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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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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年(307)
孝懷皇帝永嘉元年이라
漢元熙四年이라
春二月 群盜王彌寇靑, 徐하다
令劉柏根이어늘 王浚 討斬之注+(𢮂)[惤], 堅‧弦二音. (𢮂)[惤]縣, 自漢以來, 屬東萊郡.하니 其長史王彌 遂爲群盜러니 至是하여 寇靑, 徐하고 殺東萊太守하다
陳敏 刑政無하고 子弟凶暴하니 顧榮, 周玘等 憂之
廬江內史華譚 遺榮等書曰 陳敏 盜據吳會하여 命危朝露하고 今皇輿東返하여 俊彦盈朝하니
將擧六師하여 以淸建業이라 諸賢 何顔復見中州之士邪注+東返, 謂自長安還洛陽也.
榮等 素有圖敏之心이러니 及見書 甚慙하여
密遣使하여 報征東將軍劉準하여 使發兵臨江하고 己爲內應하여 翦髮爲信하다
遣揚州刺史劉機等하여 討敏한대 使其弟昶으로 將兵屯烏江하고 宏屯牛渚注+晉置烏江縣, 屬淮南郡. 卽烏江亭長檥船待項羽之地, 以名縣.러니
玘密使敏司馬錢廣으로 殺昶하고 因勒兵朱雀橋南注+朱雀橋, 在建業宮城之南, 跨秦淮水. 蓋取前朱雀之義, 名之, 亦曰大桁.한대 遣甘卓하여 討廣이러니
慮敏疑之 故往就敏하니 敏曰 卿當四出鎭衛 豈得就我邪注+鎭衛, 謂鎭安人心, 乃所以衛敏也.
乃出하여 與玘共說卓曰 敏旣常才 政令反覆하니 其敗必矣어늘
而吾等 安然受其官祿하니 事敗之日 使江西諸軍 函首送洛하고 題曰逆賊顧榮, 甘卓之首라하면 萬世之辱也注+江西諸軍, 謂劉準所遣臨江者也.니라
遂詐稱疾迎女하고 斷橋하여 收船南岸하여 與玘, 榮及紀瞻으로 共攻敏注+永興二年, 敏爲子景娶卓女. 橋, 卽朱雀橋也. 建業城, 在秦淮水北, 故卓收船傍南岸.하다
自帥萬餘人하여 討卓이어늘 軍人 隔水語敏衆曰 本所以戮力陳公者 正以顧丹陽, 周安豐耳注+敏以顧榮爲丹陽太守, 周玘爲安豐太守, 故以稱之.러니
今皆異矣 汝等何爲오하니 敏衆 狐疑未決이어늘 榮以白羽扇麾之하니 衆皆潰去注+白羽扇, 編白羽爲之. 諸葛亮, 常持白羽扇, 指揮三軍.
單騎走어늘 追斬之하고 夷三族하고 傳首京師하다
詔徵顧榮爲侍中하고 瞻爲尙書郞하고 太傅越 辟玘爲參軍이러니 榮等 至徐州 聞北方愈亂하고 逃歸하다
西陽夷寇江夏하다
西陽夷寇江夏注+西陽縣, 春秋弦子之國, 漢爲縣, 屬江夏郡, 晉屬弋陽郡.어늘 太守楊珉 請督將議之러니 諸將 爭獻方略이로되
騎督朱伺獨不言이라 珉曰 將軍 何以不言 伺曰 諸人 以舌擊賊이어늘 惟以力耳니이다
又問將軍前後擊賊 何以常勝 伺曰 兩敵共對 惟當忍之 彼不能忍하고 我能忍이라 是以勝耳로이다 善之러라
立淸河王覃弟詮하여 爲皇太子하다
帝親覽大政하고 留心庶事하니 不悅하여 固求出藩하다
以南陽王模 都督秦雍等州軍事하다
公師藩 旣死 汲桑 逃還苑中注+茌平牧苑也. 桑於此起兵, 赴公師藩, 藩死, 逃還.하여 更聚衆하여 聲言爲成都王報仇하고 以石勒爲前驅하니
所嚮輒克이라 遂進攻鄴하다 鄴中空竭이로되 而新蔡王騰 資用甚饒注+是年, 以東燕王騰爲新蔡王.로되 性吝嗇하여 無所振惠하고
臨急 乃賜將士米各數升, 帛各丈尺하니 以是 人不爲用이러라
遂入鄴하여 殺騰하고 燒宮하고 大掠而去하여 南擊兗州어늘 太傅越 使苟晞等討之하니
勒, 晞等 相持數月 大小三十餘戰하여 互有勝負러라
秋七月 以琅邪王睿 爲安東將軍, 都督揚州諸軍事하여 鎭建業하다
