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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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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六年이요 魏神䴥二年이라
春正月 宋以彭城王義康爲司徒錄尚書事하고 江夏王義恭都督荆湘等州軍事하다
王弘 乞解州録以授義康注+州․錄, 揚州及錄尙書事也.이어늘 宋主不許하고 而以義康爲司徒録尚書事領南徐州刺史하여 與弘共輔朝政注+宋武帝永初二年, 加京口之徐州曰南徐, 淮北之徐州, 但曰徐.하니
弘既多疾이요 且欲遠權注+遠, 去聲.이라 由是 義康專總内外之務하고 以義恭爲荆州刺史督八州注+義恭, 武帝子.하고 劉湛爲南蠻校尉行府州事하다
宋主與義恭書하여 誡之曰
天下艱難하고 家國事重하니 雖曰守成이나 實亦未易 隆替安危 在吾曹耳 豈可不感尋王業하여 大懼負荷注+感尋王業, 謂感念致王業之艱難而尋繹爲治之理也.리오
汝性褊急하여 志之所滯 其欲必行하고 意所不存 從物回改하니 此最弊事 宜念裁抑注+滯, 疑也, 積也.이니라
衛青 遇士大夫以禮하고 與小人有恩하며 西門安于 矯性齊美注+西門豹性剛急, 常佩韋以自緩. 董安于性寬緩, 常佩弦以自急, 皆能矯正其性而齊美.하고 關羽張飛 任偏同弊注+羽善待卒伍而驕於士大夫, 飛愛禮君子而不恤軍人. 二人任性偏頗, 皆不善終.하니 行己擧事 深宜鑑此니라
若事異今日하여 嗣子幼蒙하고 司徒當周公之事注+若事異今日, 言己若有不諱也. 司徒, 謂義康也. 汝不可不盡祗順之理 爾時天下安危 决汝二人耳니라
汝一月自用錢 不可過三十萬이요 府舎不須改作이요 訊獄虛懷博盡하고 慎無以喜怒加人하여
能擇善者而從之 美自歸己 不可專意自决하여 以矜獨斷之明也니라 名器深宜慎惜이요 爵賜尤應裁量이라
吾於左右 雖爲少恩이나 如聞外論 不以爲非也 以貴凌物하면 物不服이요 以威加人하면 人不厭注+厭, 亦服也.이니라
聲樂嬉遊 不宜令過 蒱酒漁獵 一切勿爲注+蒱, 樗蒱也. 供用奉身 皆有節度하고 奇服異器 不宜興長注+長, 展兩切.이요
又宜數引見佐史 相見不數則彼我不親하여 無因得盡人情이니 人情不盡이면 復何由知衆事也注+佐史, 當作佐吏, 晉宋之間, 藩府率謂參佐爲佐吏.리오
義康欲得揚州하여 形於辭旨하고 以王曇首居中 爲宋主所親委하니 愈不悅하여 謂人曰 王公久病不起하니 神州詎宜卧治리오
曇首勸弘減府中文武之半하여 以授義康한대 宋主聽割二千人하니 義康乃悅이러라
丁零 降魏하다
◑三月 宋立子劭하여 爲太子하다
◑宋以殷景仁爲中領軍하다
宋主以章太后早亡이라 奉太后所生蘇氏甚謹注+章太后胡氏生宋主, 五年被譴賜死, 宋主卽位, 諡曰章. 蘇氏, 太后母也.이러니 蘇氏卒 宋主臨哭하고 欲追加封爵하여 使群臣議之한대 景仁以爲古典無之라하니 乃止하다
秦殺其尚書辛進하다
進嘗從文昭王하여 遊凌霄觀할새 彈飛鳥라가 誤中秦王暮末之母하여 傷其面이러니 至是하여 暮末殺進并其五族二十七人注+五族, 五服內親也.하다
夏四月 魏主伐柔然하다
魏主將擊柔然하니 群臣皆不欲行하되 獨崔浩勸之러니 尚書令劉絜等 共推太史令張淵徐辯하여 使言曰
今玆己巳三陰之歲 歲星襲月하고 太白在西方하니 不可擧兵이라 北伐必敗 雖克이나 不利於上注+干以甲․丙․戊․庚․壬爲陽, 乙․丁․己․辛․癸爲陰, 支以子․寅․辰․午․申․戌爲陽, 丑․卯․巳․未․酉․亥爲陰. 己․巳皆陰, 而干支合於己巳, 是爲三陰之歲.이니라
浩曰 陽爲德하고 陰爲刑이라 故日食修德하고 月食修刑하나니 今出兵討罪 以修刑也
比年以來 月行掩昴하니 其占 三年 天子大破旄頭之國注+按史記天官云, “昴曰旄頭, 胡星也, 爲白衣會.”이라 蠕蠕高車 旄頭之衆也 願陛下 勿疑하소서
