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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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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二十九年이요 魏髙宗文成帝濬興安元年이라
春二月 注+世祖, 壽四十五.하다
魏世祖追悼景穆太子不已어늘 宗愛懼誅하여
二月 弑之하니 僕射蘭延和疋薛提等秘不發喪注+疋, 古雅字. 和疋, 姓名.하다
延疋以濬沖幼欲立長君이라하여 徴秦王翰하여 置之秘室이러니 提以濬嫡孫不可廢라하여 議久不决注+秘室, 祕密之室.하니
宗愛知之하고 自以得罪於景穆太子 而素惡翰하고 善南安王余
乃密迎余하여 矯皇后令召延等하고 而使宦者持兵伏禁中이라가 以次收縛하여 斬之하다
殺翰立余하니 余以愛爲大司馬大將軍하다 翰余皆世祖之子也
夏五月 하다
宋主聞魏世祖殂하고 更謀北伐하니 魯爽等復勸之어늘 太子中庶子何偃 以爲淮泗數州瘡痍未復하니 不宜輕動이니이다한대 不從注+偃, 尙之之子也. 淮泗數州, 謂靑․冀․徐․兗․司․豫也.하다
五月 遣蕭思話하여 督張永等하여 向碻磝하고 魯爽魯秀程天祚將荆州甲士四萬하여 出許洛하고 雍州刺史臧質帥所領하여 趣潼關하고 沈慶之固諫이라 宋主不使行注+通鑑 “以其異議, 不使行.”하다
青州刺史劉興祖上言하여 以爲河南阻飢하여 野無所掠하니 脱諸城固守 非旬月可拔이니 稽留大衆 轉輸方勞 應機乘勢 事存急速이라
今僞帥始死하고 兼逼暑時 國内猜擾하니 不暇遠赴 愚謂宜長驅中山하여 據其關要注+自中山至代, 有倒馬關․飛狐關. 冀州以北民人尙豐하고 兼麥已向熟하니 因資爲易注+謂因敵取資, 於事爲易.
若中州震動하면 黄河以南 自當消潰 臣請發青冀兵하여 入其心腹하여 若前驅克勝하면 則衆軍宜一時濟河하여 竝建司牧하고 撫柔初附하며 西拒太行하고 北塞軍都하며 因事指揮하고 随宜加授注+軍都縣, 前漢屬上谷郡, 後漢屬廣陽郡, 晉屬燕國, 有軍都關. 加授, 謂仕於魏有官者, 加其官, 未有官而能聚衆以應宋師者, 先授之以官.
若能成功이면 清壹可待 若不克捷이라도 不爲大傷注+淸壹可待, 謂河南北肅淸, 混壹之功可待也.이라하되
宋主意止存河南이라 亦不從하고 又使侍郎徐爰随軍하여 向碻磝하여 銜中旨하여 授諸将方略하여 臨時宣示하다
尙之以老請致仕하여 退居方山注+方山, 在建康東北, 有方山埭, 截淮立埭於山南. 曰方山者, 山形方如印.하니 議者咸謂尙之不能固志라하더니 既而 詔書敦諭數四하니 果起視事어늘
袁淑錄自古隱士有迹無名者하여 爲眞隱傳하여 以嗤之注+有迹無名, 如晨門․荷蕢․荷蓧․野王二老․漢陰丈人之類.하다
潘淑妃生始興王濬하니 元皇后恚恨而殂注+袁皇后諡曰元后.하고 淑妃専總内政하다 由是 太子劭深惡淑妃及濬한대 濬懼하여 曲意事劭하니 劭更與之善이러라
吴興巫嚴道育自言호되 能役使鬼物이라하여 因東陽公主婢王鸚鵡하여 出入主家注+嚴道育, 女巫也. 其夫爲劫, 坐沒入奚官. 東陽公主, 文帝女, 適王僧綽.하니 主與劭濬信惑之러라
劭濬多過失하여 數爲宋主所詰責이라 使道育祈請하고 號曰天師注+祈請, 欲令過不上聞也.러니
後遂與道育鸚鵡及主奴陳天與黄門陳慶國으로 共爲巫蠱하여 琢玉爲宋主形像하여 埋於含章殿前하다
劭補天與爲隊主한대 宋主讓之曰 汝所用隊主副竝是奴邪注+隊主․隊副, 皆東宮之官.아하다
劭懼하여 以書告濬한대 濬復書曰 彼人若所爲不已 正可促其餘命이니 或是大慶之漸耳注+劭․濬相與往來書疏, 常謂上爲彼人, 或曰其人.
