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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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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年(299)
九年이라 春正月 擊萬年하여 獲之하다
太子洗馬江統 以爲戎, 狄亂華하니 宜早絶其原이라하여 乃作徙戎論하여 以警朝廷하니
曰 四夷之中 戎, 狄爲甚하니 弱則畏服하고 彊則侵叛이라 是以 有道之君 待之有備하며 禦之有常하여
雖稽顙執贄 而邊城不弛固守注+漢元帝時, 匈奴單于請罷邊塞守備, 應以爲不可, 所謂不弛固守也.하고 彊暴爲寇 而兵甲不加遠征注+周宣王薄伐玁狁, 至于太原, 盡境而還, 譬猶蟁蝱, 驅之而已, 所謂不加遠征也.하여 期令境內獲安하고 疆埸不侵而已러니
及至周室失統 諸侯專征이라 戎, 狄乘間하여 得入中國注+如戎伐魯濟西, 山戎病燕, 狄伐衛‧邢, 長狄入三國之類.하니 或招誘安撫하여 以爲己用注+如申‧繒以西戎攻殺周幽王, 晉遷陸渾之戎於伊川, 與之掎角, 以敗秦師于殽, 楚以蠻軍與晉戰于鄢陵.이라
自是 四夷交侵하여 中國錯居注+如徐夷在齊‧晉‧魯‧宋之間, 鮮虞介燕‧晉之境, 赤狄居上黨之地, 陸渾戎居伊‧洛之間, 義渠‧大荔居秦‧晉之域, 戎蠻子居梁‧霍之地.러니 及秦始皇幷天下 兵威旁達하여 攘胡走越하니 當是時하여 中國無復四夷也
漢建武中 馬援 領隴西太守하여 討叛羌하여 徙其餘種於關中하여 居馮翊‧河東空地하니
數歲之後 族類蕃息이러니 永初叛亂 夷, 夏俱敝注+按漢光武建武十一年, 馬援討羌降之, 安帝永初元年, 羌反. 自建武十一年, 至永初元年, 凡七十三年, 數歲之後當作數十歲之後.
自此之後 餘燼不盡하여 小有際會 輒復侵叛이러니 魏武帝徙武都氐於秦川하여 以禦蜀하니 葢權宜之計 今已受其敝矣
夫關中 帝王所居 未聞戎狄宜在此土也注+周都豐‧鎬, 秦都咸陽, 漢都長安, 皆關中之地. 非我族類 其心必異하고
而士庶翫習하여 侮其輕弱하니 以貪悍之性으로 挾憤怒之情하여 候隙乘便하여 輒爲橫逆이니 此必然之勢也
今宜及兵威方盛하여 因其死亡流散하고 與關中之人으로 戶爲仇讐之際注+謂氐‧羌之反, 暴掠平民, 關中之人, 怨毒之, 戶皆爲讎敵.하여 徙諸羌하여 著先零, 罕幵, 析支之地하고
徙諸氐하여 出還隴右하여 著陰平, 武都之界注+著, 直略切. 先零‧罕幵‧析支之地, 自湟中西至賜支‧河首‧陰平‧武都, 舊白馬氐地也.하고
稟其道路之糧하여 令足自致注+稟, 當作廩, 給也.하여 各附本種하여 反其舊土하여
使屬國, 撫夷 就安集之注+屬國‧撫夷, 謂屬國都尉及撫夷護軍也.하면 戎, 晉 不雜하여 竝得其所리니
縱有猾夏之心이나 絶遠中國하여 隔閡山河하니 爲害不廣矣注+閡, 與礙同.리라
幷州之胡 本匈奴桀惡之寇也 建安中 使右賢王去卑 誘質呼廚泉하여 聽其部落散居六郡注+質, 音致. 六郡, 謂幷州所統六郡也. 晉書匈奴傳曰 “匈奴與晉人雜居, 平陽‧西河‧太原‧新興‧上黨‧樂平莫不有焉.”이러니 今爲五部하여 戸至數萬하고
驍勇便利 倍於氐, 羌하니 若有不虞 則幷州之域 可爲寒心이라
正始中 毌丘儉 討句驪하고 徙其餘種於滎陽戸落 今以千計注+落, 居也.
數世之後 必至殷熾 今百姓失職이면 猶或亡叛注+民不得安於耕鑿, 是失職也.이라
犬馬肥充 則有噬齧이어든 況於夷狄 能不爲變이리오 但顧其微弱耳注+顧, 內顧也.
