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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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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昇明三年이요 齊太祖高帝蕭道成建元元年이요 魏太和三年이라
◑是歲 宋亡齊代하다
春正月 宋以蕭嶷爲荊州刺史하고 蕭賾爲僕射하다
太傅道成以朏有重名으로 欲引參佐命하여 以爲左長史하고 嘗與論魏晉故事할새 因曰 石苞不早勸晉文하고 死方慟哭하니 方之馮異컨대 非知機也注+晉文王薨, 石苞自州奔喪, 慟哭曰 “基業如此, 而以人臣終乎?” 馮異勸漢光即尊位. 道成言石苞不能早勸晉文爲禪代之事, 比之馮異勸漢光, 苞非知機者也, 欲以此言感動謝朏耳.로다
朏曰 晉文世事魏室하니 必將身終北面이요 借使魏行唐虞故事라도 亦當三讓彌高注+言三以天下讓, 則節行彌髙也.라한대 道成不悅하여 以朏爲侍中하고 更以王儉爲左長史하다
三月朔 日食하다
◑宋蕭道成自爲相國하고 封齊公加九錫하다
以十郡爲齊國하고 官爵禮儀 竝倣天朝注+時以靑州之齊郡, 徐州之梁郡, 南徐州之蘭陵․魯郡․琅邪․東海․晉陵․義興, 揚州之吳郡․會稽十郡封.하다
楊運長 爲道成所殺하니 義慶之孫也 以淩源令潘智與運長善注+蕭子顯齊志 “臨淮郡有淩縣.” 應邵曰 “淩水出淩縣西南入淮.”이어늘 遣人說之曰
先帝舊人이요 是宗室近屬이니 如此形勢 豈得久傳이리오 若招合內外 計多有從者라하니 智以告道成한대 道成殺之하다
宋司空褚淵 引何曾自魏司徒 爲晉丞相故事하여 求爲齊官한대 道成不許하고 以王儉爲僕射하니 時年二十八이러라
夏四月 齊公道成 進爵爲王하다
增封十郡하다注+時又增徐州之南梁․陳․潁川․陳留, 南兗州之盱眙․山陽․秦․廣陵․海陵․南沛等十郡.
齊王道成 殺武陵王贊注+贊, 明帝子.하다
宋主下詔禪位于齊하고 而不肯注+通鑑, 作帝當臨軒, 不肯出, 逃于佛蓋之下.이어늘 王敬則勒兵入迎하니 太后懼하여 自帥閹人하고 索得之어늘 敬則啓譬令出하니
宋主收淚謂曰 欲見殺乎 敬則曰 出居別宮耳 官先取司馬家亦如此 宋主泣而彈指曰 願後身世世勿復生天王家라하니 宮中皆哭하더라 宋主又拍敬則手曰 必無過慮인댄 當餉輔國十萬錢注+敬則時爲輔國將軍.이라
是日 百僚陪位한대 侍中謝朏在直注+句.하여 當解璽綬하여 陽爲不知曰 有何公事注+直, 謂當日侍直也. 傳詔云 解璽綬授齊王注+傳詔, 官名, 屬中書舍人, 出入宣傳詔旨.이라 朏曰 齊自應有侍中이라하고 乃引枕臥하니
傳詔懼하여 使朏稱疾한대 朏曰 我無疾하니 何所道아하고 遂朝服步出이어늘 乃以王儉爲侍中하여 解璽綬하고 禮畢 宋主出就東邸러라
光祿大夫王琨 在晉世 已爲郎中注+琨, 華之從父弟也.이라 至是 攀車慟哭曰 人以壽爲歡이나 老臣以壽爲戚하니 旣不能先驅螻蟻하고 乃復頻見此事라하고 鳴咽不自勝하니 百官雨泣注+不能先驅螻蟻, 謂不能早死也. 雨泣, 言涕泣如雨也.하더라
司空褚淵等奉璽綬詣齊宮하여 勸進하니 淵從弟炤謂淵子賁曰 不知汝家司空將一家物與一家하니 亦復何謂注+炤, 與照同. 賁音祕, 一說賁讀曰.오하더라
齊王即皇帝位하여 奉宋主爲汝陰王하고 築宮丹楊하고 置兵守衛하고 以褚淵爲司徒하니 賀者滿座러라
炤歎曰 彥回少立名行이러니 何意披猖至此注+披猖, 言披靡而猖獗也. 門戶不幸하여 乃復有今日之拜하니 使彥回作中書郎而死 不當爲一名士邪 名德不昌하고 乃復有期頤之壽라하니 淵固辭不拜注+曲禮, “人生百年曰期頤.” 註, “期, 要也. 頤, 養也. , 孝子要盡養道而已.”하다
奉朝請裴顗上表數齊主過惡하고 掛冠徑去하니 齊主殺之하다 太子賾請殺謝朏한대 齊主曰 殺之遂成其名하니 正應容之度外耳라하더니 久之 因事廢于家하다
齊主問爲政於參軍劉瓛注+瓛, 音桓.한대 對曰 政在孝經하니 凡宋氏以亡 陛下所以得者 皆是也 陛下若戒前車之失하여 加以寬厚 雖危可安이요 循其覆轍이면 雖安必危矣
齊主歎曰 儒者之言 可寶萬世라하더라
齊主以其子嶷 爲揚州刺史하다
◑齊主令群臣言事하다
齊主命群臣各言得失한대 淮南宣城太守劉善明注+江左僑立淮南郡於宣城郡界, 故善明兼二郡.호되 除宋氏大明泰始以來苛政하여 以崇簡易하고 交州險遠이어늘 宋末政苛하여 遂至怨注+宋明帝泰始四年, 李長仁據交州而叛.하니 今宜懷以恩德이요
且彼土所出 唯有珠寶 實非聖朝所須之急이니 討伐之事 謂宜且停이라
給事黃門郎崔祖思言호되 人不學則不知道하나니 此悖逆禍亂所由生也 今無員之官 空受祿力注+無員之官, 員外官也. 下所謂限外官, 是也. 祿者, 所食之祿, 力者, 所役之人.하니 宜開文武二學하여 令限外官으로 各從所樂하여 依方習業호되 廢惰者 遣還故郡하고 優殊者 待以不次注+方, 道也.하소서
又今陛下雖躬履節儉이나 而群下猶習侈靡하니 宜褒進朝士之約素淸修者하고 貶退其驕奢荒淫者 則風俗可移矣니이다
宋元嘉之世 事皆責成郡縣이러니 世祖徵求急速하여 始遣臺使督之하니 自是 使者旁午하여 公私勞擾어늘 聞喜公子良 極陳其弊注+聞喜, 縣名. 子良, 賾之次子. 昇明三年, 爲會稽太守都督五郡, 封聞喜公.호되
以爲臺有求須어든 但明下詔勅하여 爲之期會 則人思自竭이라 若有稽 自依糾坐之科 今雖臺使盈湊 會取正屬所辦하여 徒相疑憤하여 反更淹懈하니 宜悉停之注+正屬, 正官․屬官也. 謂使者雖多, 亦當取辦於所屬也.
