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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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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年(230)
八年이라
魏太和四年이요 吳黃龍二年이라
吳發兵浮海하여 求夷洲, 亶洲하다
吳主權 使將軍衛溫, 諸葛直으로 將甲士萬人하여 浮海求夷洲, 亶洲하여 欲俘其民以益衆注+後漢書東夷傳曰 “會稽海外, 有夷洲及亶洲, 傳言秦始皇使徐福將童男女數千人, 入海求蓬萊神仙, 不得. 福懼誅, 不敢還, 遂止此洲, 世世相承, 有數萬家. 人民時至會稽市. 會稽東縣人, 有入海行, 遭風流移, 至亶洲者, 所在絶遠, 不可往來.” 沈瑩臨海水土志曰 “夷洲, 在臨海東, 去郡二千里. 土地無霜雪, 草木不死, 四面是山谿, 地有銅鐵. 唯用鹿骼爲矛, 以戰闘, 摩厲靑石, 以作弓矢. 取生魚肉, 雜貯大瓦器中, 以鹽鹵之, 歷月餘日, 仍啖食之, 以爲上肴也. 今人相傳 ‘倭人, 卽徐福止王之地. 其國中, 至今廟祀徐福.’”하니
陸遜, 全琮 皆諫하여 以爲 桓王創基 兵不一旅注+五百人爲旅.러니 今江東見衆 自足圖事注+見衆, 謂據今所有之衆. 不當遠涉不毛
萬里襲人 風波難測이요 又民易水土 必致疾疫하리이다 且其民 猶禽獸하니 得之不足濟事 無之不足虧衆이니이다
不聽하다 溫等 遂行하여 經歲乃還하니 士卒疾疫死者 什八九
亶洲 絶遠不可至하고 得夷洲數千人以歸하니 溫等 以無功坐誅하다
二月 魏立郞吏課試法하다 尙書諸葛誕等 有罪免하다
魏尙書諸葛誕 中書郞鄧颺等注+中書郞, 卽通事郞. 結爲黨友하여 更相題表하여 以夏侯玄等爲四聰하고 誕輩爲八達注+玄, 尙之子也.하고
中書監劉放子熙 中書令孫資子密 吏部尙書衛臻子烈 以父居勢位 容之爲三豫注+魏改漢選部尙書, 曰吏部尙書. 三豫者, 容三人得豫於題品之也.하다
行司徒事董昭 上疏曰注+資望輕, 未可爲公者, 爲行事. 凡有天下者 莫不貴樸忠之士하고 疾虛僞之人하니
以其毁敎亂治하고 敗俗傷化也일새니이다 竊見當今 年少 不復以學問爲本하고 專以交遊爲業하며
國士不以孝悌淸修爲首하고 乃以趨勢遊利爲先하여 合黨連群하여 互相褒歎하여
以毁訾爲罰戮하고 用黨譽爲爵賞注+訾, 將此切, 毁也.하여 附己者則嘆之盈言하고 不附者則作爲瑕釁注+嘆者, 嗟嘆而稱其美也. 盈, 溢也. 嘆美之過, 溢於言辭, 則爲溢美之言. 玉之病曰瑕, 器之隙曰釁.하여
至乃往來禁奧하여 交通探問注+禁奧, 謂禁省深嚴之地.하니 凡此諸事 皆法之所不取 刑之所不赦也니이다
魏主叡善其言하고 詔郞吏하여 學通一經하고 才任牧民이어든
博士課試하여 擢其高第者하여 亟用注+郞吏, 謂尙書郞也.하고 其浮華不務道本者 罷退之하니 仍免誕, 颺等官하다
秋七月 이어늘 丞相亮 出次成固하니 九月 魏師還하다
魏曹眞 以漢人數入이라하여 請由斜谷伐之어늘 魏主叡詔司馬懿하여 泝漢水하여 由西城하여 與眞會漢中注+漢中西城縣, 漢末置西城郡, 魏文帝改魏興郡.하니 諸將 或欲由子午谷하고 或欲由武威注+武威, 恐當作武都, 否則建威也.
