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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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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年(213)
十八年이라 春正月 曹操引兵還하다
操進軍濡須口하여 號四十萬이라하니 孫權 率衆七萬禦之하여 相守月餘
操見其舟船, 器仗, 軍伍整肅하고 歎曰 生子 當如孫仲謀注+仲謀, 權字. 如劉景升兒子 豚犬耳라하더라
爲牋與操하여 說春水方生하니 公宜速去라한대 操徹軍還하다
幷十四州하여 爲九州注+十四州, 司‧豫‧冀‧兗‧徐‧靑‧荊‧揚‧益‧涼‧雍‧幷‧幽‧交也. 爲九州者, 割司州之河東‧河內‧馮翊‧扶風及幽‧幷二州皆入冀州, 涼州所統悉入雍州, 又以司州之京兆入焉, 又以司州之弘農‧河南入豫州, 交州幷入荊州, 則省司‧涼‧幽‧幷‧交, 而復禹貢之九州矣. 此曹操自領冀州牧, 欲廣其所統以制天下耳.하다
◑徙濱江郡縣하다
曹操在譙 恐濱江郡縣 爲孫權所略하여 欲徙令近內하여 以問蔣濟曰 昔軍官渡 徙燕, 白馬民이러니 民不得走하고 賊亦不敢鈔
今欲徙淮南民하노니 何如注+燕縣‧白馬縣, 皆屬東郡. 對曰 是時 兵弱賊強하여 不徙 必失之어니와
今明公 威震天下하고 民無他志하며 人情 懷土하여 實不樂徙 懼必不安이니이다 操不從이러니
旣而 民轉相驚하여 戶十餘萬 皆東渡江하니 江西遂虛 合肥以南 惟有皖城注+大江東北流, 故自歷陽至濡須口, 皆謂之江西, 而建業謂之江東.이러라
以冀州十郡으로 封曹操爲魏公하고 以丞相으로 領冀州牧如故注+時以冀州之河東‧河內‧魏郡‧趙國‧中山‧常山‧鉅鹿‧安平‧甘陵‧平原凡十郡, 爲魏國.하고
又加九錫하니 大輅, 戎輅各一이요 玄牡二駟注+大輅, 金輅也, 祭祀所乘. 戎輅, 革輅也, 兵事所乘. 玄牡, 黑色牡牛也, 用以告皇天上帝. 袞冕之服 赤舃副焉注+舃, 履也. 舃有三等, 赤舃爲上, 冕服之舃.하고 軒縣之樂 六佾之舞注+縣, 讀曰懸. 諸侯軒縣, 去其南面, 以避王也. 朱戶以居하고 納陛以登하며
虎賁三百人이요 鈇鉞各一이요 彤弓一이요 彤矢百이요 玈弓十이요 玈矢千注+玈, 與盧同, 黑色也.이요 秬鬯一卣 珪, 瓚副焉하다
大雨水하다
◑劉璋 遣將吳懿等하여 拒劉備라가 敗績하여 皆降하니 備進圍雒城하다
益州從事廣漢鄭度 謂劉璋曰 左將軍 懸軍襲我하여 野穀是資하니
莫若盡驅巴西, 梓潼民하여 內涪水以西하고 其倉廩野穀 一皆燒除하고 高壘深溝하여 請戰勿許하면
不過百日 彼將自走하리니 走而擊之 此必禽矣注+劉璋分巴郡墊江已上, 爲巴西郡. 梓潼縣, 屬廣漢郡. 內, 入也. 涪水, 出廣漢南, 入漢리이다 備聞而惡之어늘
灋正曰 璋 終不能用하니 無憂也注+灋, 古法字.라하더니 果謂其群下曰 吾聞拒敵以安民이요 未聞動民以避敵也라하고 遣其將吳懿等하여 拒備러니 皆敗退하다
懿詣軍降이어늘 復遣李嚴, 費觀하여 督軍注+觀, 音貫, 費觀, 姓名.이러니 嚴, 觀亦降하니 備軍 益強이라
分遣諸將하여 平下屬縣하고 進圍雒城하니 守將張任 出戰敗死注+雒城, 廣漢郡雒縣城.하다
秋七月 하다
注+操三女, 長憲‧次節‧次華, 節後立爲皇后.하다
