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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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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이라
趙建武五年이라
欲開復中原하여 表以桓宣鎮襄陽하고 弟懌鎮魏興하고 翼鎮江陵하고 毛寳, 樊峻戍邾城注+邾城, 在江北, 漢江夏郡邾縣之故城也.하고
上疏하여 欲帥大衆十萬하여 移鎮石城하고 遣諸軍하여 羅布江, 沔하여 爲伐趙之規하다
帝下其議한대 丞相導 請許之하고 太尉鑒 議以爲資用未備하니 不可大舉라하다
太常蔡謨議曰
時有否泰하고 道有屈伸하니 茍不計彊弱而輕動이면 則亡不終日이니 何功之有리오
爲今之計 莫若養威以俟時 時之可否 繋胡之彊弱이요 胡之彊弱 繋虎之能否니이다
自石勒舉事 虎常爲爪牙하여 百戰百勝하여 遂定中原이러니 勒死之後 虎挾嗣君하고 誅將相注+謂殺石堪․程遐․徐光諸將相也.하여 内難旣平
翦削外宼하여 四境之内 不失尺土하니 以是觀之하면 虎爲能乎잇가 將不能也잇가
今征西欲自將大軍하여 席卷河南하니 虎必親帥其衆하여 來决勝負하리니
欲與之戰이면 何如石生이며 若欲城守 何如金墉이며 欲阻沔水 何如大江이며 欲拒石虎 何如蘇峻이리오
石生 猛將이요 關中 精兵이라 征西之戰 殆不能勝也
金墉險固하여 劉曜十萬衆 不能拔하고 又當是時하여 洛陽, 關中 皆舉兵擊虎러니 今此三鎮 反爲其用하니 方之於前하면 倍半之勢也注+洛陽․關中而曰三鎭, 倂郭權據上邽爲三也.
石生 不能敵其半이어늘 而征西欲當其倍하니 愚所疑也니이다
蘇峻之彊 不及石虎하고 沔水之險 不及大江이로되 大江 不能禦蘇峻이어늘 而欲以沔水禦石虎하니 又所疑也니이다
祖士雅在譙 佃於城北界할새 豫置軍屯하여 以禦其外하여 榖熟 胡至하면 丁夫 戰於外하고 老弱 穫於内호되
多持炬火하여 急則燒榖而走하니 如此數年이로되 竟不獲利
當是時하여 胡唯據河北하니 方之於今하면 四分之一耳로되 士雅不能捍其一이어늘 而征西欲以禦其四하니 又所疑也니이다
然此 但論征西旣至之後耳 尚未論道路之慮也注+旣至之後, 謂旣至中原之後也.니이다 自沔以西 水急岸髙하니 魚貫泝流 首尾百里注+言水狹而急, 舟不得騈爲一列而進也.
若胡無宋襄之義하여 及我未陣而擊之 將如之何注+左傳, 宋襄公及楚人戰于,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子魚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陳而後擊之, 宋師敗績, 國人皆咎公, 公曰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리잇고 今王土與胡 水陸異勢하여 便習不同注+南便於用舟, 北便於用馬.하니 胡若送死하면 則敵之有餘어니와
若棄江遠進하여 以我所短으로 擊彼所長이면 懼非廟勝之算也니이다
朝議多與謨同이라 乃詔亮不聽移鎮하다
代王什翼犍 求昬於燕하다
什翼犍 會諸大人하여 議都灅源川이러니 其母王氏曰
吾自先世以來 以遷徙爲業注+謂逐水草爲行國, 草盡水竭, 則徙而之他也.이라 今國家多難하니 若城郭而居라가 一旦宼來하면 無所避之라한대 乃止하다
什翼犍 求昬於燕하니 燕王皝 以其妹妻之하다
秋七月 丞相始興公王導卒하니 以何充爲護軍將軍하고 庾冰爲中書監揚州刺史하여 參録尚書事하다
導簡素寡欲하고 善因事就功하니 雖無日用之益이나 而歲計有餘 輔相三世 倉無儲榖하고 衣不重帛注+三世, 謂元․明․成. 重, 直龍切.이러라
導與庾亮으로 共薦丹陽尹何充於帝하고 且曰 臣死之日 願引充内侍하시면 則社稷無虞矣리이다
及導薨 詔喪葬 參用天子之禮하고 諡曰文獻이라하다
徵庾亮爲丞相하니 固辭어늘 遂以充及亮弟冰으로 録尚書事하다
經綸時務하여 不舍晝夜하고 賓禮朝賢하며 升擢後進하니 由是 朝野翕然하여 稱爲賢相이러라
導輔政할새 毎從寛恕러니 至冰하여는 頗任威刑하니 丹陽尹殷融 諫之한대
冰曰 前相之賢으로도 猶不堪其弘하니 況如吾者哉注+堪, 任也. 言過於寬弘而不任也.