陳群 諫曰 太祖昔攻張魯 多收豆麥하여 以益軍糧이로되 魯未下而食猶乏하니이다 今旣無所因하고 而斜谷阻險하여 轉運 有鈔截之虞注+鈔, 略也. 截, 斷也.
多留兵守要하면 則損戰士 不可不熟慮也라하고 幷言軍事用度之計하니 叡以群議下眞이러니 據之遂行注+詔以議下眞, 將與之商度可否也. 眞銳於出師, 遂以詔爲據而行.하다
丞相亮 聞之하고 次於成固赤坂하여 以待之注+胡三省曰 “赤坂, 在今洋州東二十里龍亭山, 坂色正赤. 魏兵泝漢水, 及從子午道入者, 皆會于成固, 故於此待之.”하고 召李嚴하여 使將二萬人하여 赴漢中이러니 會天大雨三十餘日 棧道斷絶이러라
魏太尉華歆 上疏曰 陛下宜留心治道하여 以征伐爲後事 爲國者 以民爲基 以衣食爲本이라
使中國無飢寒之患하고 百姓無離上之心이면 則二敵之釁 可坐而待也리이다
少府楊阜曰 昔武王 白魚入舟 君臣變色하니 動得吉瑞로되 猶尙憂懼어든 況有災異而不戰竦者哉잇가
今吳, 蜀未平이어늘 而天屢降變하여 諸軍始進 便有天雨之患하니 稽閡山險 已積日矣注+稽, 留止也. 閡, 與礙同.
轉負勞苦하고 所費已多하니 若有不繼하면 必違本圖하리이다
散騎常侍王肅曰注+肅, 司徒朗之子也. 前志 有之하니 千里饋糧이면 士有飢色하고 樵蘇後㸑이면 師不宿飽注+前書, 李左車說陳餘之言, 蓋前乎左車, 已有是言矣. 採薪曰樵, 取草曰蘇. 爨, 音竄, 炊也, 言雖有糧, 必待樵蘇而後, 可炊爨. 師不宿飽, 謂師衆無越宿而自飽之理.라하니
此謂平途之行軍者也 又況深入險阻하여 鑿路而前하니 則其爲勞 必相百也리이다
今又加之以霖雨하여 山坂峻滑하여 衆迫而不展하고 糧遠而難繼하니 實行軍之大忌也
聞曹眞 發已踰月而行裁半谷이요 治道功夫 戰士悉作注+行裁半谷, 謂子午谷之路, 行纔及半也.이라하니 是彼偏得以逸待勞 乃兵家之所憚也니이다
遠則周武出關而復還注+武王東觀兵, 至于孟津, 諸侯皆曰 “紂可伐.” 王曰 “汝未知天命, 未可也.” 乃還師.하고 近則武, 文臨江而不濟注+魏武帝進軍濡須口, 與吳相守, 月餘而還, 文帝以舟師擊吳, 臨江而還.하시니 豈非順天知時하여 通於權變者哉잇가 乃詔班師하다
魏主叡如許昌하다
魏主叡如許昌하니 左僕射徐宣 摠留事러니 及還 主者奏呈文書注+尙書諸曹, 各有主者.한대 叡曰 吾省與僕射省 何異리오하고 竟不視하다
冬十二月 吳人 攻魏合肥러니 不克하다
魏征東將軍滿寵 聞吳欲攻合肥하고 表請召兵이러니 吳尋退還하니 以爲賊大擧而還 非其本意
此必欲僞退하여 以罷吾兵하고 而倒還乘虛하여 掩不備也라하고 遂表不罷兵注+上表言敵情, 請不罷兵也.하다 後十餘日 吳果來攻이러니 不克而還하다
丞相亮 以蔣琬爲長史하다
數外出하니 常足食足兵하여 以相供給注+數, 音朔.이라
每言公琰 託志忠雅하니 當與吾共贊王業者也注+公琰, 琬字.라하니라
吳廷尉監隱蕃 作亂이라가 伏誅하다
靑州人隱蕃 逃奔入吳하여 上書求見注+隱蕃, 姓名.이어늘 吳主權 召入하니 陳時務호되 甚有辭觀注+觀, 古玩切. 辭觀, 言其敏於言辭, 美於儀觀也.이라
以爲廷尉監이러니 將軍朱據 廷尉郝普 皆稱其有王佐才하니 於是 蕃門 車馬雲集이러라
潘濬子翥亦與周旋饋餉之注+翥, 章庶切. 周旋, 相追逐也.러니하고 大怒하여
疏責翥曰注+疏, 所去切, 謂條陳也. 吾受國厚恩하여 志報以命注+言志在致命以報國恩.하노니 爾等在都 當念恭順하여 親賢慕善이어늘
何故與降虜交하여 以糧餉之 疏到 急就往使하여 受杖一百하고 促責所餉注+使, 疏吏切. 促責所餉, 謂復取索前所贈遺也. 濬欲布其子之罪於國中, 以絶後禍.하라하니
時人 恠之러라 頃之 謀作亂이라가 伏誅하니 自殺하고 坐禁止라가 久之 乃解注+禁止者, 雖未下之獄, 使人守之, 禁其不得出入, 止不得與親黨交通也. 一說, “禁止, 謂禁入殿省也.” 解, 佳買切, 脫也.하다