員外散騎劉思效言호되 宋自大明以來 徵賦有加而天府尤貧注+天府, 謂天子之府藏也.하고 小民殆無生意로되 而貴族富室 以侈麗相高하여 乃至山澤之民 不敢采食其水草하니 今宜一新王度하여 革正其失이라하니
齊主皆加褒賞하고 或付有司하여 詳擇所宜奏行之하고 尋詔二宮諸王하여 悉不得營立屯邸하여 封略山湖注+二宮, 謂上宮及東宮. 上宮, 諸王皇子也, 東宮, 諸王皇孫也. 一說 “二宮, 皇后․太子也.” 屯, 屯田也. 邸, 店舍也. 不以道取曰略. 一云 “略, 界也.”하다
魏罷候官하다
魏詔候官千數 重罪受賕不列하고 輕罪吹毛發擧注+魏太祖置候官, 以伺察內外.하니 宜悉罷之하고
更置謹直者數百人하여 使防邏街術하여 執喧鬪者而已라하니 自是吏民始安其業注+街, 四通道也. 術讀曰遂, 又食聿切, 邑中道也.하다
處士何點 戱謂人曰 我作齊書已竟하니 其贊曰 淵旣世族이요 儉亦國華 不賴舅氏하니 遑恤國家
尙之之孫也 淵儉母皆宋公主 故點云然注+淵母宋始安公主, 繼母吳郡公主. 儉母武康公主.하다
或走馬過汝陰王之門하니 衛士 恐이라 有爲亂者하여 奔入殺王이어늘 而以疾聞하니 齊主賞之하고 遂殺宋宗室하여 無少長 皆死하다
劉澄之與褚淵善이러니 淵爲之固請이라 故遵考之族 獨得免注+澄之, 遵考之子也.하다
齊以垣崇祖爲豫州刺史하다
齊主謂崇祖曰 吾新得天下하니 索虜必以納劉昶爲辭하고 侵犯邊鄙注+宋泰始元年, 昶出奔魏.하니 壽陽當虜衝이라 非卿이면 無以制 故有是命호라
魏葭蘆鎭主楊廣香降齊注+廣香, 難當族弟也.하다
注+嶷爲豫章王, 映爲臨王, 晃爲長沙王, 曄爲武陵王, 暠爲安成王, 鏘爲鄱陽王, 鑠爲桂陽王, 鑑爲廣陵王.하다
◑秋九月 魏隴西王源賀卒하다
諡曰宣하다
晉壽民李烏奴與白水氐 寇梁州어늘 刺史范柏年 說降之注+水經註 “白水西北出臨洮縣東南西傾山, 水色白濁, 東南入陰平界. 氐居水上者號白水氐.”러라 及朝廷遣王玄邈代柏年할새 詔與烏奴俱下注+玄邈, 玄謨之從弟也.어늘 烏奴勸柏年不受代한대 柏年計未決이러니
左衛胡諧之嘗就柏年하여 求馬不得이라 譖於齊主曰 柏年欲據梁州라하니
齊主使南郡王長懋 誘柏年殺之하니 烏奴叛하여 引氐兵爲寇어늘 玄邈誘擊破之하다
玄邈爲靑州刺史러니 齊主在淮陰 爲宋太宗所疑하여 欲北附魏하여 遣書結玄邈한대
玄邈長史房叔安曰 將軍居方州之重하여 無故擧忠孝而棄之하니 三齊之士 寧蹈東海而死耳언정 不敢隨將軍也注+自項羽分立諸侯王, 分齊地爲三王, 後遂稱齊地爲三齊, 猶關中稱三秦也. 玄邈乃不答書러니
及罷州還하여 至淮陰하여 嚴軍直過하여 至建康하여 啓太宗호되 稱道成有異志러니
及齊主爲驃騎하여 引爲司馬하니 玄邈甚懼어늘 齊主待之如初하고 賞叔安忠正하여 欲用爲梁州러니 會病卒하다
魏遣梁郡王嘉하여 奉丹楊王劉昶하여 以伐齊하다
魏遣將奉昶伐齊 許昶以克復舊業하여 世胙江南하여 稱藩于魏注+胙, 祭餘肉也. 世胙, 言常主宋祀也.하다
魏使高允議定律令하다
是歲 魏詔中書監高允議定律令하니 允雖篤老 而志識不衰
詔以允家貧養薄이라하여 令樂部十人으로 五日一詣允하여 以娛其志하고 朝晡給膳하고 朔望致牛酒하고 月給衣服綿絹하고 入見 備几杖하여 問以政治하다
契丹莫賀弗勿于 帥部落萬餘口하고 入附于魏하여 居白狼水東注+契丹酋帥曰莫賀弗于, 通鑑作干. 水經註 “白狼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 北流, 逕龍城西南, 又東南流, 至遼東房縣, 入于遼水.”하다


나라 순제順帝 유준劉準 승명昇明 3년이고, 나라 태조太祖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 건원建元 원년이며,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3년이다.
이해에 나라가 멸망하고 나라가 대신하였다.
[] 봄 정월에 나라가 소억蕭嶷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고 소색蕭賾복야僕射로 삼았다.
[] 나라가 사비謝朏시중侍中으로 삼았다.
[] 태부太傅 소도성蕭道成사비謝朏가 중한 명망을 갖고 있어서 그를 이끌어 좌명佐命에 참여시키고자 장사長史로 삼았다. 한번은 그와 나라와 나라의 고사故事를 토론하였는데, 그로 인해 말하기를 “석포石苞는 일찍 문왕文王(사마소司馬昭)에게 권고하지 않았다가 그가 죽자 통곡하였으니, 이를 풍이馮異에 비한다면 기회를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① 晉 文王이 薨하자, 石苞가 揚州에서 그의 初喪에 달려가서 통곡하기를 “기업이 이와 같은데 신하로 생을 마치십니까.” 하였다. 馮異는 後漢 光武帝에게 권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蕭道成이 석포가 일찍 진 문왕에게 권하여 禪讓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지 못한 일을 풍이가 후한 광무제를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한 일에 비견하여 석포는 기회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여, 이 말로 謝朏가 감응하여 움직이게 하려고 한 것이다.
