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二年
에 詔停周公爲先聖
하고 始立孔子廟堂於國學
하여 稽式舊典
하여 以仲尼爲先聖
하고 顔子爲先師
하여 兩邊
之容
이 始備于玆矣
라
是歲
에 大收天下儒士
하여 賜帛給傳
注+① 賜帛給傳:去聲, 驛傳也.하여 令詣京師
注+② 令詣京師:令, 平聲, 後同.하여 擢以
하여 布在廊廟者
가 甚衆
이요 學生通一大經已上
은 咸得署吏
注+③ 咸得署吏:署, 吏職入仕也.라
國學
에 增築學舍四百餘間
하여 國子太學四門廣文
에 亦增置生員
하고 其書算
에도 各置博士學生
하여 以備衆藝
注+④ 國子太學四門廣文……以備衆藝:唐制, 國子‧太學‧廣文‧四門‧律‧書‧算, 凡七學, 皆置博士. 國子, 掌敎三品以上及子孫‧從二品以上曾孫爲生者. 太學, 掌敎五品以上及郡縣公子孫從三品曾孫爲生者. 廣文館, 掌領國子學生業進士者. 四門館, 掌敎七品以上侯伯子男爲生及庶人子爲俊士生者. 律學書學算學, 掌敎八品以下及庶人子爲者. 又有五經博士, 掌以其經敎國子.라
太宗
이 又數幸國學
注+⑤ 又數幸國學:數, 音朔.하여 令祭酒司業
注+⑥ 令祭(좨)酒司業:凡會同饗醼, 必尊長先, 以酒祭先, 故曰祭酒, 長者之稱也. 唐制, 國子監祭酒, 掌邦國儒學訓導之政, 兼領諸學. 凡釋奠, 則爲初獻. 司業, 其貳職也.博士講論
하고 畢
이어든 各賜以束帛
하니 四方儒士負書而至者
가 蓋以千數
라
俄而吐蕃及高昌高麗新羅等諸夷酋長
注+⑦ 諸夷酋長:音掌.이 亦遣子弟
하여 請入于學
이라 於是
에 國學之內
에 升講筵者
注+⑧ 鼓篋升講筵者:篋, 方竹器, 所以盛書籍者.가 幾至萬人
注+⑨ 幾至萬人:幾, 平聲.하니 儒學之興
이 古昔未有也
注+⑩ 貞觀二年……古昔未有也:按儒林傳 “貞觀十四年, 召天下惇師老德, 以爲學官, 數臨幸觀. 廣學舍千二百區, 益生員至三千二百. 自屯營, 皆給博士受經. 能通經者, 聴入, 四方秀艾, 坌集京師. 於是新羅‧高昌‧百濟‧吐蕃‧高麗等群酋長, 竝遣子弟入學. 鼓笥踵堂者, 凡八千餘人, 雖三代之盛, 所未聞也.”러라
注
【集論】范氏祖禹曰
하여 士修之於家而後升於鄕
하고 升於鄕而後升於國
하고 升於國而後達於天子
하나니 其敎之有素
하고 其養之有漸
이라
故成人有德하고 小子有造하니 賢才不可勝用은 由此道也라
後世鄕里之學廢하여 人君能敎者는 不過聚天下之士하여 而烏合於京師라 學者衆多나 眩耀於一時而已요 非有敎養之實也라
唐之儒學은 惟貞觀開元爲盛이요 其人才之所成就者를 亦可睹矣나
孟子曰
라하니 無學
이면 則人倫不明
이라 故有國者以爲先
하나니 如不復三代之制
면 未知其可也
라
注
愚按昌黎韓子原道曰 堯以是傳之舜하고 舜以是傳之禹하고 禹以是傳之湯하고 湯以是傳之文武周公孔子라하니
然周公而上은 得位與時者也요 孔子不得位與時者也니 得位與時者는 其道見之於事하고 不得位與時者는 其道託之於言이로되
夫堯舜而至周公히 去夫子之時邈矣라 正道日以榛蕪하니 非得夫子면 則堯舜之道가 何由而明於後世哉리오
先儒周子謂
하여 報德報功之無盡焉
이라하니 夫周公
이 固爲先聖
이나 而立孔子廟堂於國學
하여 以夫子爲先聖
은 實始於太宗
이라
遂爲萬代之定制하여 廟祀徧天下하여 人知尊夫子之道하고 卽知尊堯舜禹湯文武周公之道矣라
太宗은 聰明英睿之君이라 眞特見也니 王封起於開元도 亦太宗有以致之라
정관貞觀 2년(628)에 조칙에 의해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으로 삼는 것을 멈추고, 국자학國子學에 공자孔子의 사당을 처음 건립하여 옛 의전을 참고해 규정을 만들어 중니仲尼(공자의 자字)를 선성先聖으로 삼고 안자顔子를 선사先師로 삼아 사당의 양쪽에 조두俎豆와 간척干戚을 진설하는 형식이 비로소 구비되었다.
