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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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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年(218)
二十三年이라 春正月 注+司直, 卽丞相司直.하다
時有金褘者 自以世爲漢臣注+褘, 音輝. 三輔決錄註 “自以世爲漢臣, 自日磾討馬何羅, 忠誠顯著, 名節累葉.”이라하여 乃發憤하여 與紀, 晃起兵하여 欲挾天子以伐魏하고 南援劉備러니 不克而死하다
三月 注+春秋哀十三年 “有星孛于東方.” 註 “平旦衆星皆沒, 而孛星乃見, 故不言所在之次.”하다
◑夏四月 代郡上谷烏桓이어늘 魏王操遣其子彰하여 擊破之하다
魏王操召裴潛하여 爲丞相理曹掾한대 潛曰 潛 於百姓雖寬이나 於諸胡爲峻하니 今繼者必以潛爲治過嚴이라하여 而事加寬惠하리니
彼素驕恣 過寬必弛 旣弛 又將攝之以法이면 此怨叛所由生也注+攝, 持也, 整也. 以勢料之컨대 代必復叛이리이다
後數十日 反問 果至어늘 操使其子彰討之하다
少善射御하고 膂力過人이라 操戒曰 居家 爲父子 受事 爲君臣이라 動以王法從事하리니 爾其戒之하라
劉備擊張郃이러니 不克하다
劉備屯陽平關하여 攻郃等不克하고 急書發益州兵이어늘 諸葛亮 以問從事犍爲楊洪한대
洪曰 漢中 益州咽喉 存亡之機會 若無漢中이면 則無蜀矣 此家門之禍也 發兵何疑리잇고
法正 從備北行이라 於是 表洪領蜀郡太守하니 衆事皆辦이라 遂使卽眞注+遂使之代法正.하다
犍爲太守李嚴 辟洪爲功曹러니 未去犍爲 而洪 已爲蜀郡하고 擧門下書佐何祗有才策이러니
尙在蜀郡 而祗已爲廣漢太守하니 是以 西土咸服諸葛亮能盡時人之器用也러라
秋七月 魏王操擊劉備하여 九月 至長安하다


戊戌年(218)
나라 孝獻皇帝 建安 23년이다. 봄 정월에 少府 耿紀 韋晃이 군대를 일으켜 魏王 曹操를 토벌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注+司直은 바로 丞相司直이다.
】 이때 金褘(김휘)라는 자가 자신은 대대로 나라의 신하였다 하여,注+는 음이 이다. ≪三輔決錄 하였다. 마침내 울분을 터뜨려 耿紀韋晃과 함께 군대를 일으키고서 천자를 의지하여 나라를 정벌하면서 남쪽으로 劉備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3월에 孛星東方에 나타났다.注+春秋左氏傳哀公 13년 조에 “孛星이 동방에 나타났다.” 하였는데, 에 “새벽에 여러 별이 모두 사라진 뒤에 孛星이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에 孛星이 있는 位次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 여름 4월에 代郡上谷에 있던 烏桓이 반란을 일으키자, 魏王 曹操가 그의 아들 曹彰을 보내어 격파하였다.
魏王 曹操裴潛을 불러 丞相理曹掾으로 삼자, 배잠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백성들에게는 비록 너그러우나 여러 오랑캐들에게는 준엄하였으니, 지금 저의 뒤를 잇는 자는 반드시 제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생각하여 일마다 더 너그럽고 은혜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오랑캐들은 평소 교만하고 방자하므로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반드시 해이해질 것이고, 해이해진 다음에 또다시 법으로써 단속하면 원망과 배반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날 것입니다.注+은 잡음이고 정돈함이다. 형세로써 헤아려보건대, 代郡烏桓은 반드시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수십 일 뒤에 과연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조조는 그의 아들 曹彰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曹彰은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 몰기를 잘하였으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曹操가 그에게 경계하기를 “집안에 있을 때에는 부자간이 되고, 임무를 받았을 때에는 군신 간이 된다. 나는 언제나 王法에 따라 從事(처리)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경계하라.” 하였다.
劉備張郃을 공격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였다.
劉備陽平關에 주둔하여 張郃 등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니, 급히 편지를 보내어 益州의 병력을 징발하게 하였다. 諸葛亮이 이 문제를 犍爲郡 사람 從事 楊洪에게 묻자,
양홍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漢中益州의 목구멍과 같은 중요한 지역이어서 나라의 存亡이 달려 있는 중요한 關鍵이니, 만약 한중이 없으면 지방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家門이니, 군대를 징발하는 것에 대해 어찌 의심하십니까.”
이때 蜀郡太守法正이 유비를 따라 북쪽으로 갔다. 제갈량은 이에 表文을 올려 양홍에게 임시로 蜀郡太守를 겸하게 하였는데 모든 일이 제대로 해결되니, 마침내 양홍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太守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注+〈“遂使卽眞”은〉 마침내 그(양홍)로 하여금 法正의 직위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 처음에 犍爲太守 李嚴楊洪辟召하여 功曹로 삼았는데 이엄이 건위군을 떠나기 전에 양홍이 이미 蜀郡太守가 되었다. 또 양홍은 문하에 있는 書佐 何祗(하지)가 재주와 계책이 있다고 천거하였는데,
양홍이 촉군에 있을 때에 하지가 이미 廣漢太守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서쪽 지역 사람들은 모두 諸葛亮이 당시 사람들의 재주를 충분히 이용하는 데에 탄복하였다.
】 가을 7월에 魏王 曹操劉備를 공격하여 9월에 長安에 이르렀다.


