遷拜太子右庶子
注+唐制, 東宮右春坊右庶子, 掌侍從左右‧獻納啓奏‧宣傳令旨之政.라가 俄遷兵部尙書
注+唐制, 兵部掌武選‧地圖‧車馬‧甲械之政, 尙書其長也.하고 進封蔡國公
하니 實封一千三百戶
라
貞觀二年
에 以本官
으로 檢校侍中
注+唐制, 檢校某官者, 皆詔除, 而非正命.하고
三年
에 拜尙書右僕射
하여 兼知吏部選事
注+唐制, 吏部掌文選‧勳封‧考課之政. 知, 猶主也.하여 仍與房玄齡
으로 共掌朝政
하니 至於
規模
와 典章文物
하여는 皆二人所定
이라
甚獲當時之譽
하여 時稱房杜焉
注+按, 如晦進僕射久之, 以疾辭職. 薨, 贈司空, 謚曰成. 手詔虞世南爲碑文, 言痛悼意. 他日食瓜美, 輟其半奠焉. 後夢如晦, 若平生. 明日, 勅所御饌往祭, 勞問妻子, 恩禮無少衰. 後詔功臣世襲, 贈密州刺史, 徙國萊.이라
故로 太宗定禍亂에 而房杜不言功하고 王魏善諫諍에 而房杜讓其賢하고 英衛善將兵에 而房杜行其道라
房杜皆以命世之才로 遭逢明主하여 謀猷允協하여 以致升平한대 議者以比漢之蕭曹하니 信矣라
太宗嘗與玄齡圖事할새 則曰 非如晦면 莫能籌之라하여늘 及如晦至하여는 竟如玄齡之策하니 蓋房知杜之能斷大事하고 杜知房之善建嘉謀라
하여 相須而成
하여 俾無悔事
하니 賢達用心
이 良有以也
라
太宗取孤隋하여 攘群盜하고 天下已平에 用房杜輔政이라
大亂之餘에 紀綱彫弛어늘 而能興仆植僵하여 使號令典刑으로 粲然罔不完하니 可謂名宰相이라
雖然
이나 宰相
은 代天者也
니 輔贊彌縫而
하여 使斯人由而不知
하니 彼揚己取名
하여 瞭然使戶曉者
는 殆房杜之細耶
인저
太宗身屬櫜鞬하여 以基帝業할새 閫外之臣은 皆以功爲尙이나 而房杜는 隱然爲國名臣이라
自後世觀之컨대 任公竭節하여 身處要地가 如玄齡者는 誰人也며 臨機獨斷하여 吐胸中之奇가 若如晦者는 誰人也오
房杜輔相太宗
하여 成貞觀之治
나 而後世觀之
면 無迹可尋
하니 此則近於
之至矣
라
是故
로 漢之
은 紀無可書之事
로되 而爲
之仁君
하고 唐之房杜
는 傳無可載之功
이로되 而爲貞觀之賢相
이라
而古之王者
는 必有師臣
하니 湯之於
과 武王之於
가 是也
라
今以史傳攷之
하니 則褚遂良嘗謂玄齡自義旗之始
에 翼贊聖功
으로 하고
貞觀之初에 選賢立政하니 人臣之勤에 玄齡爲最라하다
高祖謂玄齡
은 論事千里外
라도 猶對面
이라하고 謂玄齡
은 奇謀秘計
를 未嘗宣泄
이라하니 是玄齡之功
을 猶可得而知也
라
至於如晦之爲人하여는 則世稱玄齡善謀하고 如晦善斷하여 每有大事에 玄齡輒曰 非如晦면 不能斷이라하고
及如晦至하여는 卒用玄齡之策이라하니 是如晦之斷은 初不能出於玄齡之謀也라
嗚呼라 後之大臣이 幸而與賢者同列하여 恥己之短하고 而求加於人者는 眞如晦之罪人也哉인저
은태자隱太子가 패망했을 때, 두여회杜如晦는 방현령房玄齡과 제일 큰 공을 세웠다.
태자太子 우서자右庶子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동궁東宮 우춘방右春坊의 우서자右庶子는 좌우에서 시종侍從하는 일, 충언을 올리고 글로 아뢰는 일, 명령을 알리거나 전하는 정무를 관장한다.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병부상서兵部尙書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병부兵部는 무장武將의 선발, 지도, 수레와 말, 갑옷과 병장기의 정무를 관장하는데, 상서尙書는 병부의 수장이다.로 옮겼으며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으니,
실봉實封이 1,300호였다.
정관貞觀 2년(628)에 본래 관직을 지닌 채
검교시중檢校侍中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검교모관檢校某官은 모두 조칙으로 임명하기는 하지만 정식 관원이 아니다.을 맡았다.
정관 3년(629)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고
지이부선사知吏部選事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이부吏部는 문관文官의 선발과 훈봉勳封과 고과考課의 정무를 관장한다. 지知는 주主(주관하다)와 같다.를 겸임하여 방현령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관장하였으니, 조정 기구의 규모와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에 있어서는 모두 두 사람이 결정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몹시 칭송을 받아 당시에 ‘
방두房杜’라고 일컬어졌다.