夫爲邦者 憂不在寡而在不安注+論語 “孔子曰 ‘丘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이라 以四海之廣 士民之富 豈須夷虜在內然後 取足哉리오
此等 皆可申諭發遣하여 還其本域하여 慰彼土思하고 惠此中國 於計爲長也니이다 朝廷 不能用注+土思, 謂懷土之思.이러라
以成都王穎으로 爲平北將軍하여 鎭鄴하고 河間王顒으로 爲鎭西將軍하여 鎭關中하다
賈謐 侍講東宮할새 對太子倨傲어늘 見而叱之하니하여 言於賈后하여 出之하고 又以顒鎭關中하다
武帝作石函之制하여 非至親이면 不得鎭關中이러니 安平獻王孚之孫也
輕財愛士하니 朝廷以爲賢이라 用之하니라


己未年(299)
[] 나라 孝惠皇帝 元康 9년이다. 봄 정월에 孟觀齊萬年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 太子洗馬 江統은 생각하기를 “西戎北狄中華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일찍 그 근원을 끊어야 한다.”고 해서 마침내 〈徙戎論〉을 지어 조정을 경계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운데 西戎北狄이 가장 심하니, 이들은 약하면 中華를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강하면 침공하고 배반한다. 이 때문에 가 있는 군주가 이들을 대함에 대비가 있고 이들을 막음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비록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폐백을 가지고 오더라도 변방의 성에 견고한 수비를 풀지 않고,注+나라 元帝 때에 匈奴單于가 변방 요새의 수비를 파할 것을 청하였으나, 侯應이 “不可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굳게 수비함을 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하고 포악하여 침략하더라도 군대를 遠征에 동원하지 않아서注+ 비유하면 모기나 등에와 같아서 몰아 쫓아낼 뿐이니, 이른바 “멀리 정벌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境內가 편안함을 얻고 국경이 침략받지 않게 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四夷가 서로 침략하여 중국에 뒤섞여 살았는데,注+〈“四夷交侵 中國錯居”는〉 나라 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군대의 위엄이 사방에 미쳐서 북쪽 오랑캐를 물리치고 남쪽 을 패주시키니, 이때를 당하여 중국에는 다시 四夷가 없게 되었다.
[] 나라 建武 연간에 馬援隴西太守를 겸하여 배반한 羌族들을 토벌하고 그 남은 종족을 關中으로 옮겨서 馮翊河東의 빈 지역에 살게 하였다.
몇 년이 지난 뒤에 이들의 族類가 점점 번성하였는데, 永初 연간에 반란을 일으키니, 오랑캐와 中夏가 모두 피폐하였다.注+살펴보건대 나라 光武帝 建武 11년(35)에 馬援羌族을 토벌하여 항복하게 하였는데 安帝 永初 원년(107)에 강족이 배반하였으니, 건무 11년부터 영초 원년까지는 모두 73년인바 “數歲之後(몇 년이 지난 후)”는 마땅히 “數十歲之後(몇 십 년이 지난 후)”가 되어야 한다.
이 뒤로부터 남은 불씨가 꺼지지 않아서 조금의 기회만 있으면 번번이 다시 침공하고 배반하였는데, 나라 武帝武都氐族秦川으로 옮겨서 이들에게 蜀漢을 막게 하였다. 이는 임시방편의 계책이니, 지금 이미 그 폐해를 받고 있다.
[] 關中帝王이 거주하는 곳이니, 西戎北狄이 이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注+나라는 에 도읍하였고 나라는 咸陽에 도읍하였고 나라는 長安에 도읍하였는데, 모두 關中의 지역이다. 오랑캐들은 우리와 같은 종류가 아니니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를 것이요,
士庶人들이 그들을 우습게 보아 그들의 유약함을 업신여기니, 탐욕스럽고 포악한 성질로 분노의 감정을 품고서 중국의 허점을 노리고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번번이 횡포와 반역을 저지르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이다.
이제 중국 군대의 위엄이 한창 강성한 때에 그들이 사망하거나 흩어지고 關中 사람들과 家戶마다 원수가 된 기회를 이용하여注+〈“與關中之人 戶爲仇讐之際”는〉 氐族羌族이 배반하여 평민들에게 난폭한 짓을 행하고 노략질을 자행하니, 關中 사람들이 그들을 원망하여 家戶마다 모두 원수와 적으로 여김을 말한다. 여러 羌族들을 옮겨서 先零(선령)과 罕幵(한견), 析支의 지역에 정착시키고,
여러 氐族을 내보내서 隴右로 돌아가게 하여 陰平武都의 경계에 안착시켜야 한다.注+(붙이다)은 直略이다. 先零罕幵析支의 지역은 湟中으로부터 서쪽으로 河首, 陰平, 武都에 이르니, 모두 옛날 白馬氐의 지역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양식을注+은 마땅히 이 되어야 하니, 지급함이다. 도로에서 지급해서 각각 본래의 종족에 붙어 옛 터전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屬國都尉撫夷護軍으로 하여금 가서 이들을 편안히 살게 하면注+屬國, 撫夷”는 屬國都尉撫夷護軍을 이른다. 오랑캐와 晉人(漢族)이 뒤섞이지 않아 모두 제자리를 얻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중화를 어지럽힐 마음이 있더라도 중국과 매우 멀고 山河가 장애물이 되어 막아주니, 큰 폐해는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注+(막다)는 와 같다.
