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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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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十三年이요 魏太延二年이라
◑是歳 燕亡하니 凡三國이라
春三月 하다
道濟立功前朝하여 威名甚重하고 左右腹心 竝經百戰하고 諸子又有才氣하니 朝廷疑畏之러라
宋主久疾不愈어늘 劉湛説司徒義康호되 以爲宮車一日晏駕 道濟不復可制리라 會宋主疾篤하니 義康請召道濟入朝한대
其妻向氏謂道濟曰 高世之勲 自古所忌 今無事相召하니 禍其至矣로라
至留累月 宋主稍間注+間, 如字, 猶瘳也.하니 將還未發이러니 會宋主疾動이라
義康矯詔召道濟入하여 祖道 因執之하고 三月 下詔稱호되 道濟因朕寢疾하여 規肆禍心이라하고 收付廷尉하여 并其子植等十一人誅之하고
又殺其參軍薛彤高進之하니 二人皆道濟腹心이라 有勇力하니 時人比之關張注+關․張, 關羽․張飛也.이러라
道濟見收憤怒하니 目光如炬하고 脱幘投地曰 乃壊汝萬里長城이로다 魏人聞之하고 喜曰 道濟死하니 吳子輩不足復憚이라하더라
楊難當 自稱大秦王하다
難當稱王하여 改元建義하고 立王后太子하고 置百官 皆如天子之制 然猶貢奉宋魏不絶하다
魏伐燕하니 燕王弘奔髙麗하다
魏伐燕할새 娥清古弼 攻白狼城克之注+白狼縣, 漢屬右北平郡. 燕以白狼城爲重鎭, 置并州. 魏後併入建德郡廣都縣, 有白狼山․白狼水.하니 高麗遣將衆數萬하여 隨陽伊迎燕王이러니
燕尚書令郭生 因民之憚遷하여 開城門納魏兵하니 魏人疑之不入이어늘 生遂勒兵攻燕王한대 王引高麗兵入하여 與生戰殺之하니
高麗兵因大掠城中하다
五月 燕王帥龍城見戸東徙할새 方軌而進하니 前後八十餘里 焚宮殿하니 火一旬不滅이러라
古弼部將高茍子 帥騎欲追之어늘 弼醉拔刀止之 故燕王得逃去
魏主聞之하고하여 檻車徴弼及娥清하여 至平城하니 皆黜爲門卒하고 遣封撥使高麗하여 令送燕王한대 不從하다
魏主議擊之하여 將發隴右騎卒이러니 劉絜曰 秦隴新民 且當優復하여 俟其饒實하여 然後用之注+新民, 新附之民也. 優, 寬饒也. 復, 方目切.니이다
樂平王丕曰 和龍新定하니 宜廣修農桑하여 以豐軍實然後 進取則高麗 一擧可滅也니이다하니 乃止하다
秋七月 魏伐楊難當于上邽降之하다
赫連定之西遷也 楊難當遂據上邽러니 至是하여 魏主遣樂平王丕하여 討之하고 先遣齎詔하여 諭難當하니
難當懼請奉詔어늘 諸將議호되 以爲不誅其豪帥하면 後必爲亂이요 大衆遠出하여 不有所掠이면 無以充軍實賞將士니라
丕將從之러니 中書侍郎高允曰注+允時參丕軍事. 如諸將之謀 是傷其向化之心이라 大軍旣還이면 爲亂必速이리라
丕乃止하고 撫慰初附하고 秋毫不犯하니 秦隴遂安하다
魏置野馬苑하다
魏主如棝陽하여 驅野馬於雲中하고 置苑注+棝, 音固. 前漢志 “五原郡有棝陽縣.”하다
高祖克長安하고 得古銅渾儀하니 儀狀雖擧 不綴七曜注+日月五星謂之七曜.러니
是歲 詔太史令錢樂之하여 更鑄渾儀하니 徑六尺八分이라 以水轉之하니 昬明中星 與天相應하더라
柔然絶魏和親하고 冦其邊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13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延 2년이다.
이해에 北燕이 망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綱] 봄 3월에 宋나라가 司空 檀道濟를 죽였다.
[目] 檀道濟가 이전 조정에 공을 세워서 위세와 명성이 매우 중하였고 좌우 심복들은 많은 전쟁을 겪었으며, 여러 아들이 모두 재능과 기개가 있으니 조정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宋主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낫지 않자, 劉湛이 司徒 劉義康을 설득하기를 “황상께서 어느 날 돌아가시면 단도제를 다시는 제압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宋主의 병이 위독해지자, 유의강이 단도제를 조정에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다.