范汪 謂冰曰 頃 天文錯度하니 足下宜盡消禦之道注+七曜失行, 爲錯度.니이다
冰曰 玄象 豈吾所測이리오 正當勤盡人事耳라하다
又隱實戸口하여 料出無名萬餘人하여 以充軍實注+隱, 度也. 料, 數也.하다
好爲糾察하여 近於繁細러니 後益矯違하여 復存寛縱하여 疎密自由하니 律令 無用矣注+矯違, 謂矯前之煩細而流於寬縱, 愈於正道也.러라
八月 改丞相爲司徒하다
◑大尉南昌公郗鑒하니 以蔡謨 都督徐兗軍事하다
疾篤 上疏曰 臣所統 錯雜하여 率多北人이라 遷徙新附 皆有歸本之心注+遷徙․新附, 通鑑作 “或逼遷徙, 或是新附.” 或逼遷徙, 謂 “中原之人, 有戀土不肯南者, 以兵威逼遷之也.”하니
臣宣國恩하여 示以好惡하고 處與田宅하여 漸得少安이러니 聞臣疾篤하면 衆情駭動이라
若當北渡 必啟宼心注+蓋時議欲徙京口之鎭, 渡江而北. 故鑒云然.이리이다 太常臣謨 平簡貞正하여 素望所歸 可爲徐州니이다 即以謨代之하다
左衛將軍陳光 請伐趙한대 詔遣攻壽陽注+壽陽, 卽壽春, 晉避簡文鄭太后諱, 改曰壽陽. 自祖約之敗, 爲趙所據.이러니 謨上疏曰
壽陽 城小而固하고 又王師在路五十餘日이라 前驅未至 聲息 久聞注+聞, 音問.하니 賊河北之騎 足以來赴
況停船水渚하고 引兵造城하여 前對堅敵하고 顧臨歸路하니 此兵法之所誡也注+造, 至也.니이다
今光所將 皆殿中精兵이니 以國之爪士 擊寇之下邑하여 得之則利薄而不足損敵이요 失之則害重而足以益寇 非長策也니이다 乃止하다
九月 趙人 入寇하여 攻沔南及邾城하여 陷之하다
陶侃 在武昌할새 議者以江北有邾城하니 宜分兵戍之니이다 毎不答이로되 而言者不已
乃渡水獵할새 引將佐하여 語之曰 我所以禦寇者 長江耳 邾城 隔在江北하여 内無所倚하고 外接群夷注+接西陽諸蠻也.하니 夷中利深이라
晉人貪利하면 夷不堪命하여 必引虜入寇하리니 此乃致禍之由也 若羯虜有可乗之會하면 又不資於此矣리라
至是하여 庾亮 使毛寳, 樊峻戍之하니 趙王虎 遣夔安等하여 將兵數萬入寇하여 敗晉兵하고 殺五將軍하고 以二萬騎 攻邾城이어늘
寳求救於亮호되 不時遣하니 沔南, 邾城 皆陷이라 寳, 峻 突圍赴江死注+晉人, 蓋置戍於沔南, 以備津要.하다
進寇江夏, 義陽하니 皆降이라 進圍石城이러니 竟陵太守李陽 拒擊敗之하니 乃退하다
猶欲遷鎮이러니 聞邾城陷하고 乃止하다
趙以李巨爲御史中丞하다
趙王虎 患貴戚豪恣하여 乃擢巨爲中丞하니 中外肅然이라
虎曰 朕聞良臣如猛虎하여 髙步曠野하면 而豺狼避路라하니 信哉로다
殺其臣李演하다
羅恒, 解思明 復議奉晉하니 漢主壽不從이어늘 李演 復上書言之한대 壽怒하여 殺演하다
壽常慕漢武, 魏明之爲人하여 恥聞父兄時事 上書者 不得言先世政教하니 自以爲勝之也러라
燕王皝 遣長史劉翔하여 來獻捷하다
燕王皝 自以稱王이요 未受晉命이라하여 遂遣長史劉翔하여 來獻捷論功하고 且言權假之意注+獻捷, 獻趙捷也. 權假, 謂自稱王也.하고 并請刻期大舉하여 共平中原하다
又使其子恪, 霸 擊宇文别部하니 霸年十三 勇冠三軍이러라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5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5년이다.
