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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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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年(245)
八年이라
魏正始六年이요 吳赤烏八年이라.
吳殺其太子太傅吾粲하다
吳太子和 與魯王同宮하고 禮秩如一하니 群臣多以爲言이라 吳主權 乃命分宮別僚하니 二子由是有隙注+別僚, 分別二宮臣僚, 令各有差等.이러라
全琮遣其子寄하여 事魯王하니 陸遜謂曰 子弟苟有材 不憂不用이니
私出以要榮利 終取禍耳注+私出, 謂出私門也. 要, 一遙切. 聞二宮勢敵하니 此古人之深忌也니라
寄果阿附交構어늘 遜又與書曰 卿不師日磾而宿留阿寄하니 終爲門戶禍矣라커늘 琮不納注+日磾事見漢武帝後元二年. 宿留, 猶遲疑不決之意. 蓋全琮遣其子寄, 事魯王, 陸遜嘗戒之, 不納, 故謂全琮不法金日磾殺子之明斷, 而遲疑不決, 縱令其子阿附魯王也.하다
霸曲意交結名士러니 將軍朱績 以膽力稱注+績, 然之子也.이라 霸自詣之하여 欲與結好어늘 績辭不受하니 於是 仇黨疑貳하여 擧國中分이러라
權長女 適全琮하고 少女 適朱據注+二女, 步夫人所生也. 全公主與太子母王夫人으로 有隙이러니 權寢疾한대 遣太子하여 禱桓王廟注+孫權都建業, 立兄長沙桓王廟於朱雀橋南.하다
太子妃叔父張休 居近廟 邀太子過所居하니 公主因言호되 太子不至廟中하고 專就妃家計議하고
而王夫人見上寢疾하고 有喜色이라한대 權由是發怒하니 夫人以憂死하고 太子寵日衰
霸黨楊笁全寄 從而毁之한대 權惑焉이어늘 陸遜 諫曰 正統藩臣 當使寵秩有差 則彼此得所 上下獲安矣리이다
書三四上하여 辭情危切하니 權不悅이러라
太常顧譚 遜之甥也러니 上疏曰 有國家者 必明嫡庶之端하고
異尊卑之禮하여 使高下有差하고 等級踰邈하면 則骨肉之恩全하고 覬覦之望絶矣注+邈, 遠也.
臣之所陳 非有所偏이라 誠欲以安太子而便魯王也이니이다
由是 霸惡譚하고 全琮亦惡之하여 相與譖之하니 吳主徙譚於交州하다
太子太傅吾粲 請使魯王鎭夏口하고 出楊笁等하여 不得在京師라하고
又數以消息語陸遜注+吾粲, 姓名. 消者, 浸微浸滅之意. 息者, 漸生漸長之意.하니 霸笁譖之한대 吳主怒하여 誅粲하다
吳丞相陸遜하다
吳主權 以魯王霸楊笁之譖으로 數遣使責問遜한대 遜憤恚而卒하니
其子抗代領其衆하여 送葬東還注+自荊州東還葬吳.할새 權以笁所白遜二十事 問抗이어늘 抗事事條答하니 權意乃稍解하다
秋八月 皇太后吳氏崩하다
◑冬十一月 大司馬 蔣琬卒하다
董允秉心公亮하여 獻替盡忠하니 帝甚嚴憚之러라 宦人黃皓 便僻佞慧하니 有寵이라
允數責之하니 皓畏允하여 不敢爲非하고 終允之世 位不過黃門丞注+續漢志 “黃門令丞一人, 以宦者爲之.”이러라
費禕以選曹郞陳祗 代允爲侍中注+漢六曹尙書, 一曹有郞六人. 選曹郞, 屬選部.하니 祗矜厲有威容하고 多技藝挾智數
禕以爲賢이라하여 越次用之하니 祗與皓相表裏 皓始預政하여 遷中常侍하니 操弄威柄하여 終以覆國하다
自祗有寵으로 而帝追怨允日深하니 由祗阿意迎合而皓浸潤構間故也注+構, 謂會其過惡也. 間, 去聲, 離隔也.
