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貞觀 7년(633)에 양주도독襄州都督注+지금 양양襄陽이고 하남河南에 속해 있다.장공근張公謹이 죽었다. 태종太宗이 듣고 탄식하며 애도하였고, 교외에 머물면서 애도의식을 거행하자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말하였다. “음양서陰陽書에 준하여 보건대 ‘진일辰日에는 곡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는 또한 풍속에 꺼리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군신의 의리는 부자와 같소. 슬픔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데 어찌 진일辰日을 피하겠소.” 라 하고 마침내 곡을 하였다.注+살펴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6년 여름 4월 신묘일辛卯日에 양주도독襄州都督추양공鄒襄公장공근張公謹이 죽었는데, 다음 날 태종이 교외에 나와서 애도 의식을 가졌다고 하였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진일辰日에 장공근張公謹을 곡하고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다고 말하여 의리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제어制御하는 방략이 고상하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임금이 경대부卿大夫에 대해 장례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고 졸곡卒哭 때까지 음악을 듣지 않음은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공정한 도리이다.
이 때문에 위衛나라 유강柳莊이 죽고 나서 헌공獻公이 제사와 조문을 하자 의논하는 자들이 옳다고 하였고, 진晉나라의 순영荀盈을 장사 지내지 않았는데 진후晉侯가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자 주방장이 그것을 기롱했다.
태종太宗이 장공근張公謹의 죽음에 대해 비록 진일辰日이라도 곡을 그치지 않았으니, 어진 임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