◑八月 馬超入涼州하여 殺刺史어늘 九月 參軍事楊阜 起兵攻之하니 超奔漢中하다
曹操追馬超하여 至安定이라가 引軍還할새 參涼州軍事楊阜 言於操曰注+涼州刺史韋康, 辟阜爲別駕, 留參軍事. 超有信, 布之勇하고 得羌, 胡心하니 若不設備 隴上諸郡 非國家之有也注+信‧布, 謂韓信‧黥布也. 隴西‧南安‧漢陽‧永 皆隴上諸郡也.리이다
操還 超果率羌, 胡하여 擊隴上諸郡取之하니 惟冀城 固守注+冀縣, 屬漢陽郡, 郡及涼州刺史治焉. 自正月 至八月 救兵不至하니 刺史韋康及太守欲降이어늘
楊阜號哭諫曰 阜等 率父兄子弟하여 以義相勵하여 有死無二하여 以爲使君守此城注+爲, 去聲.이어늘 今奈何棄垂成之功하고 陷不義之名乎잇가
康等 不聽하고 開門迎超러니 超入하여 遂殺康等이어늘 曹操使夏侯淵救한대 超逆戰敗之하다
楊阜喪妻하여 求假以葬注+通鑑, 求假上, 有就超二字. 假, 休假也, 求假, 猶古之請告, 請急也.이러니 阜外兄姜敍 擁兵屯歷城注+外兄, 姑子也. 水經註 “歷城在西縣, 去仇池一百二十里, 後改爲建安城.”이라 阜見敍及其母하고 歔欷悲甚이어늘
敍曰 何爲乃爾 阜曰 守城不能完하고 君亡不能死하니 亦何面目以視息於天下注+視息, 瞻視喘息也.리오
馬超背父叛君하고 虐殺州將注+背父, 謂馬騰在鄴, 不顧而反.하니 豈獨阜之憂責이리오 一州士大夫 皆蒙其恥
擁兵專制而無討賊之心하니 此趙盾所以書弑君也注+趙盾, 晉卿趙宣子也. 左傳 “趙穿攻靈公於桃園, 宣子未出山而復. 太史書曰 ‘趙盾弑其君.’ 以示於朝. 宣子曰 ‘不然.’ 對曰 ‘子爲正卿, 亡不越境, 反不討賊, 非子而誰.’ 引此文者, 以州將喩君, 敍喩盾也. 彊而無義하고 多釁하여 易圖耳니이다
敍母慨然曰 咄伯奕 韋使君遇難 亦汝之負 豈獨義山哉注+咄, 當沒切, 嗟嘆聲. 一曰 “呵也.” 伯奕, 敍字. 負, 罪負也. 義山, 阜字. 人誰不死리오 死於忠義 得其所矣
但當速發이니 我不以餘年累汝也호리라 敍乃與趙昂, 尹奉等으로 合謀하고 又使人至冀하여 結梁寬, 趙衢하여 使爲內應하다
超已取昂子月爲質이라 謂妻異曰 吾謀如是어니와 當奈月何注+妻名異, 士氏女也.
異厲聲應曰 雪君父之大恥 喪元 不足爲重이온 況一子哉注+雪, 拭也. 元, 首也.잇가
九月 阜與敍, 昂, 奉으로 討超注+通鑑 “阜與敍進兵入鹵城, 昂‧奉據祁山, 以討超.”하니 衢因譎說超하여 使自出戰하고 而與寬閉門하고 盡殺超妻子注+譎, 詐也.하다
超襲歷城하여 得敍母하여 幷趙月皆殺之하고 與阜戰敗하여 奔漢中하다
張魯欲妻之러니 或曰 有人若此하여 不愛其親이어니 焉能愛人이리오하니 魯乃止하다
冬十一月 하다
以荀攸爲尙書令하고 涼茂爲僕射注+涼茂, 姓名.하고 毛玠, 崔琰, 常林, 徐奕, 何夔爲尙書注+魏置五曹尙書吏部‧左民‧客曹‧五兵‧度支.하고 王粲, 杜襲, 衛覬, 和爲侍中注+自是以後, 侍中遂以四人爲定員.하고
鍾繇爲大理注+大理, 漢廷尉之職.하고 王脩爲大司農하고 袁渙爲郞中令하여 行御史大夫事注+郞中令, 漢光祿勳之職.하고 陳群爲御史中丞注+時以御史大夫爲三公, 以中丞爲御史臺主.하다
得賞賜 皆散之하니 家無所儲하고 乏則取之於人호되 不爲皦察之行이라이나 時人 皆服其淸注+皦, 明也.이러라
時有傳劉備死者러니 群臣 皆賀로되 唯渙 獨否注+渙以嘗爲備擧吏, 獨不賀.러라
操欲復肉刑하여 令曰 昔 陳鴻臚以爲死刑 有可加於仁恩者라하니 御史中丞 能申其父之論乎注+陳群父紀爲漢大鴻臚. 仁恩, 蓋指肉刑也.