睿至建業하여 以王導爲謀主하고 推心親信하여 毎事咨焉이러라
睿名論素輕하니 吳人不附하여 居久之 士大夫莫有至者注+名論, 名譽議論也.러니
睿出觀禊할새 導使睿乘肩輿하고 具威儀하고 導與諸名勝 皆騎從注+禊, 胡計切, 祓除不祥也. 漢儀 “季春上巳. 官及百姓, 皆禊於東流水上.” 肩輿, 平肩轝也. 人以肩擧之而行. 騎, 奇寄切. 從, 才用切.하니
紀瞻, 顧榮等 見之하고 驚異하여 相帥拜於道左 導因說睿曰 顧榮, 賀循 此土之望이니
宜引之以結人心이니 二子旣至 則無不來矣리이다 睿乃使導躬造之하니 循, 榮 皆應命이어늘
以循爲吳國內史하고 榮爲軍司注+軍司, 軍司馬也.하여 加散騎常侍注+職爲軍司, 此加官也.하여 凡軍府政事 皆與之謀하다
又以紀瞻爲軍祭酒하고 卞壼爲從事中郞하고 周玘, 劉超, 張闓, 孔衍 皆爲掾屬注+闓, 昭之曾孫也. 衍, 孔子三十二世孫.하다
導說睿하여 謙以接士하고 儉以足用하며 以淸靜爲政하여 撫綏新舊하니 故江東歸心焉注+新, 謂自中原來者, 舊, 謂江東人.이러라
睿初至 頗以酒廢事러니 導以爲言한대 睿命酌하여 引觴覆之하고 於此遂絶하니라
苟晞擊汲桑, 石勒하여 大破之하니 走死하고 降漢하다
苟晞追擊汲桑하여 破其八壘하니 死者萬餘人이라 犇馬牧이러니 爲人所殺하고 石勒 犇樂平注+馬牧, 茌平馬牧也. 幷州有樂平郡, 武帝泰始中置, 唐之遼州也.하다
太傅越 加晞都督靑兗諸軍事하다 晞屢破彊寇하여 威名甚盛하며 善治繁劇하고 用法嚴峻이러라
其從母依之하니 奉養甚厚注+從, 才用切. 從母, 母之姊妹也.러니 其子求爲將이어늘
晞不許하고 曰 吾不以王法貸人이로니 將無後悔邪 固求之한대 乃以爲督護러니
後犯法이어늘 晞杖節斬之하니 從母叩頭求之호되 不聽하다
旣而 素服哭之曰 殺卿者 兗州刺史 哭弟者 苟道將也注+道將, 晞字.라하니라
胡部大張㔨督等 擁衆하여 壁于上黨注+大, 猶長也, 胡人一部之長, 呼爲部大. 張, 姓也. 㔨督, 名.이러니 石勒 往從之하고 因說㔨督等하여 與俱歸漢하니
漢王淵 以勒爲護漢將軍, 平晉王하다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以王衍爲司徒하다
說太傅越曰 朝廷 危亂하니 當賴方伯하니 宜得文武兼資以任之라하고
乃以弟澄爲荊州都督하고 族弟敦爲靑州刺史하고 語之曰 荊州 有江, 漢之固하고 靑州 有負海之險이어늘
卿二人在外하고 而吾居中하니 足以爲三窟矣注+窟, 穴也. 俗云 “兔營窟, 必背丘相通.” 所謂狡兔三窟.로다
澄至鎭 日夜縦酒하여 不視庶務하여 雖寇戎交急이나 不以爲懷하니라
太傅越 自領兗州牧하고 徙苟晞爲靑州刺史하다
與晞親善하여 引升堂하여 結爲兄弟러니
司馬潘滔說越曰 兗州 衝要 魏武以之創業하니 晞有大志하여 非純臣也
若遷之靑州하고 公自牧兗州하여 經緯諸夏하고 藩衛本朝하면 此所謂爲之於未亂者也注+老子曰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니이다
越以爲然하여 自領兗州牧하고 以晞爲征東大將軍, 靑州刺史하니 越, 晞由是有隙이러라
晞至靑州하여 以嚴刻立威하여 日行斬戮하니 州人 謂之屠伯注+言殺人, 若屠兒之殺六畜. 伯, 長也.이러라
王彌及其黨劉靈 降漢하다
少貧賤이로되 力制犇牛하고 走及犇馬하니 時人 雖異之 莫能擧也 撫膺歎曰 天乎 何當亂也오하더니
及公師藩起 自稱將軍하고 寇掠趙, 魏러니 與王彌俱降漢하다
慕容廆自稱鮮卑大單于하다
弟猗盧摠攝三部하여 與慕容廆 通好하다


丁卯年(307)
[] 나라 孝懷皇帝 永嘉 원년이다.