注+사전史傳을 살펴보니, 두여회杜如晦는 복야僕射로 승진한 지 오래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사공司空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성成이라고 했다. 태종太宗이 우세남虞世南에게 수조手詔를 내려 비문碑文을 짓게 하여 애도하는 뜻을 말하였다. 어느 날 참외를 먹다가 그 맛이 좋자, 먹던 것을 멈추고 그 참외의 나머지 반을 두여회의 영전에 올리게 하였다. 그 후에 꿈에서 두여회를 보았는데 생전의 모습과 같았다. 다음 날 명을 내려 어찬御饌을 가지고 가서 두여회의 제사에 쓰도록 하고 처자식을 위로하였는데, 은전과 예우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뒤에 조서를 내려 두여회의 공신 작위를 세습하도록 하고 밀주자사密州刺史로 추증하고 봉국封國을 내국萊國으로 바꾸어주었다.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태종太宗을 보좌할 적에 천하에서 어진 재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찾을 만한 자취가 없고 덕성 역시 지극하였다.
그러므로 태종이 난리를 평정했을 때 방현령과 두여회는 공을 말하지 않았고,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간쟁을 잘하자 방현령과 두여회는 그 현명함을 사양하였으며,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이 군사를 잘 다스리자 방현령과 두여회는 그 도道를 실천하였다.
치적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훌륭함은 군주에게 돌렸으니, 당唐나라의 종신宗臣(존경받는 신하)이 된 것이 마땅하도다.”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당세에 걸출한 인재로 명철한 군주를 만나 계책을 내어 참으로 화합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평론하는 자들이 이들을 한漢나라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에 비유하니 믿을 만하다.
그러나 두여회가 등용된 것은 방현령의 천거 때문이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방현령과 일을 도모할 적에 방현령이 ‘두여회가 아니면 일을 계획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두여회가 이르자 마침내 방현령의 계책대로 하였으니, 방현령은 두여회가 큰일을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여회는 방현령이 좋은 계책을 잘 세운다는 것을 안 것이다.
비심裨諶이 초안을 하고 동리東里가 윤색하여 서로 함께 도와 이루어 후회가 없도록 하였으니, 현달한 이들이 마음을 쓰는 것은 참으로 그 이유가 있다.
만일 과거의 철인哲人으로 비유하자면 방현령은 관중管仲과 자산子産이고, 두여회는 포숙鮑叔과 한호罕虎이다.”
“태종太宗이 고립된 수隋나라를 차지하여 여러 도적들을 물리치고 천하가 평정된 뒤에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등용하여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큰 난리가 끝난 뒤에 기강이 무너졌으나 넘어진 것을 일으키고 쓰러진 것을 다시 세워 호령號令과 전형典刑이 찬연히 완비되지 않음이 없도록 하였으니, 명재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 자취를 찾아도 거의 찾을 수가 없으니 어째서인가.
비록 그렇지만 재상은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자로, 군주를 보필하고 이리저리 주선하여 용用에 능력을 감추어서 백성들이 따르면서도 알지 못하게 하니, 자기를 내세우고 명성을 취하여 집집마다 분명히 알게 하는 자들은 아마 방현령과 두여회가 하찮게 여길 것이다.”
“태종太宗이 몸소 무장武裝을 갖추고 싸워 제업帝業의 기틀을 다질 때 곤외閫外(지방의 장군)의 신하들은 모두 공을 숭상하였으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은연중에 나라의 명신이 되었다.
후세에서 살펴보건대 공무를 맡아 절개를 다하여 방현령처럼 몸소 요직要職에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중요한 일에 임해 홀로 결단을 내려 두여회처럼 마음속에 있는 기이한 계책을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태종太宗을 보좌하여 정관貞觀의 치적을 이루었으나 후세에서 살펴보건대 찾을 만한 자취가 없으니, 이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지극함에 가깝다.
이 때문에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본기本紀에 기록할 만한 일이 없지만 서도西都의 어진 임금이 되었고, 당나라의 방현령과 두여회는 열전列傳에 기록할 만한 공이 없지만 정관 연간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태종太宗이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와 군신의 교분이 깊었으니, 명철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옛날의 왕자王者는 반드시 스승으로 섬기는 신하가 있었으니,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에 대해서와 무왕武王이 상보尙父에 대해서가 이와 같은 관계였다.
이 때문에 도道로 군주를 바르게 하여 그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아 요堯임금‧순舜임금의 성대한 경지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덕을 이루고 재상을 공경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방현령과 두여회가 태종에 대해서 명상名相이라 할 수는 있으나 외상畏相(공경을 받은 재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살펴보건대 소문충공蘇文忠公(蘇軾)이 말하기를 “당唐나라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열전列傳에 기록할 만한 공이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전史傳을 고찰해보니, 저수량褚遂良이 일찍이 이르기를 “방현령은 의로운 깃발을 든 당唐나라 초창기에 성상聖上의 공을 도움으로부터 무덕武德(618~626) 말년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결단하였다.
정관貞觀 초기에는 현자賢者를 선발하여 정사政事를 확립하였으니, 부지런히 노력한 신하로는 방현령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고조高祖가 말하기를 “방현령은 천리 밖에서 일을 논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고, 장손후長孫后는 말하기를 “방현령은 기이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발설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방현령의 공을 오히려 알 수가 있다.
두여회의 인물됨에 대하여는 세상에서 칭하기를 “방현령은 모의를 잘하고, 두여회는 결단을 잘하여, 늘 큰일이 있을 적에 방현령이 그때마다 말하기를 ‘두여회가 아니면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며,
두여회가 오고 나서는 결국 방현령의 계책을 썼다.”라고 하였으니, 두여회의 결단은 애초에 방현령의 도모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여회의 공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찌 두여회가 방현령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아, 후세의 대신 중에 요행으로 어진 사람과 같은 대열에 있으면서 자기의 모자란 점을 부끄러워하고 남보다 위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참으로 두여회에게 죄를 짓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