對曰 臣父紀以爲漢除肉刑而增笞法 本興仁惻이로되 而死者更衆하니 所謂名輕而實重者也
名輕則易犯이요 實重則傷民이니이다 且殺人償死 合於古制어니와 至於傷人 或殘毁其體而裁翦毛髮 非其理也
若用古刑하여 使淫者下蠶室하고 盜者刖其足이면 則永無淫放穿踰之姦矣注+蠶室, 腐刑所居溫密之室也. 凡養蠶者, 欲其溫而早成, 故爲密室, 蓄火以置之, 而新腐刑亦有中風之患, 須入密室, 乃得以全, 因呼爲蠶室.리이다
夫三千之屬 雖未可悉復注+孝經 “五刑之屬, 三千.”이나 若斯數者 時之所患이니 宜先施用이니이다 漢律殊死之罪 仁所不及也 其餘逮死者 可易以肉刑이면
則所刑之與所生 足以相貿矣注+逮, 近也. 貿, 易也.리이다 以笞死之法으로 易不殺之刑하니 重人支體而輕人軀命也니이다
議者唯鍾繇與群議同하고 餘皆以爲未可行이라하니 操以軍事未罷라하여 顧衆議而止하다


癸巳年(213)
나라 孝獻皇帝 建安 18년이다. 봄 정월에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曹操濡須의 어귀로 진군하여 40만 대군이라고 부풀려 말하니, 孫權이 7만 병력을 인솔하고 조조를 막아서 서로 대치한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조조는 손권의 선박과 무기, 군대의 行伍가 정돈되고 엄숙한 것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식을 낳으려거든 마땅히 孫仲謀(孫權)와 같은 자식을 낳아야 하니,注+仲謀孫權의 자이다. 劉景升(劉表)의 자식(劉琮)과 같은 자는 돼지와 개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손권이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봄물이 막 불어나려 하니, 은 빨리 떠나가야 한다.”라고 하자, 조조는 撤軍하고 돌아갔다.
】 14를 합병하여 9로 만들었다.注+14司州, 豫州, 冀州, 兗州, 徐州, 靑州, 荊州, 揚州, 益州, 涼州, 雍州, 幷州, 幽州, 交州이다. “爲九州”는 司州河東河內, 馮翊扶風, 幽州幷州 두 주를 떼어서 모두 기주로 편입하고, 양주에 소속되었던 것을 모두 옹주에 편입하고 또 사주의 京兆를 옹주로 편입하였으며, 또 사주의 弘農河南을 예주로 편입하고 교주를 모두 형주로 편입하니, 그렇다면 사주, 양주, 유주, 병주, 교주를 줄여서 를 회복한 것이다. 이는 曹操가 스스로 冀州牧을 겸하여 자신이 통솔하는 곳을 넓혀 천하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長江 가에 있는 郡縣의 백성들을 內陸으로 옮겼다.
】 처음에 曹操譙縣에 있을 적에 長江 가에 있는 郡縣들이 孫權에게 經略을 당할까 염려해서 內地 가까이로 옮기고자 하여 蔣濟에게 묻기를 “옛날 官渡에 군대를 주둔했을 적에 燕縣白馬縣의 백성들을 옮겼는데, 백성들이 도망하지 않고 적 또한 감히 노략질하지 못하였다.
이제 淮南의 백성들을 내지로 옮기고자 하니, 어떠한가?”注+燕縣白馬縣은 모두 東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에 장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때에는 우리 군대가 약하고 적이 강하였으므로 옮기지 않으면 반드시 백성들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明公의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고 백성들에게 딴마음이 없으며, 또 人情은 자기가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여 실로 옮기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반드시 불안해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백성들이 서로 놀라고 불안해하여 십여 만 家戶가 모두 동쪽으로 長江을 건너가니, 江西 지역이 마침내 텅 비게 되었고, 合肥 이남에는 오직 皖城(환성)만이 남게 되었다.注+大江(양자강)이 동북쪽으로 흐르므로 歷陽으로부터 濡須의 어귀까지를 모두 江西라 이르고, 建業(秣陵)을 江東이라 하였다.
】 여름 5월에 曹操가 스스로 서서 魏公이 되니, 九錫을 가하였다.
冀州의 10개 을 가지고 曹操를 봉하여 魏公으로 삼고 丞相으로서 예전처럼 冀州牧을 겸하게 하였다.注+이때 冀州河東, 河內, 魏郡, 趙國, 中山, 常山, 鉅鹿, 安平, 甘陵, 平原 등 모두 10개의 魏國으로 만들었다.
九錫을 가하니, 大輅戎輅가 각각 1대이고 玄牡(검은 수말)가 8필이며,注+大輅金輅이니 제사 지낼 때 타는 것이고, 戎輅革輅이니 군대의 일에 타는 것이다. 袞冕의 복식에 붉은 신이 뒤따르고,注+은 가죽신이다. 은 세 등급이 있는데 赤舃이 최상이니, 冕服에 딸린 이다. 軒縣의 음악과 이며,注+(걸다)은 으로 읽는다. 南面에 걸지 않는 것은 天子를 피한 것이다. 朱戶에 거처하고 納陛에 오르며,
大輅大輅
革輅革輅
虎賁이 300명이고 鈇鉞이 각각 하나씩이며, 붉은 활이 1개이고 붉은 화살이 100개이고 검은 활이 10개이고 검은 화살이 1,000개이며,注+와 같으니, 검은색이다. 검은 기장과 鬱金으로 빚은 鬱鬯酒가 한 동이이고 이 여기에 뒤따랐다.
】 큰비가 내려 홍수가 졌다.
劉璋이 장수 吳懿 등을 보내어 劉備를 막다가 패하여 모두 항복하니, 유비가 진군하여 雒城을 포위하였다.