鸚鵡先與天與通이라 恐事泄하여 白劭密殺之한대 慶國懼曰 巫蠱事 唯我與天與宣傳往來러니 今天與死하니 我其危哉인저하고 乃白其事한대
宋主大驚하여 即遣收鸚鵡하고 封籍其家하여 得劭濬書及所埋玉人이어늘 命有司窮治其事하니 道育亡命하여 捕之不獲이라
宋主惋歎彌日하여 遣中使切責劭濬이어늘 劭濬惶懼陳謝하니 宋主雖怒甚이나 猶未忍罪也러라
秋八月 宋攻碻磝라가 不克而退하고 雍州兵進至虎牢라가 亦還하다
諸軍攻碻磝로되 累旬不拔하다
八月 魏人夜自地道潜出하여 燒營及攻具한대 張永夜徹圍退軍하고 不告諸將하니 士卒驚擾어늘 魏人乗之하니 死傷塗地러라
蕭思話自往하여 増兵力攻이로되 旬餘不拔하다 時青徐不稔하여 軍食乏이라 思話命諸軍하여 皆退屯歴城이러니
魯爽至長社하니 魏戍主棄城走어늘 臧質遣司馬柳元景하여 帥參軍薛安都等하여 向潼關하고 梁州刺史劉秀之遣司馬馬汪하여 與參軍蕭道成으로 將兵向長安하다 道成 承之之子也
魏將軍封禮自浢津南渡하여 赴弘農注+浢, 音豆. 水經註 “門水自鴻關東北流, 又北逕弘農縣故城東. 故城卽故函谷關也. 其水側城北流, 而注于河. 河水於此有浢津之名.”하다
九月 魯爽與魏拓跋僕蘭으로 戰于大索하여 破之하고 進攻虎牢라가 聞碻磝敗退하고 與元景等으로 皆引還注+索, 音冊, 又音求索之索, 水名, 在滎陽. 漢高帝與項羽戰于京․索間, 卽此京縣. 有大索亭․小索亭, 大小索氏兄弟居之, 故有大小之號.하다
吐谷渾王慕利延卒하고 拾寅立하다
拾寅始居伏羅川하여 遣使請命于宋魏注+拾寅, 樹洛于之子. 居伏羅川, 猶未敢遠離白蘭之險也.어늘 宋以爲河南王하고 魏以爲西平王하다
魏南安隱王余 自以違次而立注+余以少子爲宗愛所立, 非次也.이라하여 厚賜群下하여 欲以收衆心하니 旬月之間 府蔵虚竭하고 又好酣飲及聲樂畋獵하여 不恤政事러라
宗愛爲宰相하여 錄三省하고 總宿衞하여 坐召公卿하여 専恣日甚注+魏蓋以尙書․侍中․中秘書爲三省.이어늘 余患之하여 謀奪其權하니 愛憤怒러라
余以十月朔 夜祭東廟할새 愛使小黄門賈周等으로 就弑而秘之하니 唯羽林郎中劉尼知之하고 勸愛立皇孫濬注+羽林郞, 自漢以來有之. 漢羽林郞秩比三百石, 郞中可以槪推矣. 魏以劉尼爲羽林郞中, 與殿中尙書俱典兵宿衛, 則其位任蓋重於漢朝也.한대
愛驚曰 君大癡人이로다 皇孫若立하면 豈忘正平時事乎注+景穆太子之死, 魏正平元年也. 上年六月, 魏改元正平.
尼恐愛爲變하여 密告殿中尙書源賀한대 賀時與尼 俱典兵宿衞
乃與尙書陸麗 謀曰 宗愛既立南安하고 還復殺之하니 今又不立皇孫이면 將不利於社稷이라하고
遂定謀하여 共立濬하다 俟之子也
賀與尙書長孫渇侯 嚴兵守衞하고 使尼麗 迎濬於苑中注+魏都平城有鹿苑.한대
尼馳還東廟하여 大呼호되 宗愛弑南安王하니 大逆不道 皇孫已登大位하사 有詔宿衞之士 皆還宮하라한대 衆咸呼萬歲어늘
遂執宗愛賈周等하고 勒兵入奉皇孫하여 即位하고 殺愛周호되 具五刑하고 夷三族하다 追尊景穆太子爲皇帝하고 立乳母常氏爲保太后하다
宋西陽蠻反하니 遣沈慶之하여 討之하다
◑魏殺其外都大官古弼張黎하다
魏南安王余之立也 以弼爲司徒하고 黎爲太尉러니 及是하여 黜爲外都大官한대 坐有怨言하여 皆被誅하다
魏隴西屠各叛하니 討平之하다
◑魏復建佛圖하고 聽民出家하다
魏世祖晩年 佛禁稍弛하여 民間往往有私習者러라 至是하여 群臣多請復之어늘 乃詔州郡縣하여 各聽建佛圖一區하고 民欲爲沙門者 聽出家하니 大州五十人이요 小州四十人注+佛圖, 卽浮屠. 或曰 “佛圖, 卽佛寺.” 捨俗爲僧, 謂之出家.이라
於是 曏之所毁 率皆修復하고 魏主親爲沙門下髪注+爲, 去聲. 下髮, 剃髮也. 亦謂之祝髮.하다
魏以周忸爲太尉하고 陸麗爲司徒하고 杜元寳爲司空이러니 하다
麗以迎立之功으로 受心膂之寄하니 朝臣無出其右者 賜爵平原王한대
麗辭曰 陛下國家之正統이라 當承基緒 效順奉迎 臣子常職이라 不敢慆天之功하여 以干大賞注+慆, 義與叨同, 貪也.이라한대
魏主不許어늘 麗曰 臣父奉事先朝하여 忠勤著效注+陸俟事世祖, 威行北鎭, 功著關中.러니 今年逼桑榆하니 願以臣爵授之하노이다
魏主曰 朕豈不能使卿父子 爲二王邪아하고 乃進其父建業公俟爵爲東平王하다
班賜群臣할새 使源賀 任意取之한대 賀辭曰 南北未賓하니 府庫不可虚注+謂魏南有宋, 北有柔然, 不可一日弛備, 府庫所以供軍國之用, 不可虛於賞賜.니이다한대 固與之어늘 乃取戎馬一匹注+示欲宣力於邊垂.하다
魏主之立也 髙允預其謀러니 麗等 皆受賞而不及允호되 允終身不言하고 忸坐事賜死하다
魏法深峻이러니 賀奏호되 謀反之家 男子十三以下本不預謀者 宜免死沒官이라한대 從之하다
魏行玄始曆하다
魏入中原하여 用景初曆注+景初曆, 楊偉所造, 曹魏明帝景初元年行之.이러니 世祖克沮渠氏하고 得趙𢾺玄始曆하니 時人以爲密이라 是歲 始行之注+𢾺, 讀如斐字.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29년이고, 北魏 髙宗 文成帝 拓跋濬 興安 원년이다.
