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四年
에 有司上言
호대 林邑蠻國
注+① 林邑蠻國:林邑, 南蠻國名, 漢南象郡之地, 在交州南千餘里.이 表疏不順
하니 請發兵討擊之
라한대
苻堅自恃兵彊
하고 欲必呑晉室
하여 興兵百萬
이라가 一擧而亡
注+② 苻堅自恃兵彊……一擧而亡:苻堅, 略陽氐人. 晉時, 苻健據長安, 是爲前秦. 健死, 子立, 苻堅弑生自立. 伐晉大敗, 後爲姚萇所殺.하고 하고
至如頡利
하여는 往歲數來
注+⑤ 往歲數來:數, 音朔.侵我國家
러니 部落疲於征役
하여 遂至滅亡
이라 朕今見此
하니 豈得輙卽發兵
이리오
但經歴山險
하고 土多瘴癘
하니 若我兵士疾疫
하면 雖剋翦此蠻
이나 亦何所補
리오 言語之間
에 何足介意
아하고 竟不討之
注+⑥ 貞觀四年……竟不討之:按通鑑 “林邑獻大珠, 有司以其表辭不順, 請討之, 上曰 ‘好戰者亡, 如煬帝頡利, 皆所親見也. 小國勝之不武, 況未可必乎.’”하다
注
【集論】胡氏曰 太宗不以夷狄一言之慢으로 遽興兵革하니 幾於能忍이라
然林邑表辭를 敢爲不順者는 以獻大珠嘗試朝廷也니 還其獻則善矣어늘 今不聞還其獻하니 則是太宗貪其寶而甘其慢也라
明年에 鸚鵡繼來하니 則納侮多矣라 雖詔使者歸之나 而珠竟爾不還하니 夫豈格遠人之道리오
注
愚按 是年에 方擒突厥하여 北土以寧하니 有司請討林邑이어늘 而太宗不欲再勞師以黷武也라
然自古窮兵極武하면 未有不亡하고 又取譬於苻堅之伐晉과 隋主之取遼와 與夫頡利之侵疆이 皆致於滅亡之地하니 可謂知所鑑矣라
夫是三者는 皆太宗耳目之所聞而知요 見而知者也라 以此爲鑑하니 宜終其身而不忘이어늘 夫何晩年興忿兵於遼水之上而不知止耶아
書曰 終始에 愼厥與는 惟明明后라하니 後之人主는 式監在玆어다
정관貞觀 4년(630)에 담당 관리가 아뢰기를 “
임읍국林邑國의 오랑캐들이
注+임읍林邑은 남만南蠻에 있는 국가 이름이다. 한남漢南 상군象郡 지역으로, 교주交州 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올린
표문表文이 불손하니, 군대를 출동시켜 그들을 토벌하십시오.”라고 하니,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병기는 흉기이니,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하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말하기를 ‘매번 군사를 출동시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다.’라고 하였소.
옛날부터 병력과 무력을 지나치게 남용하면 멸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소.
부견苻堅이 스스로 병력의 강성함만을 믿고
진晉나라를 반드시 병탄하려고 하여 백만 대군을 일으켰다가 한 차례 거병으로 패망하였고
注+부견은 약양略陽의 저족氐族 사람이다. 진晉나라 때에 부건苻健이 장안長安을 점거하였는데, 이 나라가 전진前秦이다. 부건苻健이 죽고 그 아들이 〈부생苻生이〉 즉위하였는데, 부견苻堅이 부생苻生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동진東晉을 공격하였다가 크게 패하고, 뒤에 요장姚萇에게 살해되었다.,
수 양제隋 煬帝 역시 반드시
고구려高句麗를 빼앗고자 하여
注+〈이麗는〉 평성平聲이다. 해마다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자, 백성들이 원망을 견디지 못하여
注+승勝(감당하다)은 평성平聲이다. 결국 필부의 손에 죽임을 당했소.
힐리頡利와 같은 경우에는 과거에 누차
注+수數(자주)은 음音이 삭朔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는데, 그
부락部落이 정벌로 인해 피폐해져 결국 멸망에 이르렀소. 짐이 지금 이런 상황을 보았으니, 어찌 번번이 군대를 출동시킬 수 있겠소.
더구나 험한 산악 지역을 지나야 하고 그 지역에 풍토병이 많이 발생하니, 만약 우리 병사들이 역병에 걸린다면 비록 이 오랑캐 나라를 정벌한다고 한들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소. 〈불손한 그들의〉 말에 어찌 마음 쓸 일이 있겠소.” 그리고는 결국 토벌을 하지 않았다.
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4년에 “임읍林邑에서 대주大珠를 바쳤는데, 유사有司가 그들이 보낸 표문表文의 말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토벌할 것을 청하자,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멸망하니, 수 양제隋 煬帝와 힐리가한頡利可汗과 같은 자들을 모두 직접 목격한 바이오. 작은 나라를 이긴다 한들 무공武功이랄 것도 없는데, 하물며 기필할 수 없는 경우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注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오랑캐가 한 번 오만한 말을 했다고 해서 대번에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으니, 잘 인내하는 데 가까웠다.
그러나 임읍국林邑國에서 표문表文의 말을 감히 불손하게 쓴 것은 큰 구슬을 바쳐서 당唐나라 조정을 떠보려고 한 것이다. 바친 구슬을 돌려주어야 좋은데, 지금 바친 구슬을 되돌려주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태종이 그 구슬이 탐이 나서 그들의 오만한 말을 달게 받아들인 것이다.
다음 해에 임읍국에서 이어서 앵무새를 보내왔으니 업신여김을 받은 것이 많았다. 비록 사신에게 명하여 되돌려주었으나 구슬은 끝내 되돌려주지 않았으니, 어찌 먼 지역의 사람들을 이르게 하는 방도라 할 수 있겠는가.”
注
내가 살펴보건대 이해에 막 돌궐을 평정하여 북방이 안정되었다. 유사有司가 임읍국林邑國을 토벌하라고 청하거늘 태종이 병사들을 재차 수고롭게 하면서까지 무공武功을 남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부터 병력과 무력을 남용하면 멸망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고, 또 부견苻堅의 진晉나라 정벌, 수 양제隋 煬帝의 요동遼東(고구려) 정벌, 힐리頡利의 중원 침략이 모두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사실에서 비유를 취하였으니, 거울로 삼을 대상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세 가지 경우는 모두 태종이 눈과 귀로 듣고서 알고 보고서 알았던 것이다. 이런 일들을 거울로 삼았으니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만년에 분노로 요수遼水에서 전쟁을 일으켜 멈출 줄을 몰랐던 것인가.
《서경書經》 〈상서商書 태갑太甲〉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할 바를 신중히 하는 것은 밝은 덕을 밝히는 임금이다.” 라고 하였으니, 후대의 임금은 이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