淵辯曰 蠕蠕 荒外無用之物이라 得其地라도 不可耕而食이요 得其民이라도 不可臣而使 有何汲汲而勞士馬以伐之리오
浩曰 淵辯言天道 猶是其職이어니와 至於人事하여는 非其所知 此乃注+自韓安國․主父偃至于嚴 其論皆如此.이니 施之於今 殊不合事宜
何則 蠕蠕 本國家邊臣으로 中間叛去러니 今誅其元惡하고 收其良民하여 令復舊役 非無用也니이다 魏主大悦하다
既罷 公卿 或尤浩曰 南冦伺隙이로되 而捨之北伐이라가 若蠕蠕遠遁하여 前無所獲이요 後有彊寇 將何以待之
浩曰 不然하다 今不先破蠕蠕하면 則無以待南寇 南人聞國家克統萬하고 内懐恐懼
故揚聲動衆以衞淮北하니 比吾破蠕蠕往還之間 南冦必不敢動이요
且彼歩我騎 彼能北來 我亦南往이니 在彼甚困이나 於我未勞
況南北殊俗하고 水陸異宜하니 與之河南이라도 亦不能守
以劉裕之雄傑 吞併關中하여 留其愛子하고 輔以良將하여 精兵數萬이로되 猶不能守어늘 況義隆今日君臣 非裕時之比
主上英武하고 士馬精彊하니 彼若果來 如以駒犢闘虎狼이라 何懼之有리오
蠕蠕恃其絶遠하여 謂國家力不能制라하여 夏則散衆放畜하고 秋肥乃聚하여 背寒向温하여 南來冦抄하니
今掩其不備 必望塵駭散하리니 牡馬護牝하고 牝馬戀駒하여 驅馳難制 不得水草 不過數日 必聚而困弊하리니 可一擧而滅也 蹔勞永逸이니 時不可失이니라
寇謙之謂浩曰 蠕蠕果可克乎
浩曰 必克이어니와 但恐諸將𤨏𤨏하여 前後顧慮하여 不能乘勝深入하여 使不全擧耳注+𤨏𤨏, 細小也, 言志趣細小, 不能一擧而全取之也.니라
先是 宋主因魏使還告魏主曰 汝趣歸我河南地注+趣, 讀曰促.하라 不然이면 將盡我將士之力하리라
魏主聞之하고 大笑謂公卿曰 龜鼈小豎 夫何能爲注+東南, 澤國也, 故詆之曰 “龜鼈小豎.”리오 就使能來라도 若不先滅蠕蠕 乃是坐待冦至 腹背受敵 非良策也 吾行决矣라하고 遂發平城하다
五月朔 日食하다
◑宋以王敬弘爲光祿大夫하다
宋主以敬弘爲尚書令이러니 敬弘固讓하여 表求還東이라 故有是命注+自建康歸會稽爲還東.하니라
涼及吐谷渾 侵秦이어늘 秦敗之하고 獲涼世子興國하다
◑柔然紇升蓋可汗大檀出走어늘 魏主追至涿邪山하여 秋七月 引還하다 大檀死하니 子勅連可汗吳提立하다
魏主至漠南하여 捨輜重하고 帥輕騎兼馬하여 襲擊柔然하여 至栗水注+兼馬者, 每一騎兼有副馬也. 栗水, 在漠北, 近稽落山, 有漢將軍竇憲故壘在焉.하니 柔然紇升葢可汗 先不設備 遂燒廬舎하고 絶迹西走하니
部落四散이어늘 魏主分軍搜討하여 東西五千里 南北三千里 俘斬甚衆하고 高車諸部 乘勢抄掠하니 柔然種類前後降魏者 三十餘萬落이요 獲戎馬百餘萬匹이요 畜産車廬 亡慮數百萬注+亡, 無字通. 亡慮之義, 猶言不用計慮, 可知其大數也.이러라
魏主循弱水하여 西行至涿邪山注+薛氏曰 “弱水出吐谷渾界窮石山, 自刪丹西至合黎山, 與張掖縣河合.” 栁宗元曰 “西海之山有水焉, 散渙無力, 不能負芥, 投之則委靡墊没, 及底而止, 故名曰弱.” 邪, 讀曰耶.하여는 諸將慮有伏兵이어늘 冦謙之以崔浩之言告한대
魏主不從하고 引兵還하여 至黑山하여 盡以所獲班將士注+黒山, 在大漠北, 山長數十里. 土石皆紫黒, 似磁石, 有水出其下, 所謂黒水也.하고
既得降人言호되 可汗被病하여 以車自載하여 入南山하고 民畜窘聚하여 方六十里無人統領하니 相去百八十里 追兵不至 乃徐西遁이라하고
若復前行二日이면 則盡滅之矣라하니 魏主深悔之러라
紇升葢可汗憤悒而卒커늘 子吳提立하고 號勅連可汗注+勅連, 猶言神聖也.이라
武都王楊玄卒하니 弟難當 廢其子保宗而自立하다
◯八月 魏遣兵擊髙車하여 降之하다
魏主至漠南하여 聞高車東部 屯巳尼陂하고 人畜甚衆한대 去魏軍千餘里注+北史 “烏洛侯國, 西北二十日行, 有于巳尼大水, 所謂北海也.” 烏洛侯直濡源西北, 巳尼陂又當在其西北也.하고 遣左僕射安原將萬騎擊之하니
高車諸部迎降者 數十萬落이라 獲馬牛羊百餘萬하다