益州從事廣漢 사람 鄭度劉璋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左將軍(劉備)이 孤立無援의 군대를 이끌고 우리를 습격하여 들판의 곡식을 먹으며 지내고 있으니,
창고와 들의 곡식을 한결같이 모두 불태워 없애며, 보루를 높이 쌓고 해자를 깊이 파고서 유비가 싸움을 청하여도 응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100일이 지나지 않아 저들이 장차 스스로 달아날 것이니, 달아날 때 공격하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注+劉璋巴郡墊江縣(점강현) 이상을 나누어 巴西郡으로 만들었다. 梓潼縣廣漢郡에 속하였다. (납)은 들임이다. 涪水廣漢의 남쪽에서 발원하여 漢水로 들어간다. 劉備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였는데,
灋正(법정)이 말하기를 “유장이 끝내 그 계책을 쓰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注+古字이다. 하였다. 유장이 과연 그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고, 백성을 옮겨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고는 그의 장수 吳懿 등을 보내어 유비를 막게 하였는데, 모두 패하여 후퇴하였다.
오의가 군중에 나와 항복하자, 유장은 다시 李嚴費觀을 보내어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는데注+은 음이 이니, 費觀은 사람의 성명이다. 이엄과 비관 또한 항복하니, 유비의 군대가 더욱 강성해졌다.
유비는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서 屬縣들을 평정하고 나아가 雒城을 포위하니, 낙성을 지키던 장수 張任이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注+雒城廣漢郡 雒縣이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처음으로 宗廟社稷을 세웠다.
魏公 曹操가 세 딸을 황제에게 바쳐 貴人으로 삼게 하였다.注+曹操의 세 딸은 장녀는 曹憲, 다음은 曹節, 그 다음은 曹華인데, 조절을 뒤에 皇后로 세웠다.
】 8월에 馬超涼州에 침입하여 刺史를 죽였다. 9월에 參軍事楊阜가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니, 마초가 漢中으로 달아났다.
】 처음에 曹操馬超를 추격하여 安定에 이르렀다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적에, 涼州 參軍事楊阜가 조조에게 말하기를注+涼州刺史 韋康楊阜辟召하여 別駕로 삼았다가 參軍事로 남아 있게 하였다. “마초는 韓信黥布의 용맹이 있고 羌族胡族의 마음을 얻고 있으니, 만약 대비하지 않으면 隴上의 여러 이 국가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注+, ”는 를 이른다. 隴西, 南安, 漢陽, 永陽은 모두 隴上의 여러 이다. 하였다.
조조가 돌아가자, 마초는 과연 강족과 호족을 거느리고서 농상의 여러 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오직 만이 굳게 지켰다.注+冀縣漢陽郡에 속하니, 한양군과 涼州刺史의 치소가 있는 곳이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涼州刺史 韋康太守가 항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양부가 울부짖고 통곡하며 간하기를 “저희들은 부형과 자제들을 인솔하고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여 죽을 때까지 두 마음을 품지 않고서 使君을 위해 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거의 이루어진 을 버리고 不義하다는 罪名에 빠지십니까.” 하였다.
그러나 위강 등은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마초를 맞이하니, 마초가 들어와서 마침내 위강 등을 살해하였다. 조조가 夏侯淵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는데, 마초가 하후연을 맞아 싸워서 패퇴시켰다.
】 마침 楊阜가 아내의 을 당하여 휴가를 받아 장례하러 갔는데,注+資治通鑑≫에는 “求假”의 위에 “就超(마초에게 찾아가서)” 두 글자가 있다. 休假()이니, “求假(휴가를 청함)”는 옛날의 請告, 請急이라는 말과 같다. 양부의 外兄(外從兄)인 姜敍가 군대를 거느리고 歷城에 주둔해 있었다.注+이다. ≪水經註≫에 “歷城西縣에 있으니 仇池와의 거리가 120리인데, 뒤에 이름을 고쳐 建安城이라 했다.” 하였다. 양부가 강서와 그 어머니(고모)를 만나보고 크게 탄식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강서가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슬퍼하는가?” 하자, 양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고 자사와 태수가 죽었는데도 함께 죽지 못했으니, 또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注+視息”은 눈만 뜨고 숨(생명)을 보전한 것이다.
馬超는 아버지를 등지고 군주를 배반하고 의 장수(자사와 태수)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注+背父”는 馬騰鄴城에 있을 적에 馬超가 돌아보지 않고 배반한 것을 이른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저 혼자 근심하고 책임질 일이겠습니까. 한 大夫가 모두 그 치욕을 입었습니다.
