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翰林侍講學士朝請大夫守國子祭酒上柱國賜紫金魚袋臣邢昺等奉勅校定
原注
曰:案漢書藝文志云 “論語者, 孔子應答弟子‧時人, 及弟子相與言而接聞於夫子之語也.
然則夫子旣終,
已絶, 弟子恐離居已後, 各生異見, 而聖言永滅,
故相與論撰, 因採時賢及古明王之語, 合成一法, 謂之論語也.
鄭玄云 “仲弓‧子游‧子夏等
. 論者, 綸也, 輪也, 理也, 次也, 撰也.”
蘊含萬理, 故曰理也, 篇章有序, 故曰次也, 群賢集定, 故曰撰也.
鄭玄 周禮注云 “答述曰語.” 以此書所載, 皆仲尼應答弟子及時人之辭, 故曰語.
疏
常山都尉龔奮‧長信少府夏侯勝‧丞相韋賢及子玄成‧魯扶卿‧太子太傅夏侯建‧前將軍蕭望之並傳之, 各自名家.
齊論者, 齊人所傳, 別有問王‧知道二篇, 凡二十
篇. 其二十篇中, 章句頗多於魯論.
昌邑中尉王吉‧少府
畸‧琅邪王卿‧御史大夫貢禹‧尙書令五鹿充宗‧膠東庸生並傳之, 唯王吉名家.
安昌侯張禹受魯論于夏侯建, 又從庸生‧王吉受齊論, 擇善而從, 號曰張侯論, 最後而行於漢世.
鄭玄就魯論張‧包‧周之篇章, 考之齊‧古, 爲之注焉.
魏吏部尙書何晏集孔安國‧包咸‧周氏‧馬融‧鄭玄‧陳群‧王肅‧周生烈之說, 幷下己意, 爲集解, 正始中上之, 盛行於世,
漢中壘校尉劉向言魯論語二十篇은 皆孔子弟子記諸善言也라 大子大傅夏侯勝과 前將軍蕭望之와 丞相韋賢及子玄成等傳之라하니라
疏
案漢書百官公卿表云 “中壘校尉掌北軍壘門內, 外掌西域.” 顔師古曰 “掌北軍壘門之內而又外掌西域.”
劉向者, 高祖少弟楚元王之後, 辟彊之孫, 德之子.
成帝詔校經傳諸子詩賦, 每一書已, 向輒條其篇目, 撮其指意, 錄而奏之, 著別錄‧新序.
此言 “魯論語二十篇, 皆孔子弟子記諸善言也.” 蓋出於彼,
疏
太后賜錢三百萬, 爲勝素服五日, 以報師傅之恩, 儒者以爲榮.
疏
[疏]表又云 “前‧後‧左‧右將軍, 皆周末官, 秦因之, 位上卿, 金印紫綬.
漢不常置, 或有前‧後, 或有左‧右, 皆掌兵及四夷.”
好學齊詩, 事同縣后倉, 又從夏侯勝, 問論語‧禮服.
及宣帝寢疾, 選大臣可屬者, 引之禁中, 拜望之爲前將軍.
疏
[疏]表又云 “相國‧丞相, 皆秦官, 金印紫綬, 掌丞天子, 助理萬機.” 應劭曰 “丞, 承也, 相, 助也.”
孝惠‧高后置左右丞相, 文帝二年, 一丞相, 哀帝元壽二年, 更名大司徒.”
篤志於學, 兼通禮尙書, 以詩敎授, 號稱鄒魯大儒.
地節三年, 以老病乞骸骨, 賜黃金百斤, 罷歸, 加賜第一區.
少子玄成, 字少翁, 復以明經, 歷位至丞相. 鄒‧魯諺曰 ‘遺子黃金滿籝, 不如一經.’
齊論語二十二篇이니 其二十篇中에도 章句頗多於魯論이라
琅邪王卿及膠東庸生과 昌邑中尉王吉이 皆以敎授하니라
疏
齊論語凡二十二篇, 其二十篇篇名, 與魯論正同, 其篇中章句, 則頗多於魯論.
昌邑中尉者, 表云 “諸侯王, 高帝初置, 金璽盭綬, 掌治其國. 有太傅輔王, 內史治國民, 中尉掌武職, 丞相統衆官.
成帝綏和元年, 省內史, 更
相治民, 如郡太守, 中尉如郡都尉.”
疏
○正義曰:旣敍魯論‧齊論之作及傳述之人, 乃以此言結之也.
魯共王時에 嘗欲以孔子宅爲宮하야 壞타가 得古文論語하니라
疏
言魯共王時, 曾欲以孔子宅爲宮, 乃毁之, 於壁中故得此古文論語也.
初好治宮室, 壞孔子舊宅以廣其宮, 聞鍾磬琴瑟之音, 遂不敢復壞.
故漢武帝謂東方朔云 “傳曰 ‘時然後言, 人不厭其言.’”
以論語‧孝經非先王之書, 是孔子所傳說, 故謂之傳, 所以異於先王之書也.
形多頭麤尾細, 狀復團圓, 似水蟲之科斗, 故曰科斗也.
古論亦無此二篇이나 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하야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라
疏
齊論有問王‧知道, 多於魯論二篇, 所謂齊論語二十二篇也.
古論亦無此問王‧知道二篇, 非但魯論無之, 古論亦無也.
古論亦無此二篇, 而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如淳曰 “分堯曰篇後子張問 何如可以從政以下爲篇, 名曰從政. 其篇次又不與齊魯論同.” 新論云 “文異者, 四百餘字.”
安昌侯張禹本受魯論하고 兼講齊說하야 善者從之하고 號曰張侯論이라하니 爲世所貴하니라
疏
○正義曰:此言張禹擇齊‧魯論之善者從之, 爲世所重, 包‧周二氏爲章句, 訓說此張侯論語也.
成帝卽位, 徵禹以師, 賜爵關內侯給事中領尙書事.
傳又云 “始魯扶卿及夏侯勝‧王陽‧蕭望之‧韋玄成, 皆說論語, 篇第或異.