十月 魏主還平城하여 徙柔然高車降民於漠南하여 東至濡源 西暨五原陰山 三千里中 使之耕牧而收其貢賦注+濡, 乃官切. 水經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又東南過海陽縣西南, 入于海.”하고
命長孫翰劉絜安原及侍中古弼同鎭撫之하니 自是 魏之民間 馬牛羊及氊皮 爲之價賤注+爲, 去聲.이러라
冬十月 魏以崔浩爲撫軍大將軍하다
魏主加崔浩侍中特進撫軍大將軍하여 以賞其謀畫之功하다 浩善占天文하여 常置銅鋌酢器中이라가 夜有所見 即以鋌畫紙하여 作字記之注+鋌, 徒鼎切. 銅, 鐵朴也. 酢, 與醋同, 倉故切. 畫, 去聲.러라
魏主每如浩家하여 問以災異러니 或倉猝不及束帶하고 奉進疏食어든 魏主必爲之擧筯하고 或立嘗而還注+爲, 去聲. 嘗, 口識其味也.이러라
嘗謂浩曰 卿才智淵博하고 著忠三世 故朕引以自近注+道武․明元及太武爲三世.하니 卿宜盡忠規諫하여 勿有所隠하라
朕雖或時忿恚하여 不從卿言이나 然終久深思卿言也로라
嘗指浩以示高車渠帥曰 此人 尪纎懦弱하여 不能彎弓持矛注+尪, 烏光切, 弱也. 纖, 細也. 然其胷中所懐 乃過於兵甲하니 朕之前後有功 皆此人所教也니라
又勅尚書曰 軍國大計 汝曹所不能决者 皆當咨浩然後 施行하라하다
十一月朔 하다
◑秦地震하다
日食不盡如鉤하고 星晝見至晡하고 河北地闇하고 秦地震하니 野草皆自反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6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神䴥 2년이다.
[綱] 봄 정월에 宋나라가 彭城王 劉義康을 司徒 錄尚書事로 삼고, 江夏王 劉義恭을 都督荆湘等州軍事로 삼았다.
[目] 王弘이 揚州刺史 및 錄尙書事를注+① 州․錄은 揚州刺史 및 錄尙書事이다. 해직하고서 이를 劉義康에게 줄 것을 청하였으나 宋主는 허락하지 않고, 유의강을 司徒 錄尚書事를 삼고 南徐州刺史를注+② 宋 武帝 永初 2년(421)에 京口의 徐州를 더하여 ‘南徐’라고 하고, 淮北의 徐州는 다만 ‘徐’라고 하였다. 겸직하게 하여 왕홍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왕홍은 이미 병이 많았고 또 권력을 멀리注+③ 遠(멀리하다)은 去聲이다. 하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의강이 안팎의 업무를 전적으로 총괄하고, 劉義恭을注+④ 劉義恭은 武帝(劉裕)의 아들이다. 荊州刺史 都督荊湘等八州軍事로 삼고, 劉湛을 南蠻校尉로 삼아 府․州의 업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目] 宋主가 劉義恭에게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천하에는 환란이 있고 국가는 일이 중요하니, 비록 守成이라 말하는 것도 실로 쉽지 않다. 흥성과 쇠퇴, 안정과 위기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을 뿐이니, 어찌 왕업을 이룬 어려움을 생각하여注+① “感尋王業”은 왕업을 이룬 어려움을 생각하여 다스리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계승하는 것을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의 성품은 편협하고 급하여 뜻이 막히게 되는注+② 滯는 의심하며, 적체한다는 뜻이다. 것은 그 욕심을 반드시 실행하고, 마음에 두지 않은 일은 남의 의견을 따라 바꾸니 이것이 매우 일을 망치는 것이다. 마땅히 생각하여 절제해야 한다.