은 군대를 거느리고 마음대로 통제하면서도 역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으니, 이런 마음 때문에 ≪春秋≫에서 趙盾(조돈)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쓴 것입니다.注+趙盾나라의 趙宣子이다. ≪春秋左氏傳宣公 2년에 “趙穿靈公桃園에서 공격(시해)하였는데, 조선자가 〈망명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국경에 있는〉 을 나가지 않고 돌아왔다. 太史가 쓰기를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 하여 조정의 대신들에게 보이니, 조선자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하였다. 태사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正卿이 되어서 도망할 적에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군주를 시해한 자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인가?’ 했다.” 하였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州將(刺史)을 군주에 비유하고 姜敍를 조돈에 비유한 것이다. 마초는 강하지만 의리가 없고 약점이 많아 도모하기가 쉽습니다.”
姜敍의 어머니가 분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伯奕아! 韋使君(韋康)이 난을 만난 것은 또한 너의 책임이기도 하니, 어찌 다만 義山의 책임일 뿐이겠느냐.注+
楊阜가 병사를 빌려 馬超를 격파하다楊阜가 병사를 빌려 馬超를 격파하다
當沒이니, 한탄하는 소리이다. 일설에 “꾸짖는 말이다.” 한다. 伯奕姜敍의 자이다. 罪責(過失)이다. 義山楊阜의 자이다.
사람이 누구인들 죽지 않겠는가. 忠義에 죽는 것이 죽을 곳을 얻는 것이다.
너는 다만 마땅히 속히 군대를 일으켜야 하니, 나는 나의 餘生을 가지고 너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 강서는 마침내 趙昂, 尹奉 등과 함께 모여 擧事를 모의하고 또 사람을 冀城으로 보내서 梁寬, 趙衢와 결탁하여 그들로 하여금 內應이 되게 하였다.
이때 馬超가 이미 조앙의 아들 趙月을 데려다가 인질로 삼고 있었는데, 조앙이 아내 士異에게 이르기를 “나의 계책은 이와 같지만 저 조월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注+아내의 이름이 이니, 士氏의 딸이다. 하니,
사이가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君父의 큰 치욕을 씻을 수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잃는 것도 아깝지 않은데, 하물며 한 자식이겠습니까.”注+은 씻음이다. 은 머리이다. 하였다.
】 9월에 楊阜姜敍, 趙昂, 尹奉과 함께 馬超를 토벌하니,注+資治通鑑≫에는 “楊阜姜敍와 함께 진군하여 鹵城(노성)으로 들어가자, 趙昂尹奉祁山을 점거하여 馬超를 토벌했다.” 하였다. 趙衢가 이 틈에 거짓말로 마초를 설득하여 직접 나가 싸우게 하고는 梁寬과 함께 성문을 닫고 마초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注+은 속임이다.
마초는 歷城을 기습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사로잡아 趙月과 함께 모두 죽이고, 양부와 싸워 패하자 漢中으로 달아났다.
張魯가 마초를 사위 삼으려고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저 마초는 인품이 이와 같아서 자기 어버이도 사랑하지 않으니,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하자, 장로가 마침내 마초를 사위 삼으려는 생각을 접었다.
】 겨울 11월에 나라가 처음으로 尙書, 侍中, 六卿을 설치하였다.
荀攸尙書令으로 삼고, 涼茂僕射(복야)로 삼고,注+涼茂는 사람의 성명이다. 毛玠, 崔琰(최염), 常林, 徐奕, 何夔(하기)를 尙書로 삼고,注+나라가 五曹尙書吏部, 左民, 客曹, 五兵, 度支(탁지)를 설치하였다. 王粲, 杜襲, 衛覬(위기), 和洽侍中으로 삼고,注+이로부터 이후로 侍中은 마침내 네 사람을 定員으로 삼았다.
鍾繇大理로 삼고,注+大理나라 廷尉의 직책이다. 王脩大司農으로 삼고, 袁渙郞中令으로 삼아 御史大夫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注+郞中令나라 光祿勳의 직책이다. 陳群御史中丞으로 삼았다.注+
袁渙下賜받은 재물을 모두 사람들에게 흩어주니 집안에 저축된 바가 없었고, 궁핍하면 남에게서 취하여 썼으나 〈자신의 청렴함을〉 밝게 드러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淸白함에 감복하였다.注+는 밝음이다.
이때 劉備가 죽었다고 전하는 자가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은 모두 축하하였으나 오직 원환이 홀로 축하하지 않았다.注+〈“惟渙獨否”는〉 袁渙이 일찍이 劉備의 천거로 관리가 되었으므로 홀로 축하하지 않은 것이다.
曹操을 회복하고자 하여 명령하기를 “옛날에 陳鴻臚(陳紀)가 말하기를 하였으니, 御史中丞이 부친의 의논을 다시 펼 수 있는가?”注+陳群의 아버지인 陳紀나라의 大鴻臚를 지냈다. “仁恩”은 肉刑을 가리킨 것이다. 하였다.
이에 陳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의 아비 陳紀가 말하기를 ‘은 본래 인자하고 측은한 마음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죽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이른바 형벌의 명칭은 가벼워졌으나 실제는 무거워졌다는 것입니다.