[] 나라(前趙) 高祖 劉淵 元熙 4년이다.
[] 봄 2월에 도적 떼 王彌靑州徐州 지역을 침략하였다.
[] 처음에 惤縣(견현)의 縣令 劉柏根이 배반하자 王浚이 토벌하여 참수하니注+, 두 가지 음이다. 惤縣나라 이후로 東萊郡에 속하였다. 마침내 그의 長史 王彌가 도적 떼가 되었는데, 이때에 靑州徐州를 침략하고 東萊太守를 살해하였다.
[] 3월에 陳敏의 장수 顧榮周玘가 진민을 죽이고서 항복하였다.
[] 陳敏은 형벌과 정사에 법도가 없고 자제들도 흉악하고 포악하니, 顧榮周玘 등이 걱정하였다.
廬江內史 華譚이 고영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진민이 吳會 지역을 도둑질해 점거하여 목숨이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다. 이제 皇輿(황제)가 동쪽으로 돌아와서 준걸스러운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장차 六軍을 동원하여 建業 지역을 깨끗이 청소할 것이다. 諸賢들이 무슨 얼굴로 다시 中州의 선비들을 만나보겠는가.”注+東返”은 長安에서 洛陽으로 돌아온 것을 이른다.
고영 등은 평소 진민을 도모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편지를 보고는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征東將軍 劉準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알리고, 유준에게는 군대를 징발하여 강가로 오게 하고 자신들은 內應이 되기로 하고는 머리를 깎아 信標로 삼았다.
유준이 揚州刺史 劉機 등을 보내어 진민을 토벌하자, 진민이 그의 아우 陳昶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烏江에 주둔하게 하고 陳宏牛渚에 주둔하게 하였다.注+나라는 烏江縣을 설치하여 淮南郡에 소속시켰다. 이곳은 바로 烏江亭長이 배를 대고 項羽를 기다리던 곳이므로 의 이름을 오강이라고 한 것이다.
주기가 은밀히 진민의 司馬 錢廣으로 하여금 진창을 죽이고 이어서 朱雀橋 남쪽에서 군대를 무장하게 하자,注+朱雀橋建業 宮城의 남쪽에 있으니, 秦淮水에 걸쳐 있는바 이는 朱雀門 앞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大桁이라고도 한다. 진민이 甘卓을 보내어 전광을 토벌하게 하였다.
고영은 진민이 자기를 의심할까 염려하여 진민에게 찾아가니, 진민이 말하기를 “은 마땅히 사방으로 나아가 사람들을 진정하여 나를 호위해야 하는데, 어찌 나에게 왔는가.”注+鎭衛”는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바로 陳敏을 호위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顧榮이 마침내 나와서 周玘와 함께 다음과 같이 甘卓을 설득하였다. “陳敏은 평범한 재주인데다가 정사와 명령도 이랬다저랬다 하니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들이 편안히 그의 관직과 녹봉을 받고 있으니, 일이 실패하는 날에 만일 江西의 여러 군대가 우리의 머리를 잘라 함에 넣어 洛陽으로 보내면서 ‘역적 고영과 감탁의 머리’라고 쓴다면, 이는 萬代의 치욕이 될 것이다.”注+江西諸軍”은 劉準이 강가로 보낸 자들을 이른다.
