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진덕수眞德秀가 말하였다. “학문을 좋아하는 후세의 임금 가운데 당 태종唐 太宗만 한 이는 없다. 전쟁이 채 마무리되기 전부터 이미 경학經學에 마음을 두어 명유名儒와 학사學士들을 초빙하여 강마講磨했으니,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일이다.
황제에 오르고 나서는 정전正殿 옆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대내大內로 학사들을 불러들여 당번을 정해 숙직하고 번갈아가며 쉬게 하고,
조정의 정무를 보고 나서 여가가 있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고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였는데 때론 해가 기울고 밤이 깊어서도 조금도 나태하게 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또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육지陸贄가 이러한 예를 들어 덕종德宗에게 아뢰기를 ‘논의가 농사의 어려움에 미치게 되면 절약과 검소를 힘써 준수하였고, 논의가 백성의 고통에 미치게 되면 조세와 요역을 중단하기를 논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관貞觀의 치세를 이룩한 원인이다. 후대의 임금들이 제왕의 사업에 뜻을 둔다면 정관의 규모를 회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지극하다 할 만하다. 황제에 오르기 전엔 영주瀛洲의 현자들을 널리 초빙하고 황제에 오르고 나서는 홍문관弘文館을 크게 확대하여 분전墳典(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정사를 상의하였다.
삼대三代 이후로부터 학문을 열심히 강론한 임금들 가운데 아마 당 태종唐 太宗보다 앞선 이가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논하건대, 태종이 익힌 학문이 어찌 진정한 제요帝堯‧제순帝舜‧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공자孔子‧안자顔子의 학문이겠는가.
‘참으로 그 중도中道를 견지함’은 제요의 학문이고,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희미하므로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 함’은 제순과 우왕의 학문이고, ‘중심中心을 세우고 기준을 세움’은 탕왕과 무왕의 학문이고, ‘충忠과 서恕가 하나로 관통됨’은 공자孔子 문하의 사우師友들의 학문인데,
영주의 현자들이 강구했던 것이 어찌 여기에 미치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홍문관의 제유諸儒들이 강론했던 것이 또 일찍이 여기에 미치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내가 홀로 이상하게 여긴 점은, 군신간의 문답할 때와 조령詔令과 소장疏章 사이에서 작은 일 하나도 논하지 않은 것이 없고 미세한 사물 하나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유독 종통宗統을 이어받고 핵심을 모은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도 없으니,
이는 태종의 학문이 그들이 배운 것만을 배운 것일 뿐 제요‧제순‧우왕‧탕왕‧문왕‧무왕‧공자‧안자의 학문이 아닌 것이다.
아, 주공周公이 세상을 떠난 뒤 백 세 동안 훌륭한 정치가 없고 맹자孟子가 세상을 떠난 뒤 천 년 동안 진정한 유학자가 없다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