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時有否泰하고 道有屈伸하니 茍不計彊弱而輕動이면 則亡不終日이니 何功之有리오
爲今之計는 莫若養威以俟時니 時之可否는 繋胡之彊弱이요 胡之彊弱은 繋虎之能否니이다
自石勒舉事
로 虎常爲爪牙
하여 百戰百勝
하여 遂定中原
이러니 勒死之後
에 虎挾嗣君
하고 誅將相
注+謂殺石堪․程遐․徐光諸將相也.하여 内難旣平
에
翦削外宼하여 四境之内 不失尺土하니 以是觀之하면 虎爲能乎잇가 將不能也잇가
今征西欲自將大軍하여 席卷河南하니 虎必親帥其衆하여 來决勝負하리니
欲與之戰이면 何如石生이며 若欲城守면 何如金墉이며 欲阻沔水면 何如大江이며 欲拒石虎면 何如蘇峻이리오
目
石生은 猛將이요 關中은 精兵이라 征西之戰이 殆不能勝也요
金墉險固
하여 劉曜十萬衆
이 不能拔
하고 又當是時
하여 洛陽, 關中
이 皆舉兵擊虎
러니 今此三鎮
이 反爲其用
하니 方之於前
하면 倍半之勢也
注+洛陽․關中而曰三鎭, 倂郭權據上邽爲三也.라
石生이 不能敵其半이어늘 而征西欲當其倍하니 愚所疑也니이다
蘇峻之彊이 不及石虎하고 沔水之險이 不及大江이로되 大江이 不能禦蘇峻이어늘 而欲以沔水禦石虎하니 又所疑也니이다
昔에 祖士雅在譙에 佃於城北界할새 豫置軍屯하여 以禦其外하여 榖熟에 胡至하면 丁夫는 戰於外하고 老弱은 穫於内호되
多持炬火하여 急則燒榖而走하니 如此數年이로되 竟不獲利라
當是時하여 胡唯據河北하니 方之於今하면 四分之一耳로되 士雅不能捍其一이어늘 而征西欲以禦其四하니 又所疑也니이다
目
[목目] 태상太常 채모蔡謨가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때는 막힐 때도 있고 통할 때도 있으며 도는 굽히는 경우도 있고 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강함과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행동한다면 하루도 못 되어 당장 망하게 될 것이니,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지금을 위한 계책은 위력威力을 길러서 때를 기다리는 계책만 못하니, 때의 가부可否는 오랑캐의 강약에 달려 있고 오랑캐의 강약은 석호石虎의 능함과 무능함에 달려 있습니다.
석륵石勒이 거사할 때부터 석호는 항상 그의 심복이 되어서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해서 마침내 중원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석륵이 죽은 뒤에 석호는 뒤를 이은 군주의 세력을 믿고 장수와 정승들을 주살하여
注+① 〈“誅將相”은〉 石堪과 程遐, 徐光의 여러 장수와 정승을 죽임을 이른다. 내란을 평정하였고,
이어서 밖의 적들을 제거해서 사방 국경 안의 땅을 한 자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석호를 유능하다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능하다 하겠습니까.
지금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경량庚亮)이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서 하남河南 지방을 석권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석호가 반드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승부를 결판낼 것입니다.
석호와 더불어 싸우고자 할 경우 석생石生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만약 성을 수비하고자 할 경우 금용성金墉城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면수沔水를 막고자 할 경우 장강長江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석호를 막고자 할 경우 소준蘇峻과 비교해서 어떠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目
[목目] 석생石生은 용맹한 장수이고 관중關中은 정예병이 있는 곳이니,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유량庾亮)이 〈석생과〉 싸울 경우 아마도 이기지 못할 듯합니다.
또
지금은 이 3개의
진鎭(
낙양洛陽․
관중關中․
상규上邽)이 도리어
注+① 洛陽과 關中인데 3개의 鎭이라고 말한 것은 郭權이 점거하고 있는 上邽까지 아울러 셋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쓰임이 되고 있으니, 예전에 비하면 크게 차이 나는 형세입니다.
석생이 지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석호의 군대를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정서대장군이 그보다 갑절이나 많은 군대를 상대하고자 하니, 어리석은 저는 의심하는 바입니다.
소준蘇峻의 강함이 석호만 못하고 면수沔水의 험함이 장강長江만 못합니다. 장강으로도 소준을 막아내지 못하였는데 면수를 가지고 석호를 막아내고자 하니, 이는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옛날 조사아祖士雅(조적祖逖)가 초군譙郡에 있으면서 성 북쪽에서 농사지을 적에 미리 군영을 설치해서 외부의 적을 방어하여 곡식이 익을 무렵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장정들은 밖에서 싸우고 노약자는 안에서 수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횃불을 가지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하면 곡식을 불태우고 달아났는데, 몇 년을 이와 같이 하였으나 끝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오랑캐가 하북河北 지방만 점거하였으니, 지금에 비하면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아가 그 하나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서대장군이 그 네 배나 되는 적을 막아내고자 하니, 이것이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目
[목目] 당초에 왕도王導가 유량庾亮과 함께 단양윤丹陽尹 하충何充을 황제에게 천거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죽게 되면 원컨대 하충을 데려다가 조정에서 모실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면 사직社稷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도가 훙薨하자, 조령을 내려 초상과 장례를 천자의 예를 참작하여 쓰게 하고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하였다.
유량을 불러 승상으로 삼으니, 유량이 굳이 사양하므로 마침내 하충과 유량의 아우 유빙庾冰을 녹상서사録尚書事로 삼았다.
유빙은
시무時務를 경륜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정의 현자들을 손님으로 예우하며
후진後進들을 승진시키고 발탁하니, 이로부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어진 정승이라 칭찬하였다.
何充庾冰參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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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도간陶侃이 무창武昌에 있을 적에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강 북쪽에 주성邾城이 있으니, 마땅히 군대를 나누어 그곳을 지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도간은 매번 이에 답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도간은 마침내 강물을 건너 사냥을 하고는 장수와 보좌관들을 데리고 말하기를 “우리가 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장강뿐이다. 주성은 장강 이북에 떨어져 있어서 안으로는 의지할 것이 없고 밖으로는 여러
이족夷族(
유양만酉陽蠻)과 인접해 있으니,
注+① 〈“外接群夷”는〉 西陽의 여러 蠻夷들과 접한 것이다. 주성은
이족夷族들에게 이익이 많은 곳이다.
진晉나라 사람이 그 이익을 탐하면 이족夷族들이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갈로羯虜(후조後趙)를 이끌고 우리를 침략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만약 갈로羯虜가 이 틈을 노리게 된다면 또 주성에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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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 유량庾亮이 모보毛寳와 번준樊峻으로 하여금 주성邾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기안夔安 등을 보내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진晉나라(동진東晉) 군대를 물리치고 다섯 명의 장군을 죽이고서 2만 명의 기병으로 주성을 공격하였다.
모보가 유량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유량이 제때 지원병을 보내지 않으니,
면수沔水 남쪽과 주성이 모두 함락되었고 모보와 번준은 포위망을 뚫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注+① 晉나라 사람들이 아마도 수비하는 부대를 沔水 남쪽에 설치하여 나루터의 요해처를 대비한 듯하다.
기안이 전진하여 강하江夏와 의양義陽을 침략하니, 두 곳이 모두 조趙나라(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기안이 진격하여 석성石城을 포위하였는데, 경릉태수竟陵太守 이양李陽이 맞서 공격하여 물리치니, 조趙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이때 유량은 여전히 진영을 〈무창武昌에서 석성石城으로〉 옮기고자 하였는데, 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