西門豹와 董安于는 성격을 고쳐서 모두 아름답게 되었고注+③ 西門豹는 성질이 사납고 급해서 늘 무두질한 가죽[韋]을 차고서 〈부드러운 가죽처럼〉 스스로 늦추었으며, 董安于는 성질이 너그럽고 느려서 늘 팽팽한 활시위를 차고 다니며 〈활시위처럼〉 스스로 급하게 하였으니, 모두 그 성질을 고쳐서 하나같이 아름답게 되었다., 關羽와 張飛는 편협한 성격대로 하다가 똑같이 폐해를 당했으니注+④ 關羽는 병졸을 잘 대우하였으나 士大夫에게 교만하였고, 張飛는 君子를 아끼며 예우하였으나 병사들을 돌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타고난 성격대로 편협하게 하다가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 행실과 行事에 있어 깊이 이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目] 〈내가 죽고 난 뒤〉 만약 사태가 오늘과 달라져서 注+① “若事異今日”은 자기가 만일 죽고 난 뒤를 말한 것이다. 司徒는 劉義康을 말한다. 너는 공경하여 순종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천하의 안정과 위태로움은 너희 두 사람(劉義康과 劉義恭)에게서 결정된다.
너는 한 달에 스스로 쓰는 돈이 30만 전을 넘어서는 안 되고, 府舍(荊州 관청)를 고쳐 지어서는 안 된다. 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마음을 비우고 널리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여 너의 기분에 따라 남을 대해서는 안 된다.
능히 선한 것을 선택하여 따르게 되면 아름다움은 저절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니, 뜻을 독단하여 자신이 결정함으로써 홀로 결단하는 명석함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관직과 작위는 마땅히 깊이 삼가며 아껴야 하고, 작위를 하사할 때에는 더욱 헤아려서 판단해야 한다.
[目] 나는 좌우의 사람들에게 비록 은덕을 적게 내렸으나 외부에서 나를 논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귀함으로 남을 능멸하면 남이 복종하지 않고, 위엄으로 남을 압박하면 남이 복종하지注+① 厭은 또한 복종한다는 뜻이다. 않는다.
음악의 유희를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되고, 도박注+② 蒱는 樗蒱이다.․음주․고기잡이․사냥은 일체 하지 말라. 자신을 받들기 위해 제공되는 용품들은 모두 절도가 있게 하고, 기이한 의복과 기물을 흥성하게 해서는注+③ 長(자라다)은 展兩의 切이다. 안 된다.
또 자주 佐史를注+④ 佐史는 당연히 佐吏로 써야 하니, 晉․宋의 무렵에 藩府(지방 관청)에서는 대개 參佐(僚屬)를 佐吏라고 하였다. 인견해야 하니, 서로 만나는 것을 자주 하지 않으면 그들과 내가 친해지지 않아서 人情을 다할 방법이 없으니 인정을 다하지 않으면 다시 어떻게 여러 일을 알 수 있겠는가.”
[目] 劉義康은 揚州刺史를 얻고자 하여 언사에 이를 드러냈고, 王曇首가 禁中(僚屬)에 있으면서 宋主에게 친애와 신뢰를 받았기에 더욱 기쁘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王公(王弘)께서 오래도록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니 神州(중국)를 어찌 누워서 다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왕담수가 왕홍에게 그 府中(錄尙書府)에 있는 문무관원의 절반을 줄여서 유의강에게 줄 것을 권하였는데 宋主가 2천 명을 분할해줄 것을 허락하니 유의강이 마침내 기뻐하였다.
[綱] 이 北魏에 항복하였다.
[綱] 3월 宋나라가 皇子 劉劭를 세워서 太子로 삼았다.
[綱] 宋나라가 殷景仁을 中領軍으로 삼았다.