[] 봄 3월에 유량庾亮이 표문을 올려 나라(후조後趙)를 정벌할 것을 청하자, 조령을 내려 중지하도록 하였다.
[] 유량庾亮중원中原을 수복하고자 하여 표문을 올려 환선桓宣양양襄陽에 진주시키고 자신의 아우 유역庾懌(유역)을 위흥魏興에 진주시키고 유익庾翼강릉江陵에 진주시키고 모보毛寳번준樊峻에게 주성邾城注+① 邾城은 長江 북쪽에 있으니, 漢나라 江夏郡 邾縣의 옛 성이다.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글을 올려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영을 석성石城으로 옮기고서 여러 군대를 보내어 장강長江면수沔水에 나열해서 나라(후조後趙)를 정벌할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황제( 성제成帝)가 이 의견을 회부하자, 승상丞相 왕도王導는 허락할 것을 청하였는데, 태위太尉 치감郗鑒은 의논하기를 “물자와 재정이 미비하니, 군대를 크게 일으킬 수 없다.” 하였다.
[] 태상太常 채모蔡謨가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때는 막힐 때도 있고 통할 때도 있으며 도는 굽히는 경우도 있고 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행동한다면 하루도 못 되어 당장 망하게 될 것이니,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지금을 위한 계책은 위력威力을 길러서 때를 기다리는 계책만 못하니, 때의 가부可否는 오랑캐의 강약에 달려 있고 오랑캐의 강약은 석호石虎의 능함과 무능함에 달려 있습니다.
석륵石勒이 거사할 때부터 석호는 항상 그의 심복이 되어서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해서 마침내 중원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석륵이 죽은 뒤에 석호는 뒤를 이은 군주의 세력을 믿고 장수와 정승들을 주살하여注+① 〈“誅將相”은〉 石堪과 程遐, 徐光의 여러 장수와 정승을 죽임을 이른다. 내란을 평정하였고,
이어서 밖의 적들을 제거해서 사방 국경 안의 땅을 한 자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석호를 유능하다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능하다 하겠습니까.
지금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경량庚亮)이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서 하남河南 지방을 석권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석호가 반드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승부를 결판낼 것입니다.
석호와 더불어 싸우고자 할 경우 석생石生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만약 성을 수비하고자 할 경우 금용성金墉城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면수沔水를 막고자 할 경우 장강長江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석호를 막고자 할 경우 소준蘇峻과 비교해서 어떠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 석생石生은 용맹한 장수이고 관중關中은 정예병이 있는 곳이니,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유량庾亮)이 〈석생과〉 싸울 경우 아마도 이기지 못할 듯합니다.
지금은 이 3개의 (낙양洛陽관중關中상규上邽)이 도리어注+① 洛陽과 關中인데 3개의 鎭이라고 말한 것은 郭權이 점거하고 있는 上邽까지 아울러 셋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쓰임이 되고 있으니, 예전에 비하면 크게 차이 나는 형세입니다.
석생이 지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석호의 군대를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정서대장군이 그보다 갑절이나 많은 군대를 상대하고자 하니, 어리석은 저는 의심하는 바입니다.