형벌의 명칭이 가벼워지면 죄를 범하기 쉽고 실제가 무거워지면 백성을 상하게 됩니다. 또 사람을 죽인 자에게 죽음으로 補償하는 것은 옛날 제도에 부합하지만, 사람을 상해한 자에 대해서 혹은 그 신체를 훼손하고 그 모발을 깎는 것은 올바른 의리가 아닙니다.
만약 옛날 형벌을 사용하여 음탕한 자는 宮刑에 처해 蠶室로 내려보내고 도둑질한 자는 그 발을 베면, 음탕하고 도둑질하는 간악함이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注+蠶室腐刑을 받은 자가 거처하는 따뜻하고 밀폐된 방이다. 무릇 누에를 기르는 자는 누에를 기르는 방을 따뜻하게 하여 누에가 일찍 성장하기를 바라므로 밀실을 만들어서 불을 지펴두는데, 막 부형을 당한 자 또한 바람을 맞아 상처가 잘못될 염려가 있어서 모름지기 밀실에 들어가야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으므로 인하여 잠실이라고 칭한 것이다.
3,000가지 五刑의 등속을 비록 다 회복할 수는 없으나注+ 이와 같은 몇 가지는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이니, 마땅히 먼저 시행해야 합니다. 나라의 법률에 殊死(사형)의 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이 미치지 않는 바이지만, 그 나머지 죽을죄에 가까운 죄를 지은 자는 肉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注+는 가까움이요, 貿交易함이다. 지금 笞刑을 무겁게 하여 죄인을 죽이는 법으로써 죄인을 죽이지 않는 형벌(육형)과 바꾸었으니, 이는 사람의 支體를 소중히 여겨 〈肉刑을 가하지 않고 笞刑을 엄하게 시행하여〉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 의논하는 자들 중에 오직 鍾繇陳群의 의견과 같았고 나머지는 모두 肉刑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니, 曹操는 군대의 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고려하여 육형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역주
역주1 禹貢의 九州 : 〈禹貢〉은 ≪書經≫의 편명으로, 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九州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賦稅와 貢物을 바치게 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구주의 경계와 名山大川을 열거하여 중국 최초의 地理書가 되었는바, 여기의 구주는 豫州, 冀州, 兗州, 徐州, 靑州, 荊州, 揚州, 雍州, 梁州이다.
역주2 曹操自立爲魏公……加九錫 : “九錫은 王莽 때 처음 썼었는데, 이때에 다시 보인다. 그러나 왕망은 ‘安漢公 王莽에게 구석을 가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이는 명령이 그래도 황제로부터 나온 것이고, 曹操에 이르러는 ‘自’라고 썼으니 왕망보다 더 심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구석을 가할 적에 ‘自’라고 쓴 것이 11번이니, 모두 조조가 가르친 것이다.[九錫自莽始書 於是再見 然莽書加安漢公莽九錫 則命猶自上出也 至操書自 則又甚於莽矣 終綱目 九錫書自者十一 皆操之敎也]” ≪書法≫
역주3 玄牡는……고하였다 : 玄牡는 天地에 제사 지낼 때 쓰이는 검은 수소로, ≪書經≫ 〈商書 湯誥〉의 검은 犠牲을 써서 上天과 后土에게 아뢴 내용에 근거하여 訓義를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九錫의 내용(玄牡二駟)에 근거하여 검은 수말로 해석하였다.
역주4 六佾의 춤 : 佾은 춤추는 자의 대열로 六佾은 6열을 이르는바, 天子는 8열, 諸侯는 6열, 大夫는 4열, 士는 2열인데, 1열에 8명이라고도 하고 열에 맞춰 2명씩 줄어든다고도 한다. 예컨대 8열에 8명씩이면 천자는 8×8=64명, 제후는 8×6=48명, 대부는 8×4=32명, 사는 8×2=16명이 된다. 그러나 열에 맞추면 천자는 8×8=64명이어서 변동이 없지만 제후는 6열에 6명씩이어서 6×6=36명, 대부는 4×4=16명, 사는 2×2=4명에 그치게 된다.
역주5 諸侯는……軒縣하는데 : 王은 宮縣을 하고 諸侯는 軒縣을 하는데, 宮縣은 사방에 악기를 거는 것이고 軒縣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에 악기를 거는 것이다.(≪周禮≫ 〈春官 小胥〉)
역주6 巴西와……들여보내고 : 訓義에 따라 원문의 ‘內涪水以西’를 ‘涪水 서쪽으로 들여보내다.’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資治通鑑≫ 標點本(中華書局)에는 ‘盡驅巴西‧梓潼民 內‧涪水以西’로 떼어서 巴西와 梓潼의 백성들을 內水와 涪水 서쪽으로 모두 몰아내는 것으로 보았으며, 胡三省의 註에도 “梓潼의 물은 바로 五婦의 물이니, 함께 墊江으로 들어가는바, 바로 이른바 內水라는 것이다.[梓潼水卽五婦水也 同入于墊江 卽所謂內水也]” 하였다. 또 本書 아래 19년 조에 “劉備가 趙雲을 나누어 보내 外水를 따라 江陽과 犍爲를 평정했다.[分遣雲 從外水定江陽犍爲]” 하였고,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를 그대로 인용하여 “지금의 渝州 또한 漢나라 巴郡의 땅이다. 두 水口를 마주하였으니, 오른쪽은 涪內水이고 왼쪽은 蜀外水인바, 유주의 위 合州로부터 綿州에 이르는 것을 內水라 이르고 유주의 위 戎瀘로부터 蜀 지역에 이르는 것을 外水라 이른다.[今渝州亦漢巴郡地也 對二水口 右則涪內水 左則蜀外水 自渝上合州至綿州者 謂之內水 自渝上戎瀘至蜀者 謂之外水]” 하였는바, 여기의 內는 納의 뜻이 아니고 涪內水로 보아야 할 듯하다.
