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王元嘉
注+ 韓王元嘉:元嘉, 高祖第十一子也. 少好學, 藏書至萬卷, 皆以古文參定同異, 當世稱之.가 貞觀初
注+ 貞觀初:作六年.에 爲潞州刺史
注+ 爲潞州刺史:潞州, 今仍舊隷河東.하니 時年十五
라
在州
에 聞太妃有疾
注+ 在州 聞太妃有疾:太妃, 韓王之母, 隋大將軍宇文述之女也. 爲昭儀, 有寵, 高祖卽位, 欲立爲后, 固辭不受. 韓王以母有寵, 而爲帝所愛.하고 便涕泣不食
이러니 及至京師發喪
注+ 及至京師發喪:喪, 平聲.하여는 哀毁過禮
커늘
元嘉
는 閨門修整
하여 有類寒素士大夫
하고 與其弟魯哀王靈夔
注+ 與其弟魯哀王靈夔:靈夔, 高祖第十九子, 韓王同母弟也, 好學善音律. 後以謀欲起兵, 應接越王貞父子, 事洩, 自縊, 謚曰哀.로 甚相友愛
하여
兄弟集見에 如布衣之禮하여 其修身潔己가 內外如一하니 當代諸王이 莫能及者러라
霍王元軌
注+ 霍王元軌:元軌, 高祖第十四子也, 多才藝. 出爲刺史. 所至閉閤讀書, 與處士劉玄平爲布衣交. 或問王所長. 玄平曰 “王無不備, 吾何以稱之.”가 武德中
에 初封爲吳王
注+ 初封爲吳王:元軌, 武德六年, 封蜀王, 八年, 徙封吳王.하고 貞觀七年
에 爲壽州刺史
注+ 爲壽州刺史:壽州, 今爲安豐路, 隷淮西.러니
屬高祖崩
하여 去職
하여 毁瘠過禮
하고 自後常衣布服
注+ 自後常衣布服:衣, 去聲.하여 示有終身之戚
이러라
侍中魏徵
이 對曰 臣
이 愚暗
하여 不盡知其能
이나 惟吳王
이 數與臣言
注+ 惟吳王 數與臣言:數, 音朔.에 臣未嘗不自失
이니이다
徵
이 曰 經學文雅
는 亦漢之間平
注+ 亦漢之間平:間平, 漢河間獻王德, 東平獻王蒼也.이요 至如孝行
注+ 至如孝行:行, 去聲.하야는 乃古之曾閔
注+ 乃古之曾閔也:曾閔, 曾參閔損也也
니이다
由是
로 寵遇彌厚
하고 因令妻徵女焉
注+ 因令妻徵女焉:令, 平聲. 妻, 去聲.하다
注
王孫公子之貴
도 其性
이 豈與人異哉
리오 孟子所謂
라
觀太宗諸弟에 若韓王元嘉와 霍王元軌는 天性之孝友와 居處之儉約과 操履之修潔이
有一介之士所難能者하니 可謂賢也已矣요 是尤見人性之初無爾殊也니
한왕韓王 이원가李元嘉가
注+원가元嘉는 고조高祖의 11번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장서가 만권에 이르렀는데 모두 고문古文을 근거로 그 차이점을 참고하며 교정해서, 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정관貞觀 초에
注+사서史書에서는 정관貞觀 6년(632)으로 되어 있다. 노주자사潞州刺史가 되었는데
注+노주潞州는 지금도 그대로 하동河東에 속한다. 당시 나이 15세였다.
노주潞州에 있을 때
태비太妃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注+태비太妃는 한왕韓王의 어머니로 수대장군隋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의 딸이다. 소의昭儀가 되어 총애를 받았는데 고조高祖가 즉위하며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굳이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왕韓王은 어머니가 총애를 입음으로 인해 고조高祖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눈물을 흘린 채 음식을 먹지 않았더니,
경사京師에 와서
발상發喪하게 되어서는
注+상喪(초상)은 평성平聲이다. 슬픔에 몸이 야위는 정도를 정해진
예禮보다 과도하게 하였다.
