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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5)

대학연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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觴諸侯於范臺注+① 范臺:臺名.러니 酒酣 請魯君擧觴한대 興避席하여
昔者 令儀狄으로 作酒而美어늘 進之禹한대 飲而甘之하사 遂疏儀狄하시고酒曰 後世 必有以酒亡其國者로다하시고
夜半 不嗛注+② 不嗛:嗛, 飽也.이어늘 乃煎熬燔炙하여 和調五味而進之한대 桓公 食之而飽하여不覺曰 後世 必有以味亡其國者로다하고
注+③ 南之威:美婦人也.하여 三日不聽朝하고 遂推南之威而遠之曰 後世 必有以色亡其國者로다하고
楚王注+④ 楚王:.注+⑤ 强臺:臺名.하니 其樂 忘死어늘 遂盟强臺而弗登曰 後世 必有以高臺陂池 亡其國者로다하니
主君之尊 儀狄之酒也 主君之味 易牙之調也而右注+⑥ 左白台而右閭須:白台․閭須, 皆美婦人.하니 南威之美也
稱善相屬하더라


31-10-가
나라 범대范臺에서注+‘范臺’는 臺 이름이다. 제후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나라 임금에게 술잔을 들라고 청했는데, 노나라 임금이 일어나 공손하게 자리에서 약간 물러서서 좋은 내용을 골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제녀帝女의적儀狄에게 술을 만들게 했는데 술맛이 좋자 이를 우왕禹王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왕이 마셔보고는 맛있게 여기고서 마침내 의적을 멀리하고 맛있는 술을 끊으며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술로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환공桓公이 한밤중에 배가 고파지자注+‘嗛’은 ‘배부르다’라는 뜻이다. 역아易牙가 이에 식재료를 지지고 볶고 그을리고 구워서 오미五味를 조화시켜 그 음식을 환공에게 올렸습니다. 환공이 먹고 나서 배가 불러 아침까지 잠에서 깨지 못하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진미珍味로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공文公남지위南之威注+‘南之威’는 아름다운 婦人의 이름이다. 얻고서 사흘 동안 조정에 나와 정사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지위를 퇴출시켜 멀리하고서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여색女色으로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왕莊王注+‘楚王’은 楚 莊王이다. 강대强臺注+‘强臺’는 臺 이름이다. 오르니 왼쪽으로는 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호수가 있어서 그 즐거움이 죽음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강대에 맹세를 하고서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높은 누대와 연못으로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술통)에는 의적이 빚은 듯한 맛있는 술이 담겨 있고, 임금님의 진미는 역아가 조리한 듯하며, 왼쪽에는 백태白台가 있고 오른쪽에는 여수閭須가 있으니注+‘白台’와 ‘閭須’는 모두 아름다운 婦人의 이름이다. 남지위와 같은 미색美色이며, 앞에는 협림夾林이 있고 뒤에는 난대蘭臺가 있으니注+‘夾林’과 ‘蘭臺’는 모두 樓臺의 이름이다. 강대와 같은 즐거움입니다. 이 네 가지를 아울러 소유하셨으니 경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양나라 왕이 좋다고 연달아 칭찬하였다.


