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봄 2월에 魏나라 司馬師가 中書令李豐과 太常夏侯玄과 光祿大夫張緝을 죽이고 마침내 皇后張氏를 폐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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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李豐이 17, 8살 때에 이미 고결한 명망이 있었다. 이풍의 아버지 李恢는 기뻐하지 않아서 그에게 문을 닫고 교유를 끊게 하였다.注+“斷客”은 絶交라는 말과 같다. 그 뒤에 司馬師가 정권을 잡아 이풍을 中書令으로 임명하였다.
그때 太常夏侯玄이 천하에 큰 명망이 있었는데 曹爽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권세 있는 직위를 얻지 못하니, 평소에 불평하였다.注+“勢任”은 권세 있는 직임이다.張緝이 황후의 아버지로서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면서 또한 뜻을 얻지 못했다.注+張緝은 張后의 아버지였으므로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이풍이 그들과 모두 친하게 잘 지내어, 비록 사마사에게 발탁되었으나 마음으로는 늘 하후현을 생각하였고, 魏主曹芳이 또 자주 이풍을 홀로 불러 이야기하니, 사마사는 그들이 자기를 논의한 것을 알아차리고 힐문하였는데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사마사는 노하여 칼자루에 달린 고리로 쳐서 이풍을 죽이고注+鐶(고리)은 戶關의 切이니, 칼자루 위에 고리가 있다. 築은 찧는다는 뜻이다. 마침내 하후현과 장집을 체포하여 廷尉에게 회부하였다.
鍾毓이 신문하여 다스려 말하기를 “이풍 등이 大將軍(사마사)을 주살하여 하후현으로 대신하게 할 것을 꾀하였고 장집은 그 모의를 알았다.”라고 하니, 마침내 三族을 모두 멸족하고 張后도 아울러 폐위하였다.注+鍾毓은 鍾會의 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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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夏侯霸가 蜀漢으로 도망쳐 들어갈 적에 하후현을 맞이하여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하후현이 따르지 않았다. 司馬懿가 薨하자 中領軍許允이 말하기를 “다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하후현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마의는 그래도 교유하는 집안의 연소자로 나를 대우해주었으나 子元(司馬師)과 子上(司馬昭)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注+子元은 司馬師의 字이다. 子上은 司馬昭의 字이다.라고 하였다. 옥에 갇혔을 때 하후현은 죄를 승복하는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注+“下辭”는 屈服하는 말이다.
鍾毓이 밤에 供招를 만들어 눈물을 흘리며 보여주니 하후현은 보고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東市(사형장)에 가게 되었을 때 안색이 변하지 않고 행동도 태연자약하였다.
뒤에 허윤이 鎭北將軍이 되어 외방으로 나가면서 魏主曹芳과 이별할 때 울면서 흐느끼자, 사마사가 有司에게 넌지시 타일러 허윤의 죄상을 아뢰게 하여 樂浪으로 유배 보냈는데 도중에 죽었다.注+≪資治通鑑≫에 “有司가 아뢰기를 許允이 이전에 관청 물건을 함부로 썼다.” 하였다.
李豐의 아우 李翼이 兗州刺史가 되었다. 사마사가 사자를 보내 체포하게 하니, 이익의 아내 荀氏가 말하기를 “詔書가 도착하기 이전에 吳나라로 도주할 수 있는데, 어찌 앉아서 죽임을 당한단 말입니까. 측근 중에 물과 불에 함께 뛰어들 만한 자는 누구입니까?”注+물과 불에 뛰어드는 자는 들어가면 반드시 타거나 빠지니 본래 죽기 살기를 같이하자고 맹세하지 않았으면 어찌 기꺼이 서로 따라 들어가겠는가. 이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익이 생각하였으나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아내가 말하기를 “君께서 큰 고을을 맡고서 생사를 같이할 만한 자를 알지 못하니, 비록 도주한다고 해도 역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망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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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李恢가 尙書僕射杜畿, 東安太守郭智와 잘 지냈다.注+東安縣은 前漢 때에는 城陽國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琅邪國에 속하였고, 魏나라 때에는 나누어 郡으로 만들었다. 곽지의 아들 郭沖이 內實은 있으나 겉모습이 볼만한 것이 없어 고을에서 칭송함이 없었다.
곽충이 일찍이 李豐과 함께 두기를 만나보았는데, 물러난 뒤에 두기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孝懿(이회)는 아들이 없겠구나.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집안도 없어질 것이다.注+孝懿는 李恢의 字이다.