단도제의 아내 向氏(상씨)가 단도제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높은 공적이 있는 분은 예부터 남에게 시기를 받습니다. 지금 일이 없는데 보자고 부르니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 도착하여 여러 달을 머물렀는데, 宋主의 병이 차도가 있으니注+① 間(낫다)은 본음대로 읽으니, 瘳(병이 낫다)와 같은 뜻이다. 막 돌아가려 하면서 아직 출발 하지는 않았다. 마침 宋主의 병이 다시 발병하였다.
[目] 劉義康이 조서를 조작하여 檀道濟를 불러들여 를 지내는 틈을 이용하여 그를 붙잡았고, 3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단도제가 짐이 병석에 누운 것을 이용하여 음모를 꾸며 역심을 품었다.”라고 하여, 그를 체포하여 廷尉에게 넘기고 아울러 그 아들 檀植 등 11명을 죽이고,
또다시 參軍 薛彤․高進之를 죽였다. 두 사람은 모두가 단도제의 심복이었다. 이 두 사람은 용맹과 힘이 있어 당시 사람이 關羽와 張飛에注+① 關張은 關羽와 張飛이다. 견주었다.
단도제가 붙잡혀서 성을 내니 눈빛이 횃불과 같았는데, 두건을 벗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너희들의 萬里長城을 허무는구나.”라고 하였다. 北魏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단도제가 죽었으니 吳 땅(宋나라)의 무리들은 다시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綱] 楊難當이 스스로 大秦王이라고 칭하였다.
[目] 楊難當이 王을 칭하여 연호를 建義로 바꾸고 王后와 太子를 세우고 百官을 두기를 모두 天子의 제도와 같이 하였으나, 宋나라와 北魏에 貢物을 바치는 일을 끊지 않았다.
[綱] 여름에 北魏가 北燕을 정벌하니, 北燕王 馮弘이 高句麗로 달아났다.
[目] 北魏가 北燕을 정벌할 적에 娥清과 古弼이 白狼城을注+① 白狼縣은 漢나라 때에 右北平郡에 속하였다. 北燕은 白狼城을 중요한 鎭으로 삼고 并州를 설치하였다. 北魏가 후에 建德郡 廣都縣에 병합하였는데 白狼山과 白狼水가 있다.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高句麗가 장군과 군사 수만 명을 파견하여 陽伊를 따라가서 北燕王 馮弘을 迎接하였다.
北燕의 尚書令 郭生이 백성들이 타향으로 옮겨감을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고 北魏의 병사를 들이고자 하니, 北魏 사람들이 의심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결국 병사들을 거느리고 北燕王을 공격했으나 北燕王이 高句麗 병사를 이끌고서 들어와 곽생과 싸워 그를 죽였다.
高句麗 병사들이 이를 이용하여 和龍城을 크게 약탈하였다.
5월에 北燕王이 和龍城의 현존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이주할 적에 수레를 병렬하여 전진하니, 행렬이 앞뒤로 80여 리나 이어졌다. 宮殿을 불태우니 불이 10일간 꺼지지 않았다.
고필의 部將 高茍子가 騎兵을 이끌고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고필이 술에 취해 칼을 뽑아 제지하였으므로, 北燕王이 도망갈 수 있었다.
[目] 魏主가 그 사실을 듣고 분노하여 檻車로 古弼과 娥淸을 불러들여 平城에 도착하니, 모두 강등시켜서 문을 지키는 군졸로 삼았다. 封撥을 파견하여 高句麗에 사신으로 보내 北燕王을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魏主가 高句麗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여 隴右 지역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는데, 劉絜이 말하기를 “秦․隴 지역의 새로 귀의한 백성들을 마땅히 우대하고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주어서注+① “新民”은 새로 귀의한 백성이다. 優는 寬厚하게 함이다. 復(면제하다)은 方目의 切이다., 그들이 풍요롭고 충실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樂平王 拓跋丕가 말하기를 “和龍이 겨우 평정되었습니다. 마땅히 널리 농업과 잠업을 장려해서 군비와 군량미를 확충한 연후에 나아가 빼앗는다면 高句麗는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綱] 가을 7월에 北魏가 楊難當을 上邽에서 토벌하여 그를 항복시켰다.
[目] 赫連定이 서쪽으로 옮겨 가자, 楊難當이 마침내 上邽를 점령하였다. 이에 이르러서 魏主가 樂平王 拓跋丕를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하고 그에 앞서 사람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양난당을 타일렀다.