소준蘇峻의 강함이 석호만 못하고 면수沔水의 험함이 장강長江만 못합니다. 장강으로도 소준을 막아내지 못하였는데 면수를 가지고 석호를 막아내고자 하니, 이는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옛날 조사아祖士雅(조적祖逖)가 초군譙郡에 있으면서 성 북쪽에서 농사지을 적에 미리 군영을 설치해서 외부의 적을 방어하여 곡식이 익을 무렵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장정들은 밖에서 싸우고 노약자는 안에서 수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횃불을 가지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하면 곡식을 불태우고 달아났는데, 몇 년을 이와 같이 하였으나 끝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오랑캐가 하북河北 지방만 점거하였으니, 지금에 비하면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아가 그 하나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서대장군이 그 네 배나 되는 적을 막아내고자 하니, 이것이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다만 정서대장군이 이미 도착한 뒤의 일을注+① “旣至之後”는 이미 中原에 이른 뒤를 이른다. 논한 것일 뿐이요, 도로에 대한 우려는 아직 논하지도 않았습니다. 면수沔水 서쪽으로는 강물이 급하게 흐르고 강안江岸이 높아서 물고기를 꿰듯이 물길을 곧장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注+② 〈“水急岸髙 魚貫泝流”는〉 강폭이 좁고 물이 급하게 흘러서 배가 일렬로 나란히 전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리가 백 리에 이릅니다.
만약 오랑캐가 나라 양공襄公의 의리가 없어서 우리가 진을 치기도 전에 공격해온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注+③ ≪春秋左氏傳≫을 살펴보건대 宋 襄公이 楚나라 사람과 泓水에서 싸울 적에 宋나라 사람은 이미 대열을 이루었으나, 楚나라 사람은 아직 홍수를 다 건너지 못하였다. 이때 司馬 子魚가 楚軍을 공격할 것을 청하자, 양공이 “안 된다.” 하였다. 초군이 홍수를 모두 건너왔으나 아직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자어가 또다시 공격할 것을 청하자, 양공이 “안 된다.” 하였다. 초군이 이미 진을 설치한 뒤에 공격하여 송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니, 국민들이 모두 양공을 탓하였다. 양공이 말하기를 “옛날 군대를 출동하여 싸울 때에는 좁고 험한 곳을 이용하지 않았으니, 과인은 비록 멸망한 나라의 후손이지만 대열을 이루지 못한 적을 북을 쳐 공격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임금님의 영토와 오랑캐는 물과 육지의 형세가 달라서 〈강 남쪽은 배를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강 북쪽은 말을 타기에 편리하여〉 익숙한 것이 똑같지 않으니,注+④ 〈“水陸異勢 便習不同”은〉 강 남쪽은 배를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강 북쪽은 말을 쓰기에 편리함을 말한 것이다. 오랑캐가 만약 죽으러 강가로 온다면 그들을 여유 있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강을 버리고 멀리 진격하여 우리의 단점인 육전陸戰으로 저들의 장점인 육전陸戰을 공격한다면, 이것은 묘당廟堂에서 필승하기 위해 세운 계책[廟勝之算]이 아닐 듯합니다.”
조정의 의논이 대부분 채모蔡謨의 의견과 같았다. 마침내 유량庾亮에게 명하여 진영을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하였다.
[] 대왕代王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나라(전연前燕)에 혼인할 것을 청하였다.
[]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여러 대인大人들을 모아놓고 누원천灅源川(누원천)에 도읍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그의 어머니 왕씨王氏가 말하기를
“나는 선대先代 이래로 옮겨 다니는 것을 으로 여겼다.注+① 〈“以遷徙爲業”은〉 물과 풀을 따라 遊牧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풀이 다하고 물이 고갈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감을 말한 것이다. 지금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만약 한 곳에 성곽을 쌓고 거주하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쳐들어오면 피할 곳이 없을 것이다.” 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
탁발십익건이 나라에 혼인할 것을 청하니,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자신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가을 7월에 승상인 시흥공始興公 왕도王導하니, 하충何充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고 유빙庾冰중서감中書監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고서 〈이 둘을〉 녹상서사録尚書事로 삼았다.