사비가 말하기를 “진 문왕은 대대로 나라 황실을 섬겼기에 반드시 자신은 끝내 북면北面을 해야 했고, 가령 나라가 에 의거했다고 해도 세 번 사양해야 더욱 높아지는 것입니다.”注+② 〈“當三讓彌高”는〉 세 번 천하를 양보하면 節行이 더욱 높아짐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기뻐하지 않아서 사비를 시중侍中으로 삼고, 왕검王儉을 바꾸어 좌장사左長史로 삼았다.
[]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 소도성蕭道成이 스스로 상국相國의 지위에 오르고 제공齊公에 봉하여 구석九錫을 더하였다.
[] 10군을注+① 당시에 靑州의 齊郡, 徐州의 梁郡, 南徐州의 蘭陵郡․魯郡․琅邪郡․東海郡․晉陵郡․義興郡, 揚州의 吳郡․會稽郡 10개의 郡으로 봉하였다. 제국齊國으로 삼고 관작官爵예의禮儀는 모두 천조天朝를 모방하였다.
[] 제공齊公 소도성蕭道成나라 임천왕臨川王 유작劉綽을 죽였다.
[] 당시에 양운장楊運長소도성蕭道成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유작劉綽유의경劉義慶의 손자였다. 능원령淩源令注+① 蕭子顯의 ≪南齊書≫ 〈州郡志〉에 “臨淮郡은 淩縣에 있다.” 하였다. 應邵가 말하기를 “淩水는 淩縣 西南에서 나와 淮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반지潘智가 양운장과 잘 지냈는데, 유작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설득하기를
“그대는 선제先帝의 옛날 신하이고, 이 몸은 종실의 가까운 친척이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찌 오래 보존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안팎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면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지가 소도성에게 알리자, 소도성이 유작을 죽였다.
[] 나라가 왕검王儉복야僕射로 삼았다.
[] 나라 사공司空 저연褚淵하증何曾나라(조위曹魏) 사도司徒에서 나라 승상丞相이 되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의 관원이 되기를 요구하니 소도성蕭道成이 허락하지 않았고, 왕검王儉복야僕射로 삼으니, 당시 나이가 28세였다.
[] 여름 4월에 제공齊公 소도성蕭道成이 작위가 올라 왕이 되었다.
[] 10개 을 더 봉하였다.注+① 당시에 또 徐州의 南梁․陳․潁川․陳留, 南兗州의 盱眙․山陽․秦․廣陵․海陵․南沛 등 10개의 郡을 더 봉하였다.
[] 제왕齊王 소도성蕭道成무릉왕武陵王 유찬劉贊注+① 劉贊은 宋 明帝(劉彧)의 아들이다. 죽였다.
[] 제왕齊王 소도성蕭道成황제皇帝라 칭하고, 송주宋主(유준劉準)를 폐위하여 여음왕汝陰王으로 삼아 단양丹楊으로 옮기고 저연褚淵사도司徒로 삼았다.
[] 송주宋主(유준劉準)가 조서를 내려서 나라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禪讓한다고 하고서 전전前殿에 나오려 하지 않자注+① ≪資治通鑑≫에는 “帝當臨軒 不肯出 逃于佛蓋之下(황제(劉準)가 前殿에 나와야 하는데 나가려 하지 않고 佛像의 寶蓋 아래로 도망쳤다.)”로 되어 있다., 왕경칙王敬則이 군사들을 데리고 들어가 황제를 맞이하였다. 태후太后가 두려워 스스로 환관들을 데리고 그를 찾았는데, 왕경칙이 황제를 타일러 나오도록 하니,
송주宋主가 눈물을 닦으며 말하기를 “죽이려고 하는가?”라고 하니 왕경칙이 말하기를 “나가서 별궁에 계시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선조께서 사마씨司馬氏 집안을 빼앗을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주宋主가 눈물을 흘리고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기를 “죽은 뒤에는 대대로 다시는 천왕天王의 집안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을 하였다. 송주宋主가 왕경칙의 손을 치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없다면 마땅히 보국장군輔國將軍에게注+② 王敬則은 당시에 輔國將軍이었다. 돈 10만 전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에 백관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는데, 시중侍中 사비謝朏가 당직이었으므로注+③ 여기서 句를 뗀다.注+④ 直은 그날 숙직을 하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새수璽綬를 풀어야 하였지만, 겉으로 모른 척하면서 말하기를 “무슨 공적인 일이 있는가?”라고 하니, 조서를 전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새수璽綬를 풀어서 제왕齊王에게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사비가 말하기를 “나라에도 응당 시중侍中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 베개를 끄집어 누워버렸다.
조서를 전하는 사람이注+⑤ 傳詔는 관직 명칭으로, 中書舍人에 속하며, 출입하면서 詔旨를 반포하거나 전한다. 두려워서 사비로 하여금 병이 들었다고 말하게 하였는데, 사비가 말하기를 “나는 아프지 않은데 어떻게 그리 말하겠소?”라고 하고, 드디어 조복을 입고 걸어서 대궐에서 나갔다. 마침내 왕검王儉시중侍中으로 삼아서 새수璽綬를 풀고 예를 마치자, 송주宋主가 나가서 동저東邸로 갔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왕곤王琨注+⑥ 王琨은 王華의 從父의 아우이다. 나라 시절에 이미 낭중郎中을 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송주宋主의 수레를 부여잡고 통곡하기를, “남들은 오래 사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이 늙은 신하는 오래 사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이미 먼저 죽어 땅강아지나 개미를 쫓지 못하여(일찍 죽지 못하여) 마침내 다시 이러한 일을 자주 보게 되는구나.”라고 하고 오열하여 몸을 감당하지 못하자, 백관들이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注+⑦ “不能先驅螻蟻”는 일찍 죽지 못했음을 말한다. “雨泣”은 비 오듯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한다.
齊高祖齊高祖
[] 사공司空 저연褚淵 등이 새수璽綬를 받들고 제궁齊宮에 이르러 제왕齊王(소도성蕭道成)에게 황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권하니, 저연의 사촌 동생 저소褚炤가 저연의 아들 저분褚賁에게 말하기를注+① 炤(비추다)는 照와 같다. 賁의 음은 祕(비)이니, 일설에는 “賁을 蕡으로 읽는다.” 하였다. “너의 집 사공司空께서 한 집안의 물건을 다른 한 집안에 갖다주는데 또한 무어라고 말할지 모르겠구나.”라고 하였다.