이해에
천하天下의
유사儒士들을 널리 모아 비단을 하사하고 역말의 편의를 제공하여
注+〈전傳은〉 거성去聲이니 역전驛傳이다. 서울로 오게 해서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서열에 상관없이 발탁하여
낭묘廊廟에 나열된 이들이 매우 많았고, 학생 가운에
대경大經을 하나 이상 통달한 사람은 모두 관리에 임용되었다.
注+서署는 이직吏職으로 입사入仕하는 것이다.
국자학國子學에
학사學舍 400여 칸을 증축하여,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관四門館‧
광문관廣文館에도 생도를 증원하고,
서학書學‧
산학算學에도 각자
박사博士와
학생學生을 배치하여 뭇 기예들을 완비했다.
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광문관廣文館‧사문관四門館‧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모두 7개의 학교가 설치되었는데 모두 박사를 배치했다. 국자학은 3품 이상과 국공國公의 아들‧손자, 종從2품品 이상의 증손曾孫으로 학생이 된 자를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태학太學은 5품 이상과 군공郡公‧현공縣公의 아들‧손자, 종3품의 증손으로 학생이 된 자를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광문관廣文館은 국자학의 학생으로서 진사進士 수업을 받는 자를 통솔하는 것을 담당한다. 사문관四門館은 7품 이상의 후侯‧백伯‧자子‧남男으로서 학생이 된 자와 서인庶人의 아들로 준사俊士의 학생을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은 8품 이하와 서인庶人의 아들로 준사의 학생을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또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있는데 그가 전공한 경전經傳으로 국자학國子學의 학생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한다.
태종太宗이 또 자주
국자학國子學에 행차하여
注+수數(자주, 곧잘)은 음音이 삭朔이다. 좨주祭酒‧
사업司業‧
박사博士로 하여금
注+무릇 회동과 연회가 있을 땐 반드시 장자와 선배를 존중하는데, 술로 선인에게 제를 올리므로 좨주祭酒라 하는 것인바, 장자에 대한 호칭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국자감國子監 좨주는 국가의 유학儒學에 대한 훈도訓導 정책을 관장하고 여러 학교를 겸하여 통솔한다. 석전釋奠 때는 초헌初獻이 된다. 사업司業은 그의 차관이다. 학문을 강론하게 하고 마치고 나면 각자에게 비단 1
속束을 하사하니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방의
유사儒士들이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얼마 후
토번吐蕃‧
고창高昌‧
고려高麗(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등 여러 오랑캐의
추장酋長들이
注+〈장長(윗사람)은〉 음音이 장掌이다. 또한 자제들을 파견해서
국자학國子學에 입학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국자학國子學 안에서 북을 쳐 울리고 상자에서 책을 꺼내어 강연석에 참여하는 자가
注+협篋은 대나무로 만든 모난 도구로, 책 등을 담는 용도로 쓰인다. 거의 만여 명에 이르렀으니
注+기幾(거의)는 평성平聲이다. 유학의 흥성이 예전에 없던 것이었다.