最後出而尊貴, 諸儒爲之語曰 ‘欲
爲論, 念張文.’
由是學者多從張氏, 餘家浸微.” 是其善者從之, 號曰張侯論, 爲世所貴之事.
不言名而言氏者, 蓋爲章句之時, 義在謙退, 不欲顯題其名, 但欲傳之私族, 故直云氏而已, 若杜元凱集解春秋謂之杜氏也.
或曰 “以何氏諱咸, 故沒其名, 但言包氏, 連言周氏耳.”
疏
時魯共王壞孔子舊宅, 壁中得古文虞夏商周之書及傳論語‧孝經, 悉還孔氏,
故安國承詔作書傳, 又作古文孝經傳, 亦作論語訓解.
釋詁云 “訓, 道也.” 然則道其義, 釋其理, 謂之訓解.
自此安國之後, 至後漢順帝時, 有南郡太守馬融亦爲古文論語訓說.
高帝元年, 更爲臨江郡, 五年復故. 景帝二年, 復爲臨江郡, 中二年復故, 屬荊州.”
陽嘉二年, 拜議郞, 梁商表爲從事中郞, 轉武都太守,
漢末에 大司農鄭玄就魯論篇章하야 考之齊古하야 爲之註하니라
疏
注易‧尙書‧三禮‧論語‧尙書大傳‧五經緯候, 箋毛詩, 作毛詩譜.
作注之時, 就魯論篇章, 謂二十篇也. 復考校之以齊論古論, 擇其善者而爲之註.
近故에 司空陳群과 太常王肅과 博士周生烈이 皆爲義說하니라
疏
文帝卽位, 遷尙書僕射. 明帝卽位, 進封潁陰侯, 頃之爲司空.
注尙書禮喪服論語孔子家語, 述毛詩注, 作聖證論難鄭玄.” 周生烈,
前世傳
師說
에 雖有異同
이라도 不爲訓解
러니 中間爲之訓解
라
疏
○正義曰:將作論語集解, 故須言先儒有得失不同之說也.
上敎下曰傳, 下承上曰受, 謂張禹以上至夏侯勝以來, 但師資誦說而已, 雖說有異者同者, 皆不著篇簡以爲傳注訓解.
中間爲之訓解, 謂自古至今中間, 包氏周氏等爲此論語訓解,
今集諸家之善하야 記其姓名하고 有不安者면 頗爲改易하고 名曰論語集解라하니라
疏
諸家謂孔安國‧包咸‧周氏‧馬融‧鄭玄‧陳群‧王肅‧周生烈也.
注但記其姓, 而此連言名者, 以著其姓所以名其人. 非謂名字之名也.
頗爲改易者. 言諸家之善則存而不改, 其不善者頗多爲改易之.
注首不言包曰‧馬曰, 及諸家說下言一曰者, 皆是何氏自下己言, 改易先儒者也.
杜氏注春秋左氏傳, 謂之集解者, 謂聚集經傳爲之作解也. 此乃聚集諸家義理, 以解論語, 言同而意異也.
光祿大夫關內侯臣孫邕 光祿大夫臣鄭沖 散騎常侍中領軍安鄕亭侯臣曹羲 侍中臣荀顗 尙書駙馬都尉關內侯臣何晏等上하노라
疏
有太中大夫‧中大夫‧諫大夫, 皆無員, 多至數十人.
太初元年, 更名中大夫爲光祿大夫, 秩比二千石光祿.”
無印綬, 爵級十九曰關內侯. 顔師古曰 “言有侯號而居京畿, 無國邑.”
起自寒微,卓爾立操. 魏文帝爲太子, 命爲文學, 累遷尙書郞, 出補陳留大守.
表又云 “侍中‧散騎中常侍, 皆加官.” 應劭曰 “入侍天子, 故曰侍中.” 晉灼曰 “魏文帝合散騎‧中常侍, 爲散騎常侍也.”
又曰 “所加, 或列侯‧將軍‧卿大夫‧將都尉‧尙書‧太醫‧太宮令, 至郞中, 亡員, 多至數十人.”
如淳曰 “將, 謂都郞將以下也, 自列侯, 下至郞中, 皆得有散騎及中常侍也.”
又曰 “侍中‧中常侍, 得入禁中, 散騎, 並乘輿車.” 顔師古曰 “並音步浪反.
安鄕亭侯者, 不在爵級二十之數, 蓋漢末及魏置亭侯‧列侯之倫也.
武帝初置, 秩比二千石.” 顔師古曰 “駙, 副也, 非正駕車, 皆爲副馬.
何晏 字平叔, 南陽宛人也. 何進之孫, 咸之子.
原注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조청대부朝請大夫 수국자좨주守國子祭酒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형병邢昺 등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교정校定하였다.
原注
정의왈正義曰:《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고찰하건대 “《논어論語》는 공자孔子께서 제자弟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應答하신 말씀과 부자夫子께 직접 들은 말씀을 제자들이 서로 말한 것들을 〈수록한 것이다.〉
당시에 제자들이 각기 기록해두었던 것을 부자께서 별세하신 뒤에 문인들이 함께 그 기록들을 수집收輯하여 논찬論纂하였다.
그러므로 책명冊名을 《논어論語》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자夫子께서 별세하신 뒤에 미언微言이 이미 끊어졌으니, 제자들이 서로 헤어진 뒤에 각각 이견異見이 생겨 성인聖人의 말씀이 영원히 멸절滅絶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논찬論撰하면서 당시의 현인賢人 및 옛 명왕明王들의 말을 뽑아 모아 하나의 법法으로 만들고서 이를 《논어論語》라 한 것이다.
정현鄭玄은 “중궁仲弓‧자유子游‧자하子夏 등이 찬정撰定한 것인데, 논論은 윤綸‧윤輪‧이理‧차次‧찬撰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책으로 세상일을 경륜經綸할 수 있기 때문에 ‘윤綸’이라 하고, 원전圓轉(완곡 함축)이 무궁無窮하기 때문에 ‘윤輪’이라 하고,
온갖 이치를 온축蘊蓄하였기 때문에 ‘이理’라 하고, 편장篇章에 순서가 있기 때문에 ‘차次’라 하고, 여러 현인賢人들이 모여 찬정撰定하였기 때문에 ‘찬撰’이라 한 것이다.