감탁은 마침내 거짓으로 병을 칭탁하여 딸을 불러들이고 朱雀橋를 끊어 배를 南岸으로 거두어들이고서 주기와 고영, 紀瞻과 함께 진민을 공격하였다.注+永興 2년(305), 陳敏이 아들 陳景甘卓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는 바로 朱雀橋이다. 建業秦淮水 북쪽에 있으므로 감탁이 배를 거두어 南岸에 머물게 한 것이다.
진민이 직접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감탁을 토벌하였는데, 감탁의 병사들이 물을 사이에 두고 진민의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본래 진민에게 힘을 바쳤던 이유는 바로 顧丹陽(고영)과 周安豐(주기) 때문이었는데,注+〈“顧丹陽 周安豐”은〉 陳敏顧榮丹陽太守로 삼고, 周玘安豐太守로 삼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지금 이들이 모두 딴마음을 품고 있다. 너희들은 무슨 짓을 하는가.” 하였다. 진민의 병사들이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고영이 白羽扇을 흔드니, 모두 궤멸하여 도망하였다.注+白羽扇은 흰 깃털을 엮어서 만든다. 諸葛亮은 항상 이 백우선을 들고 三軍을 지휘하였다.
진민이 單騎로 도망하자 추격하여 참수하고 그의 삼족을 멸하고 머리를 파발마로 京師에 보내었다.
詔令을 내려 고영을 徵召하여 侍中으로 삼고 紀瞻尙書郞로 삼았으며, 太傅 司馬越은 주기를 辟召하여 參軍으로 삼았는데, 고영 등은 徐州에 이르러서 北方이 더욱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돌아갔다.
[] 西陽夷族江夏를 침략하였다.
[] 西陽夷族江夏를 침략하자,注+西陽縣은 춘추시대 弦子의 나라이니, 나라 때에는 으로 만들어 江夏郡에 소속시켰고 나라 때에는 弋陽郡에 소속시켰다. 江夏太守 楊珉督將들을 청하여 의논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方略을 말하였으나,
유독 騎督 朱伺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양민이 묻기를 “장군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하니, 주사가 대답하기를 “여러 사람들은 혓바닥으로 적을 공격하는데, 저는 오직 힘으로 공격할 뿐입니다.” 하였다.
양민이 또 묻기를 “장군은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적을 공격하였는데, 어찌하여 항상 승리하였는가.” 하니, 주사가 대답하기를 “두 적이 서로 대치할 적에는 오직 참아야 하니, 적들은 참지 못하였고 저는 참았습니다. 이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하니, 양민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 淸河王 司馬覃의 아우 司馬詮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 太傅 司馬越이 나가 許昌에 진주하였다.
[] 황제가 직접 큰 정사를 총괄하고 여러 일에 마음을 두니, 司馬越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굳이 (지방)으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 南陽王 司馬模都督秦雍等州軍事로 삼았다.
[] 여름 5월에 도적 떼인 汲桑石勒鄴城으로 쳐들어와 都督新蔡王 司馬騰을 죽이고 다시 兗州를 공격하자, 太傅 司馬越苟晞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 公師藩이 죽자 汲桑이 도망하여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돌아와서注+〈“苑中”은〉 茌平縣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다. 汲桑이 여기에서 군대를 일으켜 公師藩에게 달려갔었는데, 공사번이 죽자 도망하여 돌아온 것이다. 다시 병력을 모아 成都王 司馬穎의 원수를 갚겠다고 크게 선포하고 石勒을 선봉대로 삼으니,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승리하였고 마침내 전진하여 鄴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업성은 재정이 이미 바닥이 났으나, 新蔡王 司馬騰은 재물이 매우 넉넉한데도注+이해에 東燕王 司馬騰新蔡王으로 삼았다. 성품이 인색하여 은혜를 베푸는 바가 없었고,
위급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장병들에게 쌀 몇 되와 비단 몇 자를 하사하니, 이 때문에 장병들이 그를 위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
급상이 마침내 업성으로 쳐들어가서 사마등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고 크게 노략질하고 떠나가서 남쪽으로 兗州를 공격하자, 太傅 司馬越苟晞 등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석륵과 구희 등이 서로 대치한 지 수개월 동안 크고 작은 싸움이 30여 차례 있었는데, 서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 가을 7월에 琅邪王 司馬睿安東將軍 都督揚州諸軍事로 삼아 建業에 진주하게 하였다.