君謀(곽지)는 죽지 않을 것이니, 그 아들이 충분히 그 가업을 계승할 것이다.”注+君謀는 郭智의 字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두기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이풍이 죽고 나자 곽충은 郡守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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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正始 연간에 夏侯玄과 何晏, 鄧颺이 모두 큰 명성이 있었는데 傅嘏와 교유하려 하였으나 부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荀粲이 괴상하게 여겨 묻자 부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泰初(하후현)는 뜻이 기량보다 커서 헛된 명성에 부합할 수는 있으나 실제 재주가 없다.
鄧玄茂(등양)는 밖으로 名利를 바라면서 안으로 단속함이 없고, 자신과 같이하는 이를 중시하고 달리하는 이를 싫어하며 말이 많고 앞선 자를 투기하니, 말이 많으면 틈이 많이 생기고 앞선 자를 투기하면 친한 이가 없다.注+玄茂는 鄧颺의 字이다. 要(바라다)는 以消의 切이다. 鑰은 문빗장 아래 달린 막대이니 쇠로 만드는데, 자물쇠 안에 꽂아 그 문빗장을 잡아채는 것이다. “貴同惡異”는 남이 자기와 같이하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자기와 달리하는 것을 싫어함을 말한다. “妬前”은 앞선 이를 꺼리는 것이니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이를 투기하면 친한 사람이 없다.
내가 이 세 사람을 살펴보니 모두 집안을 패망시킬 것이다. 이런 자들을 멀리하여도 오히려 화가 미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가까이하는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부하는 또 李豐과 잘 지내지 못하여 동지들에게 말하였다. “이풍은 거짓을 꾸미며 의심이 많고 작은 지혜를 자랑하며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었으니 만약 機務를 담당하면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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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에 姜維가 魏나라를 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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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가을 9월에 魏나라 司馬師가 그 임금 曹芳을 폐위시키고 齊王으로 삼아 河內로 옮겨 살게 하고, 겨울 10월에 高貴鄕公曹髦를 맞이하여 황제로 즉위시켰다.
司馬師가 주군을 폐하고 새로 임금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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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曹芳은 李豐의 죽음으로 마음이 매우 평안하지 못하였다. 安東將軍司馬昭가 許昌에 鎭守하였는데 조서로 불러서 姜維를 공격하게 하였다.
9월에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알현하자 조방은 平樂觀에 행차하여 군대의 행군을 사열하였다.注+平樂觀은 洛陽城 서쪽에 있다. 측근들이 조방에게 권하여 사마소가 하직 인사를 할 때를 이용하여 그를 죽이고 군사를 지휘하여 大將軍(司馬師)을 물리치자고 하였다.
이미 면전에서 조서를 작성하였으나 조방은 겁이 나서 감히 발표를 하지 못하였다. 사마사가 太后의 명령으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논의하기를 魏主가 荒淫하여 법도가 없고 女樂들을 가까이하니,
皇統을 계승할 수 없다고 하자注+“倡優”은 女樂이다. 여러 신하들은 감히 어기는 이가 없었다. 이에 아뢰어 조방의 璽綬를 거두어들여 〈조방의 원래〉 封地인 齊나라로 돌려보내고 彭城王曹據를 즉위하게 하였다.注+曹據는 武帝(曹操)의 아들이다.
조방이 태후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諸侯王의 수레를 타고서 太極殿에서 남쪽으로 나가니注+“王車”는 諸王들이 타는 靑蓋(푸른색 일산)가 있는 수레이다. 전송하는 신하들이 수십 명이었다. 太尉
司馬孚가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였고 나머지도 대부분 눈물을 흘렸다. 태후가 말하기를 “팽성왕은 〈나에게는〉 작은아버지이다. 지금 오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注+之는 간다는 뜻이다.
사마사가 다시 신료들을 불러 논의하여 조모를 元城縣에서 맞이하였다.注+元城縣은 漢나라 때에는 魏郡에 속하였고, 魏나라 때에는 陽平郡에 속하였는데, 이때 魏나라 王‧公들을 모두 잡아서 鄴에 安置하였므로 曹髦를 鄴에서 내보내서 원성현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를 맞이한 것이다. 조모는 東海定王曹霖의 아들로, 이때 나이가 14살이었다.