庚戌年(230)
나라(蜀漢) 後主 建興 8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太和 4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黃龍 2년이다.
】 봄에 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서 夷洲亶洲(단주)를 찾게 하였다.
吳主 孫權將軍 衛溫諸葛直으로 하여금 甲士(갑옷을 입은 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夷洲亶洲를 찾아서 이곳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무리(병력)를 늘리고자 하니,注+後漢書≫ 〈東夷傳〉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會稽海外夷洲亶洲가 있으니, 전하는 말에 나라 始皇帝徐福으로 하여금 童男童女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가서 蓬萊山神仙을 찾게 하였는데 찾지 못하였다. 서복은 誅罰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섬에 거주하였는데, 대대로 서로 이어와서 수만 가호가 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때로 會稽市場에 오기도 하고, 會稽東冶縣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亶洲에 이른 경우가 있었는데, 있는 곳이 매우 멀어서 왕래할 수가 없었다.”
沈瑩의 ≪臨海水土志≫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夷洲臨海의 동쪽에 있으니 臨海郡과 2천 리 떨어져 있다. 이 지역에는 서리와 눈이 내리지 않아 초목이 죽지 않으며 4면이 모두 산과 계곡이고 땅에서는 이 생산된다. 오직 사슴의 뼈를 사용하여 창을 만들어서 전투하고, 파란 돌을 갈아서 활과 화살을 만든다. 생선과 생고기를 취하여 큰 질그릇에 섞어 담아서 소금으로 염장했다가 한 달여가 지나 그대로 먹었는데, 이것을 최상의 음식이라고 여겼다. 지금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倭人은 바로 徐福이 머물며 왕 노릇 한 지역이다. 그 나라에는 지금까지 서복의 사당을 모시고 제사한다.’라 하였다.”
陸遜全琮이 모두 다음과 같이 하였다. “桓王(孫策)이 基業을 창건하실 적에 군대가 1(500명)가 못 되었습니다.注+5백 명을 라 한다. 지금 江東에 현재 있는 병력이 충분히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注+見衆”은 현재 있는 무리를 이른다. 멀리 불모지를 건너가서는 안 되니,
만 리 멀리 남의 지역을 습격하면 풍파를 측량하기 어렵고, 또 백성(병사)들은 水土가 바뀌면 반드시 疫疾에 걸릴 것입니다. 또 그 지역 백성들은 禽獸와 같으니, 얻어도 성공하는 데 보탬이 되지 못하고 그들이 없어도 병력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은 끝내 듣지 않았다. 위온 등이 마침내 길을 떠났다가 1년이 지나 비로소 돌아오니, 士卒 중에 역질에 걸려 죽은 자가 10명에 8, 9명이었다.