제왕齊王황제皇帝로 즉위하여 송주宋主(유준劉準)를 받들어 여음왕汝陰王으로 삼아 단양丹楊에 궁궐을 짓고 군사를 두어서 그를 지키고 보위하였으며, 저연을 사도司徒로 삼으니 축하하는 사람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저소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언회彥回(저연)는 젊어서 명망과 행실을 잘 세웠는데, 어찌 이렇게 까지 잘못될 줄注+② “披猖”은 쇠락하여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생각이나 했겠는가. 집안이 불행하게 되어 마침내 다시 오늘처럼 벼슬을 받았구나. 언회로 하여금 중서랑中書郎이 되어 죽게 하였더라면 마땅히 한 명의 명사名士가 되지 않았겠는가. 이름과 덕망은 드날리지 못하고 마침내 다시 장수만 누리는구나.”注+③ ≪禮記≫ 〈曲禮〉에 “백 년 인생을 期頤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註에 “期는 바란다는 뜻이고, 頤은 봉양한다는 뜻이다. 〈너무 노쇠하여〉 의복과 음식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못하니, 효자는 봉양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바랄 뿐이다.” 하였다.라고 하니, 저연은 굳게 사양하고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봉조청奉朝請 배의裴顗가 표문을 올려서 제주齊主의 허물과 악행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관을 걸어놓고 지레 떠나니, 제주齊主가 그를 죽였다. 태자 소색蕭賾사비謝朏를 죽이라고 청하니, 제주齊主가 말하기를 “그를 죽이면 그의 명성을 이루어주는 것이니, 바로 응당 개의치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랜 시일이 흘러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집으로 폐출시켰다.
제주齊主참군參軍 유환劉瓛에게注+④ 瓛의 음은 桓이다. 정치에 대해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정치는 ≪효경孝經≫에 있습니다. 송씨宋氏가 망한 까닭과 폐하께서 얻게 된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폐하께서 만약 앞에 간 수레가 전복된 잘못을 경계로 삼아 그 위에 너그럽고 후덕한 마음을 더하신다면 비록 위태로워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복된 수레의 바퀴 자국을 따른다면 비록 편안하더라도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유자儒者의 말은 만세에 보배로 여길 만하다.”라고 하였다.
[]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가 그의 아들 소억蕭嶷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가 여러 신하들에게 정사의 득실을 말하게 하였다.
[]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가 여러 신하들에게 득실에 대해 말하게 하였는데, 회남淮南선성태수宣城太守 유선명劉善明注+① 江左(南朝)에서 宣城郡 경계에 淮南郡을 僑置했기 때문에 劉善明이 두 군을 겸하여 지켰다. 말하기를 “송씨宋氏대명大明태시泰始 연간 이후의 가혹한 정치를 제거하여 간단하고 쉬운 것을 존중해야 하고, 교주交州가 험하고 먼데 나라 말기의 정치가 가혹하여 드디어 원망하는 데 이르렀으니注+② 宋 明帝 泰始 4년(468)에 李長仁이 交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지금 마땅히 은혜와 덕으로 품어주어야 합니다.
또 그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구슬과 보배뿐이라 실로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반드시 급히 필요한 것이 아니니 토벌하는 일을 응당 중지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郎 최조사崔祖思가 아뢰기를 “사람이란 배우지 못하면 알지 못하니, 이것이 패역悖逆화란禍亂이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지금 정원에 없는 관리가注+③ “無員之官”은 정원 외의 관원이다. 아래에 이른바 限外官이 이것이다. 祿은 받아먹는 봉록이고, 力은 부리는 사람이다. 헛되이 녹봉과 부리는 사람을 받으니, 마땅히 문무文武 두 학교를 열어서 정원 이외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각 즐겨하는 것을 따라서 방도에注+④ 方은 방도이다. 의거하여 익히고 공부하도록 하되, 만약에 이를 폐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우수한 사람은 관등을 뛰어넘어 대우하십시오.
또 지금 폐하께서는 비록 몸소 절약하고 검소한 것을 실천하시지만 여러 아랫사람들은 오히려 사치하고 낭비하는 데 편안하고 익숙해 있습니다. 마땅히 조정의 인사들 가운데 검약하고 검소하며 행실이 깨끗한 사람을 올려서 포상하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황폐하고 음란한 사람을 물리쳐서 좌천시킨다면 풍속은 바뀔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나라 원가元嘉 연간에 일은 모두 군현郡縣에 책임을 지웠는데, 세조世祖(유준劉駿)가 신속히 찾아오기를 요구하니 비로소 대사臺使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였다. 이후로 사자가 바삐 오가게 되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수고롭고 소란이 있었는데, 문희공聞喜公 소자량蕭子良注+① 聞喜는 고을의 이름이다. 蕭子良은 蕭賾의 둘째 아들이다. 昇明 3년(479)에 會稽太守 都督五郡이 되었고, 聞喜公에 봉해졌다. 그 폐단을 전부 아뢰기를
(조정)에 필요한 것을 요구할 일이 있을 경우 다만 분명하게 조칙을 내려 기한을 정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에 늦어지는 일이 있으면 감찰하여 죄를 주는 규정에 의거하십시오. 지금 비록 대사臺使가 도로에 가득하기는 하지만, 바로 소속 부서에서 처리하는 것을 가져갈 뿐이어서注+② “正屬”은 正官과 屬官이다. 〈“會取正屬所辦”은〉 使者가 비록 많지만, 역시 소속 부서에서 처리한 것을 가져갈 뿐임을 말한다. 다만 서로 의심하고 격분하게 되면 도리어 다시 지체되고 헤이해집니다. 그러니 이를 마땅히 모두 중지시켜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외산기員外散騎 유사효劉思效가 아뢰기를 “나라는 대명大明 연간 이후로 부세의 징수가 가중되었으나 천부天府注+③ 天府는 천자의 창고이다.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백성은 살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귀족과 부유한 집안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가지고 서로 높여서 마침내 산이나 늪에 사는 백성들은 감히 그곳에 난 물풀조차 뜯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제왕의 법도를 새롭게 하셔셔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가 모두에게 포상을 더해주었고, 어떤 경우에는 유사有司에게 맡겨 상주한 내용 중에 적당한 것을 선택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얼마 뒤에 두 궁에 있는 제왕諸王에게 조서를 내려 “모두 둔전(장원莊園)과 저택을 경영하여, 산과 호수를 점유하여 경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注+④ 二宮은 上宮과 東宮을 말한다. 上宮은 諸王皇子이고, 東宮은 諸王皇孫이다. 일설에 “二宮은 황후와 태자이다.”라고 하였다. 屯은 둔전이고, 邸는 저택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취하지 않는 것을 略이라 한다. 일설에 “略은 경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북위北魏후관候官을 폐지하였다.