[] 幷州의 오랑캐는 본래 匈奴 중에 용맹하고 포악한 적이다. 建安 연간에 右賢王 去卑로 하여금 呼廚泉을 유인하여 인질로 삼게 해서 그 部落들이 흩어져 6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注+이다. 6幷州에서 통솔한 6개 군을 이른다. ≪晉書≫ 〈匈奴傳〉에 “匈奴나라 사람과 뒤섞여 살아서 平陽西河, 太原, 新興, 上黨, 樂平에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다. 이제 5가 되어서 戶口가 수만에 이른다.
이들은 몸이 날쌔고 용맹하며 〈弓術乘馬에〉 능수능란함이 氐族羌族보다 갑절이나 뛰어나니, 만약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幷州의 지역은 한심하게 될 것이다.
正始 연간에 毌丘儉高句驪를 토벌하고 그 남은 種族滎陽戸落에 옮긴 것이 〈백여 가호였는데〉 지금은 천으로 헤아린다.注+은 거주함이다.
몇 대가 지난 뒤에는 반드시 더욱더 많아질 것이니, 지금 우리 백성들이 생업을 잃으면 오히려 혹 그곳으로 도망하여 배반한다.注+백성들이 밭을 갈고 우물을 파는 일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면 이것이 생업을 잃는 것이다.
기르는 犬馬도 몸뚱이가 살찌고 충만하면 때로 주인을 무는데, 하물며 오랑캐들이 변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다만 그들 스스로 돌아보건대 자신들이 미약해서 변란을 일으키지 못할 뿐이다.注+는 안으로 돌아봄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백성이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하는 것이다.注+論語≫ 〈季氏〉에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듣건대 나라를 소유하고 집안을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광활한 四海와 풍부한 병사와 백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오랑캐가 內地에 있기를 기다린 뒤에야 만족할 것이 있겠는가.
이들을 모두 거듭 타일러 출발시켜 본래의 지역으로 돌아가 故鄕을 그리워하는 저들의 정을 위로하고 이 중국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다.” 조정에서는 이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注+土思”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 成都王 司馬穎平北將軍으로 삼아서 지역에 진주시키고, 河間王 司馬顒(사마옹)을 鎭西將軍으로 삼아서 關中에 진주시켰다.
[] 賈謐東宮을 모시고 할 적에 太子를 오만하게 대하자 司馬穎이 이것을 보고 질책하니, 가밀이 노하여 賈后에게 말해서 그를 내보내고 또 司馬顒關中에 진주시켰다.
처음에 武帝를 만들어서 지극히 친한 친족이 아니면 관중을 진주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사마옹은 安平獻王 司馬孚의 손자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선비를 좋아하니, 조정에서 그를 어질다고 여겼으므로 등용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四夷 : 사방의 오랑캐란 뜻으로, 東夷와 西戎, 南蠻과 北狄을 가리킨다.
역주2 周나라……돌아왔다 : 이 내용은 ≪詩經≫ 〈小雅 六月〉의 “戎車가 이미 편안하니 輊와 같고 軒과 같으며, 네 마리 말이 이미 건장하니 이미 건장하고 길들여졌도다. 잠깐 玁狁을 정벌하여 太原에 이르니, 문무를 겸비한 吉甫여, 萬邦이 법으로 삼도다.[戎車旣安 如輊如軒 四牡旣佶 旣佶且閑 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라는 구절에 대해 朱子가 ≪詩經集傳≫에서 “태원에 이르렀다는 것은 축출할 뿐이요, 끝까지 추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先王이 戎狄을 다스리는 법이 이와 같았다.”라고 풀이한 데에 보인다. 吉甫는 周나라 宣王 때 북벌을 담당한 太師 尹吉甫로, 鎬京에 침입한 험윤을 격퇴하는 등 召穆公 등과 함께 선왕을 보좌하여 쇠락한 周나라를 중흥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역주3 戎이……따위이다 : 모두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들로, 山戎이 燕나라를 괴롭힌 것은 ≪史記≫ 권32 〈齊太公世家〉 齊 桓公 23년에 “山戎이 燕나라를 공격했다.[山戎伐燕]”고 보이고, 狄이 衛나라를 공격한 것은 ≪春秋左氏傳≫ 閔公 2년에 “겨울 12월에 狄人이 衛나라를 공격하였다.[冬十二月 狄人伐衛]”라고 보이고, 狄이 邢을 공격한 것은 ≪春秋≫ 莊公 32년에 “狄이 邢을 공격하였다.[狄伐邢]”라고 보이는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다.