정현鄭玄의 《주례주周禮注》에 “답술答述을 어語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책에 실린 것이 모두 중니仲尼께서 제자 및 당시 사람들의 물음에 응답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語’라 한 것이다.
‘어語’자를 ‘논論’자 아래에 놓은 것은 반드시 논찬論撰을 거친 뒤에 그 말씀을 기재記載하여 망류妄謬가 없음을 보인 것이다.
《논어論語》는 입으로 서로 전수傳授하였기 때문에 분서焚書의 난亂을 거치고도 홀로 보존되었다.
疏
한漢나라가 건국된 뒤에 《논어論語》를 전傳한 학파學派가 셋이 있었다.
《노논어魯論語》는 노인魯人이 전한 것으로 바로 지금 통행하는 편차篇次가 그것이다.
상산도위常山都尉 공분龔奮, 장신소부長信少府 하후승夏侯勝, 승상丞相 위현韋賢과 그 아들 위현성韋玄成, 노인魯人 부경扶卿, 태자태부太子太傅 하후건夏侯建, 전장군前將軍 소망지蕭望之가 모두 《노논어魯論語》를 전하여 각각 명가名家가 되었다.
《제논어齊論語》는 제인齊人이 전한 것으로 별도로 〈문왕問王〉과 〈지도知道〉 두 편이 있으니 모두 22편이고, 그 20편 중에도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자못 많다.
창읍중위昌邑中尉 왕길王吉, 소부少府 송기宋畸, 낭야琅邪 왕경王卿, 어사대부御史大夫 공우貢禹, 상서령尙書令 오록충종五鹿充宗, 교동膠東 용생庸生이 모두 《제논어齊論語》를 전하였으나, 유독 왕길王吉만이 명가가 되었다.
《고논어古論語》는 공씨孔氏의 벽중壁中에서 나왔는데, 모두 21편이다.
두 〈자장子張〉편이 있고, 편차編次도 제齊‧노魯의 《논어論語》와 같지 않다.
공안국孔安國이 전傳을 내고, 후한後漢 마융馬融이 주注를 달았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는 하후건夏侯建에게 《노논어魯論語》를 수학受學하고 또 용생庸生과 왕길王吉에게 《제논어齊論語》를 수학하고서 좋은 것을 선택해 책으로 엮어 ‘《장후론張侯論》’이라 하였는데, 이 책은 가장 뒤에 나와 한漢나라 때에 유행하였다.
장우張禹는 이 《논어論語》를 성제成帝에게 전수하였다.
후한後漢 때 포함包咸과 주씨周氏가 모두 장구章句(注釋)를 붙여 학관學官(學校)에 배치하였다.
정현鄭玄이 장우張禹‧포함包咸‧주씨周氏가 정한 《노논어魯論語》의 편장篇章에 의거하고 《제논어齊論語》와 《고논어古論語》를 참고하여 주석을 붙였다.
위魏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하안何晏이 공안국孔安國‧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진군陳群‧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 등의 설說을 모으고 자기의 견해를 붙여 《집해集解》를 만들어 정시正始 연간에 조정朝廷에 올렸는데,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서序’는 하안何晏이 훈설訓說을 전수한 사람과 자신이 《집해集解》를 지은 뜻을 차례로 서술한 것이다.
서序는 《논어論語》를 위해 지었기 때문에 〈논어서論語序〉라 한 것이다.
한漢나라 중루교위中壘校尉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노논어魯論語》 20편은 모두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선언善言을 기록한 것인데, 태자태부太子太傅 하후승夏侯勝, 전장군前將軍 소망지蕭望之, 승상丞相 위현韋賢과 그의 아들 위현성韋玄成 등이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疏
○正義曰:이것은 《노론魯論》이 지어진 배경과 전수傳授한 사람을 서술敍述한 것이다.
‘서敍’는 ‘서序’와 음音과 의義(뜻)가 같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를 고찰하건대 “중루교위中壘校尉는 북군北軍의 누문壘門(軍門) 안을 관장하고, 밖으로 서역西域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북군北軍의 누문壘門 안의 일을 관장하고 또 밖으로 서역西域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다.
유향劉向은 한漢 고조高祖의 아우 초楚 원왕元王의 후예後裔로 벽강辟彊의 손자이고 덕德의 아들이다.
자字는 자정子政이고 본명本名은 갱생更生이었는데, 성제成帝가 즉위한 뒤에 이름을 ‘향向’으로 바꾸었다.
자주 상소上疏하여 득실得失을 말하니, 성제成帝가 유향劉向을 중루교위中壘校尉로 삼았다.
유향劉向은 사람됨이 대범하고 까다롭지 않아[簡易] 오로지 경학經學만을 깊이 연구하였다.
성제成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경전經傳과 제자諸子 및 시부詩賦를 교감校勘하게 하니, 한 책의 교감을 마칠 때마다 유향劉向은 번번이 그 책의 편목篇目을 조목별로 나누어 열기列記하고 그 뜻을 요약해 기록하여 상주上奏하고서 《별록別錄》과 《신서新序》를 지었다.
이 서敍에 “《노논어魯論語》 20편은 모두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선언善言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유향劉向에게서 나온 것인 듯하다.
대문對文에는 직접 말하는 것을 ‘언言’이라 하고, 대답하는 것을 ‘어語’라 하지만, 산문散文에는 ‘언言’과 ‘어語’를 통용通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부자夫子의 말씀[語]을 논論하면서 ‘선언善言’이라고 한 것이다.
疏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태자태부太子太傅는 고대古代의 관명官名으로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하후승전夏侯勝傳〉에 “하후승夏侯勝은 자字가 장공長公이고 동평인東平人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예복禮服(喪服)에 대해 강설講說을 잘하니, 조정이 불러들여 박사博士로 삼았다.