단주는 너무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이주에 있는 수천 명을 얻어 돌아오니, 위온 등은 공로가 없다 하여 죄에 걸려 주살당하였다.
】 2월에 나라에서 郞吏課試法을 세웠다. 尙書 諸葛誕 등이 죄가 있어 면직되었다.
나라의 尙書 諸葛誕中書郞 鄧颺(등양) 등이注+中書郞은 바로 通事郞이다. 黨友를 맺어서 번갈아 서로 상대방을 품평하고 표방하여 夏侯玄 등을 四聰이라 하고 諸葛誕 등을 八達이라 하였으며,注+夏侯玄夏侯尙의 아들이다.
中書監 劉放의 아들 劉熙中書令 孫資의 아들 孫密吏部尙書 衛臻의 아들 衛烈은 아버지의 권세와 지위로 〈품평에 참여하는 것이〉 용납되어 三豫라 하였다.注+나라는 나라의 選部尙書를 고쳐 吏部尙書라 하였다. “三豫”는 세 사람이 품평하는 가운데 참여할 수 있도록 용납된 것이다.
行司徒事董昭가 다음과 같이 上疏하였다.注+資格名望이 가벼워서 이 될 수 없는 자를 行事(行司徒事)라 한다. “무릇 천하를 소유한 자는 질박하고 충성스러운 선비를 귀중히 여기고 虛僞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虛僞의 사람이〉 가르침을 훼손하고 다스림을 혼란시키며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지금 나이 젊은 자들이 다시는 학문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交遊하는 것을 으로 삼으며,
國士들이 효도하고 공경하고 깨끗이 수행하는 것을 첫 번째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권력을 추종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을 모으고 무리를 지어 서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감탄해서,
훼방하고 비난하는 것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무조건 편들고 비호하는 것을 상을 주는 것이라고 여겨서注+將此이니, 훼방함이다.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는 감탄하여 칭송하는 말이 넘쳐나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瑕疵와 흠을 만들어내어서,注+은 감탄하면서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이다. 은 넘침이다. 아름다움을 감탄함이 지나쳐서 言辭에 넘쳐나면 지나치게 찬미하는 말이 된다. 옥의 흠을 라 하고 그릇의 흠을 이라 한다.
심지어는 엄한 禁中을 왕래하면서 서로 통하고 探問하니,注+禁奧”는 禁省의 깊고 엄한 지역을 이른다. 무릇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은 모두 법에서 허용하지 않고 형벌에서 용서하지 않는 바입니다.”
魏主 曹叡는 그의 말을 좋게 여기고 詔令을 내려서 郞吏 중에 학문이 한 가지 經書를 통달하고 재주가 牧民官을 맡을 만한 자가 있으면
博士가 시험하여 등급이 높은 자를 발탁해서 속히 등용하고注+郞吏尙書郞을 이른다. 浮華하여 의 근본을 힘쓰지 않는 자는 파면하여 물리치니, 이로 인해 諸葛誕鄧颺 등이 면직되었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漢中을 침략하자, 丞相 諸葛亮이 출동하여 成固에 군대를 주둔하니, 9월에 나라 군대가 돌아갔다.
나라 曹眞蜀漢 사람들이 자주 침입한다 하여 斜谷을 따라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魏主 曹叡詔令을 내려 司馬懿에게 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西城을 따라 曹眞漢中에서 만나게 하니,注+漢中西城縣나라 말기에 西城郡을 설치하였는데, 나라 文帝魏興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장수들이 혹은 子午谷을 경유하고자 하고 혹은 武威를 경유하고자 하였다.注+武威는 마땅히 武都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建威일 것이다.
陳群이 말하기를 “太祖(曹操)가 옛날 張魯를 공격하실 적에 콩과 보리를 많이 거두어 軍糧을 보탰는데도 장로를 항복시키기 전에 군량이 이미 부족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이용할 것이 없고 斜谷은 길이 험하고 막혀 있어서 곡식을 운반함에 약탈당하고 차단당할 우려가 있으며,注+는 노략질함이요, 은 끊음이다.