○ 時 帝數出遊觀하고 增廣聲樂하니 太子家令譙周 諫曰注+譙, 姓也. 昔王莽之敗 豪傑竝起하여 以爭神器
然莫不快情恣欲하여 怠於爲善이러니 世祖初入河北 馮異勸之曰 當行人所不能爲者라한대
遂理冤獄하고 崇節儉하니 北州歌嘆하여 聲布四遠이라
於是 鄧禹自南陽追之하고 吳漢寇恂 擧兵助之하고 其餘望風慕德하고 輿病齎棺하며 襁負而至 不可勝數
故能以弱爲彊하여 而成帝業하니이다 在洛陽 嘗欲小出이러니 銚期進諫한대 卽時還車注+銚期傳 “光武嘗與期門近出, 期頓首車前曰 ‘臣聞古今之 變生不意, 誠不願陛下微行數出.’ 帝爲之回輿而還.”하니이다
及潁川盜起 寇恂 請身往臨賊한대 聞言卽行하니 非急務 欲小出不敢하고
至於急務하여는 欲自安不爲하니 帝者之欲善也如此 傳曰 百姓 不徒附라하니 誠以德先之也하다
今漢遭厄運하여 天下三分하니 雄哲之士 思望之時也注+言思望賢主混一.니이다
臣願陛下 復行人所不能爲者하여 以副人望하소서 且承事宗廟 所以率民尊上也
今四時之祀 不臨하고 而池苑之觀 仍出하시니 臣所不安也로이다
夫憂責在身者 不暇盡樂하나니 願省減樂官後宮 凡所增造하여 以成先帝之志하소서하니 不聽하다


乙丑年(245)
[] 나라(蜀漢) 後主 延熙 8년이다.
[] 魏主 曹芳 正始 6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赤烏 8년이다.
[] 봄에 나라가 太子太傅 吾粲을 죽였다.
[] 나라 太子 孫和魯王 孫霸와 같은 궁에서 살고 예우와 秩祿이 동일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에 대해 말이 많았다. 吳主 孫權이 마침내 명을 내려 궁을 나누고 소속 신하들을 따로 두게 하니 두 형제가 이 때문에 틈이 생겼다.注+別僚”는 두 궁의 신료들을 분별하여 각각 차등이 있게 한 것이다.
全琮이 그의 아들 全寄를 보내 노왕을 섬기게 하니, 陸遜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子弟가 진실로 좋은 재목이라면 쓰이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다.
私門出仕하여 영화와 이로움을 구하면 끝내 재앙을 부를 뿐이다.注+私出”은 私門出仕함을 말한다. (구하다)는 一遙이다. 소문에 두 궁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고 하니, 이것은 옛사람이 매우 꺼리는 것이다.”
전기가 과연 노왕에게 아부하면서 노왕과 태자가 서로 모함하게 하자, 육손이 또 전종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金日磾를 스승으로 삼지 않고 (전기)를 벌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으니, 결국에는 그대의 가문에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전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注+金日磾는 일이 나라 武帝 後元 2년(B.C.87)에 보인다. “宿留”는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全宗이 그 아들 全寄를 보내어 魯王을 섬기게 하자, 陸遜이 일찍이 경계한 적이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종이 을 본받지 않고, 망설이며 결정하지 않아서 그 아들이 노왕에게 아부하도록 방임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손패는 뜻을 공손히 하여 이름 있는 선비들을 사귀었다. 將軍 朱績은 담력이 있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에,注+朱績朱然의 아들이다. 손패가 직접 주적에게 가서 그와 함께 우호를 맺으려고 하였으나 주적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반대편 무리들을 원수로 보고 의심하여 나라 전체가 두 편으로 나뉘었다.
