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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이 遣中郎常煒하여 使於燕이어늘 儁이 使封裕로 詰璽所在한대 煒曰 在鄴이니라
裕曰 張舉言在襄國은 何也오 煒曰 彼求救者 爲妄誕之辭耳니라
儁이 乃積柴其旁하고 使裕로 以其私誘之호되 煒辭不變이라
左右請殺之한대 儁曰 彼不憚殺身以徇其主하니 忠臣也라하고 使出就館하고
夜
에 使其鄉人往勞之
하고 且曰 君何以不實言
고 王
이 怒
하여 欲處君於遼, 碣之表
하시니 奈何
注+遼海及碣石, 爲遼․碣. 杜佑曰 “盧龍, 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오
煒曰 吾結髪以來로 尙不欺布衣어든 況人主乎아 曲意茍合은 性所不能이라 直情盡言하여 雖沈東海라도 不敢避也라하고 遂臥向壁하여 不復言이어늘
儁이 乃囚之於龍城이러니 後知張舉之妄하고 乃殺舉而釋煒之囚하다
目
閔이 攘袂大言曰 吾戰决矣로니 敢沮衆者는 斬하리라하고 乃悉衆出하여 與襄, 琨戰이러니
悦綰
이 適以燕兵至
하여 去魏兵數里
에 疏布騎卒
하고 曳柴揚塵
注+疏, 讀與疎同.하니 魏人
이 望之恟懼
어늘
襄, 琨, 綰이 三面擊之하고 趙王祗自後衝之하니 魏兵이 大敗라 閔與十餘騎로 走還鄴하니 將士死者十萬餘人이러라
姚襄이 還灄頭하니 姚弋仲이 怒其不擒閔하여 杖之一百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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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주趙主(후조後趙) 석지石祗 영녕永寧 2년이고 위주魏主(염위冉魏) 염민冉閔 영흥永興 2년이다.
진주秦主(전진前秦) 부건苻健 황시皇始 원년이다.
이해에 조趙나라(후조後趙)가 망하니, 옛날의 큰 나라(염위冉魏)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양涼나라(전량前涼)․대代나라․연燕나라(전연前燕) 셋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전진前秦)가 하나이니, 합하여 참국僭國이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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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염민冉閔이 중랑中郎 상의常煒를 연燕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이 봉유封裕로 하여금 옥새가 있는 곳을 묻게 하자, 상위가 말하기를 “업성鄴城에 있습니다.” 하였다.
봉유가 말하기를 “장거張舉가 양국襄國에 있다고 말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상위가 말하기를 “저 구원을 청하는 자가 허망하고 허탄한 말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그 옆에 나무섶을 쌓아놓고 봉유로 하여금 은밀히 유인하게 하였으나, 상위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좌우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청하자, 모용준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고 그 군주를 위하니, 충신이다.” 하고는 하여금 내보내 관사에 나아가게 하였다.
밤에 그의 고향 사람을 보내어 가서 위로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습니까.
연왕燕王이 노하여 그대를
요해遼海와
갈석碣石注+① 遼海와 碣石을 遼․碣이라 한 것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盧龍은 漢나라 肥如縣인데, 碣石山이 우뚝이 바닷가에 서 있다. 秦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갈석에서 시작하였다. 지금의 고구려의 옛 경계에 있는 갈석은 이 갈석이 아니다.” 하였다. 밖으로 귀양 보내고자 하니, 어쩌겠습니까.” 하니,
상위가 말하기를 “내가 머리를 묶어 상투한 이래로 아직 포의布衣도 속이지 않았는데, 더구나 군주이겠는가. 뜻을 굽혀 구차히 영합함은 내 성격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정을 곧바로 다 말하여 비록 동해에 빠져 죽더라도 감히 피하지 않겠다.” 하고는 마침내 벽을 바라보고 누워서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모용준은 마침내 그를 용성龍城에 가두어두었는데, 뒤에 장거가 거짓말한 것을 알고는 마침내 장거를 죽이고 갇혀 있던 상위를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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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염민冉閔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싸우기로 결정하였으니, 감히 여러 사람을 저상沮喪하게 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와서 요양姚襄, 석곤石琨과 싸웠는데,
열관悦綰이 때마침
연燕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위魏나라(
염위冉魏) 군대와 몇 리 떨어진 곳에 기병을 듬성듬성
注+① 疏는 疎(드물다)와 같이 읽는다. 펼쳐놓고 나뭇단을 끌어 먼지를 일으키니,
위魏나라 사람들이 바라보고 〈적병이 많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였다.
요양과 석곤, 열관이 삼면으로 위魏나라를 공격하고 조왕趙王 석지石祗가 뒤에서 충돌하니, 위魏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염민은 10여 명의 기병과 달아나 업성鄴城으로 돌아오니, 장병 중에 죽은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요양이 섭두灄頭(섭두)로 돌아오니, 요익중姚弋仲은 요양이 염민을 사로잡지 못한 것을 노여워하여 곤장 100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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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환온桓溫이 중원을 경략經略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니, 조정이 은호殷浩를 의지하여 자기에게 저항하는 것임을 알고는 매우 분노하였다. 그러나 환온은 평소 은호의 사람됨을 알아 또한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라에 다른 문제가 없다 하여 마침내 서로 대치한 상태로 한 해를 보냈다.
비록 군신간의 처신을 하고는 있지만
기미羈縻(형식적으로 매여 있음)에 지나지 않아 8
주州의 군대와 물자와
부세賦稅가
注+① 〈“八州”는〉 永和 원년(345)에 桓溫이 荊州, 司州, 雍州, 益州, 梁州, 寧州 여섯 주를 도독하였고, 5년에 滕畯을 보내어 交州와 廣州의 군대를 거느리고 林邑을 공격하였다. 아마도 이때 交州와 廣州 두 주를 더 도독한 듯하다. 資는 재물이고, 調는 賦稅이다. 거의 국가의 쓰임이 되지 못하였다. 환온이 여러 번 북쪽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표문을 올리고 곧장 출발하여 4, 5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군대를 무창武昌에 주둔하니, 조정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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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정朝廷이 장차 교사郊祀를 행하려 하였는데, 사마욱司馬昱이 왕표지王彪之에게 묻기를 “응당 사면赦免이 있어야 하는가.” 하니,
왕표지가 말하기를 “중흥中興 이래로 교사에 왕왕 사면이 있었으나, 저는 생각하건대 시의적절한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흉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반드시 장차 〈사면의〉 요행을 바라서 나쁜 짓을 하는 데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하니, 사마욱이 그 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