군대를 많이 잔류시켜 요해처를 지키게 하면 전투할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아울러 군대의 用度(재물을 씀)의 계책을 말하였다.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조진에게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조진은 詔令에 근거하여 마침내 출정길을 떠났다.注+〈“叡以群議下眞 眞據之遂行”은〉 曹叡詔令을 내려 陳群의 의논을 曹眞에게 회부하여 장차 그와 더불어 可否商議하게 했는데, 조진이 출병하는 데 마음이 급해서 마침내 詔令을 근거하여 출동한 것이다.
丞相 諸葛亮이 이 말을 듣고 成固赤坂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나라 군대를 기다리고注+胡三省이 말하기를 “赤坂은 지금 洋州 동쪽 20리 지점인 龍亭山에 있으니, 山坂의 빛이 참으로 붉다. 나라 군대는 漢水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또는 子午道를 따라 들어오는 경우 모두 成固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기다린 것이다.” 하였다. 李嚴을 불러서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려 漢中으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30여 일 내려 棧道가 끊겼다.
나라 太尉 華歆이 다음과 같이 上疏하였다. “陛下께서는 마땅히 정치하는 에 유념하시어 정벌하는 것을 차후의 일로 삼아야 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터전으로 여기고 백성은 衣食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만일 中國에 굶주리고 헐벗는 근심이 없고 백성들에게 君上을 이반하는 마음이 없으면, 蜀漢나라 두 적의 틈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少府 楊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武王 君主와 신하가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그때 번번이 길한 祥瑞를 얻었는데도 오히려 근심하고 두려워했는데, 하물며 지금 災異가 있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금 蜀漢이 평정되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여러 번 災變을 내려서 諸軍이 처음 진출하자마자 곧바로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근심이 있으니, 험한 산길에서 지체하여 막힌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注+는 머물러 지체함이다. (막히다)는 와 같다.
물자를 수송하느라 수고롭고 지출한 비용이 이미 많으니, 이 뒤에 물자를 계속 공급하지 못하면 반드시 본래 도모한 것과 어긋날 것입니다.”
散騎常侍 王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王肅司徒 王朗의 아들이다. “옛 기록에 ‘천 리 먼 곳에서 양식을 공급하면 병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고, 나무하고 건초를 벤 뒤에 밥을 지으면 병사들이 항상 배부르지 못하다.’注+〈“千里饋糧……師不宿飽”는〉 ≪漢書≫에 李左車陳餘를 설득한 말이나, 이좌거 이전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다. 섶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라 하고, 건초를 채취하는 것을 라 한다. 은 음이 이니, 밥을 짓는 것이다. 이는 비록 양식이 있더라도 반드시 땔나무와 건초가 있어야 밥을 지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師不宿飽”는 병사들이 하룻밤을 지내면서도 스스로 배부를 리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평평한 길에서 行軍하는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험한 곳에 들어가서 길을 뚫어 전진하니, 그렇다면 그 수고로움이 반드시 평지에서 행군할 때의 백 배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 또 장맛비가 겹쳐서 山坂이 험준하고 미끄러워 병사들이 궁핍하여 기를 펴지 못하고 식량 수송로가 멀어 계속 공급하기가 어려우니, 이는 실로 행군하는 자가 크게 꺼리는 것입니다.
듣건대, 曹眞이 출동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도 행군이 겨우 子午谷의 반절에 이르렀고, 길을 정비하는 공사에 戰士들이 모두 동원된다고 합니다.注+行裁半谷”은 子午谷까지 가는 길에 행군이 겨우 절반에 미쳤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적이 홀로 편안함으로써 수고로운 우리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니, 바로 兵家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멀리는 武王關門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고,注+〈“周武出關而復還”은〉 武王이 동쪽으로 군대를 사열하여 위용을 보이고 孟津에 이르자, 諸侯들이 모두 말하기를 “紂王을 정벌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무왕은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天命을 알지 못하니, 아직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회군하였다. 가까이는 武帝(曹操)와 文帝(曹丕)가 長江에까지 갔다가 건너가지 않으셨으니,注+〈“武文臨江而不濟”는〉 어찌 하늘의 뜻을 순종하고 때를 알아서 權變에 통달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曹叡詔令을 내려 班師(회군)하도록 명하였다.