역주7 (墊) : 저본에는 ‘墊’자가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8 魏始建宗廟社稷 : “‘始’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참람한 시초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魏公操’라고 쓰지 않고 ‘魏’라고 써서 은연중에 한 敵國처럼 대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宗廟에 ‘始’라고 쓴 것이 2번이고(이해와 後主 延熙 18년(255) 吳나라), ‘初’라고 쓴 것이 1번이니(五代時代 丁巳年(957) 北漢), 오직 吳나라와 北漢은 느슨한 말이 된다.[書始 何 志僭始也 故不書魏公操 而書曰魏 隱若一敵國矣 綱目宗廟書始二(是年 後主延熙十八年吳) 書初者一(五代丁巳年北漢) 惟吳與北漢爲緩辭]” ≪書法≫
역주9 魏公操 納三女爲貴人 : “妃妾은 쓰지 않는데, 여기에서 쓴 것은 어째서인가. 曹操를 비난한 것이다. 劉聰이 劉殷의 세 딸을 받아들여서 貴嬪으로 삼자 ‘漢主納(漢主(劉聰)가 받아들이다.)’이라고 썼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操納(조조가 바치다.)’이라고 썼는가. 황제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황제의 처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조의 耳目(첩자)였는데 또 세 貴人을 바쳤으니, 조조의 마음을 알 수 있다. ‘操納’이라고 특별히 쓴 것은 조조의 마음을 죄책한 것이다. 비첩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명하여 비첩을 들였다.’고 쓴 것이 모두 10번인데, 모두 비난한 것이다. 오직 鄭氏를 充華로 삼으려 한 것을 쓴 것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바친 것으로 글을 쓴 경우는 魏公 曹操 한 사람뿐이다.[妃妾不書 此其書 何 譏也 劉聰納劉殷(三)[二]女 爲貴嬪 書漢主納 此則曷爲以操納書 非帝意也 於是帝所 皆操耳目 又納三貴人焉 操之心可知矣 特書操納 誅心也 書妃妾始此 終綱目 書命納妃妾十 皆譏也 惟鄭氏爲充華 爲美辭 至以下納上爲文者 魏公操一人而已]” ≪書法≫ 劉聰의 일은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 제18권 상 晉 懷帝 永嘉 6년(312) 綱에 “봄 정월에 漢主 劉聰이 劉殷의 두 딸을 받아들여 貴嬪으로 삼았다.”라고 보이는바 이에 따르면 여기에서도 “獻帝가 曹操의 세 딸을 받아들여 貴人으로 삼았다.”라고 표기해야 할 것이다. 이때는 황제의 뜻이 아니고 曹操가 자신의 세 딸을 황제에게 바쳐 궁중의 일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鄭氏를 充華로 삼은 것은 ≪資治通鑑≫ 〈唐紀〉 貞觀 8년에 “隋나라 通事舍人 鄭仁基의 딸을 맞이하여 充華로 삼았다.[帝聘隋通事舍人鄭仁基女 爲充華]”라고 보인다. 정인기의 딸이 용모가 매우 뛰어나 太宗이 충화라는 후궁으로 삼고자 하여 詔令까지 내렸는데, 魏徵이 그녀가 이미 陸爽이라는 선비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태종에게 간하여 남의 처를 빼앗아 후궁으로 들이는 일을 중지시켰다.
역주10 韓信과 黥布 : 한신은 前漢 초기 淮陰 사람으로 처음엔 項梁과 項羽를 따랐으나 중용되지 못하자, 漢王 劉邦에게 망명하여 蕭何의 추천으로 大將軍에 올랐다. 유방에게 천하를 도모할 것을 건의하고, 군대를 이끌고 魏나라와 代나라를 격파한 뒤 燕나라를 함락시키고 齊나라를 점령하였다. 이어 유방과 함께 垓下에서 항우를 포위해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고 楚王에 봉해졌으나, 뒤에 呂后와 소하의 謀計로 잡혀 모반죄로 三族이 멸족되었다. 경포는 항우의 밀명을 받고 義帝를 江中에서 시해하였는데, 뒤에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을 도와 淮南王에 봉해졌다. 한신과 똑같은 功臣인 彭越이 유방에게 죽임을 당하자 경포는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高祖(유방)의 토벌을 받고 패망하였다.
