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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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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이라
趙建武十四年이라
秋八月 趙太子宣 殺其弟韜라가 伏誅하다
秦公韜 有寵於趙主虎하니 欲立之로되 以太子宣長이라하여 猶豫未决注+長, 知兩切.이러라
謂所幸楊杯, 趙生曰 汝能殺韜하면 當以韜之國邑으로 分封汝等호리라 韜死 主上 必臨喪하리니 吾因行大事하면 蔑不濟矣注+左傳, 潘崇謂楚商臣曰 “能行大事乎.” 注 “大事, 謂弑君.”리라
八月 杯等 殺韜하니 虎哀驚氣絶이라가 久之方蘇 將出臨其喪한대 司空李農 諫曰 害秦公者 未知何人하니 鑾輿不宜輕出이니이다 虎乃止하다
旣而 事覺하니 虎囚宣하여 殺之鄴北호되 窮極慘酷하고 縱火焚之할새 虎登中臺觀之하고 取灰하여 分置諸門交道中하고 殺其妻子九人注+中臺者, 三臺之中臺, 卽銅雀臺也. 交道, 午道也, 一縱一橫, 爲午道.하다
宣少子纔數歲 虎素愛之러니 抱之而泣하고 欲赦之한대 大臣 不聽하고 取殺之하니 兒挽虎衣하고 大叫하여 至於絶帯 虎因此發病하니라
東宮衞士十餘萬人 皆謫戍涼州注+趙未得涼州, 置涼州於金城.하다
加桓温征西大將軍하다
朝廷 論平蜀之功하여 欲以豫章郡封桓溫한대
左丞荀蕤曰注+蕤, 崧之子也. 若復平河, 洛이면 將何以賞之잇고 乃加溫征西大將軍開府儀同三司하고 封臨賀郡公하다
旣滅蜀 威名 大振하니 朝廷 憚之 會稽王昱 以殷浩有盛名하여 朝野推服이라하여 乃引爲心膂하여 爲參綜朝權하여 欲以抗溫注+參綜, 謂參錯綜核也.하니 由是 與溫寖相疑貳러라
浩以王羲之 爲護軍將軍注+羲之, 導之從子也.하니 羲之以爲内外協和然後 國家可安이라하여 勸浩不宜與溫構隙이라호되 浩不從하다
九月 燕王皝하니 世子儁하다
有疾 召儁하여 屬之曰 今中原未平하니 方資賢傑하여 以經世務
智勇兼濟하여 才堪任重하니 汝其委之하라 陽士秋 士行高潔하고 忠幹貞固하니 可託大事 汝善待之注+士秋, 字. 行, 去聲.하라
하니 諡曰文明하다
趙主虎議立太子한대 太尉張舉曰 燕公斌 有武略하고 彭城公遵 有文德하니 惟陛下所擇이니이다
虎之拔上邽也 將軍張豺 獲前趙主曜幼女하니 有殊色이라 納於虎하니 虎嬖之하여 生齊公世러니
豺乃説虎曰 陛下再立太子 其母皆賤故 禍亂相尋하니이다 今宜擇母貴子孝者하여 立之니이다
虎納其言하여 令公卿上疏請之하니 大司農曹莫 不肯署名이어늘 虎問其故한대 頓首曰 天下 重器 不宜立少 故不敢署니이다
虎稱其忠이로되 而不能用하여 遂立世爲太子하고 以劉昭儀爲后하다
冬十二月 以蔡謨爲司徒하다
謨上疏固讓하고 謂所親曰 我若爲司徒 將爲後代所哂이니 義不敢拜也로라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4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14년이다.
[] 가을 8월에 나라(후조後趙) 태자 석선石宣이 아우 석도石韜를 죽였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진공秦公 석도石韜조주趙主 석호石虎에게 총애를 받으니, 석호가 그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태자 석선石宣이 나이가 더 많다 하여注+① 長(많다)은 知兩의 切이다. 유예하고 결단하지 못하였다.
석선은 자기가 총애하는 양배楊杯조생趙生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능히 석도를 죽인다면 나는 마땅히 석도의 봉지封地를 나누어 너희들에게 봉해주겠다. 석도가 죽으면 주상이 반드시 에 와서 곡할 것이니, 내가 그 기회를 이용해 대사大事를 행하면 성공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注+② ≪春秋左氏傳≫에 潘崇이 楚나라 商臣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능히 大事를 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注에 “대사는 군주를 시해함을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 8월에 양배楊杯 등이 석도石韜를 죽이니, 석호石虎가 슬프고 놀라서 기절하였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소생하였다. 장차 그 에 나아가 곡하려 하였는데, 사공司空 이농李農이 간하기를 “진공秦公을 해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 대가大駕가 가볍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석호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윽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석호가 석선을 옥에 가두었다가 그를 업성鄴城 북쪽에서 죽였는데, 참혹한 형벌을 총동원하였고 그런 뒤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웠다. 석호가 중대中臺에 올라가 이 광경을 구경하였으며 시신을 태우고 남은 재를 가져다가 각 성문으로 통하는 길거리의 중앙에 나누어 두었고注+① 中臺는 三臺의 중대이니, 바로 銅雀臺이다. 交道는 午道이니, 두 개의 길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도로를 午道라 한다. 그의 처자식 9명을 죽였다.