[綱] 봄 2월에 北魏 中常侍 宗愛가 그의 임금 拓跋燾를 죽이고注+① 世祖(拓跋燾)는 향년이 45세였다. 南安王 拓跋余를 세웠다.
[目] 北魏 世祖 拓跋燾가 景穆太子(拓跋晃)를 追悼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宗愛가 주살될까 두려워하여,
2월에 세조를 시해하였다. 僕射 蘭延, 和疋(화아)注+① 疋(바르다)는 雅의 古字이다. 和疋는 姓名이다., 薛提 등이 비밀에 부치고 國喪을 발표하지 않았다.
난연․화아는 拓跋濬이 어려서 장성한 임금을 세워야 한다고 하여 秦王 拓跋翰을 불러서 밀실에注+② “秘室”은 비밀스런 방이다. 두었는데, 설제는 탁발준이 嫡孫이어서 廢黜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오랫동안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종애는 이것을 알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경목태자에게 죄를 지었으며, 평소에 탁발한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南安王 拓跋余와 좋다고 여겼다.
이에 비밀리에 탁발여를 맞이하고자 하여 皇后의 詔令을 위조하여 난연 등을 불렀다. 그리고 환관을 시켜서 무기를 가지고 대궐에 매복하였다가 들어오는 차례로 잡아 포박하여 참수하게 하였다.
탁발한을 죽이고 탁발여를 세우니 탁발여는 종애를 大司馬 大將軍으로 삼았다. 탁발한․탁발여는 모두 세조의 아들이다.
[綱] 여름 5월에 宋나라 사람들이 北魏를 침략하였다.
[目] 宋主는 北魏 世祖가 殂했다는 소식을 듣고, 北伐을 다시 도모하니, 魯爽 등이 다시 찬성하였다. 太子中庶子 何偃이 말하기를 “淮水․泗水에 있는 몇 개 州들은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경솔히 출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注+① 何偃은 何尙之의 아들이다. 淮泗數州는 靑州․冀州․徐州․兗州․司州․豫州를 말한다., 따르지 않았다.
5월에 蕭思話를 보내어 張永 등을 감독하여 碻磝로 향하게 하고, 魯爽․魯秀․程天祚가 荆州 甲士 4만 명을 거느리고서 許昌․洛陽으로 출동하고, 雍州刺史 臧質은 소속 부대를 인솔하여 潼關으로 향하고, 沈慶之는 정벌을 굳이 만류하였으므로 宋主는 그를 가게 하지 않았다.注+② ≪資治通鑑≫에 “〈沈慶之가〉 異議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가지 않게 했다.”고 하였다.
青州刺史 劉興祖가 上言하기를 “河南 지역은 사람들이 곤궁하고 굶주려 들에 노략질할 것이 없으니 만일 〈北魏의〉 여러 성들이 굳게 지키면 열흘이나 한 달 내에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성 아래에〉 많은 군사들을 머물게 하면 군량을 수송하는 데 수고롭고, 시기와 형세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일이 속전속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가 막 죽고, 게다가 더운 시기가 가깝고 그 국내가 의혹하고 소란하니, 대군을 멀리 보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臣이 생각건대 中山으로 곧장 달려가서 그 관문과 要害處를 점거하면注+③ 中山에서 代까지 倒馬關과 飛狐關이 있다. 冀州 이북의 백성들이 여전히 풍요롭고 게다가 보리도 이미 익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물자를 마련하기가 쉽습니다.注+④ 〈“因資爲易”는〉 적군에 의하여 물자를 취하는 것이 일에 있어 쉬움을 말한다.
만일 中州(中原)가 진동하면 黄河 이남 지역에서 〈북위의 세력이〉 자연히 소멸될 것입니다. 臣은 청컨대 靑州와 冀州의 병력을 동원하여 北魏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만약 선봉 부대가 승리하면 여러 군대가 일시에 황하를 건너서 司牧(牧民官)을 모두 세우고 새로 귀부한 이들을 어루만져주며, 서쪽으로 太行山(태항산)에 의거하고 북쪽으로 軍都를 막으며, 일에 따라 지휘하고 일의 마땅함에 따라 〈호응한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注+⑤ 軍都縣은 前漢 때에는 上谷郡에 속하고, 後漢 때에는 廣陽郡에 속하고, 晉나라 때에는 燕國에 속하였는데, 軍都關이 있다. “加授”는 北魏에 벼슬하여 관직이 있는 사람은 그 관직을 더해주고, 관직이 없으면서 무리를 모아 宋나라 군대에 호응한 사람은 우선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성공하면 천하통일을 기대할 수 있고注+⑥ “淸壹可待”는 黃河 南北을 숙청하여 천하를 통일할 공로를 기다릴 수 있음을 말한다. 만약 이기지 못하더라도 큰 손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宋主의 의도는 河南에 있었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고, 또다시 侍郎 徐爰을 보내서 종군하면서 碻磝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中旨(황제 勅旨)를 가지고서 때에 이르러 諸將들에게 宣示하고 方略을 주게 하였다.