역주
역주1 司直 : 漢 武帝 元狩 5년(B.C.118)에 丞相司直을 두었는데, 사직으로 약칭하였다. 丞相을 보좌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자를 탄핵하였다. 秩이 比二千石이다. 後漢 때 司徒에 소속되었으나 建武 11년(35)에 폐지하였다. 建安 8년(203)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사도에 소속시키지 않고 京師의 百官을 감독하게 하였다.
역주2 少府耿紀……不克死之 : “少府와 司直은 귀한 大臣이 아니니, 신분이 귀한 대신이 아닌데도 군대를 일으킨 것은 ≪資治通鑑綱目≫에서 깊이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討’라고 쓰고 ‘死之’라고 썼으니, 曹操의 徒黨을 부끄럽게 한 것이 깊다.[少府司直 非貴大臣也 非貴大臣而能起兵 綱目所深予也 故特書討 書死之 所以愧黨操者深矣]” ≪書法≫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에는 이 사건을 기재하기를 ‘曹操가 長史 王必로 하여금 군대를 담당하게 하니, 이때 京兆 사람 金褘가 耿紀, 韋晃, 吉邈 등과 함께 왕필을 살해하고 천자를 의지하여 魏나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런데 길막 등의 병력이 무너지자 왕필이 이들을 토벌하여 참수하였다.’ 하였고, ≪三國志≫ 〈魏書〉를 참고해보면 곧바로 ‘경기와 위황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필이 토벌하여 참수했다.’ 하고 또 김휘를 그 아래에 附注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이는 위황 등이 賊이 된 것이고 역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독 范曄의 ≪後漢書≫에는 ‘경기와 위황이 군대를 일으켜 조조를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三族이 멸했다.’라고 써서 의리를 세움이 자못 정밀하다.
이제 ≪資治通鑑綱目≫을 보면 ‘군대를 일으켰다.’라고 썼고, ‘조조를 토벌하다가 죽었다.’라고 썼으니, 이는 온전한 절개로 경기와 위황을 인정하여 ≪자치통감≫과 魏나라의 史書(〈魏志〉)와 조금도 같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陳壽가 ≪삼국지≫ 〈위서〉를 지은 것은 대체로 잘못되고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않으니 요컨대 굳이 깊이 논할 것이 못 되고, ≪자치통감≫은 魏나라를 위주로 사건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대략 진수의 〈위서〉와 서로 出入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後人이 折衷하기를 기다리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치통감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확정하여 ≪春秋≫에서 법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조조가 간사한 역적의 자질로 직접 弑逆을 행하여 漢나라의 국통을 찬탈하였으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주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그의 세력이 강대하다는 이유로 그의 죄를 末減하여 역적을 토벌한 의리로 하여금 굽혀서 펴지지 못하게 하겠는가. 더구나 위황 등은 비록 미천하였으나 요컨대 이들은 漢나라의 신하이다. 울분으로 역적을 토벌하여 비록 승리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오히려 당시에 고개를 숙여 역적을 섬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正色하고 쓴 것은 綱常을 붙들고 天理를 보존해서 천하 후세에 名分과 義理의 바름을 보여주어 비록 신분이 미천하나 반드시 기록하고 비록 죽었으나 영화로움을 나타낸 것이다. 아! 역적을 토벌함이 이와 같으니, 역적이 된 자가 어찌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按通鑑 載操使長史王必典兵 時京兆金褘與耿紀韋晃吉邈等 謀殺必 挾天子攻魏 邈等衆潰 必討斬之 及參以魏志 則直謂紀晃等反 王必討斬之 且附注金褘於其下 如此 則是晃等爲賊 非討賊也 獨范史載紀晃起兵誅操 不克 夷三族 立義頗精 今觀綱目書起兵 書討操死之 是以全節予紀晃 與通鑑魏史略不相似 何哉 陳壽志魏 大扺謬妄無理 要之不足深論 通鑑主魏紀事 故大略未免與魏志相出入 蓋欲待後人折之耳 綱目正名定分 取法春秋 故其書法如此 夫操以姦賊之資 躬行弑逆 簒奪漢祚 人皆得而誅之 豈得以強大之故 末減其罪 而使討賊之義 屈而不伸 況晃等雖微 要是漢之臣子 發憤致討 縱使不克而死 猶足以愧當時俛首事賊之人 綱目正色書之 所以扶綱常 存天理 示天下後世名義之正 以見雖微必錄 雖死爲榮也 嗚呼 討賊若此 爲賊者 豈有容足之地哉]” ≪發明≫
역주3 金褘는……여겼다 : 金日磾는 匈奴 休屠王의 太子로 자가 翁叔이었는데, 武帝가 즉위한 초기에 漢나라로 귀순하여 侍中이 되었는바, 독실하고 신중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休屠國에서는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다 하여 金氏 姓을 하사하였다. 馬何羅는 태자의 巫蠱 獄事를 일으킨 江充과 친했는데, 뒤에 강충이 태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황제가 그의 黨與들을 다스리자, 武帝 後元 원년(B.C.89) 禍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황제를 시해하려 하였으나, 김일제가 이를 알아차리고 마하라를 안고 궁궐 아래로 투신하여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 김휘는 김일제의 후손이므로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역주4 有星孛于東方 : “獻帝의 시대에 이보다 앞서는 孛星을 6번 썼고 이때에 7번 썼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孛星을 쓴 것이 53번인데, 한 대에 7번 쓴 것은 오직 武帝와 獻帝뿐이다. 그러나 무제는 禍가 병란에 그쳤는데 헌제는 천하를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헌제의 재주가 漢나라 國統의 쇠퇴를 만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獻帝之世 先是六書孛矣 於是七書 終綱目 書孛五十三 而一世七書者 惟武帝獻帝焉 然武止兵禍 而獻至於失天下 則獻之才不足以挽漢祚之衰故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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