[] 司馬睿建業에 이르러 王導謀主로 삼고 마음을 다하여 친애하고 신임해서 모든 일을 그에게 자문하였다.
사마예는 평소 명망이 낮으니, 지역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서 오랫동안 건업에 있었으나 士大夫 중에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注+名論”은 명예와 의논(평가)이다.
마침 사마예가 밖에 나가 를 구경할 적에, 왕도가 사마예로 하여금 肩輿(가마)를 타고 威儀를 갖추게 하고는 왕도와 여러 명사들이 모두 말을 타고 수행하니,注+胡計이니, 상서롭지 못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漢儀≫에 “季春 上巳日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동쪽 흐르는 물가에서 를 했다.” 하였다. 肩輿平肩轝이니, 사람이 어깨에 이 가마를 메고 간다. (타다)는 奇寄이다. (거듭)은 才用이다.
紀瞻顧榮 등이 이를 보고는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서 서로 거느리고 따라와서 길 왼쪽에서 절하였다. 왕도가 인하여 사마예를 설득하기를 “顧榮賀循은 이 지역의 명망 있는 자들이니,
마땅히 그들을 불러들여 인심을 결속시켜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이 귀의해오면 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사마예가 마침내 왕도로 하여금 직접 찾아가게 하였다. 하순과 고영이 모두 명에 응하여 오자,
하순을 吳國內史로 삼고 고영을 軍司注+軍司軍司馬이다. 散騎常侍를 겸직하게 하여注+직책은 軍司이고, 이것(散騎常侍)은 겸직이다. 모든 軍府政事를 다 이들과 상의하였다.
또 기첨을 軍祭酒로 삼고 卞壼(변곤)을 從事中郞으로 삼고, 周玘劉超, 張闓(장개), 孔衍을 모두 으로 삼았다.注+張闓張昭의 증손이다. 孔衍孔子의 32세손이다.
[] 王導司馬睿에게 겸허함으로써 선비를 대하고 검소함으로써 재정을 풍족히 하며 淸靜無爲로써 정사를 다스려서 新舊의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편하게 할 것을 설득하니, 이 때문에 江東 지역의 인심이 사마예에게 돌아왔다.注+〈“新舊”의〉 中原에서 온 자를 이르고, 江東 사람을 이른다.
사마예가 建業에 처음 와서는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한 경우가 많았는데, 왕도가 이에 대하여 말하자, 사마예는 술을 따르도록 명하고는 술잔을 가져다가 뒤엎고 이로부터 마침내 술을 끊었다.
[] 苟晞汲桑石勒을 공격하여 大破하니, 급상은 패주하다가 죽고 석륵은 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 苟晞汲桑을 추격하여 그의 8개 보루를 격파하니,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급상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달아나다가 살해를 당하였고, 石勒樂平으로 달아났다.注+馬牧”은 茌平縣에 있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다. 幷州樂平郡이 있는데, 武帝 泰始 연간에 설치되었으니, 나라의 遼州이다.
太傅 司馬越이 구희에게 都督靑兗諸軍事를 겸직하게 하였다. 구희는 강한 적을 여러 번 격파하여 위엄과 명성이 매우 성대하였고, 번거로운 일을 잘 처리하고 법을 준엄하게 적용하였다.
그의 이모가 그에게 의지하니, 봉양을 매우 잘하였다.注+(친속)은 才用이니, “從母”는 어머니의 자매이다. 이모의 아들이 장수로 삼아 줄 것을 청하자,
구희는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법을 가지고 남을 용서하지 않으니, 장차 후회하는 일이 없겠느냐.” 하였으나, 굳이 청하자, 마침내 그를 督護로 삼았다.
뒤에 그가 법을 범하자, 구희가 을 잡고 가서 그를 참수하였는데, 이모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얼마 후 素服을 입고 가서 하며 말하기를 “을 죽인 자는 兗州刺史이고, 이종 아우를 하는 자는 苟道將이다.”注+道將苟晞이다. 하였다.