양난당이 두려워하여 조서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北魏의 諸將들이 의논하기를 “그 우두머리를 죽이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요, 大軍을 이끌고 멀리까지 나와서 탈취한 재물이 없으면 군량미를 확충하지 못하고 장병들에게 상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탁발비가 제장들의 의견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中書侍郎 高允이 말하기를注+① 高允은 당시 拓跋丕의 군사업무에 참여하였다. “만약 제장들의 모의대로 한다면 이는 歸順하는 마음을 손상하게 할 것입니다. 大軍이 돌아가고 나면 그들은 반드시 속히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탁발비가 바로 중지하고, 처음에 귀의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秦․隴 지역이 결국 안정되었다.
[綱] 겨울에 北魏가 野馬苑을 설치하였다.
[目] 魏主가 棝陽에注+① 棝는 음이 固이다. ≪漢書≫ 〈地理志〉에 “五原郡에 棝陽縣이 있다.”고 하였다. 가서 雲中에 野馬를 몰고 가서 野馬苑을 설치하였다.
[綱] 宋나라가 渾天儀를 주조하였다.
[目] 예전에 宋나라 高祖(劉裕)가 長安을 함락하고 오래 전에 구리로 제작된 渾天儀를 얻었다. 혼천의의 모양이 비록 다 갖추어져 있었으나 七曜가注+① 日月과 五星(水․火․金․木․土)을 일러 七曜라고 한다. 이어져 있지 않았다.
이해에 太史令 錢樂之에게 조서를 내려 다시 혼천의를 주조하게 하니, 직경이 6尺 8分이었다. 물로 그것을 돌게 하니 〈혼천의의〉 이 하늘의 昏明中星과 서로 부합하였다.
[綱] 柔然이 北魏와 화친을 끊고 그 변경을 침입하였다.


역주
역주1 宋殺其司空檀道濟 : “猛獸가 산에 있으면 명아주와 콩잎도 따러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용감한 무사는 국가가 의지하여 중히 여기는 것이고, 이웃한 적군들이 멀리 바라보면서 꺼리는 것이다. 檀道濟는 宋나라에 있어서 비록 〈周나라의〉 方叔․召虎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니, 진실로 그를 부리는 방도를 얻었다면 어찌 干城을 맡기기에 부족하겠는가. 마침내 까닭이 없이 의심하여 죽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죽음은 그의 죄가 아니었으므로 〈‘宋’이라는〉 나라를 기록하고 ‘殺’이라고 기록하였지만 ‘司空’이라는 단도제의 관직을 빼지 않았다.[猛獸在山 藜藿爲之不采 爪牙之士 國之所恃以爲重 隣敵所望而憚者也 道濟在宋 雖未可謂之方虎 然亦一時之傑 誠使御得其道 豈不足任干城之寄 乃無故疑而殺之 何歟 死非其罪 故書國書殺 而不去其官]” ≪發明≫
역주2 祖道祭 : 먼 여행길에 무사하기를 道神에게 비는 제사이다.
역주3 宋 鑄渾儀 : “혼천의는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天象 관측기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宋나라가 渾天儀를 주조하자 기록하였고(이해(437)), 唐나라가 渾天儀를 만들자 기록하였고(太宗 貞觀 7년(633)), 黄道遊儀를 만들자 기록하였고(玄宗 開元 9년(721)), 水運渾天이 완성되자 기록하였으니(開元 13년(725)), 혼천의를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渾儀’라고 기록한 것이 네 번이고, ‘儀’라고 기록한 것은 한 번이다(唐 睿宗 嗣聖 3년(686)).[渾儀必書 重象器也 是故宋鑄渾儀則書(是年) 唐造渾天儀則書(太宗貞觀七年) 造黄道遊儀則書(玄宗開元九年) 水運渾天成則書(開元十三年) 書渾儀始此 終綱目 書渾儀四 書儀一(唐睿宗嗣聖三年)]” ≪書法≫‘書儀一’은 ≪資治通鑑綱目≫ 제41권 하 唐 睿宗 嗣聖 3년(686)에 “太后鑄太儀”라고 하여 則天武后가 太極圖案을 만든 것을 이른다.
역주4 昏明中星 : 昏中星과 明中星을 말한다. 28宿 중에 해가 질 때와 해가 뜰 때, 하늘 正南方에 보이는 별이다. 昏中星은 저녁에 보이는 별이고, 明中星은 旦中星이라고도 하는데 새벽에 보이는 별이다. 이 별이 자리를 옮겨감에 따라 계절이 바뀐다. 昏은 해가 질 때이고 明은 해가 뜰 때이며, 中星은 남쪽 하늘 한복판에 있는 별을 말한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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