역주4 申나라와……것이다 : 모두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로, “申나라와 繒나라가……幽王을 공격하여 죽였으며”는 幽王이 총애하는 褒姒가 아들 伯服을 얻고는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자, 신후의 아버지 申侯가 繒나라, 犬戎과 연합하여 유왕을 살해한 후 의구를 왕위(平王)에 세운 일을 말한다.(≪史記≫ 권4 〈周本紀〉) “晉나라가 陸渾의……殽땅에서 패퇴시켰고”는 平王이 東遷할 때 周나라 대부인 辛有가 伊川에 갔다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야외에서 제사 지내는 광경을 보고는 “이곳은 100년이 채 못 가서 오랑캐의 땅이 될 것이다. 周나라의 예가 먼저 없어졌다.”라고 하였는데, 僖公 22년에 과연 晉나라와 秦나라가 陸渾의 융족을 伊川으로 이주시키고, 희공 33년에 晉나라가 융족과 함께 秦나라를 殽 땅에서 패퇴시켰던 일을 말한다.(≪春秋左氏傳≫ 僖公 22년, 33년) “楚나라가……싸웠던 것”은 晉나라가 厲公 6년에 鄭나라를 칠 때 楚나라가 東夷(楚나라의 동쪽 오랑캐)를 거느리고 鄭나라를 구원하였는데, 마침내 鄢陵에서 晉나라가 楚나라를 패배시켰던 일을 말한다.(≪國語≫ 〈晉語 6 晉敗楚師於鄢陵〉)
역주5 徐夷가……같다 : 徐夷는 현재 江蘇省 西北 지역의 徐州 일대에 있었던 부족으로, 춘추시대에 揚子江과 淮河 사이의 強國이 되어 齊나라 桓公과 연합하여 楚나라에 대항하기도 하였는데, 춘추시대 말기에 吳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鮮虞는 현재 河北省 平山 일대에 있었던 부족으로, 춘추시대에 晉나라와 燕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晉나라와 전쟁을 많이 하였고, 춘추시대 말기에 中山國을 세웠다. 赤狄은 현재 山西省 일대에 분포하여 살았던 부족으로, 晉나라 사람들과도 섞여서 지내기도 하였던 狄人의 한 분파인데, 춘추시대에 적인들 가운데 힘이 가장 강했던 부족이었다. 陸渾의 戎族은 현재 河南省 洛陽 일대에 있었던 부족으로, 춘추시대 말기에 晉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義渠와 大荔(대려)는 현재 甘肅省 慶陽 일대와 陝西省 渭南 일대에 있었던 부족으로, 의거는 춘추시대에 세력이 秦나라, 魏나라와 맞먹을 정도로 강한 부족이었는데 전국시대에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였고, 대려는 춘추시대 초기에 ‘大荔戎國’이라고 불리며 晉나라에 속해 있었는데 秦나라 穆公이 전쟁에서 晉나라를 이기면서 秦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戎蠻子는 현재 潁河 상류인 河南省 鄭州와 周口 일대에 분포하였던 西戎의 한 분파로, 춘추시대 말기에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6 (漢)[侯] : 저본에는 ‘漢’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侯’로 바로잡았다.
역주7 賜支 : 羌族이 살던 지역의 한 지명으로, ‘사지’에 대해서는 ≪後漢書≫ 권87 〈西羌傳〉에 “사지는 〈禹貢〉에 이른바 ‘析支’라고 한 곳이다.[賜支者 禹貢所謂析支者也]”라고 보이는데, ≪書經≫ 〈夏書 禹貢〉의 ‘析支’에 대해 蔡沈의 ≪書經集傳≫에 “석지는 河關의 서쪽 천여 리 지점에 있다.[析支 在河關西千餘里]”라고 보인다.
역주8 石函의 제도 : 石函은 돌로 만든 함(궤짝)으로, 여기에 황제의 명령을 보관하여 오래도록 따르게 한 제도이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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