오랑캐의 部長張㔨督 등이 병력을 거느리고 上黨에 보루를 쌓아 주둔하였는데,注+과 같으니, 오랑캐 사람들은 한 部大라고 칭하였다. 은 성이고 㔨督은 이름이다. 석륵이 가서 그를 따르고 인하여 장배독 등을 설득해서 함께 나라로 귀의하니,
漢王 劉淵이 석륵을 護漢將軍 平晉王으로 삼았다.
[]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王衍司徒로 삼았다.
[] 王衍太傅 司馬越을 설득하기를 “조정이 위태롭고 혼란하니, 마땅히 方伯에게 의뢰하여야 합니다. 文武를 겸비한 인재를 구하여 방백을 맡겨야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아우 王澄荊州都督으로 삼고 族弟王敦靑州刺史로 삼았다. 왕연이 이들에게 말하기를 “荊州長江漢水의 견고함이 있고, 靑州는 바다를 등지고 있는 험함이 있는데,
두 사람이 밖에 있고 내가 중앙(조정)에 있으니, 3개의 굴이 되기에 충분하다.”注+은 굴이다. 세속에서 말하기를 “토끼가 굴을 팔 때에 반드시 언덕을 등져 서로 통하게 한다.” 하니, 이른바 교활한 토끼는 굴이 3개라는 것이다. 하였다.
왕징은 진영에 이르자 밤낮으로 술을 마셔서 여러 사무를 살펴보지 아니하여, 도적 떼와 오랑캐의 공격으로 사정이 급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 太傅 司馬越이 스스로 兗州牧을 겸하고 苟晞를 옮겨 靑州刺史로 삼았다.
[] 처음에 司馬越苟晞와 친하여 서로 이끌고 에 올라가서 결의형제가 되었다.
司馬 潘滔가 사마월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兗州는 요충지로, 나라 武帝(曹操)가 이곳을 가지고 創業을 하였습니다. 구희는 큰 뜻을 품고 있어서 결코 순수한 신하가 아닙니다.
만약 그를 靑州로 옮기고 이 직접 兗州이 되어서 여러 中華를 다스리고 本朝를 호위한다면, 이는 이른바 혼란하기 전에 다스린다는 것입니다.”注+老子≫에 이르기를 “일이 생기기 전에 방비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린다.” 하였다.
사마월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스스로 兗州牧을 겸하고 구희를 征東大將軍 靑州刺史로 삼으니, 사마월과 구희가 이로 말미암아 틈이 생기게 되었다.
구희가 청주에 부임하여 엄하고 각박함으로 위엄을 세워서 매일 사람을 죽이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일러 ‘백정의 우두머리(屠伯)’라고 하였다.注+〈“謂之屠伯”은〉 백정이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은 우두머리이다.
[] 王彌와 그의 무리인 劉靈나라에 항복하였다.
[] 劉靈은 젊은 시절 가난하고 미천하였으나, 힘이 세어 날뛰는 소를 제재하고 달리기를 잘하여 치달리는 말을 따라잡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록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나, 그를 천거하여 등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유영은 가슴을 치며 탄식하기를 “하늘이여! 언제나 난세를 만날 것인가.” 하였다.
公師藩이 군대를 일으키자, 유영은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지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다가 王彌와 함께 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 慕容廆가 스스로 鮮卑 大單于라고 칭하였다.
[] 拓跋祿官(탁발록관)이 하였다.
[] 아우 拓跋猗盧가 3개의 를 총괄하고서 慕容廆와 우호를 통하였다.