역주11 冀城 : 冀縣으로 漢陽郡에 속하며, 漢陽郡은 涼州에 속한다.
역주12 (楊)[陽]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外兄은……아들 : 外兄은 外從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外從은 外叔(외삼촌)의 아들을, 內從은 고모의 아들을 지칭하여 이와 반대이다. 고대 문헌에는 모두 고모의 아들을 외종, 외숙의 아들을 내종이라 하였으며, 외숙을 內舅, 妻父(장인)를 外舅라 하였다.
역주14 魏初置尙書 侍中 六卿 : “이는 왕(황제)의 벼슬인데 魏나라가 설치하였으니, 曹操는 儼然히 황제인 것이다. ‘初’라고 쓴 것은 참람한 시초를 기록한 것이다.[此王官也 而魏置之 儼然帝矣 書初 志僭始也]” ≪書法≫
역주15 이때……하였다 : ≪宋書≫ 〈百官志〉에 御史大夫의 변천에 대해 서술하였다. 어사대부는 前漢 시기에 명칭이 계속 변하였는데 哀帝 元壽 2년(B.C.1)에 大司空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어사대부의 次官으로 있던 御史中丞이 독립하여 御史臺의 長官이 되고 御史長史로 명칭이 바뀌었다. 光武帝 때에 御史中丞으로 환원되고 少府에 소속되었다. 獻帝 때 다시 御史大夫를 설치하지만 어사중승을 통솔하지는 못하였다.
訓義는 어사중승은 원래 어사대부의 次官이었지만 어사대부가 三公으로 격상하면서 탄핵을 담당하는 御史臺의 長官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역주16 (合)[洽] : 저본에는 ‘合’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肉刑 : 죄인의 몸에 직접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 첫 번째는 가벼운 죄를 지은 자에게 가하는 墨刑, 두 번째는 코를 베는 劓刑(의형), 세 번째는 발을 자르는 刖刑(월형), 네 번째는 去勢하는 宮刑, 다섯 번째는 死刑인 大辟이다.
역주18 사형이……있다 : 仁恩을 베풀기 위하여 肉刑을 없애고 대신 笞刑을 가하였으나 죄인들이 혹독한 태형을 받고 도리어 죽는 자가 많았는바, 이는 곧 죄가 가벼워 육형을 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결국 죄가 무거운 사형을 가하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9 漢나라가……증가시킨 것 : 前漢 文帝 12년(B.C.168)에 詔令을 내려 肉刑을 없앴으나 笞刑을 맞고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태형을 줄였는바, 景帝 원년 조(B.C.156)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이보다 앞서 文帝가 肉刑을 없애니, 밖으로는 형벌을 경감했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실로 사람을 죽게 하였다. 오른발을 벨 자는 또 사형에 해당시키고, 왼발을 벨 자는 笞刑 500대를 치고, 코를 베는 데 해당하는 자는 태형 300대를 치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해에 詔令을 내리기를 ‘태형을 가하는 것은 중한 죄(사형)와 다름이 없다. 요행히 죽지 않더라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법률을 정하여 태형 500대는 300대로 낮추고, 태형 300대는 200대로 낮추라.’ 했다.[初文帝除肉刑 外有輕刑之名 內實殺人 斬右趾者 又當死 斬左趾者 笞五百 當劓者 笞三百 率多死 是歲 下詔曰 加笞 重罪無異 幸而不死 不可爲人 其定律 笞五百曰三百 笞三百曰二百]” 하였다.
역주20 孝經……하였다 : 五刑은 다섯 가지 肉刑으로 얼굴에 자자하는 墨刑, 코를 베는 劓刑, 발꿈치를 베는 刖刑, 남녀의 생식기를 못 쓰게 하는 宮刑, 사형인 大辟이다. ≪孝經≫ 〈紀孝行〉에 “오형의 종류가 3,000가지인데, 不孝보다 큰 죄가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라고 하여, 오형의 조목이 자세하지 않으나 ≪書經≫ 〈周書 呂刑〉에는 “墨罰의 종류가 1,000가지이고 劓罰의 종류가 1,000가지이고 剕(刖)罰의 종류가 500가지이고 宮罰의 종류가 300가지이고 大辟의 종류가 200가지이니, 五刑의 종류가 3,000가지이다.[墨罰之屬千 劓罰之屬千 剕罰之屬五百 宮罰之屬三百 大辟之罰其屬二百 五刑之屬三千]” 하여 그 조목이 자세히 보인다.
역주21 형벌을……것입니다 : 당시 劓刑이나 刖刑인 肉刑을 죄인의 신체에 직접 가하지 않고 대신 笞刑을 무겁게 가하여 태형을 맞은 자가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육형을 회복하고 태형을 가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 仁恩을 가하는 것이라 하여, 육형을 가하는 것과 살려주는 것이 서로 보상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원문의 ‘貿’는 서로 物物交換하는 것으로 ‘보상’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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