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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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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太宗 初踐祚 卽於正殿之左하여 精選天下文儒하여 令以本官注+① 令以本官:令, 平聲.兼署學士하고 給以五品珍膳하여 更日宿直注+② 更日宿直:更, 平聲.하고
以聴朝之隙 引入內殿하여 討論注+③ 討論墳典:論, 平聲.하고 商略政事하여 或至夜分乃罷하다
又詔勳賢三品已上子孫하여 爲弘文學生注+④ 太宗……爲弘文學生:舊本, 此與後三章通爲一章, 今按崇儒雖同, 典故則異, 分爲三章. 又按通鑑, 武德九年九月, 上於弘文殿, 聚四部書二十餘萬卷, 置弘文館於殿側, 精選天下文學之士虞世南‧褚遂亮‧姚思廉‧歐陽詢‧蔡允恭‧蕭德言等, 竝以本官兼學士云云. 又取三品已上子孫, 充弘文館學生.하다
【集論】眞氏德秀曰 後世人主之好學者 莫如唐太宗이라 當戰攻未息之餘 已留情於經術하여 召名儒學士하여 以講磨之하니 三代以下之無有也
旣卽位하얀 置弘文館於殿之側하여 引內學士하여 番宿更休하고
聴朝之暇 與討古今論成敗호대 或日昃夜艾라도 未嘗少怠하니 三代以下之所又無也
此所以致貞觀之治也 後之人君 有志於帝王之事業인댄 則貞觀之規模 不可以不復이라
愚按 太宗之好學 可謂至矣 其未卽位也 廣招하고 其旣卽位也 大啓弘文之館하여 討論墳典하고 商略政事하니
蓋自三代以下 人君講學之勤 未能或之先也
然嘗論之컨대 太宗之所講學 豈眞堯舜禹湯文武孔顔之學也리오
堯之學也 舜禹之學也 湯武之學也 孔門師友之學也어늘
瀛洲諸賢之所講 亦嘗及於此乎 愚不得而知也
弘文諸儒之所講 亦嘗及於此乎 愚不得而知也
愚獨怪夫君臣問答之際 詔令章疏之間 一事之微 無不講也 一物之細 無不講也로되 獨於之地 迺無一語及之하니
是則太宗之學 學其所學이요 非堯舜禹湯文武孔顔之學也


태종太宗이 처음 황제에 올라서 정전正殿 왼쪽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천하의 문사文事에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해서 본 관직과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함께 학사學士를 겸직하게 하고 5품 이상의 관리가 먹는 진귀한 음식을 주어 날짜를 교대하면서 숙직하게 하고注+(바꾸다)은 평성平聲이다.,
조정 일을 보고 나서 틈이 날 때마다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분전墳典을 토론하고注+(논하다)은 평성平聲이다. 정사를 상의하며 때론 한밤중이 되어서야 자리를 마치기도 했다.
또 3품 이상의 훈신勳臣현신賢臣의 자손을 홍문관弘文館 학생으로 삼으라고注+구본舊本에는 이 장과 뒤 3장이 통합되어 한 장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살펴보니 숭유崇儒의 내용은 같지만 전고典故가 다르기에 3장으로 나눴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살펴보면 무덕武德 9년(626) 9월에 태종太宗홍문전弘文殿사부四部의 책 20여만 권을 모아두고 정전 옆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천하의 문학文學이 뛰어난 선비인 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亮요사렴姚思廉구양순歐陽詢채윤공蔡允恭소덕언蕭德言 등을 선발하여 본 관직과 함께 학사學士를 겸하게 했다라고 하였다. 또 3품 이상의 자손을 취택하여 홍문관弘文館 학생으로 충원했다고 하였다. 조칙을 내렸다.
진덕수眞德秀가 말하였다. “학문을 좋아하는 후세의 임금 가운데 당 태종唐 太宗만 한 이는 없다. 전쟁이 채 마무리되기 전부터 이미 경학經學에 마음을 두어 명유名儒학사學士들을 초빙하여 강마講磨했으니,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일이다.