[] 왕도王導는 간략하고 검소하고 욕심이 적으며 일을 따라 훌륭하게 공을 이루니, 비록 일상日常에서는 유익함을 볼 수 없으나, 1년의 공을 통계해보면 유익함이 넉넉하였다. 재상으로 3대의 임금을 섬겼는데 자기 집안 창고에는 축적한 곡식이 없었고 옷은 비단옷을 겹쳐 입지 않았다.注+① 3대는 元帝, 明帝, 成帝를 이른다. 重(거듭)은 直龍 切이다.
[] 당초에 왕도王導유량庾亮과 함께 단양윤丹陽尹 하충何充을 황제에게 천거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죽게 되면 원컨대 하충을 데려다가 조정에서 모실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면 사직社稷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도가 하자, 조령을 내려 초상과 장례를 천자의 예를 참작하여 쓰게 하고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유량을 불러 승상으로 삼으니, 유량이 굳이 사양하므로 마침내 하충과 유량의 아우 유빙庾冰녹상서사録尚書事로 삼았다.
유빙은 시무時務를 경륜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정의 현자들을 손님으로 예우하며 후진後進들을 승진시키고 발탁하니, 이로부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어진 정승이라 칭찬하였다.
何充庾冰參政事何充庾冰參政事
[] 처음에 왕도王導가 정사를 보필할 적에는 매번 너그럽게 용서함을 따랐는데, 유빙庾冰승상丞相이 되고 나서는 자못 위엄과 형벌에 맡기니, 단양윤丹陽尹 은융殷融이 간하였다.
그러자 유빙이 말하기를 “전임 정승인 왕도의 어짊으로도 오히려 너그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는데,注+① 堪은 감당함이니, 〈“猶不堪其弘”은〉 관대함이 지나쳐서 감당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하물며 나와 같은 자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범왕范汪이 유빙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천문天文을 보니 〈칠요七曜가〉 궤도를 벗어나 운행하니,注+가 궤도를 벗어나 운행하는 것을 ‘錯度’라 한다. 족하足下는 마땅히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막는 방도를 다해야 합니다.” 하였다.
유빙이 대답하기를 “천문을 내가 어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의 일을 부지런히 다할 뿐이다.” 하였다.
또 실제 호구戶口를 낱낱이 조사하여 명부名簿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만여 명을 헤아려 색출해서 군실軍實에 충당하였다.注+③ 隱은 헤아림이고 料는 셈이다.
유빙은 규찰하기를 좋아하여 번거롭고 세세하게 할 정도였는데, 뒤에는 이전의 번거롭고 세세하게 함을 바로잡으려다가 더욱 정도에서 어긋나注+④ “矯違”는 예전의 번거롭고 세세함을 바로잡으려다가 너그럽게 방임하는 데로 흘러서 더욱 정도에 어긋남을 말한 것이다. 다시 관대하게 방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래서 관대함과 엄격함을 아무런 기준 없이 시행하니, 율령律令이 쓸모가 없었다.
[] 8월에 승상丞相을 고쳐 사도司徒라 하였다.
[] 대위大尉남창공南昌公 치감郗鑒하니, 채모蔡謨도독서都督徐연군사兗軍事로 삼았다.
[] 치감郗鑒이 병이 위독하자, 상소하기를 “신이 다스리고 있는 지역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데 대부분 북쪽 사람입니다. 핍박당하여 남쪽으로 옮겨온 자들이나 근래 귀부한 자들은注+① 遷徙, 新附는 ≪資治通鑑≫에는 “혹 핍박당하여 옮겨오거나 혹은 근래 귀부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주석에〉 ‘혹 핍박당하여 옮겨옴’에 대해 “중원 사람으로서 본토를 그리워하여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군대의 위엄으로 핍박하여 강제로 이주시킴을 이른다.” 하였다. 모두 본토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이 그동안 나라의 은혜를 베풀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농지와 주택을 주어서 점점 다소 편안해지게 되었는데, 신이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놀라 동요할 것입니다.