[綱] 宋나라 尙書令 何尙之가 致仕하였는데, 얼마 후 다시 기용하였다.
[目] 何尙之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致仕하기를 청하여 물러나 方山에注+① 方山은 建康 동북쪽에 있고 方山埭가 있는데, 淮水를 가로질러 방산 남쪽에 제방을 만들었다. 方山이라고 말한 것은 산 모양이 반듯하여 도장과 같기 때문이다. 머물렀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何尙之가 은퇴할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詔書를 내려 서너 번 敦諭하니 과연 출사하여 직무를 보았다.
袁淑이 예로부터 事跡은 있으나 이름이 남지 않은注+② “有迹無名”은 과 같은 부류이다. 隱士들을 기록하여 ≪眞隱傳≫을 지어서 하상지를 비웃었다.
[綱] 宋나라 太子 劉劭와 始興王 劉濬의 巫蠱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용서하고 주살하지 않았다.
[目] 예전에 潘淑妃가 始興王 劉濬을 낳자, 元皇后가注+① 袁皇后의 시호를 元后라고 하였다. 화나서 한스러워하다가 殂하였고 반숙비가 內政을 전담하여 총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太子 劉劭가 반숙비와 유준을 몹시 미워하였는데 유준은 겁이 나서 뜻을 굽혀 유소를 섬기니, 유소가 다시 유준과 사이좋게 지냈다.
吴興의 무당 嚴道育이 스스로 말하기를 “귀신을 부릴 수 있다.”라고 하여, 東陽公主의 하녀 王鸚鵡를 통하여 동양공주의 집에 출입하니注+② 嚴道育은 여자 무당이다. 그 남편이 남을 겁박하여 그에 연루되어 奚官(內侍省 소속 관청)에 籍沒되었다. 東陽公主는 文帝의 딸로 王僧綽에게 시집갔다., 동양공주가 유소․유준과 함께 엄도육을 신봉하고 현혹되었다.
유소와 유준은 과실이 많아서 자주 宋主에게 꾸지람을 받았으므로 두 사람은 엄도육을 시켜서 〈과실이 임금께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注+③ “祈請”은 과실을 황제가 듣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녀를 天師라고 일컬었다.
뒤에 마침내 엄도육․왕앵무 및 동양공주의 하인 陳天與와 黄門 陳慶國과 함께 巫蠱를 하여 옥을 쪼아서 宋主의 형상을 만들어 含章殿 앞에 묻었다.
유소는 진천여를 보임하여 隊主로 삼았는데, 宋主가 꾸짖기를 “네가 등용한 隊主․隊副가注+④ 隊主와 隊副는 모두 東宮의 관직이다. 모두 이런 노예이냐?”라고 하였다.
유소는 두려워하여 편지로 유준에게 고하였는데, 유준이 답장하기를 “저 사람(宋 文帝)이注+⑤ 劉劭와 劉濬이 서로 함께 편지를 왕래할 적에 항상 上(文帝)을 ‘저 사람[彼人]’이라 하고, 혹은 ‘그 사람[其人]’이라고 하였다. 만약 저렇게 하는 짓을 그치지 않으면 바로 남은 목숨을 재촉하는 것이니, 혹 이는 경사의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王鸚鵡는 이전부터 陣天與와 사통하고 있던 터라, 사실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유소에게 아뢰어 진천여를 몰래 죽이게 하였다. 이에 陣慶國이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巫蠱의 일은 오직 나와 진천여만이 전달하며 왕래하였는데 지금 진천여가 죽었으니, 내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 그 사건을 宋主에게 아뢰었다.
宋主가 크게 놀라서 즉시 사람을 보내 왕앵무를 체포하고 그 집안의 재물을 조사하고 몰수하게 하여 유소․유준의 편지 및 매장한 옥인형을 찾아내었는데, 有司에게 명하여 그 사건을 끝까지 추궁하도록 하였다. 엄도육은 망명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宋主가 종일토록 비통해 있다가 中使를 보내어 유소․유준을 매우 꾸짖자 유소․유준이 두려워하여 사죄를 하니, 宋主가 비록 크게 분노하였으나 차마 죄를 주지는 못하였다.
[綱] 가을 8月에 宋나라가 碻磝를 공격했다가 승리하지 못하여 퇴각하고, 雍州의 군사가 虎牢로 진격하였다가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目] 〈宋나라의〉 여러 군대가 碻磝를 공격하였으나 수십 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8월에 北魏의 군사들이 밤에 지하도에서 몰래 나와서 〈宋나라〉 군영과 무기를 불태웠는데, 張永이 밤에 포위를 풀고서 군사를 후퇴시키면서 여러 장군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졸들이 놀라 소란이 일자, 北魏 군사들이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니 사상자들이 길에 깔렸다.