[] 북위北魏에서 조서를 내려 “후관候官이 천 명을 헤아리는데注+① 北魏 太祖(道武帝)가 候官을 두어 안팎의 관리를 규찰하였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뇌물을 받아 잡아 엮지 않고,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머리카락을 불어서 들추어내듯 잡아내니, 마땅히 후관을 모두 없앤다.”라고 하고,
다시 삼가며 곧은 사람 수백 명을 두어서 큰 거리와 안의 도로를注+② 街는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다. 術은 遂(도로)로 읽고, 또 食聿의 切이니, 읍에 있는 길이다. 순찰하게 하여 시끄럽게 떠들고 싸우는 사람을 잡게 하니 이로부터 관리와 백성들은 비로소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 나라 저연褚淵왕검王儉 등이 차등 있게 작위가 올랐다.
[] 처사處士 하점何點이 농담으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제서齊書≫를 짓는 일을 끝마쳤으니, 그 에 ‘저연褚淵은 이미 세족世族이고, 왕검王儉도 나라의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이들이 외삼촌을 의지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국가(나라)를 구휼할 겨를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점何點하상지何尙之의 손자이다. 저연과 왕검의 어머니는 나라 공주였다.注+① 褚淵의 어머니는 宋나라 始安公主이고, 계모는 吳郡公主이다. 王儉의 어머니는 武康公主이다. 그러므로 하점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 5월에 제주齊主 소도성蕭道成여음왕汝陰王을 시해하고 그 종족을 멸하였다.
[]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여음왕汝陰王의 문 앞을 지나가자, 위사衛士들이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난을 일으켜 달려 들어가 여음왕을 죽였는데,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하니 제주齊主가 상을 내리고, 마침내 나라 종실을 죽였는데,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유징지劉澄之注+① 劉澄之는 劉遵考의 아들이다. 저연褚淵과 잘 지냈는데, 저연이 그를 위해 굳게 청하였으므로, 유준고劉遵考의 가족들만 죽음을 면하였다.
[] 나라가 원숭조垣崇祖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가 원숭조垣崇祖에게 말하기를 “내가 막 천하를 얻었는데, 삭로索虜(북위北魏)가 필시 유창劉昶을 맞아들이라는 것을 빌미로 삼아 변방을 침략할 것이다.注+① 宋나라 泰始 원년(465)에 劉昶이 北魏로 망명하였다. 수양壽陽은 오랑캐를 감당할 요충지이니, 이 아니면 제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명을 내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북위北魏 가로진주葭蘆鎭主 양광향楊廣香注+① 楊廣香은 楊難當의 族弟이다. 나라에 항복하였다.
[] 나라가 세자 소색蕭賾태자太子로 삼고 여러 황자를 왕에 봉하였다.注+① 蕭嶷은 豫章王으로, 蕭映은 臨川王으로, 蕭晃은 長沙王으로, 蕭曄은 武陵王으로, 蕭暠는 安成王으로, 蕭鏘은 鄱陽王으로, 蕭鑠은 桂陽王으로, 蕭鑑은 廣陵王으로 봉해졌다.
[] 가을 9월에 북위北魏 농서왕隴西王 원하源賀하였다.
[] 시호가 이다.
[] 겨울 11월에 나라가 왕현막王玄邈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았다.
[] 예전에 진수晉壽의 백성 이오노李烏奴백수白水저족氐族注+① ≪水經註≫에 “白水는 서북쪽에 臨洮縣의 東南 西傾山에서 발원하니, 물의 색깔이 희고 흐리며, 동남쪽으로 가서 陰平의 경계로 들어간다. 白水 가에 사는 氐族을 白水氐라고 한다.” 하였다. 양주梁州를 노략질하였는데, 양주자사梁州刺史 범백년范柏年이 이오노를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조정에서 왕현막王玄邈注+② 王玄邈은 王玄謨의 종제이다. 파견하여 범백년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이오노와 함께 내려오게 하니, 이오노가 범백년에게 대신하는 것을 수락하지 말라 권하였는데, 범백년이 아직 계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좌위솔左衛率 호해지胡諧之가 범백년에게 가서 말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얻지 못하자, 제주齊主(소도성蕭道成)에게 참소하기를 “범백년이 양주를 점거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남군왕南郡王 소장무蕭長懋로 하여금 범백년을 유인하여 죽이게 하였다. 이오노가 반란을 일으켜 저족氐族의 군사를 이끌고 양주를 침략하니 왕현막이 유인하여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예전에 왕현막이 청주자사靑州刺史를 지냈는데, 제주齊主회음淮陰에 있으면서 태종太宗(유욱劉彧)에게 의심을 받자 북쪽으로 가서 북위北魏에 귀의하려고 하여 편지를 보내어 왕현막과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왕현막의 장사長史 방숙안房叔安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한 의 중임을 맡으시면서 아무 까닭 없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사람들을 들어서 버리신다면 삼제三齊注+③ 項羽가 諸侯王을 나누어 세울 적에 齊나라 땅을 나누어 세 王을 세우고 나서 그 후에 결국 齊나라 땅을 三齊라고 칭하였으니, 關中을 三秦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사는 선비들은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감히 장군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현막이 끝내 답서를 하지 않았다.
자사刺史에서 파직되어 돌아와 회음에 이르자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고, 곧바로 지나쳐 건강建康에 이르러 태종에게 계문을 올리기를 “소도성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제주齊主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자, 데려다 사마司馬로 삼으니, 왕현막이 몹시 두려워하였으나, 제주齊主는 처음처럼 그를 대우하였으며, 방숙안을 충성스럽고 올바르다고 여겨 상을 주어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병이 들어 하였다.
[] 북위北魏양군왕梁郡王 탁발가拓跋嘉를 파견하여 단양왕丹楊王 유창劉昶을 받들어 나라를 공격하였다.
[] 북위北魏가 장수를 파견하여 유창劉昶을 받들어 나라를 공격하면서 유창에게 적을 이겨서 옛 기업을 회복하는 것을 허락하고, 강남에서 대대로 사직을 지키게 하면서注+① 胙는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이다. “世胙”는 항상 宋나라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북위北魏번속藩屬이라 칭하게 하였다.
[] 북위北魏고윤高允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율령律令을 정하게 하였다.
