧삼례三禮‧《논어論語》‧《상서대전尙書大傳》과 오경五經위서緯書를 달고, 《모시毛詩》에 을 달고, 《모시보毛詩譜》를 지었다.
허신許愼의 《오경이의五經異義》를 공파攻破하고, 하휴何休의 《좌씨고황左氏膏肓》을 치료하고, 《공양묵수公羊墨守》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일으켰으니, 대유大儒라고 할 수 있다.
를 지을 때 《노론魯論》의 편장篇章에 의거하여 20편으로 정하고, 다시 《제론齊論》과 《고론古論》을 참교參校하여 완선完善한 것을 골라 를 내었다.
(뜻)가 같다.
근고近故(近古)에 사공司空 진군陳群태상太常 왕숙王肅박사博士 주생렬周生烈이 모두 《의설義說》을 지었다.
[近故]에서 [義說]까지
○正義曰:이것은 나라 때에 《논어論語》에 주설注說을 붙인 사람을 서술한 것이다.
연대年代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어 고인故人이 된 것이 바로 ‘근고近故’이다.
[司空] 옛 관명官名으로 삼공三公의 하나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봉상奉常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종묘宗廟예의禮儀를 관장한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6년(B.C. 144)에 그 이름을 태상太常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박사博士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고금古今을 널리 통달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위지魏志》 〈진군전陳群傳〉에 “진군陳群장문長文이고 영천潁川 허창許昌 사람이다.
태조太祖진군陳群을 초빙하여 사공서조속司空西曹屬으로 삼았다.
문제文帝가 즉위하여서는 상서복야尙書僕射승천升遷시켰고, 명제明帝가 즉위하여서는 관직官職을 올려 영음후潁陰侯하고, 얼마 뒤에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청룡靑龍 4년(236)에 죽었다.”라고 하였다.
위지魏志》 〈왕숙전王肅傳〉에 “왕숙王肅자옹子邕이고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나라 위장군태상난릉경후衛將軍太常蘭陵景侯를 역임하고 감로甘露 원년(256)에 죽었다.
상서尙書》‧《의례儀禮》 〈상복喪服〉‧《논어論語》‧《공자가어孔子家語》에 를 내고, 《모시주毛詩注》를 찬술撰述하였으며, 《성증론聖證論》을 지어 정현鄭玄을 비난하였다.”라고 하였다.
[周生烈] 돈황燉煌 사람이다.
칠록七錄》에 “문일文逸이고, 본성本姓이다.
나라의 박사博士시중侍中을 지냈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 모두 《논어의설論語義說》을 지었다.
를 지어 그 뜻을 해설解說하였기 때문에 ‘의설義說’이라 한 것이다.
전세前世에는 전수傳受사설師說에 비록 이동異同이 있어도 훈해訓解를 짓지 않았는데, 중간中間에 훈해를 지었다.
지금에 와서는 훈해가 매우 많으나, 소견이 각각 같지 않으니 서로 득실得失이 있다.
[前世]에서 [得失]까지
○正義曰:장차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으려 했기 때문에 선유先儒들의 득실得失과 〈소견이〉 같지 않은 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금세今世에서 옛날을 말할 때에 ‘전세前世’라고 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이라 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받는 것을 ‘’라 하니, 장우張禹 이상으로부터 하후승夏侯勝까지는 단지 스승의 가르침[師資]을 송설誦說(傳述解說)하기만 하고, 비록 이동異同이 있어도 모두 전주傳注훈해訓解저술著述하지 않았음을 이른다.
[中間爲之訓解]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이에 포씨包氏주씨周氏 등이 《논어훈해論語訓解》를 지은 것을 이른다.
훈해訓解를 지은 이가 20여 인이기 때문에 ‘지우금다의至于今多矣’라 한 것이다.
〈그 훈해에〉 취사取捨한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서로 득실得失이 있다.
지금 제가諸家 중에 타당한 것만을 채집採集하여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고,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상당히 많이 고치고서 책명冊名을 《논어집해論語集解》라 하였다.
[今集]에서 [集解]까지
정의왈正義曰 : 이것은 《집해集解》의 체례體例(체제體制격식格式)를 서술한 것이다.
[今] 하안何晏시대時代를 이른다.
[諸家] 공안국孔安國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진군陳群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을 이른다.
제가諸家 중에 타당한 것을 존록存錄(記載)하여 초설勦說(남의 표절剽竊하여 자기의 설로 삼음)하지 않았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각각 그 성명姓名을 기록한 것이니, 에 ‘포왈包曰’, ‘마왈馬曰’이라고 한 가 그것이다.
에는 단지 그 만을 기록했으면서 여기(敍)에 ‘이름[名]’까지 붙여 말한 것은, 그 을 드러낸 것은 그 사람을 지칭指稱[名]하기 위함이니, 이 ‘’자는 ‘(이름)’을 가리키는 ‘’자가 아니다.
[有不安者] 제가諸家의리義理에 타당하지 못함이 있음을 이른다.
