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房玄齡은注+〈방현령房玄齡이〉 이름은 교喬인데, 자字로 알려졌다. 부친 방언겸房彦謙은 수隋나라에 출사하여 자사刺史를 지냈다. 방현령房玄齡은 어릴 적에 신중하고 민첩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개황開皇(581~600) 연간에 수隋나라가 한창 강성해지자 은밀하게 부친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공덕功德이 없어 다만 근친들과 어울리고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며,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혼동하고 다투어 과분한 사치를 일삼으니, 결국에는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부친이 놀라 “망언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18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우기위羽騎尉겸비서성兼秘書省교수校讐에 임명되었는데, 시랑侍郞고효기高孝基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인데, 그가 계곡을 뛰어넘고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나.”라고 하였다. 중원中原이 한창 어지러울 때, 강개하여 천하를 근심하는 뜻이 있었다. 진왕秦王을 섬기게 되자 진왕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등우鄧禹를 얻었는데, 지금 내가 방현령房玄齡을 얻은 것은 등우를 얻은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나머지는 아래에 보인다.제주齊州임치현臨淄縣 사람이다.注+제주齊州는 지금의 제남로濟南路이니, 산동山東에 속한다. 임치臨淄는 현縣의 이름이니, 지금의 익도로益都路에 속한다.
처음에 수隋나라에 출사하여 습성현隰城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다가注+습隰은 음이 습習이다. 습성隰城은 지금의 습주隰州이니, 하동河東에 속한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현縣에는 위尉를 두는데, 직접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여러 부서의 일을 나누어 판결하며, 결단하여 환수를 재촉하고, 과세를 부과하여 거두어들이는 일을 관장하니, 현령의 보좌관이다. 뒤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제명을 당해 상군上郡으로 옮겨갔다.
태종太宗이 위수渭水 북쪽 지역을 순행할 적에注+〈위북渭北은〉 위수渭水의 북쪽이니, 지금의 섬서陝西 지역이다. 방현령이 말채찍을 잡고 군문軍門 앞에서 태종太宗을 뵈었는데, 태종이 한 번 보고서 마치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대하고 위북도渭北道의 행군기실참군行軍記室參軍으로 임명했다.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군부軍府에서 표表, 계啓, 서書, 소疏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방현령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 마침내 태종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房玄齡
역주
역주1禹 :
鄧禹로, 光武帝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제일의 개국공신이다. 24세 때 광무제가 즉위하자 三公의 하나인 大司徒에 임명되고 高密侯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