蕭思話가 직접 가서 병력을 늘려 힘써 공격하였으나 십여 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靑州와 徐州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 군량이 모자랐으므로, 소사화는 여러 군대에 명하여 모두 歴城으로 물러나 주둔하게 하였다.
魯爽이 長社에 이르니, 수비를 맡은 北魏의 主將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臧質이 司馬 柳元景을 보내어 參軍 薛安都 등을 거느리고 潼關으로 향하게 하고, 梁州刺史 劉秀之와 司馬 馬汪을 보내어 參軍 蕭道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게 하였다. 소도성은 蕭承之의 아들이다.
北魏의 將軍 封禮는 浢津에서注+① 浢는 음이 豆이다. ≪水經註≫에 “門水는 鴻關에서 동북쪽으로 흐르고 또 북쪽으로 가서 弘農縣 故城 동쪽을 지난다. 故城은 바로 옛 函谷關이다. 그 물길은 성의 측면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황하로 들어간다. 황하가 여기에서 浢津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가서 弘農에 도착하였다.
9월에 노상이 북위의 拓跋僕蘭과 함께 大索에서注+② 索은 음이 冊이고, 또 음이 求索(여기저기 찾다)의 索이기도 하니, 물 이름인데, 滎陽에 있다. 漢 高帝가 項羽와 京과 索 사이에서 싸웠으니 바로 이 京縣이다. 大索亭과 小索亭이 있는데, 大索氏와 小索氏 兄弟가 살았으므로 大小의 호칭이 있게 되었다. 전투를 치러 탁발복란을 격파하고, 虎牢로 진격하다가 碻磝에서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유원경 등과 함께 모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綱] 吐谷渾의 왕 慕容慕利延이 卒하고, 慕容拾寅이 즉위하였다.
[目] 慕容拾寅이 처음에 伏羅川에 살면서注+① 拾寅은 慕容樹洛干의 아들이다. “居伏羅川”은 여전히 白蘭의 험지에서 감히 멀리 떠나지 못한 것이다. 사신을 보내 宋과 北魏에 封爵의 命을 청하자, 宋나라에서는 河南王으로 삼고, 北魏에서는 西平王으로 삼았다.
[綱] 겨울 10월에 北魏 宗愛가 자신의 임금 拓跋余를 시해하자, 魏主 拓跋濬이 즉위하여 종애를 토벌하여 죽였다.
[目] 北魏 南安隱王 拓跋余가 스스로 순차를 어기고 즉위하였다고 여겨서注+① 拓跋余는 〈太武帝의〉 작은 아들로 宗愛에 의해 즉위하였으므로 순서에 맞지 않다.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하사품을 많이 주어 대중들의 마음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한 달쯤 지나자 창고의 물품이 고갈되었다. 또 음주와 음악, 사냥을 좋아하여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宗愛는 宰相이 되어서 三省을注+② 北魏는 尙書와 侍中과 中秘書를 三省으로 삼았다. 관장하고 궁중의 宿衞를 총괄하여 앉아서 公卿들을 부르는 등 전횡이 날로 극심해졌다. 탁발여가 이를 근심하여 종애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도모하니 종애가 분노하였다.
탁발여가 10월 초하루 밤에 東廟에서 제사 지낼 때, 종애가 小黄門 賈周 등을 시켜 가서 탁발여를 시해하게 하고는 비밀에 부쳤다. 오직 羽林郎中注+③ 羽林郞은 漢나라 이후로 있었다. 漢나라 羽林郞은 秩이 比三百石이고, 郞中이 평가하여 추천할 수 있었다. 北魏가 劉尼를 羽林郞中으로 삼았는데, 殿中尙書와 함께 병사를 맡아 宿衛를 하였으니, 그 지위와 임무는 漢나라 시대보다 중하였다. 劉尼만이 이를 알고 종애에게 권하여 皇孫 拓跋濬을 세우자고 하자,
종애가 놀라 말하기를 “그대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약 皇孫이 즉위하면 어찌 正平注+④ 景穆太子(拓跋晃)가 죽은 것은 北魏 正平 원년(451)이다. 지난해 6월에 北魏가 연호를 正平으로 바꾸었다. 때의 일을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劉尼는 宗愛가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몰래 殿中尙書 源賀에게 고하였는데, 원하는 당시 유니와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궁중을 宿衞하고 있었다.
마침내 尙書 陸麗와 도모하기를 “종애가 이미 南安王을 황제로 세우고 나서, 도리어 다시 그를 죽였다. 지금 또 皇孫을 세우지 않으면 앞으로 社稷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모의를 확정하여 함께 拓跋濬을 세우기로 하였다. 陸麗는 陸俟의 아들이다.
원하는 尙書 長孫渇侯와 함께 병사들을 엄히 단속하여 궁성을 지키고 유니와 육려를 보내 탁발준을 苑中에서注+① 北魏는 平城에 도읍하여 鹿苑이 있었다. 맞이해오게 하였는데,
유니가 말을 달려 東廟로 돌아가서 크게 소리치기를 “종애가 南安王을 시해하였으니, 大逆不道한 죄인이다. 皇孫께서 이미 帝位에 등극하시어 조서를 내려 宿衞하는 군사들은 모두 궁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라고 하자,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마침내 宗愛와 賈周 등을 체포하고 병력을 지휘하여 皇孫 탁발준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고서 종애와 가주를 죽였는데, 五刑을 모두 받게 하고 三族을 멸하였다. 景穆太子를 추존하여 皇帝로 하고, 乳母 常氏를 세워서 保太后로 삼았다.
