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太子承乾
注+ 時太子承乾:承乾, 字高明, 太宗長子也, 生承乾殿, 卽以命之. 貞觀初, 立爲皇太子, 甫八歲, 特敏惠. 及長, 過惡浸聞, 十七年, 廢爲庶人, 十八年, 卒. 封常山王, 諡曰愍.이 頗留意典墳
注+ 頗留意典墳:孔安國曰 “伏羲神農黃帝之書, 謂之三墳, 言大道也. 少昊顓頊高辛唐虞之書, 謂之五典, 言常道也.”이나 然閑讌之後
에 嬉戲過度
어늘
伊天地之玄造
와 洎皇王之建國
에 曰人紀與人綱
이 資
하니
履之則
하고 違之則
하여 望興廢如從
하고 視吉凶如糾纆
注+ 視吉凶如糾纆:纆, 音墨.이니이다
至乃
하고 君臨
하얀 因萬物之思化
하여 以百姓而爲心
하고 體
之潛運
하여 閱往古於來今
이니이다
盡爲善於
하고 惜勤勞於寸陰
注+ 惜勤勞於寸陰:淮南子曰 “聖人不貴尺璧, 而重寸之陰, 時難得而易失也.”이라
故能釋層冰於
하고 變寒谷於蹛林
注+ 變寒谷於蹛林:蹛, 都賴都例二切. 唐之思結地, 置蹛林州. .”하며 總人靈以胥悅
하고 極穹壤而
이니이다
정관貞觀 5년(631)에 이백약李百藥이 태자太子 우서자右庶子로 있었는데,
당시 태자
이승건李承乾이
注+승건承乾은 자字가 고명高明이며 태종太宗의 장자이다. 승건전承乾殿에서 낳았다 하여 그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정관貞觀 초기에 황태자가 되었는데, 겨우 8세였으며 매우 영민했다. 그런데 자라면서 과오와 죄악이 점차 알려져서 정관 17년(643)에 폐출돼 서인庶人이 되고, 18년(644)에 세상을 떠났다. 상산왕常山王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를 민愍이라 했다. 삼분三墳과
오전五典에 뜻을 두었지만
注+공안국孔安國이 말하였다.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책을 삼분三墳이라 하니 대도大道를 말하였다.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唐‧우虞의 책을 오전五典이라 하니 일상의 도리를 말하였다.” 한적하게 지낼 때 유희를 즐기는 것이 과도하자
이백약이 〈찬도부贊道賦〉를 지어 풍간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선성先聖의 바른말을 살며시 듣고 지난 전적典籍에 들어 있는 법칙을 일찍이 열람하니,
하늘과 땅이 창조되고 제왕이 국가를 건설할 때 인간의 기紀와 강綱이 임금이 세운 말과 확립한 덕에 힘입었으니,
이를 실천하면
본성本性대로 실천하여
도道를 완성하고, 이를 어기면 생각하지 않아 사특한 일을 하여 그 흥성과 폐망이 마치 저울 무게처럼 정확함을 보게 되고,
길吉과
흉凶이 먹줄과 똑같음을 보게 됩니다.
注+묵纆(노끈)은 음音이 묵墨이다.
도圖를 받고 녹籙에 부응하여, 거울을 잡고 임금으로 임하게 되어서는 만물의 변화에 따라 백성으로 마음을 삼고, 대의大儀의 조용한 움직임을 체득하여 지나간 과거를 현재에서 들여다보았습니다.
한밤에 선을 행할 것을 극진히 헤아리고,
촌음寸陰의 시간을 아끼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注+《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서 말하였다. “성인은 한 척尺의 벽璧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한 촌寸의 시간을 중시하니 시간은 얻기 어렵고 잃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해瀚海에서 쌓인 얼음들을 녹이고,
대림蹛林에서 추운 골짜기를 변화시켰으며
注+대蹛(제사 터)는 도都와 뇌賴, 도都와 예例 두 개의 반절이다. 당唐나라 때 사결思結 부락에 대림주蹛林州를 설치했다. 《한서漢書》 주註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림蹛林은 흉노匈奴가 숲으로 둘러싸 제사 지낸 곳이다.”, 온갖 신령과 백성들이 서로 기뻐하고, 온 누리가 그 말씀에 교화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