〈곽광郭光과 장안세張安世가 창읍왕昌邑王을 폐출廢黜하고〉 선제宣帝를 세우고는, 〈곽광郭光은 ‘군신群臣이 동궁東宮(太后)에게 정사政事를 주달奏達하고 태후가 정사를 살피니, 응당 경술經術(經學)을 알아야 한다.’고 여겨, 태후께 아뢰어〉 하후승夏侯勝으로 하여금 태후에게 《상서尙書》를 가르치게 하였다.
장신소부長信少府로 승천升遷하였으나 묘악廟樂을 의논한 일에 연좌되어 옥獄에 갇혀 두 해 겨울을 보냈다.
사면을 받고 출사出仕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선제宣帝는 하후승夏侯勝이 본디 잘못이 없었음을 알고서 다시 장신소부長信少府로 삼았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승천升遷시켰다.
하후승夏侯勝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상서尙書》와 《논어論語》의 주설注說을 지으니, 황금黃金 100근斤을 하사하였다.
나이 90세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죽으니, 나라에서 묘지墓地를 내려 평릉平陵에 장사 지냈다.
태후가 300만 전錢을 내리고 하후승夏侯勝을 위하여 5일 동안 소복素服을 입어 사부師傅의 은혜에 보답하니, 유자儒者들이 이를 영예榮譽로 여겼다.
당초에 하후승夏侯勝은 경전經傳을 강설講說하여 전수傳授할 때마다 항상 제생諸生들에게 ‘선비는 경술經術에 밝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한다.
경술이 밝아지면 청자靑紫(公卿)를 취하는 것이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쉽다.
경經을 배우고도 경술에 밝지 못하면 〈학문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는 것이 낫다.’고 했다.” 하였다.
疏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전장군前將軍‧후장군後將軍‧좌장군左將軍‧우장군右將軍은 모두 주周나라 말기의 관명官名인데, 진秦나라가 그 관명官名을 그대로 인습하였으니, 지위는 상경上卿이고 자주색 인끈으로 꿴 황금인장黃金印章을 찼다.
한漢나라는 이 관직을 항상 두지 않고, 혹은 전前‧후後의 장군만을 두기도 하고 혹은 좌左‧우右의 장군만을 두기도 하였는데, 모두 병사兵事와 사이四夷의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에 “소망지蕭望之는 자字가 장천長倩이고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제시齊詩》 배우기를 좋아하여 동현同縣의 후창后倉을 사사師事하고, 또 하후승夏侯勝에게 《논어論語》와 예복禮服을 물었다.
사책射策해 갑과甲科에 합격하여 낭郞이 되고, 누차 승진하여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뒤에 병길丙吉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좌천左遷되었다.
선제宣帝가 병이 깊어 대신大臣 중에 후사後事를 부탁할 만한 자들을 선발해 궁중宮中으로 불러들일 때에 미쳐 소망지蕭望之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았다.
원제元帝가 즉위한 뒤에 환시宦侍 홍공弘恭‧석현石顯 등의 박해를 받아 짐독鴆毒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천자天子는 그가 죽었단 말을 듣고 놀라 손을 치며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리니 애통해하는 모습이 좌우를 감동시켰다.
장자長子 소급蕭伋이 뒤를 이어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疏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상국相國과 승상丞相은 모두 진秦나라의 관명官名인데 모두 자주색 인끈으로 꿴 황금인장黃金印章을 차고서, 천자天子를 받들어 모시며 정무政務를 보좌輔佐해 처리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는데, 응소應劭의 주注에 “승丞은 승承(받듦)이고, 상相은 조助(도움)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진秦나라는 좌左‧우右의 승상丞相을 두었으나, 한漢나라는 고제高帝가 즉위하면서부터 한 승상만을 두었다.
고제高帝 11년(B.C. 196)에 이름을 상국相國으로 바꾸고서 녹색綠色의 인끈을 사용하게 하였다.
효혜제孝惠帝와 고후高后 때에 좌‧우의 승상을 두었는데, 문제文帝 2년(B.C. 178)에 다시 한 승상만을 두었고,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B.C. 1)에 이름을 대사도大司徒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위현전韋賢傳〉에 “위현韋賢은 자字가 장유長孺이고 노魯나라 추현鄒縣 사람이다.
위현韋賢은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욕심이 적었다.
학문에 전념하여 《예禮》와 《상서尙書》에 정통精通하고 학도學徒에게 《시詩》를 가르치니, 사람들은 그를 ‘추로대유鄒魯大儒’라고 호칭하였다.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가 박사博士‧급사중給事中이 되어 소제昭帝에게 나아가 《시詩》를 가르쳤고, 점차 승진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다.
선제宣帝가 즉위하여서는 선제先帝의 사부師傅라 하여 매우 존경하였다.
본시本始 3년(B.C. 71)에 채의蔡義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고, 부양후扶陽侯에 봉封해졌다.
이때 위현韋賢의 나이 70여 세이고, 승상이 된 지 5년이었다.
지절地節 3년(B.C. 67)에 늙어서 질병이 많다는 이유로 사직辭職을 청하니 황금黃金 100근斤을 하사下賜하고 물러나 돌아가게 하고는 가옥家屋 한 채를 내렸다.
승상이 치사致仕하는 일은 위현韋賢으로부터 비롯하였다.
82세에 죽으니, ‘절후節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위현韋賢의 막내아들 위현성韋玄成은 자字가 소옹少翁인데, 그도 명경明經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승상의 지위에 오르니, 추鄒‧노魯의 속담에 ‘자식에게 황금黃金을 광주리 가득 물려주는 것이 한 경전經傳을 물려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생겼다.
위현성韋玄成이 승상이 된 지 7년째 되는 건소建昭 3년(B.C. 36)에 죽으니, ‘공후共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네 사람은 모두 《노논어魯論語》를 전하였다.
《제논어齊論語》는 22편인데, 그 20편 중에도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자못 많다.