[綱] 宋나라 西陽의 蠻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沈慶之를 보내 토벌하였다.
[綱] 北魏가 外都大官 古弼과 張黎를 죽였다.
[目] 北魏 南安王 拓跋余가 帝位에 오르고 나서 古弼을 司徒로 삼고, 張黎를 太尉로 삼았다. 이때에 와서 이들을 강등하여 外都大官으로 삼았는데 원망하는 말을 한 죄에 걸려 모두 죽임을 당했다.
[綱] 北魏 隴西의 屠各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綱] 北魏가 佛圖(佛寺)를 다시 세우게 하고,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目] 北魏 世祖 太武帝 만년에 불교를 금지한 것이 점점 느슨해져서 민간에서는 종종 사사로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불교를 회복시키자고 청하자, 이에 州․郡․縣에 명을 내려 각각 佛寺 1곳을 건립하는 것을 허락해주고, 백성들 중에 沙門이 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출가를 허락해주었는데注+① “佛圖”는 바로 浮屠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佛圖는 곧 佛寺이다.”라고 하였다. 세속을 버리고 중이 되는 것을 出家라고 한다., 큰 州 50명, 작은 州 40명으로 하였다.
이에 예전에 허물었던 곳을 대략적으로 모두 수리하여 복구시키고, 魏主가 친히 沙門을 위해 〈沙門의〉 머리를 깎아주었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下髮”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인데, 또한 祝髮이라고도 한다.
[綱] 北魏는 拓跋周忸를 太尉로 삼고, 陸麗를 司徒로 삼고 杜元寳를 司空으로 삼았는데, 탁발주뉴가 얼마 뒤에 일에 연루되어 賜死되었다.
[目] 陸麗는 拓跋濬을 맞이하여 즉위시킨 공로로 〈황제에게〉 심복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으니, 조정 신하 중에는 그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었다. 平原王의 작위를 내리자,
육려가 사양하기를 “폐하께서는 國家의 正統이므로, 마땅히 基業을 이어야 합니다. 순리를 본받아 받들어 맞이하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직분이기에, 감히 하늘의 공로를 탐내어注+① 慆는 叨와 뜻이 같으니, 탐낸다는 뜻이다. 큰 상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허락하지 않자, 육려가 말하기를 “신의 아비는 先帝를 받들어 모실 적에 충성스럽고 근면한 공효가 드러났습니다.注+② 陸俟는 世祖(太武帝)를 섬겨 北鎭에 위엄을 떨쳤고, 공이 關中에 드러났다. 지금 거의 노년이 되었으니, 신의 작위를 아비에게 주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말하기를 “朕이 어찌 卿의 父子를 두 명의 王으로 삼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고, 육려의 아버지 建業公 陸俟의 작위를 東平王으로 올려주었다.
[目] 魏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품을 나누어줄 때 源賀를 시켜서 자기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는데, 원하가 사양하기를 “남쪽의 宋나라와 북쪽의 柔然 등이 아직 굴복하지 않았으니 府庫를 비게 해서는 안 됩니다.”注+① 北魏 남쪽에는 宋나라가 있고 북쪽에는 柔然이 있어 하루라도 대비를 늦춰서는 안 되고, 府庫는 軍國에 재용을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상을 주는 일로 허비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굳이 내려주자 원하가 마침내 戎馬 1필만을 선택하였다.注+② 〈“取戎馬一匹”은〉 힘을 변방에 과시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다.
魏主가 즉위할 때에 髙允이 그 계획에 참여하였다. 육려 등은 모두 포상을 받았으나 고윤은 미처 포상을 받지 못했는데, 고윤은 종신토록 말을 하지 않았다. 拓跋周忸는 일에 연루되어 賜死되었다.
이때에 北魏의 법률이 매우 엄하였는데, 원하가 아뢰기를 “모반을 일으킨 집안 중에 13세 이하의 남자로 본래 모반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마땅히 목숨을 살려주고 관작을 몰수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자, 魏主가 그대로 따랐다.
[綱] 北魏가 玄始曆을 시행하였다.
[目] 예전에 北魏가 中原으로 들어와 景初曆을注+① 景初曆은 楊偉가 만든 것이고, 曹魏 明帝 景初 원년(237)에 시행하였다. 사용하였다. 世祖 太武帝가 沮渠氏(北涼)에게 승리하고 趙𢾺(조비)가注+② 𢾺는 ‘斐’자와 동일하게 읽는다. 편찬한 玄始曆을 얻었는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정밀하다고 여겼다. 이해에 비로소 시행하였다.