[目] 宋主는 〈생모인〉 章太后가 일찍 죽은 것으로 해서 章太后를 낳은 蘇氏를 매우 공손히 모셨다.注+① 章太后 胡氏는 宋主를 낳았는데 문제가 5살 때에 견책을 받아 賜死되었다. 宋主가 즉위하자 시호를 章이라고 하였다. 蘇氏는 장태후의 어머니이다. 蘇氏가 죽자 宋主는 臨哭하고 封爵을 추증하려고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殷景仁이 古典에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
[綱] 西秦이 尚書 辛進을 죽였다.
[目] 辛進이 일찍이 文昭王을 따라서 凌霄觀에서 노닐 적에 나는 새를 탄환으로 쏘다가 잘못하여 秦王 乞伏暮末의 어머니를 맞추어 그 얼굴을 다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걸복모말이 신진과 그 五族注+① 五族은 이내의 친속이다. 27명을 죽였다.
[綱] 여름 4월에 魏主가 柔然을 정벌하였다.
[目] 魏主가 柔然을 공격하려고 하니 여러 신하들은 모두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오직 崔浩만이 이를 권하였다. 尙書令 劉絜(유혈) 등이 함께 太史令 張淵․徐辯을 추천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올리게 하였다.
“올해 己巳年은 三陰이 되는 해로注+① 天干은 甲․丙․戊․庚․壬으로 陽을 삼고, 乙․丁․己․辛․癸로 陰을 삼으며 地支는 子․寅․辰․午․申․戌로 陽을 삼고, 丑․卯․巳․未․酉․亥로 陰을 삼는다. 己․巳는 모두 陰인데다 천간과 지지가 己巳에 합해지니, 이것이 三陰의 해가 되는 것이다. 歲星이 달을 침입하고 太白星이 서쪽에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북벌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비록 승리하더라도 上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최호가 말하였다. “陽은 德이 되고 陰은 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일식에는 덕을 수양하고 월식에는 형벌을 정비하는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출동하여 죄를 토벌하는 것은 형벌을 정비하는 것입니다.注+② ≪史記≫ 〈天官〉을 살펴보건대 라고 하였다.
近年 이래로 달의 운행이 昴星을 가리고 있으니, 그 占卜이 3년 안에 천자가 크게 旄頭星의 나라를 격파한다는 것입니다. 蠕蠕․는 모두성의 무리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目] 張淵과 徐辯이 말하였다. “蠕蠕(柔然)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荒服 밖의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그 토지를 얻더라도 갈아 먹을 수가 없으며, 백성들을 얻더라도 신하로 삼아 부릴 수가 없으니, 어찌 분주하게 병사와 군마를 수고롭게 하여 저들을 정벌하고자 하십니까.”
崔浩가 말하였다. “장연과 서변이 天道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직분이지만 인사에 대해서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이는 漢나라 시대의 일상적인 말이니注+① 韓安國․主父偃(주보언)으로부터 嚴尤에 이르기까지 그 논의가 모두 이와 같았다., 오늘날에 이 말을 시행하는 것은 事宜에 매우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蠕蠕은 본래 우리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신하로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떠났습니다. 지금 그 원흉을 주살하고 그 良民을 수습하여 예전의 부역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魏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目] 논의를 마치고 난 뒤에 공경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崔浩를 허물하여 말하기를 “남방의 적이 빈틈을 엿보고 있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북벌을 하다가 만약 蠕蠕이 멀리 달아나버려서 앞에서는 얻을 바가 없고 뒤에서는 강대한 적을 갖게 되면 장차 어떻게 이를 상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금 우선 연연을 격파하지 않으면 남방의 적을 상대할 수가 없다. 남쪽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統萬(夏나라 도성)에서 승리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놀라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공공연히 군대를 동원하여 淮北을 지킨다고 하니, 우리들이 연연을 격파하러 갔다 올 때까지는 남방의 적들이 반드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저들은 步兵이고 우리들은 騎兵이므로 저들이 북쪽으로 침입해올 수 있으나 우리들은 또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이는 저들에게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남과 북의 습속이 다르고 水戰과 陸戰의 편의가 다르니 河南을 저들에게 준다고 해도 저들은 또한 지킬 수 없을 것이다.