[] 이해에 북위北魏중서감中書監 고윤高允에게 조서를 내려 율령을 논의하여 정하게 하니, 고윤은 비록 연로하였으나 뜻과 지식이 쇠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고윤의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하여 악부樂部로 하여금 10명으로 5일에 한 번씩 고윤에게 가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하였으며, 아침저녁 식사 시간에 음식을 제공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소고기와 술을 보내게 하며, 달마다 의복과 비단을 주게 하였고, 들어와서 알현하면 궤장을 준비하게 하고 정치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다.
[] 거란契丹북위北魏로 들어와 귀부하였다.
[] 거란契丹막하불물우莫賀弗勿于가 부락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위北魏에 귀의하여 백랑수白狼水의 동쪽에 살았다.注+① 契丹의 추장이 莫賀弗于이다. ≪資治通鑑≫에는 干으로 되어 있다. ≪水經註≫에 “白狼水는 右北平 白狼縣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龍城 서남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遼東의 房縣에 이르러 遼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宋以謝朏爲侍中 : “그 사이에 사건이 있던 것이 아닌데 두 번이나 ‘宋以(宋나라가 누구로)’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구별한 것이다. 謝朏를 蕭嶷․蕭賾과 구별한 것은 그가 蕭道成의 당여가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王龔을 梁冀와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以’라고 기록하고(漢 順帝 永和 元年(136)), 孔融을 荀彧과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以’라고 기록하고(漢 獻帝 建安 원년(196)), 阮佃夫를 劉秉과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宋’이라고 기록하고(壬子年(472)), 謝朏를 蕭嶷․蕭賾과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宋’이라고 기록하고(이해(479)), 侯瑱을 陳覇先과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梁’이라고 기록하고(丙子年(556)), 劉仁贍을 周廷構와 구별해서는 두 번이나 ‘唐’이라고 기록하였으니(五代 丁巳年(957)), ≪資治通鑑綱目≫에서 正邪의 구별이 엄격하다.[非間有事也 再書宋以 何 殊之也 殊朏於嶷賾 所以著其非黨也 是故 殊王龔於梁冀 則再書以(漢順帝永和元年) 殊孔融於荀彧 則再書以(漢獻帝建安元年) 殊佃夫於劉秉 則再書宋(壬子年) 殊謝朏於嶷賾 則再書宋(是年) 殊侯瑱於覇先 則再書梁(丙子年) 殊仁贍於廷構 則再書唐(五代丁巳年) 綱目正邪之别嚴矣]” ≪書法≫
역주2 唐虞의 고사 : 堯임금과 舜임금이 선양에 의해 왕위를 물려주고 물려받은 일을 말한다.
역주3 (楊)[揚]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揚’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齊公道成 殺宋臨川王綽 : “‘宋臨川王’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齊나라의 권세가 높은 것이 이미 심하여 은연중에 하나의 敵國처럼 대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齊나라를 宋나라에다 소속시키지 않고 기록하기를 ‘齊公某殺宋臨川王某(齊公 누가 宋나라 臨川王 누구를 죽였다.)’라고 한 것은 마치 齊나라 사람이 宋나라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 것처럼 하게 하여 신하 노릇 하지 않음을 깊이 드러낸 것이다. 이로부터 齊나라의 일은 齊나라에 기록하여 다시 宋나라에 소속시키지 않았다.[書宋臨川王 何 齊伉已甚也 隱若一敵國矣 綱目不繫齊於宋 而書曰齊公某殺宋臨川王某 使若齊人殺宋人云者 所以深著其不臣也 自是齊事書齊 不復繫之宋矣]” ≪書法≫
역주5 齊以王儉爲僕射 : “이때 蕭道成은 여전히 宋나라의 신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宋나라에 소속시키지 않은 것은 그 權勢가 성대하여 이미 宋나라의 신하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曹氏․司馬氏의 찬탈은 오히려 늦추어 여러 해가 지났고, 劉裕가 晉나라를 대신하는 데에는 반드시 남북을 정벌하여 공로를 세운 뒤에 차지하였으나, 지금 蕭道成이 宋나라를 대신하는 데에는 바로 때를 틈타서 훔친 것이 조석 사이에 있는 것처럼 가까워서 曹氏․司馬氏와 비교하면 더욱 미치지 못한다. ≪資治通鑑綱目≫의 기록을 살펴보고 세상 도리의 消長을 증거로 삼아 보면 역시 군자의 한탄만 나올 뿐이니, 소도성에게 무엇을 꾸짖으랴.[是時道成猶爲宋氏之臣 而綱目不繫之宋者 著其權勢之盛 已非宋氏之所得臣也 夫以曹馬之簒 猶遲之歴年之久 至劉裕代晉 亦必南征北伐 有功而後取 今道成代宋 直以乗時攘竊 近在旦夕之間 其視曹馬輩 益不及矣 觀綱目之所書 驗世道之消長 亦徒以發君子之嘆而已 於道成何誅]” ≪發明≫
역주6 齊王道成稱皇帝……以褚淵爲司徒 : “褚淵은 宋나라 때부터 司空이었는데 이때에 齊主(蕭道成)가 司徒로 삼자 임명을 받지 않은 것은 기록하지 않고 ‘齊以爲司空’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저연은 宋나라 신하인데 齊나라에 마음을 두어서 이미 그대로 옛 지위를 이었다면 비록 齊나라가 임명했다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다. 위에서는 ‘齊王蕭道成稱皇帝’라고 기록하고, 아래에서는 ‘以褚淵爲司空’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저연이 齊나라를 위하여 佐命한 것을 볼 수 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임명을 받지 않은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명예를 구한 사사로움을 주벌하기 위한 것이고, ‘以爲司空’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가 덮으려고 한 자취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淵自宋爲司空矣 於是齊主以爲司徒不拜 不書 書齊以爲司空 何 淵宋臣也 而心乎齊 既仍舊位 則雖謂齊以之可也 上書齊王道成稱皇帝 下書以淵爲司空 則淵之爲齊佐命可見矣 綱目不書不拜 所以誅其求名之私 書以爲司空 所以彰其欲蓋之迹]” ≪書法≫“위에서는 ‘齊王稱帝廢主’라고 기록하고 아래에서는 ‘以褚淵爲司空’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褚淵이 佐命의 신하가 됨이 명백하다. ≪資治通鑑綱目≫을 살펴보면 曹氏․司馬氏․劉宋이 교대할 즈음에 翼賛한 인물이 없지 않았으나 모두 책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유독 저연만 기록한 것은 저들은 모두 그 本國의 무리여서 平時에 서로 함께 빼앗아 훔칠 계획을 하여, 다만 桀임금을 도울 줄만 알고 돌아보지 않고 堯임금에게 개처럼 짖는 자들이었다. 