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북위北魏 사람들이 제齊나라 회양淮陽을 침략하여 각성角城에서 군주軍主성매成買를 포위하였는데, 제齊나라에서 장군 이안민李安民과 주반룡周盤龍 등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성매는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주반룡의 아들 주봉숙周奉叔은 군사 200명을 데리고 진지를 무너뜨리고 깊이 들어갔는데, 북위北魏가 1만여 기병을 좌우 날개처럼 펼쳐서 포위하였다.
父子突圍(周盤龍 父子가 포위망에 돌격하다)
주반룡이 말을 달려서 창을 휘두르며 곧장 북위北魏 진지로 돌격하자, 지나가는 곳마다 적병들이 쓰러졌다. 주봉숙이 이미 포위를 뚫고 나왔다가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서 주반룡을 찾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탄 두 마리의 말이 뒤얽혀注+① 縈은 음이 嬰이니 얽힌다는 뜻이다. 소란스럽게 하자, 북위北魏의 수만 병사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여 북위北魏 군사들이 패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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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제齊나라가 회양淮陽에서 북위北魏 군대를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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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사문沙門법수法秀가 난을 일으켰는데,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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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법수法秀가 요망한 술책으로 무리들을 현혹시켜 평성平城에서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자 붙잡아다가 가두어 농두籠頭를 씌우고 쇠사슬로 묶어놓았는데, 까닭 없이 절로 풀어졌다.注+① 解는 벗어난다는 뜻이다.
북위北魏 사람이 그의 목뼈를 뚫고는 빌게 하며 말하기를 “만일 과연 신통력이 있다면 살을 뚫어도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뚫어서 조리를 돌렸는데, 3일 만에 죽었다.
연좌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반역법에 걸려 멸족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왕예王叡가 극악한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 당여는 용서해주라고 요청하였는데, 풍태후馮太后가 그 말을 따르니, 죽음을 면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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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가 남만교위南蠻校尉의注+① 南蠻校尉는 晉 武帝가 설치하였다. 관직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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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晉나라와 송宋나라 시절에 형주자사荊州刺史는 대부분 남만교위南蠻校尉를 관장하지 않고 별도로 중요한 사람을 그 자리에 두었는데, 예장왕豫章王소억蕭嶷이 형주荊州와 상주湘州 두 주의 자사가 되어 비로소 그 직책을 관장하였다. 소억이 그만두자, 다시 왕환王奐으로 그 자리를 맡게 하니 왕환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서쪽 지방은 전쟁이 끝난 뒤에 무너지고 훼손된 것을 회복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또 태부太府(큰 주부州府)의注+① 晉나라 永嘉의 난리 이후에 張氏가 河西의 명을 좌지우지하여 都府를 太府로 삼았다. 관원을 나누어 철수시켜서 한 방면을 담당하는 교위校尉를 설치하면 실제를 돕기에는 부족하고 서로 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또 물자와 인력이 이미 나누어지고 맡은 관원이 늘어날 것이니, 여러 수고로운 업무가 배가 되어 문건이 많고 번잡해질 것이니, 국가를 위한 계책으로는 온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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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5월 등지강鄧至羌이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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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등지鄧至는 강족羌族의 별종으로, 탕창宕昌의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注+① ≪北史≫에 “鄧至는 白水의 羌族으로, 대대로 羌族의 豪族이 되었는데, 지명으로 인해 鄧至라고 하였다. 그 지역은 街亭 이동 지역, 平武 이서 지역, 汶嶺 이북 지역, 宕昌 이남 지역이다.” 하였다. 혹자는 “鄧至는 鄧艾가 이르렀던 것으로 인해 명명한 것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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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의 상서령尙書令왕예王叡가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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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예王叡가 병이 들자 풍태후馮太后가 여러 번 그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왕예가 졸卒하자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당을 세웠다. 문사文士들 가운데 왕예를 위하여 애도의 글을 지은 사람이 100여 명이었으며, 장사를 지낼 때에 스스로 친인척과 친구라고注+① “姻舊”는 친인척과 옛 친구를 말한다. 하면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영구를 떠나보낸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왕예의 아들인 왕습王襲을注+② 襲은 이름이다. 그를 대신해 상서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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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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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가 사신을 북위北魏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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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송宋나라 승명昇明 연간에 사자인 은영탄殷靈誕과 구소선苟昭先을 파견하여 북위北魏에 보냈는데, 은영탄이 제齊나라가 선양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북위北魏의 전객典客에게注+① 典客은 秦나라 관직이다. 漢 武帝 泰初 원년(104)에 명칭을 고쳐 大鴻臚라고 하였고, 晉나라에 이르러 大鴻臚의 속관으로 하였고, 또 典客令을 두었다. 말하기를, “송宋나라와 북위北魏는 우호를 맺어서 근심이나 환난을 같이 하고자 하였습니다. 송宋나라가 지금 멸망하였는데, 북위北魏가 구원하지 않으니, 화친을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창劉昶이 남쪽으로 쳐들어갈 때, 은영탄이 유창의 사마司馬가 되겠다고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북위北魏가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제齊나라 사신 차승랑車僧朗의 자리를 은령탄의 아래에다 마련하니, 차승랑이 자리에 나가려고 하지 않자, 은영탄이 드디어 분노하여 욕을 하였다.