역주
역주1 31-10-가 : 《戰國策》 〈魏策2〉에 보인다. 宋나라 鮑彪(포표)의 《戰國策注》와 元나라 吳師道의 《戰國策校注》에 따르면, 魏 惠王 15년(기원전 356)에 魯나라․衛나라․宋나라․鄭나라의 임금들이 魏나라로 와서 조현하였다고 한다. 司馬貞이 《史記索隱》 〈魏世家〉에서 인용한 《竹書紀年》에 따르면, 이때의 임금들은 魯 共侯(共公), 衛 成侯, 宋 桓侯, 鄭 釐侯(昭侯)인데 조현한 시기는 魏 惠王 14년(기원전 357)이라고 하였다. 《戰國策注 卷7 魏》 《戰國策校注 卷7 魏惠王》 《史記 卷44 魏世家 司馬貞索隱》
역주2 梁王 : 魏 惠王(기원전 400~기원전 319, 재위 기원전 369~기원전 319)을 가리킨다. 전국시대 魏나라의 제3대 임금으로, 이름은 罃(앵)이다. 魏 文侯의 손자이자 武侯의 아들이다. 《竹書紀年》에는 ‘惠成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재위 기간 동안 安邑에서 大梁으로 천도했기에 ‘梁 惠王’이라고도 하였다. 즉위 초에는 韓나라와 趙나라를 패퇴시키기도 하였으나, 만년으로 접어들면서 秦나라, 齊나라, 趙나라 등으로부터 연달아 큰 패배를 당했다. 결국 문후 이래로 이어져온 霸者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史記 卷44 魏世家》
역주3 魯君 : 魯 共公(?~기원전 353, 재위 기원전 382~기원전 353)을 가리킨다. 성은 姬, 이름은 奮으로, 魯 穆公의 아들이자 魯 康公의 부친이다.
역주4 擇言 : 鮑彪에 따르면, ‘좋은 내용을 골라 말하는 것[擇善而言]’이다. 《戰國策注 卷7 魏》
역주5 帝女 : 鮑彪는 堯임금의 딸이나 舜임금의 딸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런데 范祥雍(1913~1993)은 《山海經》과 《水經注》에 근거하여 ‘제녀’는 ‘천제의 딸[天帝之女]’이라고 주장하면서 포표의 추정을 반박하였다. 《戰國策注 卷7 魏》 《范祥雍 箋證, 戰國策箋證, 上海:上海古籍出版社, 2006, 1356쪽》
역주6 : 대전본․사고본에는 ‘甘’으로 되어 있다.
역주7 齊桓公 : ?~기원전 643(재위 기원전 685~기원전 643). 춘추시대 齊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姜, 씨는 呂, 이름은 小白이다. 齊 釐公(희공)의 아들이며, 襄公의 동생이다. 즉위한 후 管仲을 중용하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春秋五霸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관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중 사후에 易牙․開方․豎刁(수조) 등과 같은 간신들을 계속 신임하여 나라를 기울게 만들었다.
역주8 易牙 : 생몰년은 자세하지 않다. 《春秋左氏傳》에는 ‘雍巫’, 《大戴禮記》․《論衡》에는 ‘狄牙’로 되어 있다. 맛을 잘 알고 요리에 능했던 奸臣이다. 珍味를 좋아하던 齊 桓公이 인육을 먹어 본 적이 없었기에 易牙가 제 아이의 머리를 쪄 올려 환공의 환심을 샀다. 환공이 죽은 후 豎刁와 함께 환공의 아들인 公子 無詭(무궤)를 옹립하면서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역주9 : 저본․509본․512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朝鮮 太祖 李旦의 피휘이다.
역주10 晉文公 : 기원전 697~기원전 628(재위 기원전 636~기원전 628). 춘추시대 晉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姬, 이름은 重耳이며, 晉 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이 驪姬의 참소를 믿고 태자 申生을 죽게 하자 고국을 떠나 20년 가까이 망명 생활을 했으며, 훗날 秦 穆公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즉위했다. 인재들을 등용하고 국내를 안정시켰으며, 더 나아가 周나라 왕실을 안정시키면서 尊王을 내세웠다. 기원전 632년에는 城濮(성복) 전투에서 楚나라를 격파하고 踐土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짐으로써 齊 桓公의 뒤를 이어 春秋五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역주11 南之威 : 《文選》․《初學記》․《太平御覽》 등에는 ‘南威’로 되어 있다. 范祥雍은 章炳麟(1869~1936)의 학설에 근거하여, ‘남위’는 威씨 성을 가진 여인이며 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范祥雍 箋證, 戰國策箋證, 上海:上海古籍出版社, 2006, 1356쪽》
역주12 莊王 : ?~기원전 591(재위 기원전 613~기원전 591). 춘추시대 楚나라의 임금으로 성은 熊, 이름은 侶(려) 또는 旅이며, 楚 穆王의 아들이다. 즉위 후 伍擧․孫叔敖 등과 같은 賢臣을 중용하여 국력을 키웠으며, 주변의 군소 국가들을 멸망시키는 등 위세를 크게 떨쳤다. 훗날 晉 文公의 뒤를 이어 춘추시대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역주13 强臺 : 淸나라 程恩澤(1785~1837)의 설에 따르면, 雲夢에 있었던 章華臺를 가리킨다. ‘장화대’는 ‘荊臺’라고도 한다. 《何建章 注釋, 戰國策注釋, 北京:中華書局, 1990, 883쪽》
역주14 左江而右湖 : 《淮南子》 〈道應訓〉에는 ‘湖’가 ‘淮’로 되어 있다. 그리고 何建章이 《戰國策注釋》에서 인용한 淸나라 程恩澤의 설에 따르면, ‘左江’의 ‘江’은 洞庭을, ‘右湖’의 ‘湖’는 彭蠡(팽려)를 가리킨다. 《何建章 注釋, 戰國策注釋, 北京:中華書局, 1990, 884쪽》
역주15 白台 : 사고본에는 이 뒤에 小字로 ‘音怡’ 2자가 있다. 范祥雍에 따르면, 백이는 ‘伯巳’로, 姓이 巳이며, 郯나라 여인이다. 《范祥雍 箋證, 戰國策箋證, 上海:上海古籍出版社, 2006, 1357․1358쪽》
역주16 閭須 : 《荀子》 〈賦〉에는 ‘閭娵(여추)’로 되어 있다.
역주17 前夾林而後蘭臺 : 繆文遠(1930~2012)은 郭希汾(1893~1984)의 설을 인용하여 ‘협림’을 놀고 구경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何建章도 ‘협림’과 ‘난대’를 魏나라 왕이 놀고 즐기던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繆文遠, 戰國策新校注, 成都:巴蜀書社, 1987, 852쪽》 《何建章 注釋, 戰國策注釋, 北京:中華書局, 1990, 884쪽》

대학연의(5)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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