낭야琅邪 왕경王卿과 교동膠東 용생庸生과 창읍중위昌邑中尉 왕길王吉이 모두 《제논어齊論語》로써 학도學徒들을 가르쳤다.
疏
○正義曰:이것은 《제논어齊論語》가 지어진 배경과 전수傳授한 사람을 서술敍述한 것이다.
《제논어齊論語》는 모두 22편인데, 그 20편의 편명篇名은 《노논어魯論語》의 편명과 같으나, 그 편篇 안에 장구章句가 《노논어魯論語》보다 매우 많다.
편篇은 장章이 쌓여 이루어지니, 편篇은 변徧(많은 사항을 두루 취取하여 책冊으로 엮음)이다.
감정을 표출表出해 사실을 서술하되 명확하게 기술하여 변徧(篇)을 이룬다는 말이다.
구句가 쌓여 장章을 이루니, 장章은 명明(밝힘)이다.
구句는 반드시 글자를 연결하여 말을 만드니, 구句는 국局이다.
글자를 연결하여 경계를 나누어 말을 국한局限하는 것이다.
왕경王卿은 천한天漢 원년元年(B.C. 100)에 제남태수濟南太守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용생庸生은 이름이 담譚이니, 생生은 아마도 옛날에 유덕자有德者를 지칭하는 말이었던 듯하다.
창읍중위昌邑中尉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제후왕諸侯王은 고제高帝가 처음 설치하고서 황금 인새印璽와 황록색 수대綬帶를 주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그 밑에 왕王을 보필하는 태부太傅, 국민을 다스리는 내사內史, 무관武官을 맡아 다스리는 중위中尉, 중관衆官을 통솔하는 승상丞相이 있었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B.C. 145)에 승상의 명칭을 ‘상相’으로 바꾸었다.
성제成帝 수화綏和 원년元年(B.C. 9)에 내사內史를 없애고 다시 상相으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상相은 군郡의 태수太守와 같고, 중위中尉는 군郡의 도위都尉와 같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왕길王吉은 자字가 자양子陽이고 낭야琅邪 고우臯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술經術에 밝았다.
군리郡吏로서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낭郞이 되어, 약로우승若盧右丞에 보임補任되었다가 형양령熒陽令으로 승차陞差하였다.
현량賢良에 천거되어 창읍昌邑의 중위中尉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세 사람은 모두 《제논어齊論語》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노논어魯論語》와 《제논어齊論語》가 있게 되었다.
疏
○正義曰:이미 《노논어魯論語》와 《제논어齊論語》가 지어진 배경과 전술傳述한 사람을 서술하고서 이 말로 종결終結한 것이다.
노공왕魯共王 때에 일찍이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에 궁전宮殿을 지으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허물다가 《고문논어古文論語》를 얻었다.
疏
○正義曰:이것은 《고론古論》을 얻게 된 연유를 서술한 것이다.
노공왕魯共王 때에 일찍이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에 궁전宮殿을 지으려고 구택을 철거하다가 벽壁 속에서 이 《고문논어古文論語》를 얻었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경십삼왕전景十三王傳〉에 “노공왕魯共王 유여劉餘는 경제景帝의 아들로 정희程姬의 소생이다.
효경제孝景帝 전원前元 2년(B.C. 155)에 회양왕淮陽王으로 봉해졌다가 전원前元 3년(B.C. 154)에 노왕魯王으로 옮겼다.
왕王에 봉해진 지 28년이 되던 해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공왕共王이라 하였다.
공왕共王은 본래 궁실宮室을 짓기 좋아하여, 궁실을 확장하기 위해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철거하다가 종경鍾磬과 금슬琴瑟 소리를 듣고서 감히 더 이상 철거하지 못하였다.
벽壁 속에서 고문古文으로 쓰인 경經과 전傳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전傳이라 한 것이다.
한漢 무제武帝가 동방삭東方朔에게 이르기를 “전傳(《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때가 된 뒤에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라고 하였고,
또 성제成帝가 적방진翟方進에게 준 책서策書에 “전傳(《효경孝經》 〈제후장諸侯章〉)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은 것이 존귀尊貴한 지위를 길이 지키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이에서 한漢나라 때는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모두 ‘전傳’으로 칭한 것을 알 수 있다.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은 선왕先王의 서적書籍이 아니고 공자孔子가 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전傳’이라 이른 것이니, 선왕의 서적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고문古文’은 과두서科斗書(蝌蚪文字)이니, 이른바 ‘창힐倉頡(蒼頡)의 본체本體’이다.
주周나라 때 사용하던 문자로 지금은 아는 이가 없다.
이 문자는 고인古人이 만든 것이므로 ‘고문古文’이라고 칭한 것이다.
자형字形이 대체로 머리는 크고 꼬리는 가늘며 모양이 둥글어 수충水蟲인 과두科斗(올챙이)와 같기 때문에 ‘과두科斗’라 한 것이다.
《제론齊論》에는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론魯論》보다 두 편이 더 많다.
《고론古論》에도 이 두 편이 없으나 〈요왈堯曰〉편 하장下章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서 두 〈자장子張〉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다.
편차篇次도 《제론齊論》‧《노론魯論》과 같지 않다.
疏
○正義曰:이것은 3종種 《논어論語》의 편장篇章의 다름을 분변한 것이다.
《제론齊論》에는 〈문왕問王〉편과 〈지도知道〉편이 있어 《노론魯論》보다 두 편이 더 많으니, 이른바 ‘《제논어齊論語》는 22편’이란 것이다.
《고론古論》에도 이 〈문왕問王〉과 〈지도知道〉 두 편이 없으니, 《노론魯論》에만 이 두 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론古論》에도 없다.
《고론古論》에도 이 두 편이 없으나, 〈요왈堯曰〉편 하장下章의 ‘자장문子張問’을 나누어 한 편으로 만들어서 두 〈자장子張〉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다.