그러자 유창이 송宋나라에서 항복해온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차승랑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북위北魏 사람들이 차승랑의 영구靈柩를 후하게 대우하여 호송하고 은영탄 등을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구소선이 그 말을 전부 아뢰자, 은영탄이 이 일로 인해 하옥되었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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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9월에 북위北魏가 서주徐州와 연주兗州를 평정하여 설호자薛虎子를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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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북위北魏의 울원尉元과 설호자薛虎子가 오고五固를 함락시키고 사마랑지司馬朗之의 목을 베니, 동남의 여러 주州가 모두 평정되었다. 설호자를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았다. 이때 주진州鎭에서 수비하는 병사들이 재물과 비단을 자기가 휴대하고 공고公庫에 넣어 보관하지 않자, 설호자가 표문을 올려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가 강동江東을 빼앗으려고 하면 먼저 반드시 팽성彭城에 곡식을 쌓아두어야 합니다. 지금 진鎭에 있는 군사들은 수만 명을 밑돌지 않고, 양곡으로 쓸 비단은 한 사람에 12필이 됩니다. 용도에 기준이 없어 미처 비단을 곡식과 바꾸지注+① 代는 바꾼다는 뜻이며, 下는 교체한다는 뜻이다. 못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니 공적이던 사적이던 비용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지금 서주徐州에 있는 양전良田은 10만여 경이 수원水源과 토지가 넉넉하고 비옥하며 청수淸水와 변수汴水가 흘러 통하니 충분히 물을 댈 수 있습니다. 만일 군사들의 비단으로 소를 산다면 1만 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둔전屯田을 일으켜 설치하여서 1년 동안에 우선 병사들에게 관부의 양식을 공급하여 한편으로 농사를 짓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수비를 하게 한다면 변방을 방어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 년의 수확이 비단에 비해 열 배 이상 많을 것이요, 잠시 농사를 지어서 몇 년 동안의 식량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뒤에는 군사에 필요한 자원은 모두 공고公庫에 저축하여 5년 동안 수확한 다음에는 곡식과 비단이 모두 넘칠 것이니, 수비를 하는 병졸이 풍족하고 배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적을 병탄할 기세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위주魏主가 그 말대로 따랐다.
설호자가 정치를 하면서 은혜와 사랑을 베푸니, 병사와 백성들이 그를 마음에 두었다. 마침 패군沛郡과 하비下邳의 태수가注+② 沛郡太守는 邵安이고, 下邳太守는 張攀이다. 뇌물을 받은 일로 설호자의 조사를 받게 되자, 설호자가 강남 사람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고발하니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설호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조사하게 하니 과연 무고이기에 조서를 내려 두 사람에게 죽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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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토욕혼왕吐谷渾王모용습인慕容拾寅이 졸卒하니 아들 모용도역후慕容度易侯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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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새로운 율령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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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모두 832장이니 문주門誅․방주房誅은 16장이고, 대벽大辟은 235장이며, 잡형雜刑은 377장이다.
역주
역주1魏沙門法秀作亂 伏誅 :
“앞에서 沙門 曇標가 난을 일으킨 것을 기록하였는데 이때에 다시 보인다. 沙門의 亂을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늘 삼가 기록하였으니 異端을 좋아하는 자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沙門에 대해 謀反하여 난을 일으킨 것을 기록한 것이 3번이다(宋나라 戊戌年(458)에 자세하다.).[前書沙門曇標作亂矣 於是再見 沙門之亂 綱目毎謹書之 所以爲好異端者之戒也 終綱目沙門書謀反作亂三(詳宋戊戌年)]” ≪書法≫“이때 南朝와 北朝가 모두 浮屠를 숭상하였는데 沙門이 모반하여 난을 일으킨 것을 누차 책에 기록하였다. 국가를 소유한 자가 여전히 佛法을 경건히 받들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是時南北俱尙浮屠 而沙門謀反作亂者 屢書於冊 有國有家者 猶欲敬奉其法可乎]” ≪發明≫
역주2(荀)[苟] :
저본에는 ‘荀’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苟’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