황제에 오르고 나서는 정전正殿 옆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대내大內로 학사들을 불러들여 당번을 정해 숙직하고 번갈아가며 쉬게 하고,
조정의 정무를 보고 나서 여가가 있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고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였는데 때론 해가 기울고 밤이 깊어서도 조금도 나태하게 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또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육지陸贄가 이러한 예를 들어 덕종德宗에게 아뢰기를 ‘논의가 농사의 어려움에 미치게 되면 절약과 검소를 힘써 준수하였고, 논의가 백성의 고통에 미치게 되면 조세와 요역을 중단하기를 논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관貞觀의 치세를 이룩한 원인이다. 후대의 임금들이 제왕의 사업에 뜻을 둔다면 정관의 규모를 회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지극하다 할 만하다. 황제에 오르기 전엔 영주瀛洲의 현자들을 널리 초빙하고 황제에 오르고 나서는 홍문관弘文館을 크게 확대하여 분전墳典(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정사를 상의하였다.
삼대三代 이후로부터 학문을 열심히 강론한 임금들 가운데 아마 당 태종唐 太宗보다 앞선 이가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논하건대, 태종이 익힌 학문이 어찌 진정한 제요帝堯제순帝舜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공자孔子안자顔子의 학문이겠는가.
‘참으로 그 중도中道를 견지함’은 제요의 학문이고,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희미하므로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 함’은 제순과 우왕의 학문이고, ‘중심中心을 세우고 기준을 세움’은 탕왕과 무왕의 학문이고, ‘가 하나로 관통됨’은 공자孔子 문하의 사우師友들의 학문인데,
영주의 현자들이 강구했던 것이 어찌 여기에 미치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홍문관의 제유諸儒들이 강론했던 것이 또 일찍이 여기에 미치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내가 홀로 이상하게 여긴 점은, 군신간의 문답할 때와 조령詔令소장疏章 사이에서 작은 일 하나도 논하지 않은 것이 없고 미세한 사물 하나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유독 종통宗統을 이어받고 핵심을 모은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도 없으니,
이는 태종의 학문이 그들이 배운 것만을 배운 것일 뿐 제요‧제순‧우왕‧탕왕‧문왕‧무왕‧공자‧안자의 학문이 아닌 것이다.
아, 주공周公이 세상을 떠난 뒤 백 세 동안 훌륭한 정치가 없고 맹자孟子가 세상을 떠난 뒤 천 년 동안 진정한 유학자가 없다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역주
역주1 弘文館 : 唐나라 武德 4년(621)에 門下省에 설치했던 修文館인데 太宗 즉위 후 弘文館으로 개칭했다. 20여만 권의 서적을 모으고 學士를 두어서 圖籍을 교정하고 生徒를 가르치는 한편 政事에 참여해 논의하도록 했으며, 校書郞을 두어 典籍을 교감‧정리하고 오류를 교정하도록 했다. 또 館主 한 명을 두어서 관내 사무를 모두 관리하게 했다. 학생 수십 명이 學士에게 經史와 書法에 대해 전수받았는데 모두 皇族‧貴戚 및 고급 京官 子弟 중에서 선발했다.
역주2 墳典 : 본래 三墳(伏羲‧神農‧黃帝의 저서)과 五典(少昊‧顓頊‧高辛‧唐‧虞의 저서)의 병칭인데, 전하여 고대의 전적을 통칭하기도 한다.
역주3 言及稼穡艱難……則議息征徭 : 陸贄의 《翰苑集》 권12의 〈奉天論前所答奏未施行狀〉에 보인다.
역주4 瀛洲之賢 : 이른바 貞觀 18學士인 褚亮, 杜如晦, 房玄齡, 于志寧, 蘇世長, 薛收, 姚思廉, 陸德明, 孔穎達, 李玄道, 李守素, 虞世南, 蔡允恭, 顔相時, 許敬宗, 薛元敬, 蓋文達, 蘇勖 등을 가리킨다.
역주5 允執厥中 : 《書經》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역주6 危微精一 : 《書經》 〈虞書 大禹謨〉의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미약하니 정밀하고 한결같아야만 참으로 그 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를 축약한 것이다.
역주7 建中建極 : 蔡沈의 〈書經集傳序〉에 “精一執中은 堯‧舜‧禹가 전수한 心法이고 建中建極은 商의 湯王과 周의 武王이 전수한 심법이다.[精一執中 堯舜禹相授之心法也 建中建極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라고 했다.
역주8 忠恕一貫 : ‘忠恕’와 ‘一貫’은 《論語》 〈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孔子가, “우리의 도는 하나로써 관통한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니, 曾子가 門人들에게, “夫子의 道는 忠恕일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했다.
역주9 統宗會元 : 周公 孔子 孟子 이래의 유학의 정통 요지이다.
역주10 周公沒……而千載無眞儒 : 宋나라의 학자 程頤가 〈明道先生墓表〉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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