魏主 曹叡許昌에 갔다.
魏主 曹叡許昌에 가니, 左僕射 徐宣留守의 일을 총괄하였다. 조예가 돌아오자 주관하는 자가 문서를 올릴 것을 아뢰니,注+尙書의 여러 에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다. 조예가 말하기를 “내가 살펴보는 것이 僕射(徐宣)가 살펴보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하고는 끝내 살펴보지 않았다.
】 겨울 12월에 나라 사람이 나라의 合肥를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나라 征東將軍 滿寵나라에서 合肥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表文을 올려서 군대를 〈兗州豫州의 군대를〉 召集할 것을 청하였다. 나라가 얼마 후 후퇴하여 돌아가니, 만총은 “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다가 돌아가는 것은 그들의 본래 뜻이 아니다.
이는 반드시 거짓 후퇴하여 우리 군대를 해산시키고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허약한 틈을 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덮치기 위한 술책이다.” 하고는 마침내 표문을 올려 군대를 해산시키지 않게 하였다.注+〈“遂表不罷兵”은〉 表文을 올려서 의 실정을 말하고 군대를 해산하지 않을 것을 청한 것이다. 10여 일 뒤에 나라가 과연 와서 공격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丞相 諸葛亮蔣琬長史로 삼았다.
諸葛亮이 자주 밖으로 출동하니, 蔣琬은 항상 식량과 병력을 충분히 지원하여 공급을 도왔다.注+(자주)은 음이 이다.
제갈량이 매번 말하기를 “公琰이 충성스러움과 바름에 뜻을 두니, 마땅히 나와 함께 王業을 도울 자이다.”注+公琰蔣琬이다. 하였다.
나라 廷尉監 隱蕃이 난을 일으켰다가 伏誅되었다.
靑州 사람 隱蕃이 도망하여 나라로 들어가서 글을 올려 吳主를 만나볼 것을 청하자,注+隱蕃은 사람의 성명이다. 吳主 孫權이 은번을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은번이 時務를 아뢰었는데, 言辭가 매우 민첩하고 행동거지가 볼만하였다.注+(儀表)은 古玩이니, “辭觀”은 그가 言辭에 민첩하고 행동거지가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손권이 그를 廷尉監으로 임명하였는데, 將軍 朱據廷尉 郝普는 모두 그가 왕자를 보좌할 만한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에 은번의 문하에는 수레와 말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潘濬의 아들 潘翥(반저) 또한 隱蕃과 더불어 왕래하고 음식물을 선물로 보내니,注+章庶이다. “周旋”은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반준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글을 지어 조목조목 지적해서 반저를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注+所去이니, 글로 조목조목 말함을 이른다. “내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목숨을 바쳐 보답할 것을 생각하니,注+〈“志報以命”은〉 뜻이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함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너희들이 도성에 있을 적에 마땅히 공손히 행동하여 현자를 가까이하고 한 사람을 사모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무슨 연고로 항복한 오랑캐와 사귀어서 음식물을 갖다 주었느냐. 이 편지를 받으면 곧바로 使者에게 찾아가서 곤장 100대를 맞고 은번에게 선물한 음식물을 빨리 되찾아와라.”注+使(사신)는 疏吏이다. “促責所餉”은 이전에 선물한 음식물을 다시 찾아오게 함을 이른다. 이는 潘濬이 그 아들의 죄를 온 나라에 선포하여 후일의 화를 끊고자 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괴이하게 여겼는데, 얼마 후 은번이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다가 伏誅를 당하니, 郝普는 자살하고 朱據는 이에 연루되어 연금당하였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났다.注+禁止”는 그를 하옥시키지는 않았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지켜서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억류하여 가까이하는 徒黨과 왕래하지 못하게 함을 이른다. 일설에 “禁止殿省에 출입하는 것을 금함을 이른다.” 한다. 佳買이니, 풀림이다.


