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人臣之對帝王
注+夫, 音扶.은 多順從而不逆
하고 甘言以取容
이나 朕今發問
엔 不得有隱
이니 宜以次言朕過失
하라
陛下聖化는 道致太平하시니 以臣觀之컨대 不見其失이니이다
黃門侍郞劉洎
注+字思道, 荊州人. 貞觀七年, 爲治書侍御史, 遷右丞, 號稱職. 十七年, 遞日直東宮, 遷侍中. 太宗征遼東, 詔輔太子監國, 洎曰 “ 帝恠其言. 及還, 遂賜死.對曰
陛下撥亂創業은 實功高萬古시니 誠如無忌等言이니이다
然頃有人上書
에 辭理不稱者
注+稱, 去聲.어든 或對面窮詰
하사 無不慙退
하니 恐非獎進言者
니이다
此言
이 是也
니 當爲卿改之
注+爲, 去聲. 按 “是年夏四月, 上至太平宮.” 因有是問, 無唐儉名. 又載“馬周曰 ‘陛下比來賞罰, 微以喜怒, 有所高下, 此外不見其失.’ 上皆納之.”하리라
仁人君子之事君에 當夫治安之世라도 而危敗禍亂之言을 未嘗一日而忘於口者는 蓋不如是면 不足以維持其治安而保養其聰明也라
然益曰 罔失法度라하고 禹曰 無若丹朱傲라하고 皐陶曰 元首叢脞哉라하니 夫舜이 豈有是哉리오마는 而禹益皐陶는 則不可以無是言也라
太宗之德은 固未能盡如堯舜이요 貞觀之治는 固未能盡如唐虞之時나 而欲自聞其過하니 則其心이 猶足爲堯舜之心也라
惜夫라 太宗이 有堯舜好問之心이로되 而長孫無忌之徒가 無禹益皐陶箴規之戒하니 可勝嘆哉아
愚按 貞觀末年에 魏徵旣死하니 在廷群臣은 類多諛說之風이요 其間諛說之特甚者는 長孫無忌가 是也라
太宗이 欲群臣直言엔 無忌는 則曰陛下無失이라하고
太宗이 欲知其過엔 無忌는 則曰陛下武功文德을 臣等이 將順之不暇라하고
太宗이 欲問破高麗之計엔 無忌는 則曰諸將奉成筭而已라하니
向非劉洎輩面折廷爭하여 庶幾魏徵之風이면 則貞觀之政이 難乎令終矣리라
정관貞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에게 말하였다.
“신하가 제왕을 대할 때는
注+부夫(대저)는 음이 부扶이다. 대부분 순종하며 거역하지 않고 달콤한 말로 환심을 사지만, 짐이 지금 자문을 구할 때는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되니 짐의 잘못을 차례대로 말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당검唐儉 등이 모두 말하였다.
“폐하의 성스러운 교화는 태평을 이끄셨으니, 신들이 보건대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황문시랑黃門侍郞 유계劉洎注+〈유계劉洎는〉 자字가 사도思道이니, 형주荊州 사람이다. 정관貞觀 7년(633)에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가 되고 우승右丞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직책을 잘 수행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관 17년(643)에 일직동궁日直東宮으로 교체되고 시중侍中으로 옮겼다.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조칙을 내려 태자太子가 감국監國하는 데에 보좌하게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大臣이 죄를 범하면 법에 따라 엄벌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태종이 그 말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돌아오자 결국 죽음을 내렸다.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혼란을 정돈하고 왕업을 일으키신 것은 실로 만고萬古의 드높은 공로시니 참으로 장손무기 등의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사이 누군가 상소하였을 때 말의 조리가 맞지 않으면
注+칭稱(알맞다)은 거성去聲이다. 이따금 대놓고 추궁하고 힐난하여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간언을 올리는 자를 장려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 말이 옳으니
경卿을 위해 고치도록 하겠소.”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해(貞觀 18년) 여름 4월에 임금이 태평궁太平宮에 왔다.”라 하고, 이어서 이 질문이 있었으나 당검唐儉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마주馬周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근래 상과 벌을 내리실 때 약간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고, 이밖에 다른 잘못은 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모두 받아들였다.”
“인인仁人과 군자君子가 임금을 섬길 때 다스려져 안정된 세상을 만나도 위험‧패망‧재앙‧혼란에 대한 진언을 하루도 입에 올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 안정을 유지하여 그 총명을 보존하고 함양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여 요임금의 도를 실행하였으니 치세治世라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익益은 ‘법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라 하였고, 우禹는 ‘단주丹朱처럼 오만해선 안 된다.’라 하였고, 고요皐陶는 ‘임금이 자질구레하게 다 챙기면…….’이라고 하였으니, 순임금에게 어찌 이런 문제가 있었겠는가마는 우禹‧익益‧고요皐陶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종太宗의 덕은 본디 요임금‧순임금과 완전히 같을 수 없고 정관貞觀의 치적은 본디 당우唐虞 시대와 완전히 같을 순 없지만, 스스로 그 과오를 듣고자 하였으니 그 마음은 요임금‧순임금의 마음이 되기에 충분하다.
애석하도다, 태종은 요임금‧순임금처럼 묻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장손무기 등은 우‧익‧고요처럼 귀감이 되는 경계의 말을 올림이 없었으니, 안타까움을 이루 다 견딜 수 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말년에 위징魏徵이 죽고 나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아첨하는 기풍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가운데 아첨이 특히 심한 자는 바로 장손무기長孫無忌였다.
태종太宗이 뭇 신하들에게 직언을 요구할 때 장손무기는 “폐하께서는 과실이 없습니다.”라 하였고,
태종이 자신의 과오를 알고 싶어 할 때 장손무기는 “폐하陛下의 무공武功과 문덕文德을 신들이 받들어 따르기에도 여념이 없습니다.”라 하였고,
태종이 고구려를 격파할 계책을 묻고자 했을 때 장손무기는 “여러 장군들은 짜놓으신 작전을 받들기만 할 뿐입니다.”라고 했으니,
아, 공자孔子가 말한 “말을 하면 나를 거역함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장손무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만일 면전에서 대들고 조정에서 언쟁하여 위징의 기풍을 거의 갖춘 유계劉洎 등이 아니었다면 정관의 정치는 잘 마무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