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五年
에 太宗謂侍臣曰 自古帝王
은 亦不能常化
라 假令內安
注+① 假令內安:令, 平聲.이면 必有外擾
라
當今
하고 百穀豐稔
하고 盜賊不作
하고 內外寧靜
하니
雖知今日無事나 亦須思其終始하여 常得如此라야 始是可貴也니라
魏徵이 對曰 自古已來로 元首股肱이 不能備具하여 或時君稱聖이나 臣卽不賢하며 或遇賢臣이나 卽無聖主러니
注
【集論】愚按 昔帝舜之作歌曰 股肱喜哉면 元首起哉하여 百工熙哉하리라하고
皐陶乃賡載歌曰 元首明哉하시면 股肱良哉하여 庶事康哉하리이다하고
皐陶之意는 以爲君明則臣良하여 而衆事皆安하니 所以勸之也라
君行臣職하면 則臣下懈怠하여 而萬事廢하니 所以戒之也라
虞廷君臣之相與責難者如此하니 雍熙之治를 所以爲不可及也라
太宗之告侍臣호대 謂當今太平은 非朕一人之力이요 皆由公等共輔하니 須思終始如一하라하니
若有賢臣하고 而君不思化면 亦爲無益이라하니 是猶皐陶勸舜之意也라
惟願陛下가 居安思危하사 孜孜不怠로소이다하니 亦猶皐陶戒舜之意也라
太宗能責難於其臣하고 魏徵亦能責難於其君하여 君臣之相責難者如此하니 有唐虞之遺風焉이라
是故有唐之治
는 雖未能上躋
之美
나 而貞觀之盛
은 可謂三代而下之所罕見者矣
로다
정관貞觀 5년(631)에
태종太宗이
근신近臣에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제왕帝王들은
천하天下를 늘 교화할 수는 없었소. 만약 국내가 안정되면
注+영令(가령)은 평성平聲이다. 반드시 국외의 소요가 있었소.
지금 먼 오랑캐가 복종하고 모든 곡식이 풍년이 들고 도적盜賊이 일어나지 않고 내외內外가 안정되었으니,
이는 짐朕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진실로 공들이 함께 보좌한 것에 말미암은 것이오.
그러나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어서는 안 되니,
비록 지금 무사한 것을 알아도 모름지기 그 시작과 끝을 생각하여 항상 이와 같을 수 있어야 비로소 귀하게 되는 것이오.”
위징魏徵이 대답하였다. “옛날부터 성스러운 군주와 보필하는 대신이 다 갖추어지지는 못하여 혹은 당시의 군주는 성스럽지만 신하는 현명하지 못하며, 혹은 현명한 신하를 만나지만 성스러운 군주는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명철하시어 치세治世를 이루었습니다.
만약 다만 현명한 신하만 있고 임금이 다스림을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천하가 지금 비록 태평하지만 신들은 여전히 기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셔서 힘써 노력하시어 태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말하기를 “신하가 기뻐하여 일하면 임금이 흥기되어 백관百官의 공이 광대해질 것이다.”라고 하고,
고요皐陶가 노래를 이어 부르기를 “임금이 현명하시면 신하가 현명하여 모든 일이 편안할 것입니다.” 라고 하고,
고요가 또 노래하기를 “임금이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하면 신하가 태만해져서 만사가 폐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를 해설한 이가 말하기를 “순임금의 뜻은 ‘신하가 일에 나아가고 공에 달려가기를 즐거워하면 군주의 다스림이 흥기되어 백관의 공이 모두 넓어질 것이다.’라고 하고,
고요의 뜻은 ‘군주가 명철하면 신하가 선량하여 많은 일이 모두 편안하게 된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권면한 것이고,
또 ‘임금이 신하의 직책을 행하면 신하는 해이해져서 모든 일이 폐기된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은 경계한 것이다.
우순虞舜의 조정朝廷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려운 일을 권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화평한 치적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이다.
태종太宗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지금 태평한 것은 짐朕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공들이 함께 보좌한 것에 말미암은 것이니 모름지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할 것을 생각하라.”라고 하였으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성스럽고 명철하시어 치세治世를 이룬 것입니다.
만약 현명한 신하만 있고 임금이 다스림을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는 고요가 순임금에게 권한 뜻과 같다.
위징이 또 말하기를 “지금 비록 태평하지만 신臣은 여전히 기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셔서 힘써 노력하시어 태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또한 고요가 순임금에게 경계한 뜻과 같다.
태종은 그 신하에게 어려운 일을 권할 수 있었고, 위징 또한 그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권할 수 있어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어려운 일을 권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당우唐虞의 유풍遺風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唐나라의 치세는 비록 위로 시옹時雍(성군의 화평한 정치)하는 아름다움에는 올라가지 못하였지만, 정관貞觀의 성대함은 삼대三代 이하에서 보기 드문 것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