역주
역주1 魏中常侍宗愛弑其君燾 而立南安王余 : “賀善의 贊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太武帝는 즉위하여 처음으로 天師道塲을 세우고, 이어서 道敎 祭壇에 나아가 符籙을 받은 것을 기록하였다. 비록 沙門을 도태시키고 佛寺를 폐지한 것은 다른 것을 숭상한 것이었으나, 世家의 자손 중에 隱士를 徵召하고, 公卿의 자제들을 태학에 들어가게 하고, 조서를 내려 經傳의 뜻에 의거하여 疑獄을 처결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빠르게 中夏로 변해간 것이다. 태무제가 魯郡에 이르러 太牢로 孔子에게 제사를 지낸 것을 ≪資治通鑑綱目≫에서 유독 매우 허여하여 특별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功業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賀善賛曰 太武即位 首立天師道塲 繼書詣道壇受符籙 雖能汰沙門 廢佛寺 蓋好尚之異也 然書徴世冑遺逸 令公卿子弟入學 詔以經義决疑獄 亦駸駸乎變夏矣 至其進至魯郡 以太牢祠孔子 綱目獨深予而特書之 功業不終 惜哉]” ≪書法≫“≪春秋≫에서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이 토벌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매우 꾸짖어 인물이 없다고 하였다. 宗愛는 일개 內侍로 임금을 시해하고 임금을 세우기를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하였는데도, 北魏 사람들이 온 나라를 들어 그를 따르고 일찍이 어기지 않았다. 만일 종애가 시해하는 반역을 거듭 행하여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다면 北魏가 오히려 설 수 있었겠는가. 곧바로 책에 기록하였으니 北魏의 國人을 허물한 것이다.[春秋君弑而賊不討 則深責其國 以為無人 宗愛以一閽寺之微 弑君立君 易若反掌 魏人舉國聴之 曽無違異 向非愛再行弑逆 自速其死 則魏尚可立乎 直書于冊 罪魏國也]” ≪發明≫
역주2 宋人侵魏 : “≪春秋左氏傳≫ 桓公 2년(B.C.710)에 宋나라 殤公이 즉위하여 10년 동안 11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는데, 백성들이 그 명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華督이 상공을 시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금 宋나라와 北魏가 전쟁을 하여 재앙이 매우 혹독하였다. 魏主는 이미 그 몸이 시해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宋나라는 또한 마땅히 스스로 경계함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北魏의 혼란을 틈타서 침략하였다가 적에게 손실을 입히지 못하고 악명만 쌓였으니, 얼마 후에 역시 北魏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天道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니, 잘 만든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인데, 두 임금(北魏 拓跋燾와 宋 文帝)은 자주 전쟁을 하고 그치지 않아 그 재앙이 마치 부절을 합한 듯이 꼭 맞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앞에서는 ‘宋나라와 北魏가 다시 통하여 우위를 맺었다.’고 기록하고 여기에서는 ‘宋나라가 北魏를 침략하였다.’고 기록하여 까닭 없이 무력을 남용하여 모두 末流의 재앙이 있음을 보였으니, 후인을 위해 경계한 것이다.[春秋宋殤公立 十年十一戰 民不堪命 遂有華督之弑 今宋魏交兵 禍亦甚烈 魏既不免其身 宋亦宜知自警 乃反乗釁侵之 無損於敵 徒稔其惡 未幾 亦蹈魏人之轍 天道好生而惡殺 佳兵者不祥之器 二君亟戰不已 其禍若合符節 綱目前書宋魏復通好 此書宋人侵魏 以見其無故黷兵 皆有末流之禍 爲後戒也]” ≪發明≫ ‘夫佳兵者 不祥之器’는 ≪老子≫ 31장에 나오는 말이다. ‘未幾 亦蹈魏人之轍’은 宋나라가 北魏의 전철을 밟아 다음 해(453) 2월에 宋나라 太子 劉劭가 宋 文帝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역주3 僞帥 : 비정통의 統帥라는 의미로 宋나라 拓跋燾를 비하하여 칭한 것이다.
역주4 宋尙書令何尙之致仕 尋復起之 : “‘起之’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何尙之를 나무란 것이다. 致仕하였다가 다시 기용된 경우가 많으나(唐나라 劉仁軌, 唐休璟, 宋齊丘에 의거한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復起’로 기록하지 않았다. 오직 何尙之에게 특별히 기록한 것은 마음을 주벌한 것이니, ‘이미 치사하였는데, 얼마 후 번복하여 기용하였으니 이것은 속임수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書起之 何 譏尙之也 致仕而復起多矣(據唐劉仁軌 唐休璟 宋齊丘) 綱目不書復起 惟尙之特書 誅心也 若曰既已致仕 尋復而起之 是僞而已矣]” ≪書法≫“大夫는 70세에 업무를 사퇴하는 것이 禮이다. 이미 致仕하였는데 얼마 후 다시 기용하였다는 것은 〈宋主와 何尙之〉 모두를 나무란 것이다.[大夫七十而謝事 禮也 既致仕矣 尋復起之 交譏之也]” ≪發明≫
역주5 晨門……漢陰丈人 : 모두 隱者들이다. 晨門․荷蕢․荷蓧는 ≪論語≫에 보인다. 野王二老는 後漢의 光武帝가 鄧禹의 西征을 전송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野王이라는 곳에서 사냥하다가 만난 두 노인인데, 그들과 문답하고서 隱者로 인정하여 등용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떠나간 후로 다시 찾지 못하였다.(≪後漢書≫ 〈野王二老列傳〉) 漢陰丈人은 남새밭을 가꿀 적에 굴을 파고 우물로 들어가서 항아리를 안고 나와 물을 주던 은자이다.(≪莊子≫ 〈天地〉)