만약 〈경구京口의 진영을 옮겨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가면 반드시 적의 침략하려는 마음을 열어주게 될 것입니다.注+② 이 당시 의논이 京口의 진영을 옮겨서 長江을 건너 북쪽에 설치하고자 하였으므로 郗鑒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태상太常채모蔡謨는 공평하고 간략하고 정직하여 평소 인망을 얻고 있으니, 그를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치감이 하자, 즉시 채모로 대신하게 하였다.
[] 이때 좌위장군左衛將軍 진광陳光나라(후조後趙)를 정벌할 것을 청하자, 그를 보내어 수양壽陽注+① 壽陽은 바로 壽春인데, 晉나라가 簡文帝의 모친 鄭太后(鄭阿春)의 휘를 피하여 수양이라고 고쳤다. 祖約이 패전한 뒤로부터 趙나라가 이곳을 점거하고 있었다. 공격하도록 조령을 내렸는데, 채모蔡謨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수양성은 성이 작으면서도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고,〉 천자의 군대가 수양성으로 가는 길이 50여 일 정도 걸릴 것입니다. 우리의 선봉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식이 적에게 오래 전에 알려질 것이니,注+② 聞(알려지다, 소문나다)은 음이 問이다. 황하 이북에 있는 적의 기병이 달려오기에 충분합니다.
더군다나 물가에 배를 정박하고 군대를 이끌고 성에 도착하여注+③ 造는 이름이다. 앞으로는 강한 적을 상대하고 뒤로는 후퇴할 길을 돌아보게 되니, 이는 병법에서 경계하는 바입니다.
지금 진광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모두 궁전을 지키는 정예병입니다. 나라의 정예로운 금군禁軍으로 적의 하읍下邑(작은 고을)을 공격하니, 점령하더라도 우리가 얻는 이득이 적어서 적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점령하지 못하면 우리가 입는 폐해가 커서 적을 유익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훌륭한 계책이 아닙니다.” 이에 조나라 정벌을 중지하였다.
[] 9월에 나라(후조後趙) 사람이 침략하여 면수沔水의 남쪽과 주성邾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 처음에 도간陶侃무창武昌에 있을 적에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강 북쪽에 주성邾城이 있으니, 마땅히 군대를 나누어 그곳을 지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도간은 매번 이에 답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도간은 마침내 강물을 건너 사냥을 하고는 장수와 보좌관들을 데리고 말하기를 “우리가 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장강뿐이다. 주성은 장강 이북에 떨어져 있어서 안으로는 의지할 것이 없고 밖으로는 여러 이족夷族(유양만酉陽蠻)과 인접해 있으니,注+① 〈“外接群夷”는〉 西陽의 여러 蠻夷들과 접한 것이다. 주성은 이족夷族들에게 이익이 많은 곳이다.
나라 사람이 그 이익을 탐하면 이족夷族들이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갈로羯虜(후조後趙)를 이끌고 우리를 침략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만약 갈로羯虜가 이 틈을 노리게 된다면 또 주성에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 이때 유량庾亮모보毛寳번준樊峻으로 하여금 주성邾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조왕趙王 석호石虎기안夔安 등을 보내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나라(동진東晉) 군대를 물리치고 다섯 명의 장군을 죽이고서 2만 명의 기병으로 주성을 공격하였다.
모보가 유량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유량이 제때 지원병을 보내지 않으니, 면수沔水 남쪽과 주성이 모두 함락되었고 모보와 번준은 포위망을 뚫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注+① 晉나라 사람들이 아마도 수비하는 부대를 沔水 남쪽에 설치하여 나루터의 요해처를 대비한 듯하다.
기안이 전진하여 강하江夏의양義陽을 침략하니, 두 곳이 모두 나라(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기안이 진격하여 석성石城을 포위하였는데,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양李陽이 맞서 공격하여 물리치니, 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이때 유량은 여전히 진영을 〈무창武昌에서 석성石城으로〉 옮기고자 하였는데, 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이거李巨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삼았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귀척들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함을 염려하여 마침내 이거李巨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발탁하니, 중외中外가 숙연해졌다.
