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九年
에 北蕃
注+① 北蕃:北突厥之國.歸朝人奏
호대 突厥內大雪
하여 人饑
하고 羊馬竝死
하며 中國人在彼者
가 皆入山作賊
하니 人情大惡
이라한대
太宗謂侍臣曰 觀古人君이 行仁義任賢良則理하고 行暴亂任小人則敗하나니
突厥所信任者를 竝共公等見之하니 略無忠正可取者하고 頡利復不憂百姓하여 恣情所爲하니 朕以人事觀之컨대 亦何可久矣리오하니
魏徵進曰 昔
魏文侯注+② 魏文侯:名斯, 晉卿桓子之子, 爲諸侯.問李克
注+③ 李克:戰國時人.호대 諸侯誰先亡
고하니
克曰 數戰數勝
注+④ 數(삭)戰數勝:數, 竝音朔, 後同.하니 數勝則主驕
하고 數戰則民疲
하나니 不亡何待
리오하니이다
頡利逢隋末中國喪亂하여 遂恃衆內侵하고 今尙不息하니 此其必亡之道니이다하니 太宗深然之하다
注
【集論】愚按 大雪에 人飢하고 羊馬竝死는 突厥將亡之徵也어늘 太宗不以此論其必亡하고 而以不任忠良하며 不憂百姓으로 知其必亡하니 可謂善觀人之國矣로다
然魏徵論吳亡之事하니 則又有深意焉이라 蓋頡利固數戰數勝者也어늘 太宗自起兵已來로 亦豈非數戰數勝者乎아 觀頡利之亡하면 亦可惕然而懼矣라
厥後太宗旣老하여 而復興高麗之師하여 殆近於李克之所論者하니
정관貞觀 9년(635)에
북번北蕃에서
注+〈북번北蕃은〉 북방의 돌궐국突厥國이다. 당唐나라 조정으로 돌아온 사람이 아뢰었다. “
돌궐突厥 지역 내에 폭설이 내려 사람들이 굶주리고 양과 말이 모두 죽었으며, 그곳에 있는 중원 사람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으니, 인심이 크게 흉흉합니다.”
태종太宗이 근신近臣들에게 말하였다. “옛 사례를 살펴보건대 군주가 인의仁義의 정치를 시행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면 나라가 다스려졌고, 폭정을 일삼고 소인을 등용하면 나라가 패망하였소.
돌궐에서 신임을 받는 자들을 아울러 함께 공들이 보았으니, 대체로 취할 만한 충정을 지닌 이가 없고, 힐리가한頡利可汗도 백성들을 위해 근심하지 않아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고 있소. 짐이 인사人事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국운國運이 어찌 오래 지속될 수 있겠소?”
위징魏徵이 나아가 아뢰었다. “옛날에
위 문후魏 文侯가
注+〈문후文侯는〉 이름이 사斯로, 진晉나라의 경卿인 환자桓子의 이들인데, 제후가 되었다. 이극李克에게
注+〈이극李克은〉 전국시대 사람이다. ‘제후들 중에 누가 먼저 멸망하겠는가?’라고 묻자,
이극이 ‘오吳나라가 제일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극이 ‘자주 전투를 치러 자주 승리하였으니
注+수數(자주)은 모두 음音이 삭朔이다. 뒤에도 같다., 자주 승리를 거두면 군주는 교만해지고, 자주 전투를 치르면 백성들은 피폐해집니다. 그러니 멸망하는 것 말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힐리가한은 수隋나라 말기에 중원이 크게 혼란했을 때를 만나, 결국 많은 병력만을 믿고 중원을 침입하였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이는 그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그러자 태종이 그 말에 깊이 수긍하였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폭설에 사람들이 굶주리고 양과 말이 모두 죽은 것은 돌궐突厥이 멸망할 조짐인데, 태종太宗이 이런 현상으로 돌궐이 필시 멸망할 것이라 논하지 않고,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지 않으며 백성을 근심하지 않는 것으로 돌궐이 필시 멸망할 것을 알았으니, 다른 나라를 잘 관찰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위징魏徵이 오吳나라가 멸망한 일을 논하였으니, 또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진실로 자주 전투를 치러 자주 승리하였는데, 태종도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역시 자주 전투를 치러 자주 승리하지 않았던가. 힐리가한이 멸망한 것을 살펴보면 역시 근심하여 두려워할 만하다.
그런데 그 후에 태종이 노년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高句麗 정벌을 위한 군사를 다시 일으켜 거의 이극李克이 논한 정황에 근사한 점이 있었다.
태종이 진실로 말하기를 “만일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 정벌을 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