역주
역주1 (治)[冶]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冶’로 바로잡았다.
역주2 (後)[中] : 저본에는 ‘後’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魏寇漢中 : “魏나라에게 ‘寇’라고 쓴 것은 漢나라(蜀漢)를 높인 것이다.[書魏以寇 尊漢也]” ≪書法≫
“≪資治通鑑綱目≫에 모든 諸侯들이 王室에 있어서와 夷狄이 中國에 있어서와 참람한 괴뢰 정권이 正統에 있어서 혹 군대를 加하여 공격하고 국경을 침범하면 ‘寇’라고 썼고, 이런 종류가 아니면 쓰지 않았다. 諸葛孔明은 昭烈을 좌우에서 보좌하여 漢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벌해서 大義를 천하에 밝혔으니, 功은 비록 성취하지 못했으나 명분은 바르다. 陳壽가 ≪三國志≫를 지음으로부터 魏나라를 위주로 하였다. ≪資治通鑑≫은 이를 따라 紀年하였기 때문에 孔明이 魏나라를 정벌한 조처에 대해 도리어 ‘入寇’라고 썼으니, 이는 역적을 토벌한 사람을 가지고 도리어 賊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은 이미 昭烈(劉備)이 漢나라의 正統을 이었다고 여겼으므로 魏나라 군대가 국경을 침범할 적에 ‘寇’라고 썼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正과 僞의 구분이 비로소 밝아진다. 이는 진실로 이론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요, 예전 사람들이 바로잡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서 끝내 옳음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또한 서로 發明한 것이다. 司馬公(司馬光)이 구천에서 살아나온다면 반드시 이 말이 옳다고 인정할 것이다.[綱目 凡諸侯之於王室 夷狄之於中國 僭僞之於正統 或加兵犯境 則書曰寇 非此類 則不書 諸葛孔明左右昭烈 爲漢討賊 聲大義於天下 功雖不就 名則正矣 自陳壽志三國 以魏爲主 通鑑因之紀年 故於孔明伐魏之擧 反以入寇書之 則是以討賊之人 名之爲賊耳 綱目旣以昭烈紹漢之統 故於魏兵犯境 書之爲寇 然後名正言順 而正僞之辨始明 固非好爲立異也 正前人之未正 卒歸之是 亦所以更相發明云耳 九原可作 切謂司馬公光必有取於斯言]” ≪發明≫
역주4 흰……들어오자 : ≪史記≫ 〈周本紀〉에 “周나라 文王이 崩하자, 武王은 나무로 만든 문왕의 神主를 받들고 동쪽으로 가서 孟津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무왕이 황하를 건널 적에 中流에서 흰 물고기가 무왕의 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때 약속하지 않고 맹진에 모인 제후들이 800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말하기를 ‘殷나라의 紂王을 정벌해야 한다.’ 하였으나, 무왕은 ‘너희들이 天命을 알지 못하니, 아직 안 된다.’ 하였다.[周文王崩 武王奉文王木主 東觀兵于孟津 武王渡河 中流 白魚躍入王舟 是時諸侯不期而會者八百 皆曰 紂可伐矣 武王曰 汝未知天命 未可也]”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馬融은 “물고기는 비늘이 있는 물건으로 군대의 象이고 흰색은 殷나라에서 숭상하는 正色이니, 이는 殷나라와 周나라의 군대가 교전할 象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역주5 魏 武帝는……되돌아왔다 : 武帝는 曹操에 대한 追尊으로, 본서 48쪽 綱에 “겨울 10월에 조조가 孫權을 공격하여 濡須에 이르렀다.”라고 보이고, 다음 해 “봄 정월에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라고 보인다. 文帝는 曹丕로, 본서 212쪽 綱에 “가을 8월에 魏主 조비가 水軍을 거느리고 吳나라를 공격하였는데 長江에 임하여 돌아왔다.”라고 보이고, 그 다음 해 여름에도 吳나라를 공격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 내용이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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