劉裕와 같은 영웅호걸이 關中을 병합하고 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남기고 훌륭한 장수로 보좌하게 하여 정예 병사 수만을 거느리고서도 오히려 지키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劉義隆과 오늘날 그 군신들이 유유의 시대와 비할 바가 못 되고,
우리 主上께서 영명하며 용감하고 군사와 군마는 정치하며 강성하니 저들이 만약 침입해온다면 마치 망아지와 송아지로 호랑이와 이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연연은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서 우리나라가 힘으로 능히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름에는 무리를 분산시켜 가축을 방목하고 가을에 가축이 살찌면 마침내 모여서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을 향해서 남쪽으로 와서 노략질을 한다.
지금 그들이 방비하지 않고 있는 것을 기습한다면 반드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놀라서 흩어질 것이다. 수말이 암말을 보호하고 어미 말이 새끼 망아지를 사랑하여 날뛰게 되어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고, 물과 풀을 구하지 못하면 수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반드시 모여들어 곤궁하고 피폐해질 것이니, 한 번 출동하여 멸망시킬 수 있다. 수고로움은 잠시이고 편안함은 영원하니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寇謙之가 崔浩에게 말하기를 “蠕蠕을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최호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다. 다만 여러 장군들이 자질구레하여注+① 𤨏𤨏는 작은 것이니, 뜻이 작아서 일거에 모두 빼앗을 수 없음을 말한다. 앞과 뒤를 생각하다가 승세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여 완전히 사로잡지 못할까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宋主가 北魏의 사신이 돌아가는 것을 이용하여 魏主에게 고하기를 “그대는 빨리注+② 趣(재촉한다)는 促으로 읽는다. 우리의 河南의 땅을 돌려달라. 그렇지 않으면 장차 우리 장수와 병사의 힘을 다하여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공경들에게 말하기를 “거북이와 자라 같은 소인배 녀석들이注+③ 동남쪽은 못이 많이 있는 나라이므로 꾸짖어 말하기를 “거북이와 자라 같은 소인배 녀석들이다.”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저들이 쳐들어오더라도 만일 우리가 유연을 먼저 멸망시키지 않으면 마침내 앉아서 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나는 가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고, 마침내 平城에서 출발하였다.
[綱] 5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宋나라가 王敬弘을 光祿大夫로 삼았다.
[目] 예전에 宋主가 王敬弘을 尚書令으로 삼았는데 왕경홍이 굳이 사양하여 표문을 올려 동쪽으로 돌아가기를注+① 建康에서 會稽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還東”이라고 한 것이다. 청하였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綱] 北涼과 吐谷渾이 西秦을 침략하자 西秦이 그들을 패퇴시키고 北涼 世子 沮渠興國을 사로잡았다.
[綱] 柔然의 紇升蓋可汗 郁久閭大檀이 도주하자 魏主가 추격하여 涿邪山(탁야산)에 이르렀다가 가을 7월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욱구려대단이 死하니, 그 아들 勅連可汗 郁久閭吳提가 즉위하였다.
[目] 魏主가 漠南에 도달하여 輜重을 버리고 경무장한 기병과 副馬를 이끌고 柔然을 습격하여 栗水에 이르렀다.注+① “兼馬”는 騎馬 1마리마다 副馬가 겸하여 있는 것이다. 栗水는 漠北에 있으니 稽落山에 가까운데, 漢나라 將軍 竇憲의 옛 보루가 있다. 유연의 紇升蓋可汗은 미리 방비를 하지 못하여 마침내 여막을 불태우고 흔적을 없애서 서쪽으로 달아났다.
부락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魏主가 군사를 나누어 찾아 토벌하여 동서로 5천 리와 남북으로 3천 리에 걸쳐서 사로잡거나 목을 벤 사람이 매우 많았고, 高車(고차)의 여러 部落이 승세를 타고 유연을 약탈하니, 유연의 종족 가운데 전후로 北魏에 항복한 사람이 30여만 부락이고 포획한 군마가 100여만 필이었고, 가축과 수레와 장막이 무려注+② 亡(없다)는 無字와 통용한다. “亡慮”의 뜻은 헤아려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으니, 큰 수량임을 알 수 있다. 수백만이었다.
