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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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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四年 兵部尙書侯君集注+① 兵部尙書侯君集:幽州人, 以雄才稱. 少事秦王, 從征伐有功, 王卽位, 進吏部尙書. 後從承乾謀計, 事覺, 被誅. 伐高昌할새 及師次柳谷注+② 柳谷:西域地名. 候騎言 高昌王麴文泰死注+③ 候騎言高昌王麴文泰死:文泰聞唐兵臨磧口, 憂懼不知所爲, 發疾卒.하여 剋日將葬이라 國人咸集하니 以二千輕騎 襲之 可盡得也라한대 副將注+④ 副將:去聲.薛萬均注+⑤ 薛萬均:燉煌人, 萬徹之兄. 高祖以其材武授上柱國. 以計勝竇建德, 擊突厥有功, 拜將軍.姜行本注+⑥ 姜行本:名確, 以字行. 所幹力稱, 爲宣威將軍. 太宗每出幸, 卽以從. 平高昌有功, 封金城郡公. 皆以爲然하되
정관貞觀 14년(640)에 병부상서兵部尙書 후군집侯君集注+후군집侯君集은〉 유주幽州 사람으로, 웅재雄才로 일컬어졌다. 젊은 시절에 진왕秦王(이세민李世民)을 섬겼고, 정벌에 따라 나가 공을 세웠는데, 진왕이 즉위하자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발탁되었다. 그 후에 승건承乾의 반역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죽임을 당했다. 고창국高昌國을 토벌할 적에 군대가 유곡柳谷에 주둔하자注+유곡柳谷은〉 서역西域의 지명이다. 정찰 기병이 말하였다. “고창국 왕 국문태麴文泰가 죽어서注+문태文泰나라 군사가 적구磧口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할 줄을 몰라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날을 정해 장사를 지내려 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경무장한 2천의 기병으로 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장副將注+(장수)은〉 거성去聲이다. 설만균薛萬均注+설만균薛萬均은〉 돈황燉煌 사람으로, 설만철薛萬徹의 형이다. 당 고조唐 高祖(이연李淵)가 그의 재주와 무예가 뛰어난 것을 보고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하였다. 계책을 내어 두건덕竇建德에게 승리하고, 돌궐突厥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강행본姜行本注+강행본姜行本은〉 이름이 이며, (행본行本)로 알려졌다. 일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일컬어져서 선위장군宣威將軍이 되었다. 태종이 행차할 때마다 곁에서 따랐다. 고창국高昌國을 평정할 때 공을 세워 금성군공金城郡公에 봉해졌다. 모두 찬성하였다.
君集曰 天子以高昌驕慢으로 使吾恭行天誅하시니 乃於墟墓間 以襲其葬이면 不足稱武 此非問罪之師也라하고 遂按兵以待라가 葬畢然後進軍하여 遂平其國注+⑦ 貞觀十四年……遂平其國:按通鑑 “於是鼓行而進, 至田城, 諭之不下. 詰朝攻之, 及午而克, 虜男女計七千餘口, 遂降.”하다
그런데 후군집이 말하였다. “천자께서 고창국이 교만하게 굴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삼가 토벌하도록 한 것인데, 무덤 근처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에 습격한다면 무공武功이라고 할 수 없소. 이는 죄를 묻는 군대가 아니오.” 그러고는 결국 병사들을 정비하여 기다렸다가 장례식이 끝난 뒤에 진군하여 이윽고 그 나라를 평정하였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정관貞觀 14년에 “이에 북을 울리며 진격하여 전성田城에 이르렀는데, 회유하여도 항복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공격하여 정오에 이르러 승리하여 포로로 잡은 남녀가 7천여 명이었는데, 드디어 항복하였다.”라고 하였다.
【集論】唐氏仲友曰 高昌地不千里 勝兵纔萬人이로되 恃遠不賓이어늘 太宗討之하니 以其地控西域之中故也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고창국高昌國은 국토가 천 리가 못 되고 정예 병사가 겨우 만 명인데, 나라와 거리가 멀다는 점만 믿고 신하로 복종하지 않아 태종太宗이 그들을 토벌하였으니, 그 지역으로 서역西域의 안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愚按 師平高昌 所以闢西陲也 高昌去唐七千餘里 當是時可謂遠討矣 然幸功臣夙將智勇足以制勝하니 是以克成厥功이라
내가 살펴보건대 군대가 고창국高昌國을 평정한 것은 서쪽 변경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다. 고창국은 나라와의 거리가 7천여 리이니, 이 당시에는 먼 곳을 토벌한 것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다행히 공신功臣노장老將들의 지략과 용맹으로 제압하여 승리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自高昌旣平之後 唐之封域 東西九千五百餘里 南北一萬九百餘里 爲唐之極盛이라 故嘗謂太宗之世 於帝王懷柔之道 雖不足이나 而方之漢武致遠之功하면 則有餘也
고창국이 평정된 뒤로 당나라의 영토가 동서로 9,500여 리이고, 남북으로 10,900여 리였으니, 당나라가 가장 강성한 때였다. 그러므로 태종 시기의 정책이 역대 제왕帝王들이 썼던 회유책에는 비록 모자란 점이 있으나, 한 무제漢 武帝가 먼 지역까지 토벌한 공과 견주어본다면 더 낫다고 여겼던 것이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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