여순如淳은 “〈요왈堯曰〉편 후미의 ‘자장문子張問 하여가이종정何如可以從政’ 이하를 나누어 한 편으로 만들고서 편명篇名을 〈종정從政〉이라 하였는데, 그 편차篇次도 《제론齊論》‧《노론魯論》과 같지 않다.”고 하였고,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 “글자가 다른 것이 400여 자이다.”라고 하였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는 본래 《노론魯論》을 수학受學하였는데, 제설齊說(《齊論》)까지 겸강兼講하여 완선完善한 것을 취해 책으로 엮고 《장후론張侯論》이라 칭하니, 세상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다.
疏
○正義曰:이것은 장우張禹가 《제론齊論》과 《노론魯論》에서 완선完善한 것을 취해 책으로 엮어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은 일과, 포씨包氏와 주씨周氏가 장章을 나누고 구句를 끊어 이 《장후논어張侯論語》를 훈설訓說(訓解)한 것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 〈장우전張禹傳〉에 “장우張禹는 자字가 자문子文이고, 하내河內 지현軹縣 사람이다.
패군沛郡 시수施讎에게 《역易》을 배우고, 왕양王陽(王吉)과 용생庸生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배운 것을 다 밝게 익힌 뒤에 천거薦擧로 군문학郡文學이 되었고, 오랜 뒤에 시험에 응시하여 박사博士가 되었다.
초원初元 중中에 황태자皇太子를 세우고서 장우張禹로 하여금 태자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천升遷하였고, 몇 해 뒤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동평내사東平內史가 되었다.
성제成帝가 즉위하여 장우張禹를 불러들여 사부師傅로 삼고서 관내후關內侯의 작위爵位를 내리고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상서尙書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하평河平 4년(B.C. 25)에 왕상王商의 뒤를 이어 승상丞相이 되고 안창후安昌侯에 봉封해졌다.
승상이 된 지 6년째 되던 해에 사직辭職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건평建平 2년(B.C. 5)에 죽으니 ‘절후節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라고 하였다.
장우張禹는 본래 하후건夏侯建에게 《노론魯論》을 수학受學하였는데, 또 용생庸生과 왕길王吉에게 《제론齊論》을 수학하였다.
그러므로 제설齊說(《齊論》)까지 겸강兼講한 것이다.
〈장우전張禹傳〉에 또 “당초에 노인魯人 부경扶卿 및 하후승夏侯勝‧왕양王陽‧소망지蕭望之‧위현성韋玄成 등이 모두 《논어論語》를 해설解說하였는데, 편차篇次가 조금 달랐다.
장우張禹는 먼저 왕양王陽(王吉)을 사사師事하고 뒤에 용생庸生에게 수학하고서 소안所安(타당하고 완전히 좋은 것)만을 채록採錄하였다.
가장 뒤에 나온 책이어서 존귀尊貴하게 여겨져서 제유諸儒들이 ‘《논어論語》를 배우려면 장우張禹의 글을 염송念誦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學者들이 장씨張氏의 《논어論語》를 취하니, 나머지 사람들의 《논어論語》는 점차 쇠미衰微해졌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완선完善한 것만을 취해 《장후론張侯論》이라 칭하니, 세상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유림전儒林傳〉에 “포함包咸은 자字가 자량子良이고, 회계會稽 곡아曲阿 사람이다.
소년少年 때 제생諸生이 되어 《노시魯詩》와 《논어論語》를 학습하여,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에 제수되었다.
건무建武 중中에 황궁皇宮으로 들어가 황태자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고, 또 《논어장구論語章句》를 지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가 영평永平 5년(62)에 대홍려大鴻臚로 승천升遷하였다.”라고 하였다.
[章句] 글에 단락을 지어 훈해訓解한 것을 이르는 명칭이다.
포씨包氏와 주씨周氏는 《장후론張侯論》에 장구章句를 정定하고 훈해訓解하여 그 의리義理를 드러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씨氏만을 말한 것은 아마도 장구를 정할 때에 겸양의 뜻으로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 장구를 일족一族에게만 전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 씨氏만을 말한 것인 듯하니, 두원개杜元凱(杜預)가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를 짓고서 ‘두씨杜氏’라고 한 것과 같다.
혹자或者는 “하씨何氏(何晏)는 〈아버지의 이름이 함咸이므로〉 ‘함咸’을 휘諱하여 포함包咸의 이름은 쓰지 않고 다만 ‘포씨包氏’라고만 말하였기 때문에 〈주씨周氏까지 이름을 말하지 않고〉 연이어 주씨周氏라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고론古論》은 오직 박사博士 공안국孔安國만이 훈해訓解를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 남군태수南郡太守 마융馬融이 또 《고론古論》의 훈설訓說을 지었다.
疏
○正義曰:이것은 《고문논어古文論語》를 훈설訓說한 사람을 서술한 것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안국孔安國은 공자孔子의 11세손으로 한漢 무제武帝 때의 박사博士였다.
이때 노공왕魯共王이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철거撤去하다가 벽壁 속에서 고문古文으로 된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 및 《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의 전傳을 얻었는데, 이 서적書籍들을 모두 공씨孔氏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공안국孔安國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서전書傳》을 짓고, 또 《고문효경전古文孝經傳》과 《논어훈해論語訓解》를 지었다.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훈訓은 도道(일러줌)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뜻을 일러주고 그 이치를 해석하는 것을 ‘훈해訓解’라 한다.
전술傳述하는 것을 ‘전傳’이라 하고, 이치를 해석하는 것을 ‘훈해訓解’라 하지만 실상은 하나이다.
무제武帝 말년에 무고옥사巫蠱獄事를 만나서 경적經籍의 길이 종식終熄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다.
공안국孔安國이 죽은 뒤로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에 이르러 남군태수南郡太守 마융馬融이 또 《고문논어훈설古文論語訓說》을 지었다.
《후한서後漢書》 〈효순황제기孝順皇帝紀〉를 고찰하건대 “효순황제孝順皇帝는 휘諱가 보保이니 안제安帝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군南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한 고을이다.