역주
역주1 (𢮂)[惤] : 저본에는 ‘𢮂’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惤’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陳敏將顧榮周玘殺敏以降 : “陳敏에 대해 일찍이 ‘토벌했다’라고 썼는데, 이때 그를 참수하였는데도 ‘誅’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顧榮과 周玘가 그를 주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영과 주기는 어찌하여 그를 주살할 수 없는가. 고영과 주기는 자신의 지조를 잃고 진민을 따랐으니, 이제 그를 죽인 것은 겨우 자신의 죄를 속죄했을 뿐, 진실로 토벌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민의 장수 고영과 주기’라고 썼으니, 자신의 지조를 잃은 자를 경계하는 것이 두려워할 만하다. 그렇다면 〈前漢 景帝 때에〉 東越 또한 〈吳‧楚 등 七國을〉 따라 배반하였다가 얼마 후 吳王 劉濞를 주살하였는데, 어찌하여 ‘誅’라고 썼는가. 越은 오랑캐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夷狄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현자에게 完備하기를 바란다. 이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越나라 사람이 吳王 濞를 주살했다.’라고 써서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주었고, 현자에게 완비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민의 장수가 진민을 죽였다고 써서 지조를 잃은 사람을 경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敏嘗書討矣 於是斬之 則其不書誅 何 顧周不得而誅之也 顧周則曷爲不得而誅之 顧周失身從敏 今而殺之 僅足以自贖耳 固不可予之以討也 書曰陳敏將顧榮周玘 其爲失身者之戒 凜凜矣 然則東越亦從反者 旣而誅濞 則何以書誅 越 夷也 綱目不治夷狄 而責備賢者 不治夷狄 故書越人誅濞 以開自新之塗 責備賢者 故書敏將殺敏 以示失身之戒]” ≪書法≫
역주3 (童)[章] : 저본에는 ‘童’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章’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太傅越 出鎭許昌 : “이때 司馬越이 굳이 나가 진주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는데, ‘詔越(사마월에게 詔命을 내렸다.)’라고 쓰지 않고 ‘越出鎭(사마월이 나가 진주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사마월이 제멋대로 했기 때문이다. 사마월이 나가고 들어옴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군주를 심하게 무시하였으니, 이것을 쓴 것은 그를 죄책한 것이다. 이 때문에 태부 사마월이 제멋대로 하면 ‘태부 사마월이 나가서 許昌에 진주했다.’라고 쓰고, 〈五代 시대에〉 徐溫이 제멋대로 하면 ‘서온이 나가서 潤州에 진주했다.’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기록하고 삭제하는 것이 엄격하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出鎭’이라고 쓴 것이 4번인데(이해(307), 東晉 孝武帝 太元 10년(385), 安帝 義熙 원년(405), 後梁 乙亥年(915)), 劉裕는 글을 올렸기 때문에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於是 越固求出鎭 帝從之 不書詔越 書越出鎭 何 越專也 越之出入自己 無君甚矣 書 罪之也 是故太傅越專 則書太傅越出鎭許昌 徐溫專 則書徐溫出鎭潤州 綱目之筆削 嚴矣哉 終綱目 書出鎭四(是年 武帝太元十年 安帝義熙元年 後梁乙亥年) 惟劉裕上書 以無譏焉]” ≪書法≫
역주5 群盜汲桑……遣苟晞討之 : “‘入(쳐들어갔다)’라고 쓰고, ‘殺(죽였다)’라고 쓴 것은 쉽게 이루었음을 나타낸 말이다. 전혀 방비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都督’이라고 썼는가. 司馬騰을 허물한 것이다. ‘도독’이라고 쓴 것이 어찌하여 허물한 것이 되는가. 이는 자신(사마등)이 도독으로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죽였다고 말한 것이니, 이 도독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많은 것이다.[書入 書殺 易辭也 無備甚矣 然則何以書都督 咎騰也 書都督則曷爲咎之 若曰身爲都督 盜得入而殺焉 有愧斯名 多矣]” ≪書法≫
역주6 掾屬 : 보좌하는 관리로, 漢나라 때부터 三公에서 郡縣에 이르기까지 上官이 모두 연속을 직접 선발하여 보좌로 두었는데, 魏‧晉 이후로는 吏部에서 임명하였다.
역주7 拓跋祿官卒 : “처음으로 索頭라는 말을 빼고 ‘卒’이라고 썼으니, 이는 拓跋祿官을 올려준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올려주었는가. 그의 아우 拓跋猗盧가 晉나라에서 匈奴와 鮮卑를 토벌할 적에 도왔기 때문에 장차 탁발의로를 봉하려 하였으므로 그를 올려준 것이다.[始去索頭 書卒 進之也 曷爲進之 弟猗盧將以助晉封 故進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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