석호가 말하기를 “짐이 들으니 ‘훌륭한 신하는 사나운 범과 같아서 광야에 어슬렁거리고 다니면 승냥이들이 길을 피한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 말이 옳다.” 하였다.
[] 나라(성한成漢)가 그 신하 이연李演을 죽였다.
[] 나항羅恒해사명解思明이 다시 나라(동진東晉)를 받들 것을 의논하니, 한주漢主 이수李壽가 따르지 않았다. 이연李演이 다시 글을 올려 이것을 말하자, 이수가 노하여 이연을 죽였다.
이수는 항상 나라 무제武帝나라 명제明帝의 사람됨을 흠모해서 자기 부친(이양李驤)과 형(이웅李雄) 때의 일을 듣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글을 올리는 자들이 선대先代의 정사와 가르침을 말할 수 없었으니, 이수가 스스로 부형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겨울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장사長史 유상劉翔을 〈나라(동진東晉)에〉 보내와서 전리품戰利品을 바쳤다.
[]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나라의 명을 받지 않았다 하여 마침내 장사長史 유상劉翔을 보내와서 전리품을 바치고 전공戰功을 논하였다. 또 왕의 칭호를 임시로 사용한 뜻을 말하고注+① “獻捷”은 趙나라에게 얻은 전리품을 바친 것이다. “權假”는 스스로 왕을 칭함을 이른다. 아울러 시기를 잡아 크게 군대를 일으켜서 함께 중원을 평정할 것을 청하였다.
모용황이 아들 모용각慕容恪모용패慕容霸로 하여금 우문씨宇文氏별부别部를 공격하게 하니, 모용패慕容霸는 이때 나이 열세 살이었는데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다.
[] 〈전량前涼의〉 장준張駿벽옹辟雍명당明堂을 세웠다.


역주
역주1 庾亮……詔諭止之 : “조령을 내려 중지하게 하였는데, 趙나라를 정벌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庾亮을 인정한 것이다. 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힌 뒤로 長江과 沱江 지방이 여러 대에 걸쳐 태평하였다. 이때 능히 중원을 수복할 것을 마음먹은 자가 있으면, ≪資治通鑑綱目≫에서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庾翼과 褚裒, 司馬勲, 殷浩가 비록 모두 성공하지 못했으나, 趙나라를 정벌했다고 쓴 것이 넷이고 北伐했다고 쓴 것이 하나이니, 이는 모두 복수하는 의리를 중국에 보여주어 臣子들에게 殉國을 권장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詔止之矣 其書伐趙 何 予亮也 自五胡雲擾 江沱宴安數世矣 於是 有能以開復中原爲心者 綱目之所予也 自是 庾翼褚裒司馬勲殷浩 雖皆無成 而書伐趙者四 北伐者一 皆所以示中國復讐之義 爲臣子徇國之勸也]” ≪書法≫
역주2 金墉城(洛陽)이……못하였고 : 咸和 3년(328)에 前趙의 劉曜가 금용성을 포위하였는데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石勒이 이를 틈타 유요의 1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역주3 그 당시에는……공격하였는데 : 咸和 8년(333)에 石生․石朗․郭權이 石虎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석생과 석랑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4 (弘)[泓] : 저본에는 ‘弘’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泓’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七曜 : 해와 달과 金․木․水․火․土의 五星을 이른다.
역주6 [違] : 저본에는 ‘違’가 없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 (度)[渡] : 저본에는 ‘度’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渡’로 바로잡았다.
역주8 張駿立辟雍明堂 : “이것을 쓴 것은 비난한 것이다. 어째서 비난하였는가. 辟雍은 天子의 학교이고 明堂은 王者의 政事堂인데, 어찌 臣子가 가질 수 있겠는가. 綱에 쓰기를 ‘張駿이 벽옹과 명당을 세웠다.’ 하였으니, 그를 폄하한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書 譏也 何譏 辟雍 天子之學 明堂 王者之堂 豈臣子所得爲哉 書曰 張駿立辟雍明堂 而貶義自見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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