[目] 魏主가 弱水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涿邪山에 이르렀는데注+① 薛氏(薛肇明)가 말하기를 “弱水는 吐谷渾의 경계인 窮石山에서 발원하여 刪丹縣 서쪽으로부터 合黎山에 이르러 張掖縣에 있는 黃河와 합류한다.”라고 하였다. 柳宗元이 말하기를 “西海의 산에 물이 있으니, 〈물살이〉 흩어져 힘이 없어서 지푸라기도 띄우지 못하여 지푸라기를 던지면 쓰러지고 가라앉아 밑바닥에 이른 뒤에 멈춘다. 그러므로 弱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邪는 耶로 읽는다. 여러 장군들이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자, 寇謙之가 崔浩의 말을 인용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魏主는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서 돌아와 黑山에注+② 黒山은 大漠의 북쪽에 있는데, 산의 길이가 수십 리이다. 흙과 돌이 모두 검붉어서 磁石과 비슷한데 물이 그 아래에서 나오니 이른바 黒水이다. 이르러 포획한 것을 모두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윽고 투항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可汗은 병이 나서 수레에 자신을 싣고 南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백성과 가축이 궁색하여 모여들어 사방 60리에 통솔하는 사람이 없었다. 〈北魏의 군대와 可汗이 서로〉 180리 떨어져 있었는데 추격하는 병사가 오지 않으므로, 마침내 서서히 서쪽으로 도망갔다.”라고 하였고,
胡人이 말하기를 “만약 다시 이틀을 더 전진하였다면 그들을 전부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니, 魏主가 매우 후회하였다.
紇升葢可汗이 분개하여 卒하니, 아들 郁久閭吳提가 즉위하고 勅連可汗이라고注+③ 勅連은 北魏의 말에 神聖함이다. 불렀다.
[綱] 武都王 楊玄이 卒하니, 그의 아우 楊難當이 양현의 아들 楊保宗을 폐하고 자신이 즉위하였다.
[綱] 8월에 北魏가 군대를 보내 髙車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目] 魏主가 漠南에 이르러 高車의 東部가 巳尼陂에注+① ≪北史≫에 “烏洛侯國에서 서북쪽으로 20일을 가면 于巳尼大水가 있는데 이른바 北海이다.”라고 하였다. 烏洛侯는 濡源의 서북쪽에 두었으니, 巳尼陂가 또 그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주둔하고 있고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은데 北魏의 군대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듣고, 左僕射 安原을 파견하여 1만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차의 여러 부락에서 영접하여 투항한 사람이 수십만 부락이어서 말․소․양 백여만 마리를 포획하였다.
10월에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와서, 柔然․高車에서 항복한 백성을 漠南으로 이주시켜 동쪽으로는 濡源에注+② 濡(물 이름)은 乃官의 切이다. ≪水經注≫에 “濡水는 塞外에서 와서 동남으로 가서 遼西 令支縣 북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가서 海陽縣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르는 곳과 서쪽으로는 五原의 陰山에 이르기까지 3천 리 안에서 그들에게 농사와 방목을 하도록 하여 그 공물과 부세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長孫翰․劉絜․安原과 侍中 古弼에게 명하여 함께 그들을 진무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北魏의 백성들 사이에 말․소․양 및 모피가 이 때문에注+③ 爲(때문에)는 去聲이다. 가격이 낮아졌다.
[綱] 겨울 10월에 北魏는 崔浩를 撫軍大將軍으로 삼았다.
[目] 魏主가 崔浩에게 侍中 特進 撫軍大將軍을 더해주어 그 책략을 세운 공로를 포상하였다. 최호는 천문을 점치는 것을 잘하였는데, 항상 식초를 담는 그릇 속에 生銅(제련하지 않은 구리 덩이)을 넣어두었다가 밤에 보이는 것이 있을 때 곧바로 생동을 가지고 종이에다 문양을 베끼고 글씨를 써서 〈천문의 변이를〉 기록하였다.注+① 鋌(쇳덩이)은 徒鼎의 切이다. 銅은 鐵朴(제련하지 않은 쇳덩이)이다. 酢(식초)는 醋와 같으니, 倉故의 切이다. 畫(그리다)는 去聲이다.
魏主가 늘 최호의 집을 방문하여 災異에 대해 물었는데, 〈최호는〉 혹은 창졸간에 허리띠를 맬 틈도 없었고, 거친 음식을 진상해도 魏主가 반드시 그를 위해 젓가락을 들었고, 혹은 즉시 맛을 보고는 돌아갔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嘗은 입으로 맛을 알아보는 것이다.