저연의 경우에는 지난 조정의 顧命大臣으로서 태자를 부탁하는 임무를 직접 받고는 도리어 남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그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옛날 春秋時代에 晉나라 荀息이 晉 獻公의 태자를 부탁받고 奚齊․卓子를 보호하다가 하지 못하게 되자 죽었으므로, ≪春秋≫에서 ‘及其大夫(그 대부와 함께)’라고 기록하여 인정해주었다. 지금 저연은 어린 임금을 보좌하다가 임금이 시해되는 데도 죽지 못하고 게다가 나라를 가지고 남에게 주었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주벌하지 않고 누구를 주벌한 것인가. 저연이 宋나라에서 진실로 큰 지위에 오래 있었으니, 泰始 2년(466)부터 ‘褚淵爲吏部尙書(저연을 吏部尙書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7년(471)에 ‘褚淵爲僕射(저연을 僕射로 삼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때 宋主는 눈물을 흘리면서 저연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 다음해에 宋主가 殂하였는데 저연이 劉勔․袁粲․蔡興宗․沈攸之와 함께 顧命을 받았다. 이윽고 蕭道成이 弑逆을 하자 심유지․원찬이 모두 역적을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저연은 마침내 뻔뻔스레 부끄러움 없이 손수 璽綬를 가지고서 齊宮에서 즉위하기를 권하였다. 찬탈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나자 몸소 上公의 총애를 입어 佩玉을 울리며 신발을 끌면서 찬탈한 임금의 앞에 엎드려 절하였으니, 만약 저연에게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의당 여기에서 마음이 변해야 했을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기록하여 의리를 세우고, 나라를 찬탈한 것 아래 ‘以褚淵爲司徒’로 크게 기록하였으니, 또한 저연이 사도를 굳게 사양한 것으로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다. 亂臣賊子를 주벌하고 討罪하여 매우 폄하고 끊은 것은 천만 대에 절개를 잃고 역적을 섬기고 나라를 팔아 이익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경계한 것이다. 書法이 이와 같으니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이 편수되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한 것이다.[上書齊王稱帝廢主 下書以褚淵爲司空 則是淵爲佐命之臣明矣 考之綱目 曹馬劉宋更代之際 非無翼賛之人 然皆不書于冊 而此獨書褚淵者 彼皆其本國之黨 平時相與爲簒竊之計 但知助桀 不顧吠堯者也 至褚淵 則以前朝顧命大臣 躬受託孤之任 乃反賣國於人 則其罪可勝誅哉 昔晉荀息受獻公之託 輔奚齊卓子 不克而死 故春秋書及其大夫以予之 今淵輔佐幼君 君弑不能死 又挈國與人 綱目不此之誅 尙誰誅耶 淵在宋朝 固已久居大位 蓋自泰始二年 書淵爲吏部尙書 七年 書淵爲僕射 是時宋主流涕付淵後事 越明年 而宋主殂 淵與劉勔袁粲蔡興宗沈攸之竝受顧命 既而道成弑逆 攸之粲皆以討賊 不克而死 淵乃靦然無恥 手持璽綬 勸進齊宮 簒事既成 躬荷上公之寵 鳴玉曵履 拜伏於簒君之前 使淵稍有人心 則宜於此焉變矣 綱目特筆起義 大書以淵爲司徒於簒國之下 亦不以淵固辭司徒而遂已 所以誅亂臣 討賊子 深加貶絶 爲千萬世失節事賊 賣國求利者之戒也 書法如此 豈苟然哉 故曰 綱目修 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7 臨軒 : 임금이 正殿에 앉아 있지 않고 친히 前殿으로 나와서 신하를 대면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8 (賁)[蕡] : 저본에는 ‘賁’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不知衣服食味 : 이는 ≪禮記注疏≫ 〈曲禮〉의 注疏에 나오는 말인데, 劉熙의 ≪釋名≫에 “老昏不復知服味善惡”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0 (受)[守] : 저본에는 ‘受’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守’로 바로잡았다.
역주11 (違)[遲] : 저본에는 ‘違’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遲’로 바로잡았다.
역주12 齊褚淵王儉等 進爵有差 : “아, ≪春秋≫에서 찬탈하고 반역한 신하에 대해 반드시 그 도당까지 주벌하여 끊어버렸으니, 亂臣賊子의 도당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이 의지해 따르는 마음을 끊어서 대를 이어 경계를 내리기 위한 것이다. 褚淵․王儉이 모두 公主의 아들로서 宋나라 大臣이 되었는데, 나이 어린 임금과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하지 못하였으니 죽음으로 잇는 것이 옳은데, 도리어 世臣의 빛나는 후손이고 王室의 아름다운 친속으로 權奸의 한 때의 길러주는 은혜를 받아 차마 외할아버지의 나라를 새로 일어난 사람에게 옮겨주어 평일에 원래 어깨를 나란히 한 자(蕭道成)에게 백 번 절해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달가워하면서 臣僕이 되었으니, 일찍이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사람이여, 일찍이 개돼지만도 못했었구나.[嗚呼 春秋於簒逆之臣 必誅絶其黨與 所以孤亂賊之黨 而絶其依附之心 以垂世戒也 褚淵王儉皆以公主子爲宋大臣 主弱國危 不能扶持 繼之以死 可也 顧以世臣之華冑 王室之㦤親 受權奸一時嫗乳之恩 忍將外王父之家國 輸之崛起之人 平日素所比肩者 百拜稽首 甘心以爲之臣僕 曽無愧恥之心 嗚呼斯人也 曽狗彘之不若哉]” ≪發明≫