역주6 宋太子劭始興王濬巫蠱事覺 赦不誅 : “‘사면하여 주살하지 않았다.[赦不誅]’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다. 형벌을 그르침을 나무란 것이다. 〈前漢 때에〉 燕王 劉旦이 謀反하였는데도 사면하여 다스리지 않으니 元鳳 때의 반란이 있었고, 王氏 五侯가 죄를 지었는데도 사면하여 주살하지 않으니 初始 때에 〈王莽의〉 찬탈이 있었으며, 太子 劉劭 등이 巫蠱하였는데도 사면하여 주살하지 않으니 宋 文帝 末年(453)에 〈유소에게 시해되는〉 재앙이 있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한결같이 사면으로 기록하였으니 결단하지 못한 어지러움을 드러낸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赦不誅’라고 기록한 것이 2번이고(漢 成帝 鴻嘉 3년(B.C.18), 이해(452)) ‘赦弗治’라고 기록한 것이 1번이니(漢 昭帝 始元 원년(B.C.86)) 모두 큰 죄이다.[赦不誅 何 譏失刑也 燕王旦謀反 赦不治 所以有元鳳之反 王氏五侯有罪赦不誅 所以有初始之簒 太子劭等巫蠱 赦不誅 所以有末年之禍 綱目一以赦書之 所以著不斷之亂也 終綱目書赦不誅二(漢成帝鴻嘉三年 是年) 書赦弗治一(漢昭帝始元元年) 皆大罪也]” ≪書法≫ ‘元鳳之反’은 漢 武帝 元鳳 원년(B.C.80)에 鄂邑 長公主, 燕王 劉旦, 上官桀, 上官安 등이 謀反하여 모두 伏誅된 사건을 말한다. ‘初始之簒’는 王莽이 찬탈한 사건을 말한다.“〈漢 武帝의 아들〉 戾太子는 江充에게 무고를 받아 죽음을 면하지 못했고, 劉劭․劉濬은 이미 직접 巫蠱를 행하여 사건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國儲副君(太子)의 행위가 이와 같은데 종묘 제사의 기물을 이어받을 수 있겠는가. 사건이 발각되어도 주살하지 않은 것을 책에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형벌을 그르침을 나무란 것이다.[戾太子爲江充所誣 不免其死 劭濬既親爲巫蠱 事驗明白 豈有國儲副君所爲若此 而可以承祧主器者哉 事覺不誅 直書于冊 譏失刑也]” ≪發明≫
역주7 魏宗愛弑其君余……討愛誅之 : “拓跋余는 순차를 어기고 즉위하였으니, 정통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弑’라고 기록한 것인가. 탁발여는 진실로 宗愛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종애가 세웠는데 北魏 國人 중에 인물이 없어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종애를 토벌하여 주살한 것은 또한 요행일 뿐이다. 北魏의 太武帝는 활을 당기는 군사가 1백만 명으로 위엄이 천하에 떨쳐서, 북쪽으로 柔然을 쓸어버리고 서쪽으로 夏國을 평정하며 北涼을 멸하고 北燕을 멸한 것이 破竹之勢처럼 쉽게 하였다. 승리를 믿고 그치지 않아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가 마음에 실컷 도륙을 하여 죽은 사람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빛나는 武功이 이와 같았으나 말년에는 변고가 측근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몸조차 보전하지 못하였고, 남은 재앙이 모여 심지어 거듭 弑逆이 일어나게 되어 거의 국가를 다스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쌓은 不善을 어찌 덮을 수 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일에 응하여 미친 바를 징험할 수 있으니, 뒤에 전쟁을 좋아하고 살인을 즐기는 자들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余越次而立 未成乎君 何以書弑 余固愛之君也 愛立之 愛弑之 魏國無人矣 討而誅之 亦幸焉爾 魏太武控弦百萬 威振天下 北掃柔然 西平夏國 滅涼滅燕 易若破竹 恃勝不已 舉兵南下 極意屠戮 死者不可勝紀 武功之暢如此 然末年變生肘腋 身且不保 餘禍所鍾 至於再行弑逆 幾不能國 不善之積 豈可掩哉 考之綱目之所書 驗之事應之所及 後之好攻戰樂殺人者 可以觀矣]” ≪發明≫
역주8 忸尋坐事賜死 : “〈綱에〉 ‘賜死’라고 기록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賜死의 예는 4가지이다. ‘연루된 바에 賜死되었다.[所坐賜死]’고 기록한 것(拓跋周忸, 郇公孝恊, 太平公主, 王毛仲)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고, ‘아무개를 貶職하고 賜死하였다.[貶某賜死]’고 기록한 것(竇參, 楊牧, 韋保衡, 孟漢卿)과 ‘아무개에게 죽음을 내렸다[賜某死]’고 기록한 것(吴通玄, 路巖, 蘇檢)은 모두 죄를 받을 만하지만 죽음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아무개가 賜死되었다.[某賜死]’고 기록한 것(唐나라 梁王 李忠)은 연루될 것이 없는 사람이니 마땅히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書賜死始此 賜死之例四 著所坐賜死(周忸 郇公孝恊 太平公主 王毛仲) 宜死者也 書貶某賜死(竇參 楊牧 韋保衡 孟漢卿) 書賜某死(吴通玄 路巖 蘇檢) 皆可罪而未宜死者也 止書某賜死(梁王忠) 無所坐者也 不宜死者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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