[] 孫權長女 孫魯班全琮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딸 孫小虎朱據에게 시집을 갔다.注+두 딸은 의 소생이다. 全公主(孫魯班)는 太子의 어머니 王夫人과 틈이 있었는데, 손권이 병으로 앓아눕자 태자를 보내어 長沙桓王(孫策)의 사당에 가서 기도하게 하였다.注+孫權建業에 도읍하고, 형인 長沙桓王 孫策의 사당을 朱雀橋 남쪽에 세웠다.
太子妃의 숙부 張休가 장사환왕의 사당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太子를 맞이하여 집안에 들르게 하였다. 전공주가 이를 틈타 말하기를 “태자는 장사환왕의 사당에 가지 않고 멋대로 태자비의 집에 가서 계책을 논의하고 있고,
왕부인은 폐하가 병을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손권이 이로 말미암아 노여워하니,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태자의 총애는 날로 줄어들었다.
孫霸의 무리인 楊笁全寄가 따라서 태자를 비방하자 손권이 그들에게 현혹되었는데, 陸遜이 간언하기를 “正統(태자)과 藩臣(손패)은 마땅히 총애와 질록에 차등이 있어야 하니, 피차간에 제자리를 얻게 되면 上下가 편안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너 차례 글을 올려서 위급하고 절실하게 실정을 말하였는데, 손권이 기뻐하지 않았다.
[] 太常 顧譚陸遜의 생질인데,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국가를 소유하는 이는 반드시 嫡子庶子의 단초를 밝히고,
높은 자와 낮은 자의 를 달리하여 高下에 차별이 있게 하고, 등급을 크게 하니, 이렇게 되면 형제간의 은혜가 온전해지고, 윗자리를 엿보는 욕망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注+은 멀다는 뜻이다.
신의 진언은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태자와 魯王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孫霸는 고담을 싫어하고 全琮도 또한 그를 싫어하여 서로 함께 참소를 하니, 吳主가 고담을 交州로 귀양 보냈다.
太子太傅 吾粲이 청하여 魯王으로 하여금 夏口鎭守하게 하고 楊笁 등을 내쫓아 京師에 있지 못하게 하고,
또 자주 육손에게 소식을 말해주었다.注+吾粲姓名이다. 는 점점 적어지고 점점 사라진다는 뜻이다. 은 점점 생겨나고 점점 자라난다는 뜻이다. 손패와 양축이 오찬을 참소하자 吳主가 노하여 오찬을 주살하였다.
[] 나라 丞相 陸遜하였다.
[] 吳主 孫權魯王 孫霸楊笁이 참소했던 일로 인해서 자주 사자를 보내 육손을 문책하자, 육손이 분통스러워하다가 하였다.
그의 아들 陸抗이 육손의 部曲을 대신 거느리고서 동쪽으로 돌아와 靈柩를 장사 지낼 적에注+荊州에서 동쪽으로 돌아와 吳郡에 장사 지냈다. 손권이 양축이 아뢴 육손에 관한 20가지 일을 가지고 육항에게 묻자, 육항이 일마다 조목조목 대답하니, 손권의 마음이 이에 조금 풀어졌다.
[] 가을 8월에 〈나라(蜀漢)〉 하였다.
[] 겨울 11월에 大司馬 蔣琬하였다.
[] 12월에 尙書令 董允하니, 환관인 黃皓中常侍로 삼았다.
[] 董允은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성실하여 임금에게 옳은 것을 권장하고 나쁜 것을 바로잡으며 충성을 다하니, 後主가 매우 경외하였다. 환관 黃皓가 겉치레를 잘하여 간사하고 약삭빠르니, 황제의 총애가 있었다.
동윤이 자주 황호를 나무라자, 황호는 동윤을 두려워하여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였고, 동윤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황호의 지위가 黃門丞에 불과하였다.注+에 “黃門令丞은 1명인데, 환관으로 임명하였다.” 하였다.
費禕選曹郞 陳祗로 동윤을 대신해 侍中으로 삼으니,注+蜀漢六曹尙書가 있는데, 1이 6명이다. 選曹郞選部에 속한다. 진지는 장중하고 엄정하면서 威儀가 있었고, 技藝가 많으며 지모가 있었다.