역주13 齊主道成……滅其族 : “宋主 劉裕가 零陵王(司馬德文)을 시해하자 지적하여 ‘劉’라고 기록하고, 齊主 蕭道成이 汝陰王(劉準)을 시해하였는데 어찌하여 ‘蕭’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처음이 아니므로 생략한 것이다. 이어서 ‘滅其族’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齊나라에게 크게 죄를 돌린 것이다. 廢興의 즈음에는 魏나라와 晉나라 이래로 이를 기록하였다. 山陽公(後漢 獻帝 劉協)․陳留王(曹魏 曹奂)에게는 ‘弑’라고 기록하지 않다가 宋나라에 이르러 零陵王에게 ‘弑’라고 기록하였고, 그 종족을 멸하였다라고 기록하지 않다가 齊나라에 이르러 ‘滅其族’이라고 기록하였으니, 宋나라는 죄가 시작되었고, 齊나라는 더욱 극심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先代의 종족을 멸한 것을 기록한 것이 6번인데, 齊나라가 열어준 것이다(이해(479)에 齊나라가 劉氏를 멸하고, 己卯年(499)에 北齊가 元氏를 멸하고, 丁酉年(577)에 北周가 髙氏를 멸하고, 辛丑年(581)에 隋나라가 宇文氏를 멸하고, 丙戊年(926)에 後唐이 王衍 종족을 멸하고, 丙辰年(956)에 南唐이 楊氏를 멸하였다.).[宋主裕弑零陵斥書劉 齊主道成弑汝陰 則曷爲不書蕭 非創也 故略之 繼書滅其族何 重罪齊也 廢興之際 魏晉以來書之矣 山陽陳留未書弑也 至宋而零陵書弑焉 未書滅其族也 至齊而書滅其族焉 宋罪首也 齊則又甚矣 終綱目書滅先代之族六 齊啓之也(是年 齊減劉氏 己卯年 齊減元氏 丁酉年 周滅髙氏 辛丑年 隋滅宇文氏 丙戊年 唐滅王衍族 丙辰年 南唐滅楊氏)]” ≪書法≫“宋나라 明帝(劉彧)가 枝葉을 제거하여 제 아들을 편안하게 하여 스스로 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이라고 여겼으나 죽은 몸이 식기도 전에 계승한 아들이 죽고 宗族이 멸망되었으니, 不善의 쌓인 것을 과연 가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蕭道成은 폄하할 것이 없는가. 남의 나라를 빼앗고 그 제사를 끊으니 그 악행이 어찌 폄하하여 끊은 뒤에야 드러나겠는가. ‘弑汝陰王滅其族’이라고 기록한 것은 晉나라 宋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각박한 것이다. 찬탈과 시해가 서로 이어져서 세태의 변화가 날로 각박해지니 애처롭다. ◯아, 帝王이 된 자들이 모두 匹夫에서 일어나서 갑자기 九重宮闕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四海의 부유함을 누리게 되어서는 누가 천만 代를 전해 무궁하게 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공덕을 쌓은 것이 크지 못하고 계획을 남긴 것이 오래가지 못해 마침내 이어서 先世를 멸절시켰으니, 姓을 받은 이래로 천만 대에 이어온 宗祀에도 이러한 경우가 있었다. 漢나라가 쇠할 적에 魏나라가 천하를 얻었고, 魏나라가 쇠할 적에 晉나라가 천하를 얻었고, 晉나라가 쇠하자 宋나라가 천하를 얻었고, 宋나라가 쇠하자 齊나라가 천하를 얻었다. 漢나라의 山陽公과 魏나라의 陳留王은 여전히 天壽를 누리고 죽었다. 宋나라는 零陵王에 대하여 곧바로 죽였을 뿐 그래도 그 후손은 남겨두었다. 齊나라에 이르러서는 汝陰王의 종족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였다. 아, 漢나라가 천하를 선행으로 얻자 사람들이 또한 선행으로 갚았으므로 後漢 獻帝가 비록 폐위되어도 여전히 수명을 잘 마칠 수 있었다. 晉나라는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뒤에 사람들이 역시 시해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 禪位한 사람은 잘 대우하였다. 宋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미 선위를 받고 또 그 사람을 죽였으니, 이것이 멸족된 보응을 얻은 까닭일 것이다.[宋明剪除枝葉 以安其子 自以爲社稷至計 然肉未及寒 嗣子殞殕 宗族夷滅 不善之積 果可掩哉 然則道成無貶乎 奪人之國而殄其祀 其惡尙何待於貶絶而後見耶 書弑汝陰王滅其族 方之晉宋則愈䠞矣 簒弑相尋 世變日薄 可哀也哉 ◯嗚呼 爲帝爲王者 皆起自匹夫 一旦而居九重之尊 享四海之富 孰不欲傳之千萬世而無窮哉 然而積德不宏 貽謀不遠 遂因而滅其先世 自受姓以來 千萬世之宗祀者 亦有之矣 方漢之衰也 魏得之 魏之衰也 晉得之 晉衰而宋得 宋衰而齊得 漢之山陽 魏之陳留 猶得終其天年 宋於零陵 直殺之而已 然猶有遺種焉 至于齊 乃掩汝陰之族類而滅之 嗚呼 漢得天下以善 而人亦報之以善 故獻帝雖廢 猶得善終 晉則弑君矣 故其後也 人亦弑之 然彼猶善待其所禪之人也 至於宋 則既受其禪 又弑其人 此其所以得族滅之報也歟]” ≪發明≫
역주14 (州)[川] : 저본에는 ‘州’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川’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5 齊立世子……皆封王 : “蕭道成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그 종족을 멸망시키고 그 여러 아들에게는 모두 封爵을 하였으니, 어찌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나가 남에게 미치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얼마 안 되어 西昌侯 蕭鸞이 蕭道成의 종자를 멸망시켜서 다시 하나도 남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과연 天道가 없는 것이겠는가. ≪資治通鑑綱目≫이 여기에서 폄하하는 말이 없는 것 같으나 위에서 汝陰王의 친속을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고 아래에서 여러 아들들을 모두 왕으로 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가 남을 죽이고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을 저절로 볼 수 있다.[道成簒人之國而赤其族 於其諸子則皆封之 胡不推己之心以及人乎 然未幾西昌勦絶道成之種 亦無復孑遺者 是豈果無天道耶 綱目於此若無貶詞 然上書滅汝陰王之族 下書諸子皆封王 則其殺人利己 自可觀矣]” ≪發明≫
역주16 齊以王玄邈爲梁州刺史 : “北魏 군사가 남쪽을 향한 것에 ‘伐’이라고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伐’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齊나라를 미워한 것이다. 齊나라에서 劉氏를 멸망시키고 그 지위를 찬탈하였는데 劉昶은 劉氏의 종족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奉丹陽王劉昶(丹陽王 劉昶을 받들었다.)’이라고 기록하였으니, 北魏가 의로운 출동을 한 것을 인정해준 것이다.[魏師南向 未有書伐者 此其書伐何 惡齊也 齊滅劉氏而簒其位 昶 劉宗也 綱目書曰 奉丹陽王劉昶 其予魏以義擧矣]” ≪書法≫
역주17 (帥)[率] : 저본에는 ‘帥’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率’로 바로잡았다.
역주18 契丹入附于魏 : “契丹이 처음으로 ≪資治通鑑綱目≫에 보인다.[契丹始見綱目]”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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