사마사가 사자를 보내 璽綬를 청하여 조모를 맞이하겠다고 하였는데, 태후가 말하기를 “나는 고귀향공을 보아와서 어릴 때부터 알고 있으니 璽綬를 직접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하기를 “魏나라가 玄武館을 芒山 변두리에 세웠다.”라고 하였다. 현무관은 망산 끝자락에 있는데 그 지역은 洛城 북쪽에 닿는다. 여러 신하들이 주청하여 前殿에 머물게 하였는데 조모는 先帝의 옛 거처라고 하여 西廂으로 피하여 머물렀고,注+“前殿”은 玄武館의 前殿(正殿)이다.
여러 신하들이 또다시 청하여 法駕(천자 수레의 일종)를 가지고 영접하겠다고 하자 따르지 않았다. 洛陽에 들어왔을 때 여러 신하들이 맞이하여 절을 하자 조모가 수레에서 내려 答拜를 하였다.注+儐(인도하다)은 必刃의 切이니, 〈“儐者”는〉 도와서 인도하는 사람이다. “儀不拜”는 예법상 答拜하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儐者가 청하기를 “예의상 절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조모가 말하기를 “나는 신하의 신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答拜를 하였다.
止車門에 이르러 左右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들어갔습니다.”注+洛陽官府는 남쪽, 동쪽, 서쪽 세 곳에 止車門이 있는데 신하들이 이 문에 이르면 수레를 멈추고 걸어 들어가고, 오직 임금만이 수레를 타고 들어간다.라고 하니, 조모가 말하기를 “나는 부름을 받았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注+天子만이 수레를 타고 止車門에 들어갈 수 있는데, 자신이 방금 부름을 받아 어찌 할 줄 몰라 天子로 자처할 수 없음을 말한다.라고 하고,
역주1魏司馬師……遂廢其后張氏 :
“신하가 황후를 폐위한 것을 쓴 것이 司馬師로부터 시작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황후가 신하에게 폐위된 것은 세 번이다.(魏나라 張后와 晉나라 賈后, 羊后)[書臣子廢其后 自司馬師始 終綱目 書后爲臣所廢三(魏張后 晉賈后羊后)]” ≪書法≫ “李豐 등을 ‘殺’이라고 기록하면서 모두 그 관직을 삭제하지 않은 것은 司馬師의 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마사를 주살하려고 한 계획을 인정해주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虛名無實한 사람은 의리를 지켜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없고 다만 제 몸을 죽일 뿐이니,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書法의 뜻이다.[豐等書殺 而皆不去其官 所以正司馬師之罪 然不予其謀誅師者 何耶 虛名無實之人 非能仗義有爲 特足以殺其軀而已 何足貴哉 此固書法之意也]” ≪發明≫
역주2(領)[頷] :
저본에는 ‘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8,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頷’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말 잘하는……사람이다 :
원문의 ‘利口覆邦國之人’은, ≪論語≫ 〈陽貨〉에 “잡색인 자줏빛이 원색인 붉은빛의 자리를 뺏는 것을 미워하며, 鄭나라의 음란한 음악이 바른 雅樂을 문란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며,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역주4魏司馬師廢其主芳……立之 :
“임금 曹芳을 폐위하여 옮겨 살게 하고 高貴鄕公 曹髦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고 쓴 것은 쉽게 이루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니, 司馬氏의 위세가 이루어진 것이다.[書廢其主芳 遷之 迎高貴鄕公髦 立之 易(이)辭也 司馬氏之勢 成矣]” ≪書法≫
역주5黃初……삼는다 :
世嫡은 대를 이어가는 맏아들이다. 大宗은 嫡長子를 이어가는 계통이고, 나머지 아들은 小宗이 된다. 支子는 嫡長子를 제외한 아들, 즉 庶子로, 둘째 아들 이하를 말한다.
역주6[亭] :
저본에는 ‘亭’이 없으나, ≪三國志≫ 〈魏書 文帝紀〉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太)[大宗] :
저본에는 ‘太’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大宗’으로 바로잡았다. 아래에도 동일하다.
역주8酈道元 :
466~527. 北魏 孝文帝 때의 文臣으로 벼슬은 荊州刺史‧關右大使를 지냈다. 학문을 좋아하고 奇書를 많이 보았으며, ≪水經注≫를 저술하였다.
역주9太極殿은……小寢이다 :
路寢은 天子와 諸侯의 正寢(正廳)이다. 周나라에는 路寢이라 하였고, 漢나라에는 正殿이라 하였다. 小寢은 天子와 諸侯의 寢宮(燕寢)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