고제高帝 원년元年(B.C. 206)에 군명郡名을 임강군臨江郡으로 바꾸었다가 5년에 옛 이름으로 회복시켰고, 경제景帝 2년(B.C. 155)에 다시 임강군臨江郡으로 바꾸었다가, 중원中元 2년(B.C. 148)에 옛 이름으로 회복시키고 형주荊州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군수郡守는 진秦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그 군郡을 다스리는 일을 관장하고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이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2년(166)에 그 이름을 태수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마융전馬融傳〉에 “마융馬融은 자字가 계장季長이고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사람됨이 언어言語와 자태姿態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경적經籍에 널리 통달하여 영초永初 연간에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양가陽嘉 2년(133)에 의랑議郞에 제수되었는데, 장군將軍 양상梁商이 표문表文을 올려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았다가 무도태수武都太守로 전직轉職시켰다.
《효경孝經》‧《논어論語》‧《시詩》‧《역易》‧《상서尙書》‧삼례三禮에 주注를 달았다.
연희延熹 9년(166)에 88세의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한말漢末에 대사농大司農 정현鄭玄이 《노론魯論》의 편장篇章에 의거해 《제론齊論》과 《고론古論》을 참고하여 주석註釋을 내었다.
疏
○正義曰:정현鄭玄 또한 《논어論語》의 주注를 낸 것을 말한 것이다.
[鄭玄] 자字가 강성康成이고,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 사람으로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하였다.
대사농大司農으로 불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집에서 기거起居하며 후생後生들을 가르쳤다.
후한後漢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이기 때문에 ‘한말漢末’이라 한 것이다.
《역易》‧《상서尙書》‧삼례三禮‧《논어論語》‧《상서대전尙書大傳》과 오경五經의 위서緯書에 주注를 달고, 《모시毛詩》에 전箋을 달고, 《모시보毛詩譜》를 지었다.
허신許愼의 《오경이의五經異義》를 공파攻破하고, 하휴何休의 《좌씨고황左氏膏肓》을 치료하고, 《공양묵수公羊墨守》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일으켰으니, 대유大儒라고 할 수 있다.
주注를 지을 때 《노론魯論》의 편장篇章에 의거하여 20편으로 정하고, 다시 《제론齊論》과 《고론古論》을 참교參校하여 완선完善한 것을 골라 주註를 내었다.
근고近故(近古)에 사공司空 진군陳群‧태상太常 왕숙王肅‧박사博士 주생렬周生烈이 모두 《의설義說》을 지었다.
疏
○正義曰:이것은 위魏나라 때에 《논어論語》에 주설注說을 붙인 사람을 서술한 것이다.
연대年代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어 고인故人이 된 것이 바로 ‘근고近故’이다.
[司空] 옛 관명官名으로 삼공三公의 하나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봉상奉常은 진秦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종묘宗廟의 예의禮儀를 관장한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6년(B.C. 144)에 그 이름을 태상太常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박사博士는 진秦나라 때의 관명官名인데, 고금古今을 널리 통달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위지魏志》 〈진군전陳群傳〉에 “진군陳群은 자字가 장문長文이고 영천潁川 허창許昌 사람이다.
태조太祖가 진군陳群을 초빙하여 사공서조속司空西曹屬으로 삼았다.
문제文帝가 즉위하여서는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승천升遷시켰고, 명제明帝가 즉위하여서는 관직官職을 올려 영음후潁陰侯에 봉封하고, 얼마 뒤에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청룡靑龍 4년(236)에 죽었다.”라고 하였다.
《위지魏志》 〈왕숙전王肅傳〉에 “왕숙王肅은 자字가 자옹子邕이고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이다.
위魏나라 위장군태상난릉경후衛將軍太常蘭陵景侯를 역임하고 감로甘露 원년(256)에 죽었다.
《상서尙書》‧《의례儀禮》 〈상복喪服〉‧《논어論語》‧《공자가어孔子家語》에 주注를 내고, 《모시주毛詩注》를 찬술撰述하였으며, 《성증론聖證論》을 지어 정현鄭玄을 비난하였다.”라고 하였다.
《칠록七錄》에 “자字는 문일文逸이고, 본성本姓은 당唐이다.
위魏나라의 박사博士와 시중侍中을 지냈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 모두 《논어의설論語義說》을 지었다.
주注를 지어 그 뜻을 해설解說하였기 때문에 ‘의설義說’이라 한 것이다.
전세前世에는 전수傳受한 사설師說에 비록 이동異同이 있어도 훈해訓解를 짓지 않았는데, 중간中間에 훈해를 지었다.
지금에 와서는 훈해가 매우 많으나, 소견이 각각 같지 않으니 서로 득실得失이 있다.
疏
○正義曰:장차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지으려 했기 때문에 선유先儒들의 득실得失과 〈소견이〉 같지 않은 설說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금세今世에서 옛날을 말할 때에 ‘전세前世’라고 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전傳’이라 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받는 것을 ‘수受’라 하니, 장우張禹 이상으로부터 하후승夏侯勝까지는 단지 스승의 가르침[師資]을 송설誦說(傳述解說)하기만 하고, 비록 이동異同이 있어도 모두 전주傳注나 훈해訓解를 저술著述하지 않았음을 이른다.
[中間爲之訓解]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이에 포씨包氏‧주씨周氏 등이 《논어훈해論語訓解》를 지은 것을 이른다.
훈해訓解를 지은 이가 20여 인이기 때문에 ‘지우금다의至于今多矣’라 한 것이다.
〈그 훈해에〉 취사取捨한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서로 득실得失이 있다.
지금 제가諸家의 설說 중에 타당한 것만을 채집採集하여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고,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상당히 많이 고치고서 책명冊名을 《논어집해論語集解》라 하였다.
疏
○정의왈正義曰 : 이것은 《집해集解》의 체례體例(체제體制의 격식格式)를 서술한 것이다.
[諸家] 공안국孔安國‧포함包咸‧주씨周氏‧마융馬融‧정현鄭玄‧진군陳群‧왕숙王肅‧주생렬周生烈을 이른다.