비위는 진지를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그를 등용하니, 진지와 황호가 서로 表裏가 되었다. 황호가 처음으로 정사에 관여하여 中常侍로 승진하니, 정권을 잡아 농락하여 결국 나라를 전복시켰다.
진지가 총애를 받게 된 뒤로 後主가 동윤을 원망함이 날로 심해졌으니, 진지가 후주의 뜻에 아첨하여 영합하고 황호가 점차 참소하여 악행을 엮어서 이간질했기 때문이었다.注+는 과실과 악함을 모은 것을 말한다. 去聲이니, 이간질한다는 뜻이다.
[] 이때에 황제(後主)가 자주 나가서 유람을 하고 악공과 가인의 수를 늘리니, 太子家令 譙周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注+이다. “옛날에 王莽이 패배했을 때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서 神器(황제의 자리)를 다투었으나,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고 욕심을 부리면서 선행을 하는 데 태만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世祖(光武帝)가 처음 河北으로 들어갔을 때에 馮異가 세조에게 권하기를, ‘마땅히 남들이 시행하지 못한 것을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원통한 獄事를 다스리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니, 북쪽 지방에서 노래하며 감탄하여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鄧禹南陽에서 세조를 따라왔고 吳漢寇恂이 병사를 동원하여 그를 도왔으며, 그 나머지 사람의 경우 풍모를 바라보고 공덕을 흠모하여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을 가지고 오기도 하였으며, 어린아이를 강보에 싸서 업고 온 사람들의 경우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약한 것을 강하게 하여 帝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세조가〉 洛陽에 있을 때에 한번 微行하려 하였는데, 銚期가 나서서 간언하자 즉시 수레를 돌려 돌아갔으며,注+後漢書≫ 〈銚期傳〉에 “光武帝銚期와 함께 성문 가까운 곳에 나아갔을 적에, 요기가 수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신이 고금의 경계를 들으니, 변고는 뜻밖에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폐하께서는 微行을 자주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광무제가 이 때문에 수레를 돌려서 돌아왔다.” 하였다.
潁川에서 들이 일어났을 때에 구순이 〈세조가〉 직접 나가서 적들을 대적해야 한다고 청하자, 그 말을 듣고서 즉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세조는〉 급한 일이 아니면 微行을 나가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고,
급한 일에는 스스로 편안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光武帝께서 선행을 하려고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옛 기록에, ‘百姓이 공연히 귀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진실로 덕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액운을 만나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으니, 포부와 식견을 가진 선비들이 賢主가 통일하기를 기대하는 때입니다.注+현명한 군주가 통일하기를 기대함을 말한 것이다.
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다시 남들이 시행하지 못한 것을 시행하셔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또 종묘를 받들어 섬기는 것은 백성들을 이끌고 군주를 높이는 길입니다.
지금 四時의 제사에 친림하지 않고 연못과 동산의 유람을 빈번히 나가시니, 신이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천하의 통치를 근심하고 책임지는 자는 향락을 다할 겨를이 없으니, 樂官後宮을 증원한 것을 줄여서 先帝의 뜻을 이루소서.”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역주
역주1 阿寄 : 阿는 이름이나 성 앞에 쓰여 친밀한 뜻을 나타낸다. 刮目相待의 고사에서 魯肅이 呂蒙에게 “吳下阿蒙(吳下의 阿蒙)”이라 하였는데, 阿蒙은 여몽을 친밀하게 부른 말이다. 여기 阿寄도 이와 같은 표현이다.