[頗爲改易] 제가諸家 중에 타당한 것은 존록存錄하여 고치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것은 고친 것이 상당히 많음을 말한 것이다.
의 첫머리에 ‘포왈包曰’‧‘마왈馬曰’을 말하지 않은 곳과 제가諸家 아래에 ‘일왈一曰(일설一說에 말하기를)’이라 말한 곳은 모두 하씨何氏가 자기의 의견을 기술하여 선유先儒의 설을 개역改易한 것이다.
[名曰論語集解] 하씨何氏주해注解를 끝내고서 스스로 이 책의 표제標題로 삼은 것이다.
두씨杜氏(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를 내고서 그 책명冊名을 《집해集解》라고 한 것은 경전經傳취집聚集하여 훈해訓解를 지었음을 이른 것이고, 이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제가諸家의리義理취집聚集하여 《논어論語》를 해석解釋한 것이니,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광록대부光祿大夫 관내후關內侯 손옹孫邕, 광록대부光祿大夫 정충鄭沖, 산기상시散騎常侍 중령군中領軍 안향정후安鄕亭侯 조희曹羲, 시중侍中 순의荀顗, 상서尙書 부마도위駙馬都尉 관내후關內侯 하안何晏 등은 이 책을 올린다.
[光祿]에서 [等上]까지
○正義曰:이것은 《집해集解》를 함께 지은 사람들을 서술한 것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대부大夫논의論議관장管掌한다.
태중대부太中大夫중대부中大夫간대부諫大夫가 있는데, 모두 정원定員이 없어 많은 경우에는 수십 명에 이른다.
태초太初 원년(B.C. 104)에 중대부中大夫직명職名광록대부光祿大夫로 고치고 녹봉祿俸을 2천석千石(郡守)과 동일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인수印綬가 없고 작급爵級이 19등인 것을 ‘관내후關內侯’라 하는데, 안사고顔師古는 “관내후關內侯제후諸侯명호名號만이 있을 뿐, 국읍國邑(封地)이 없어 경기京畿에 거주한다.”라고 하였다.
[孫邕] 종유宗儒이고 낙안樂安 청주靑州 사람이다.
진서晉書》 〈정충전鄭沖傳〉에 “정충鄭沖문화文和이고 형양熒陽 개봉開封 사람이다.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탁월한 절조節操를 세우니, 문제文帝태자太子로 있을 때 문학文學에 임명하였는데, 누차 승진하여 상서랑尙書郞이 되었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진류태수陳留太守보임補任되었다.
조상曹爽이 이끌어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았는데, 산기상시散騎常侍 광록훈光祿勳으로 전직轉職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시중侍中산기중상시散騎中常侍는 모두 가관加官(본직本職 이외에 다른 관직官職을 겸임)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응소應劭는 “들어가 천자天子를 모시기 때문에 ‘시중侍中’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진작晉灼은 “ 문제文帝산기散騎중상시中常侍를 합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가관加官하는 대상은 혹은 열후列侯장군將軍경대부卿大夫장도위將都尉상서尙書태의太醫태궁령太宮令에서부터 낭중郞中까지인데, 정원定員이 없어 많은 경우에는 수십 명에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여순如淳은 “도낭장都郞將 이하를 이르는데, 열후列侯로부터 아래로 낭중郞中에 이르기까지 모두 산기散騎중상시中常侍를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시중侍中중상시中常侍금중禁中에 들어갈 수 있고, 산기散騎는 함께 승여거乘輿車(황제皇帝가 탄 수레)를 탄다.”라고 하였는데, 그 안사고顔師古는 “은 步浪反(방)이다.
말을 타고서 한산閑散하게 여거輿車를 따를 뿐, 일정한 직책職責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곳에 말한 ‘중령군中領軍’은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보이지 않는다.
[安鄕亭侯] 20개의 작급爵級에 들어있지 않으니, 한말漢末나라 때에 두었던 정후亭侯열후列侯인 듯하다.
[曹羲]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으로 나라의 종실宗室 조상曹爽의 아우이다.
[荀顗] 경천景倩으로 순욱荀彧의 아들이고 순선荀詵의 아우이다.
함희咸熙 사공司空이 되었다.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소부少府나라의 관명官名인데, 속관屬官상서尙書가 있다.
성제成帝 건시建始 4년(B.C. 29)에 처음으로 상서尙書를 설치하였는데, 정원定員이 5이다.”라고 하였다.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부마도위駙馬都尉부마駙馬를 관리한다.
무제武帝 초년初年에 설치하였는데,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 안사고顔師古는 “이니 정거正車(主車)에 메우는 말이 아닌 것을 모두 ‘부마副馬’라 한다.
일설一說에 말하기를 ‘는 가깝고 빠른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何晏] 평숙平叔이고 남양南陽 완현宛縣 사람으로 하진何進의 손자이고 하함何咸의 아들이다.
조상曹爽정권政權을 잡았을 때 하안何晏상서尙書로 삼고, 또 공주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저술著述한 것이 모두 수십 편이다.