[目] 魏主가 일찍이 崔浩에게 말하기를 “卿의 재능과 지략은 깊고 넓으며 그 충성은 三代에注+① 道武帝(拓跋珪)와 明元帝(拓跋嗣)와 太武帝(拓跋燾)가 바로 三世이다. 드러났다. 그러므로 짐은 경을 이끌어서 가까이에 둔 것이다. 경은 마땅히 충성을 다해 간언하여 감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짐이 비록 어떤 경우에 분노하여 경의 말을 따르지 않기도 하겠지만, 끝내 오래도록 경의 말을 깊이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최호를 가리키면서 高車의 우두머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몸이 가냘프며 유약하여注+② 尪(약하다)은 烏光의 切이니, 약하다는 뜻이다. 纖은 가늘다는 뜻이다. 활시위를 당기거나 창을 잡을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은 무기나 갑옷보다 뛰어나다. 짐이 전후로 공을 세웠던 것은 모두 이 사람이 가르쳐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尙書에게 칙령을 내리기를 “국가와 군사에 관한 큰 계책 중에 그대들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마땅히 최호에게 자문을 구한 뒤에 시행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綱]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나니 별이 낮에 보였다.
[綱] 西秦에 地震이 일어났다.
[目] 일식이 다하지 않아서 갈고리 모양처럼 되었고, 별이 낮에 보여 晡時(오후 3~5시)까지 나타났으며, 河北 지역이 깜깜하였고 西秦에 지진이 일어나니, 들판의 풀들이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역주
역주1 衛靑은……베풀었으며 : ≪漢書≫ 〈伍被列傳〉에 보인다.
역주2 후사가……되면 : 司徒 劉義康이 周나라 周公처럼 어린 황제를 보필함을 말한다. 周公은 武王의 아우로서 武王이 죽자 武王의 어린 아들 成王을 보필하여 주나라 초기 정치를 안정시켰다.
역주3 丁零 : 丁令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투르크계 유목민으로 前漢 시대에는 바이칼호 이남에 살았다. 後漢 시대에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勅勒, 鐵勒으로도 불렸다.(≪魏書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4 五服 : 斬衰(참최), 齊衰(자최), 大功, 小功, 緦麻의 五服 안의 친족을 이른다. 斬衰는 3년으로 아버지나 남편에 대한 服制이고, 齊衰는 3년부터 3월까지인데, 자최 3년은 어머니에 대한 복제이며 나머지는 大功 9월, 小功 5월, 緦麻 3월인데 이를 五服의 친족이라 한다.
역주5 昴宿는……白衣會이다 : ≪史記正義≫에 “昴宿 7星이 머리를 풀어 헤친 모양이다. 胡星은 또한 獄事를 주관하니, 〈昴宿가〉 밝으면 천하의 옥사가 공평하고 어두우면 형벌이 범람한다. 〈7星 중〉 6星의 밝기가 大星의 밝기와 같으면 홍수가 장차 이르고 병란이 크게 일어나고, 별빛이 흔들리는 것이 도약하는 것 같으면 胡兵이 크게 일어나고, 한 星이 보이지 않으면 모두 병란의 우려가 있다.[昴七星爲髦頭 胡星 亦爲獄事 明 天下獄訟平 暗 爲刑罰濫 六星明與大星等 大水且至 其兵大起 搖動若跳躍者 胡兵大起 一星不見 皆兵之憂也]”라 하였다. 또한 白衣會는 위의 내용처럼 별빛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이른 것으로 凶災의 조짐을 말한 것이다. 백의회를 喪事의 조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髦頭, 胡星, 白衣會는 昴星의 별칭으로 쓰인다.
역주6 高車(고차) : 丁零과 병칭되기도 한다. 漠北에 있던 투르크계 유목민에 대한 범칭으로 丁零, 勅勒, 鐵勒으로 불렸다.
역주7 (光)[尤] : 저본에는 ‘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尤’로 바로잡았다.
역주8 漢世常談 : 漢 武帝가 匈奴를 정벌하려 하자 韓安國이 “그 땅을 얻어도 넓다고 할 것이 못되고 그 민중을 소유해도 강성할 것이 못됩니다.[得其地不足以爲廣 有其衆不足以爲彊]”라고 하고, 그 뒤에 主父偃․嚴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資治通鑑新注≫)
역주9 [胡言] : 저본에는 ‘胡言’이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0 (夏)[魏] : 저본에는 ‘夏’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魏’로 바로잡았다.
역주11 日食 星晝見 : “日食이 일어나 별이 낮에 보이는 것은 큰 변고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일식이 일어나 별이 보이는 현상을 기록한 것이 두 번이다(이해(429)와 唐 肅宗 上元 2년(761)).[日食至星晝見 大變也 終綱目 書日食星見二(是年 唐肅宗上元二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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