태종太宗이 그 극진한 성품을 가상히 여겨 여러 차례 위로하고 권면했다.
이원가는 집안을 정갈하게 다스려 한미한
사대부士大夫와 같았고, 아우
노애왕魯哀王 이영기李靈夔와
注+영기靈夔는 고조高祖의 19번째 아들로, 한왕韓王의 동복아우이며 공부를 좋아하고 음률에 뛰어났다. 뒤에 병사를 일으켜 월왕越王 이정李貞의 부자父子를 응접하려는 모의를 했다가 일이 발각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시호는 애哀이다. 매우 우애 있게 지내서
형제들이 만날 때는 평민의 예절과 같았고 몸을 닦으며 자신을 정갈하게 함이 안팎으로 한결같았으니, 당시의 제왕諸王들 가운데 미칠 자가 없었다.
곽왕霍王 이원궤李元軌가
注+원궤元軌는 고조高祖의 19번째 아들이며 재능이 많았다. 지방으로 나가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문을 닫은 채 독서에 몰두했고 처사處士 유현평劉玄平과 포의布衣의 교류를 맺었다. 누군가 곽왕霍王의 장점에 대해 묻자 현평玄平이 말하였다. “곽왕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내가 무엇이라 칭하겠는가.” 무덕武德 연간에
오왕吳王에 책봉되었고
注+원궤元軌는 무덕武德 6년(623)에 촉왕蜀王에 책봉되었다가 8년(625)에 다시 오왕吳王에 책봉되었다. 정관貞觀 7년에
수주자사壽州刺史가 되었는데
注+수주壽州는 지금의 안풍로安豐路이며 회서淮西에 속한다.,
마침
당 고조唐 高祖가 붕어하자 관직을 그만두어 몸이 야위는 정도를 정해진 예보다 과도하게 하고, 그 뒤에 언제나 평민의 옷을 입고
注+의衣(입다)는 거성去聲이다. 일생 동안 슬픔을 안고사려는 모습을 내보였다.
태종이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짐朕의 자제 가운데 누가 훌륭하오.” 라고 하니,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여 그 능력을 다 알진 못합니다만
오왕吳王이 여러 번 신과 이야기를 나눌 때
注+수數(자주, 여러 번)은 음이 삭朔이다. 신이 일찍이 자괴감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경卿은 지난 시대의 누구와 견줄 수 있다고 보오.” 라고 하자,
위징이 말하기를 “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소양은
한漢나라의
하간헌왕河間獻王과
동평헌왕東平獻王이고
注+간평間平은 한漢나라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과 동평헌왕東平獻王 유창劉蒼이다.,
효행孝行에 있어선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고대의
증삼曾參과
민손閔損일 겁니다.” 라고 했다.
注+증민曾閔은 증삼曾參과 민손閔損이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가 더욱 두터웠고 위징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게 했다.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고, 처妻(아내 삼다)는 거성去聲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맹자孟子가 본성이 선善한 것을 이야기하여, “요堯‧순舜에서부터 길 가는 사람까지 똑같다.” 라고 했으니,
왕손王孫과 공자公子의 고귀한 이들이라도 그 본성이 어찌 뭇사람들과 다르겠는가. 맹자가 말한 그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태종太宗의 아우들 가운데 한왕韓王 이원가李元嘉와 곽왕霍王 이원궤李元軌는 타고난 품성이 효도하고 우애 있고 일상생활이 검소하고 소략하며 지조와 행동거지가 잘 닦이고 정갈하여
일개 선비가 능하기 어려운 면모를 갖추고 있으니 훌륭하다 할 만하며, 여기에서 사람의 본성이 애초에 다름이 없음을 보다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저 혼미하여 무지한 자들은 스스로 그 천리天理를 단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