정시正始 에 이 다섯 사람이 이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함께 올린 것이다.


역주
역주1 : 經이나 注의 뜻을 해석한 文字이다. 여기에 말한 疏는 邢昺의 《論語正義》이다.
역주2 正義 : 正確한 原義라는 뜻인데, 經史의 注疏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여기에 말한 正義는 邢昺의 《論語正義》를 이른다.
역주3 論纂 : 토론을 거쳐 편찬함이다.
역주4 微言 : 深奧하고 微妙한 말이다. 《漢書》 〈藝文志〉에 “부자께서 逝去하시자 微言이 끊어졌고, 七十弟子가 죽자 大義가 어그러졌다.[夫子沒而微言絶 七十子喪而大義乖]”는 말이 보인다.
역주5 撰定 : 編纂해 定本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주6 圓轉無窮 : 둥근 물체의 회전이 끝이 없듯이, 《論語》에 실린 言辭가 완곡하고 뜻이 함축되어 무궁한 후세에 영원히 전해진다는 뜻이다.
역주7 妄謬 : 잘못되어 도리에 맞지 않음이다.
역주8 (一)[二] : 저본에는 ‘一’로 되어있으나, 敍의 “齊論語二十二篇”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9 (朱)[宋] : 저본에는 ‘朱’로 되어있으나, 《漢書》 〈藝文志〉 및 〈蕭望之傳〉에 의거하여 ‘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乃)[及] : 저본에는 ‘乃’로 되어있으나, 沈廷芳의 《十三經注疏正字》에 의거하여 ‘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對文 : 뜻이 상반되거나 연관이 있는 辭句를 對置시켜 구성하는 문장을 이른다.
역주12 : 字數나 韻律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이 의사를 開陳하는 散文을 이른다.
역주13 靑紫 : 옛날에 三公은 자주색 인끈을 사용하고 九卿은 푸른 인끈을 사용하여 청색과 자색의 구별이 있었으므로, 전하여 公卿의 지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역주14 射策甲科 : 射策은 漢代에 人材를 선발하던 科試의 하나이다. 모든 科試에는 甲‧乙‧丙의 三科가 있었다.
역주15 (慟)[動] : 저본에는 ‘慟’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北監本과 毛本에 慟이 動으로 되어있다. 《漢書》 〈蕭望之傳〉에는 본래 慟으로 되어있는데, 顔師古가 이르기를 ‘慟은 動이다.’ 하였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動’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名)[令] : 저본에는 ‘名’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漢書》 〈百官公卿表〉에 ‘名’이 ‘令’으로 되어있다.” 한 것에 의거하여 ‘令’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 《孝經》 〈諸侯章〉에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으며, 財用을 節制하고 법도를 삼가면 가득 차도 넘치지 않으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은 것이 尊貴한 지위를 길이 지키는 방법이며,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 것이 부유한 재산을 길이 지키는 방법이다.[在上不驕 高而不危 制節謹度 滿而不溢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18 (不) : 저본에는 ‘不’자가 있으나, 阮刻本에 “《漢書》 〈張禹傳〉에는 ‘不’자가 없다.” 한 것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19 (昌)[習] : 저본에는 ‘昌’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後漢書》 〈儒林傳〉에는 ‘昌’이 ‘習’으로 되어있다.” 한 것에 의거하여 ‘習’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0 (壽)[熹] : 저본에는 ‘壽’로 되어있으나, 《後漢書》 〈馬融傳〉에 의거하여 ‘熹’로 바로잡았다.
역주21 針何休左氏膏肓……起穀梁廢疾 : 《後漢書》 〈鄭玄傳〉에 “이때 任城 사람 何休가 公羊學을 좋아하여 드디어 《公羊墨守》와 《左氏膏肓》과 《穀梁廢疾》이란 책을 지으니, 鄭玄은 墨守할 수 없는 이유를 들추어내고, 膏肓의 병을 침을 놓아 치료할 수 있고, 廢疾에서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何休가 公羊學은 義理가 深遠하여 흠잡을 곳이 없으니, 墨翟이 城을 지킨 것처럼 그 學說을 굳게 지켜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公羊墨守》를 짓고, 左氏學은 고황에 든 병처럼 고칠 수 없는 缺點이 있음을 비난하기 위해 《左氏膏肓》을 짓고, 穀梁學은 廢疾(병신이 되는 병)을 앓는 사람처럼 장애가 있음을 말하기 위해 《穀梁廢疾》을 지었는데, 鄭玄은 何休의 說을 반박하여 묵수해서는 안 됨을 드러내고, 고황의 병을 침을 놓아 치료할 수 있고, 폐질에서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古代 醫學에 脂肪으로 싸인 心臟 끝을 膏라 하고, 心臟과 膈膜 사이를 肓이라 하는데, 이곳에 병이 들면 침도 미치지 않고 藥 기운도 이르지 않아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역주22 (授)[受] : 저본에는 ‘授’로 되어있으나, 疏에 ‘上敎下曰傳 下承上曰受’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受’로 바로잡았다.

논어주소(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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