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내가 살펴보건대, 학學이라는 의미는 본받음이다. 사람의 본성이 모두 선善하지만 깨침에는 선후가 있으니 뒤에 깨치는 사람은 반드시 앞서 깨친 사람이 한 것을 본받아야만 선을 밝혀 애초의 것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논한다면 선은 나의 본성에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배움이 아니면 회복할 수 없으니, 마치 물은 대합이 본성적으로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달이 아니면 물을 내뿜는 것을 이룰 수 없고, 불은 나무가 본성적으로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불을 댕기는 나무가 아니면 불을 피울 수 없는 것과 같다.
태종太宗의 이 논의는 비록 후대의 순수한 유학자라도 크게 앞설 수 없다.
잠문본岑文本이 이러한 때에 의당, “폐하께서 이미 본성의 선善함이 자신에게 구비된 것을 아셨으니 본성은 안팎의 구분이 없으므로 바깥 것만 신중하고 내면의 것에 나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본성은 처음과 끝의 다름이 없으므로 시작만 조심하고 끝에 나태해선 안 됩니다.” 라고 아뢰어
그 사악한 마음을 공격하고 옳지 않은 마음을 바로잡았다면 거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을 터인데, 다만 〈학기學記〉의 말만을 대충 인용하여 바르게 구제한 것이 없었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은 훌륭한 임금이 있고 훌륭한 신하가 없는데 따른 것이니 어찌 대단히 개탄스럽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