석선의 어린 아들이 겨우 대여섯 살이었는데, 석호가 평소 그를 사랑하였다. 석호가 그 아이를 안고 울면서 용서하려고 하자, 대신이 따르지 않고 데려다 죽이려 하니, 아이가 석호의 옷을 잡아당기며 크게 울부짖어 띠가 끊어졌다. 석호가 이로 인하여 병이 났다.
동궁東宮의 호위병 10여만 명이 모두 양주涼州注+② 趙나라는 아직 涼州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양주를 金城에 둔 것이다. 귀양 가서 자리 살았다.
[] 〈나라(동진東晉)가〉 환온桓温에게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더해주었다.
[] 조정에서는 지방을 평정한 공을 논하여 환온桓溫예장군豫章郡으로 봉하려고 하자,
좌승左丞 순유荀蕤(순유)가注+① 荀蕤는 荀崧(순숭)의 아들이다. 말하기를 “환온이 만약 다시 , 지방을 평정하면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겠습니까.” 하니, 마침내 환온에게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주고 임하군공臨賀郡公에 봉하였다.
[] 환온桓溫이 이미 지방을 멸망시킨 뒤에 위엄과 명성이 세상에 크게 떨쳐지니, 조정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은호殷浩가 훌륭한 명성이 있어 조야에서 추앙하고 복종한다 하여 마침내 그를 불러 심복心腹으로 삼아 조정의 권력에 참여하여 다스리게 해서注+① “參綜”은 참여하여 총괄하여 다스림을 이른다. 환온에게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환온과 점점 서로 의심하게 되었다.
은호가 왕희지王羲之注+② 王羲之는 王導의 從子이다.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으니, 왕희지는 생각하기를 “안과 바깥이 화합한 뒤에야 국가가 편안해질 수 있다.” 하여 은호에게 환온과 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권하였으나, 은호는 따르지 않았다.
羲之決策於殷浩羲之決策於殷浩
[] 9월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하니, 세자世子 모용준慕容儁이 즉위하였다.
[] 모용황慕容皝이 병이 있자 모용준慕容儁을 불러 당부하기를 “지금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니, 바야흐로 어진 이와 영걸英傑의 도움을 받아 세상의 일을 경륜하여야 한다.
모용각慕容恪은 지혜와 용맹을 겸하여 재주가 중임重任을 맡길 만하니, 너는 그에게 정사를 맡겨라. 그리고 양사추陽士秋는 선비의 품행이 고결하며注+① 士秋는 陽騖의 자이다. 行은 去聲이다. 충성스럽고 재간才幹이 있고 정고貞固하니, 대사大事를 맡길 만하다. 너는 그들을 잘 대우하라.” 하였다.
하니, 시호를 문명文明이라 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아들 석세石世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 조주趙主 석호石虎가 태자를 세울 것을 의논하자, 태위太尉 장거張舉가 말하기를 “연공燕公 석빈石斌(석빈)은 무략이 있고 팽성공彭城公 석준石遵은 문덕이 있으니, 오직 폐하께서 선택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옛날 석호가 상규上邽를 함락할 적에 장군 장시張豺전조前趙의 군주 유요劉曜의 어린 딸을 사로잡았는데, 용모가 절색絶色이었다. 그녀를 석호에게 바치니, 석호가 그녀를 몹시 총애해서 제공齊公 석세石世를 낳았다.
장시가 마침내 석호를 설득하기를 “폐하가 태자를 두 번(석수石邃석선石宣) 세웠는데 그 어미가 모두 천하였기 때문에 화란禍亂이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귀한 어미를 둔 효성스러운 자식을 가려서 세워야 합니다.” 하니,
석호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공경公卿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청하게 하였는데, 대사농大司農 조막曹莫이 상소문에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석호가 그 까닭을 묻자, 조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자리는 중요한 지위이니, 나이 어린 사람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감히 서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석호는 그의 충성스러움을 칭찬하였으나 그의 말을 따르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석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유소의劉昭儀를 황후로 삼았다.
[] 겨울 12월에 〈나라(동진東晉)가〉 채모蔡謨사도司徒로 삼았다.
[] 채모蔡謨가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고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약 사도司徒가 되면 장차 후대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의리상 감히 사은숙배하지 못한다.” 하였다.


역주
역주1 (驚)[騖] : 저본에는 ‘驚’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騖’로 바로잡았다.
역주2 趙立子世爲太子 : “僭國에서 자식을 태자로 세운 것을 모두 쓰지는 않았는데, ‘趙나라 태자’라고 씀은 어째서인가. 나이 어린 사람을 세움을 비난한 것이다. 石遵이 시해하고 반역함이 이때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삼가 쓴 것이다.[僭國立子 不悉書 書趙太子 何 譏立少也 遵之弑逆 始此矣 故謹書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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