注+《신당서新唐書》 권198 〈유림전儒林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14년(640)에 천하에 돈독하고 노숙한 스승과 원로들을 초빙하여 학관學官으로 삼고, 자주 행차하여 석채釋菜를 살펴보았다. 1,200곳의 학사를 증축하여 생도 수를 3,200명까지 늘렸다. 둔영屯營의 비기飛騎부터 모두 박사에게 경전 수업을 받게 했다. 경전에 능통한 자는 공거貢擧 고시考試에 참여하게 하니 사방의 준수한 자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신라新羅‧고창高昌‧백제百濟‧토번吐蕃‧고구려高句麗 등의 뭇 추장酋長들이 모두 자제들을 파견하여 입학시켰다. 북을 쳐 울리고 상자에서 책을 꺼내어 학당學堂에 연이어 온 자가 8,000여 명에 이르렀으니 비록 삼대三代의 성대한 때라도 듣지 못한 일이다.”라고 했다.
注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고대의 교육기관은 가家에 숙塾이 있고 당黨에 상庠이 있고 수遂에 서序가 있고 국國에 학學이 있어서, 선비가 가家에서 닦고 나서 향학鄕學에 오르고 향학에 오르고 나서 국학國學에 오르고 국학에 오르고 나서 천자天子에게 도달하게 되니, 교육에 기본이 되는 학교들이 있고 함양에 교육의 단계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成人은 덕을 갖추고 어린 사람은 조예가 있었으니, 훌륭하고 재능 있는 자가 이루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은 이러한 제도 때문이다.
후세엔 향리鄕里에서의 배움이 폐기되어, 임금이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이 천하의 인사들을 서울에 옹기종기 모이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 시대에 빛날 뿐, 교육과 함양의 실체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당唐나라의 유학儒學은 정관貞觀과 개원開元의 시대만 성대하였고 인재의 성취를 또한 볼만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학學(학교)은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배움이 없으면 인륜이 밝지 못하다. 그러므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이를 우선으로 삼아야 하니, 만일 삼대三代의 제도를 복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제요帝堯는 이 도道를 제순帝舜에게 전수하고 제순은 이 도를 우왕禹王에게 전수하고 우왕은 이 도를 탕왕湯王에게 전수하고 탕왕은 이 도를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에게 전수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주공 이전의 분들은 지위와 시기를 얻은 분들이고 공자는 지위와 시기를 얻지 못한 분이다. 지위와 시기를 얻은 분들은 그 도를 정사에 실현하였지만 지위와 시기를 얻지 못한 분은 그 도를 말에 의탁할 뿐이다.
그런데도 재아宰我가 이르기를, “나의 관점에서 부자夫子(공자孔子)를 볼 때 요순堯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 라고 했다.
요순에서 주공에 이르는 시기까지 부자가 살던 시대와는 거리는 멀기 때문에 정도正道가 나날이 황폐해졌으니 부자가 아니었다면 요순의 도가 어떻게 후세에 밝아질 수 있겠는가.
육경六經의 가르침이 하늘을 운행하는 태양처럼 훤히 빛나는 것은 부자의 공로이다.
선유先儒 주자周子(주돈이周敦頤)가 ‘의당 후세에 무궁토록 부자를 제왕帝王으로 제사를 올려 영원히 그 공덕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공이 실로 선성先聖이긴 하지만 국자학國子學에 공자 사당을 세워 부자를 선성先聖으로 삼은 것은 실로 태종太宗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만대萬代의 정해진 법도가 되어 사당의 제사를 천하에 두루 지내서 저마다 부자의 도를 존중해야 할 줄 알게 되고 동시에 제요‧제순‧우왕‧탕왕‧문왕‧무왕‧주공의 도를 높일 줄을 알게 됐다.
태종은 총명하고 영매하고 지혜로운 임금으로 참으로 특별한 견해를 가졌으니,
개원開元 때에 공자를
으로 책봉한 것도 태종이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