제가諸家의 설說 중에 타당한 것을 존록存錄(記載)하여 초설勦說(남의 설說을 표절剽竊하여 자기의 설로 삼음)하지 않았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각각 그 성명姓名을 기록한 것이니, 주注에 ‘포왈包曰’, ‘마왈馬曰’이라고 한 유類가 그것이다.
주注에는 단지 그 성姓만을 기록했으면서 여기(敍)에 ‘이름[名]’까지 붙여 말한 것은, 그 성姓을 드러낸 것은 그 사람을 지칭指稱[名]하기 위함이니, 이 ‘명名’자는 ‘명名(이름)’을 가리키는 ‘명名’자가 아니다.
[有不安者] 제가諸家의 설說이 의리義理에 타당하지 못함이 있음을 이른다.
[頗爲改易] 제가諸家의 설說 중에 타당한 것은 존록存錄하여 고치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것은 고친 것이 상당히 많음을 말한 것이다.
주注의 첫머리에 ‘포왈包曰’‧‘마왈馬曰’을 말하지 않은 곳과 제가諸家의 설說 아래에 ‘일왈一曰(일설一說에 말하기를)’이라 말한 곳은 모두 하씨何氏가 자기의 의견을 기술하여 선유先儒의 설을 개역改易한 것이다.
[名曰論語集解] 하씨何氏가 주해注解를 끝내고서 스스로 이 책의 표제標題로 삼은 것이다.
두씨杜氏(杜預)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주注를 내고서 그 책명冊名을 《집해集解》라고 한 것은 경전經傳을 취집聚集하여 훈해訓解를 지었음을 이른 것이고, 이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제가諸家의 의리義理를 취집聚集하여 《논어論語》를 해석解釋한 것이니,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광록대부光祿大夫 관내후關內侯 신臣 손옹孫邕, 광록대부光祿大夫 신臣 정충鄭沖, 산기상시散騎常侍 중령군中領軍 안향정후安鄕亭侯 신臣 조희曹羲, 시중侍中 신臣 순의荀顗, 상서尙書 부마도위駙馬都尉 관내후關內侯 신臣 하안何晏 등은 이 책을 올린다.
疏
○正義曰:이것은 《집해集解》를 함께 지은 사람들을 서술한 것이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대부大夫는 논의論議를 관장管掌한다.
태중대부太中大夫‧중대부中大夫‧간대부諫大夫가 있는데, 모두 정원定員이 없어 많은 경우에는 수십 명에 이른다.
태초太初 원년(B.C. 104)에 중대부中大夫의 직명職名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고치고 녹봉祿俸을 2천석千石(郡守)과 동일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인수印綬가 없고 작급爵級이 19등인 것을 ‘관내후關內侯’라 하는데, 안사고顔師古는 “관내후關內侯는 제후諸侯의 명호名號만이 있을 뿐, 국읍國邑(封地)이 없어 경기京畿에 거주한다.”라고 하였다.
[孫邕] 자字가 종유宗儒이고 낙안樂安 청주靑州 사람이다.
《진서晉書》 〈정충전鄭沖傳〉에 “정충鄭沖은 자字가 문화文和이고 형양熒陽 개봉開封 사람이다.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탁월한 절조節操를 세우니, 위魏 문제文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문학文學에 임명하였는데, 누차 승진하여 상서랑尙書郞이 되었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진류태수陳留太守에 보임補任되었다.
조상曹爽이 이끌어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았는데, 산기상시散騎常侍 광록훈光祿勳으로 전직轉職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시중侍中과 산기중상시散騎中常侍는 모두 가관加官(본직本職 이외에 다른 관직官職을 겸임)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응소應劭는 “들어가 천자天子를 모시기 때문에 ‘시중侍中’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진작晉灼은 “위魏 문제文帝가 산기散騎와 중상시中常侍를 합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가관加官하는 대상은 혹은 열후列侯‧장군將軍‧경대부卿大夫‧장도위將都尉‧상서尙書‧태의太醫‧태궁령太宮令에서부터 낭중郞中까지인데, 정원定員이 없어 많은 경우에는 수십 명에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여순如淳은 “장將은 도낭장都郞將 이하를 이르는데, 열후列侯로부터 아래로 낭중郞中에 이르기까지 모두 산기散騎나 중상시中常侍를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는 금중禁中에 들어갈 수 있고, 산기散騎는 함께 승여거乘輿車(황제皇帝가 탄 수레)를 탄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안사고顔師古는 “병並의 음音은 步浪反(방)이다.
말을 타고서 한산閑散하게 여거輿車를 따를 뿐, 일정한 직책職責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곳에 말한 ‘중령군中領軍’은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보이지 않는다.
[安鄕亭侯] 20개의 작급爵級에 들어있지 않으니, 한말漢末과 위魏나라 때에 두었던 정후亭侯와 열후列侯의 유類인 듯하다.
[曹羲]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종실宗室 조상曹爽의 아우이다.
[荀顗] 자字가 경천景倩으로 순욱荀彧의 아들이고 순선荀詵의 아우이다.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소부少府는 진秦나라의 관명官名인데, 속관屬官에 상서尙書가 있다.
성제成帝 건시建始 4년(B.C. 29)에 처음으로 상서尙書를 설치하였는데, 정원定員이 5인人이다.”라고 하였다.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 또 “부마도위駙馬都尉는 부마駙馬를 관리한다.
무제武帝 초년初年에 설치하였는데, 녹봉祿俸이 2천석千石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안사고顔師古는 “부駙는 부副이니 정거正車(主車)에 메우는 말이 아닌 것을 모두 ‘부마副馬’라 한다.
일설一說에 말하기를 ‘부駙는 가깝고 빠른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何晏] 자字가 평숙平叔이고 남양南陽 완현宛縣 사람으로 하진何進의 손자이고 하함何咸의 아들이다.
조상曹爽이 정권政權을 잡았을 때 하안何晏을 상서尙書로 삼고, 또 공주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정시正始 중中에 이 다섯 사람이 이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함께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