역주2 金日磾가……결단 : 金日磾는 본래 匈奴 休屠王의 태자였으나, 漢나라에 끌려가 官奴가 되어 말을 기르다가 武帝에게 발탁되어 上將軍이 되었는데, 그의 큰아들이 무제의 곁에서 총애를 받다가 궁녀와 희롱하는 것을 보고는 그 아들을 죽였다.(≪漢書≫ 〈金日磾傳〉)
역주3 步夫人 : ?~238. 步練師로 孫權의 寵妃이고 丞相 步騭의 族人이다. 全公主와 朱公主 두 딸을 낳았다. 孫權이 帝位에 오르자 夫人에 봉해지고 宮中에서 황후의 禮節로 대하였다. 赤烏 원년(238)에 세상을 떠나자 황후에 追封되었다. 이는 妃妾을 황후로 追封한 최초의 사례이다.(≪三國志≫ 〈吳書 吳主權步夫人〉)
역주4 皇太后 吳氏 : 吳懿의 누이이자 劉璋의 형 故人 劉瑁의 아내이다. 劉備가 益州를 평정하고 나자 孫夫人이 친정 吳나라로 돌아가자 여러 신하들이 권하여 오씨와 혼인하도록 하였는데, 유비가 유모와 같은 종친임으로 해서 망설이자 法正의 진언에 의해 오씨를 夫人으로 맞아들였다. 章武 원년(221)에 황후가 되고, 建興 원년(223)에 後主 劉禪이 즉위하여 황태후로 올렸다.(≪三國志≫ 〈蜀書 先主穆后〉)
역주5 尙書令董允卒……爲中常侍 : “中常侍는 宦者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화의 근본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董允이 卒하고 黃皓가 등용되고(이해), 李絳이 내쫓기고 吐突承璀가 내직으로 들어온 것을(唐 憲宗 元和 9년(814)) ≪資治通鑑綱目≫에서 매번 연이어 기록하였으니, 君子와 小人이 兩立하지 못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中常侍 以宦者爲之宜矣 則其書 何 著亂本也 是故 董允卒而黃皓用(是年) 李絳出而承璀入(唐憲宗元和九年) 綱目每聨書之 所以著君子小人之不兩立也]” ≪書法≫ ≪資治通鑑綱目≫ 元和 9년에(814) “봄 정월에 李絳이 재상에서 파면되고 禮部尙書가 되었다. 吐突承璀로 左神策中尉를 삼았다.” 하였다.
“東漢이 宦者에게 망하였으니 龜鑑으로 삼는 것이 멀지 않다. 後帝(後主)가 어리석어서 멸망한 자취를 직접 찾아가니 난리와 멸망의 형세가 드러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위에는 蔣琬과 董允의 卒한 것을 기록하고 아래에는 宦者가 中常侍가 된 것을 기록하였으니, 두 신하의 公正함이 그래도 小人들의 악행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른 사람이 서거하자 아첨하는 자들이 대번에 형적을 드러냈으니, 그런 뒤에 법도 있는 대신의 집안과 보필하는 신하가 世道에 이와 같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또 ≪資治通鑑綱目≫에 기록된 말의 이면에 담긴 뜻이다.[東漢亡於宦者 殷鑒不遠 後帝昏庸 親尋覆轍 亂亡之形 著矣 綱目上書蔣琬董允卒 下書以宦者爲中常侍 則見二臣公正 猶足以尼小人之惡 一旦 正人告殞 憸佞遽形 然後知法家拂士 其所繫也如此 此又綱目言外之意]” ≪發明≫
역주6 續漢志 : 晉나라 때의 司馬彪가 지은 ≪續漢書≫의 8志 중에 하나이다. 南朝 宋나라 때에 范曄이 지은 ≪後漢書≫가 세상에 유통되자 사람들은 이미 나와 있던 ≪속한서≫를 점차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서≫는 범엽이 彭城王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처형되면서 志 부분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 北宋 때에 이르러 ≪속한서≫의 8志, 즉 〈律曆志〉, 〈禮儀志〉, 〈祭祀志〉, 〈天文志〉, 〈五行志〉, 〈郡國志〉, 〈百官志〉, 〈輿服志〉를 ≪후한서≫에 합하여 간행함으로써 ≪후한서≫에 없었던 志를 보충하였는바, 이것이 바로 현전하는 ≪후한서≫가 되었다.
역주7 (誠)[戒] : 저본에는 ‘誠’으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 〈銚期傳〉에 의거하여 ‘戒’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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