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義入神
은 事豫吾內
하야 求利吾外也
요 利用安身
은 素利吾外
하야 致養吾內也
注+易繫辭下傳曰 精義入神은 以致用也요 利用安身은 以崇德也라하니라 ○ 朱子曰 求字似有病이라 精義入神이면 自然是能利我外니 何時待於求리오 當云所以利吾外也니라니라
硏精義理하야 妙以入神은 知之功也나 然事理素定於內면 則施於外者 無不順이요 順於致用하야 以安其身은 行之功也나 然所用이 旣順於外면 則養於內者益以厚니 此는 明內外之交養而知行之相資也니라
[張伯行 註] 此言內外之交養互發하야 以明繫辭所言爲學自然之機也라
易曰 精義入神이라하니 乃精於硏究義理하야 以通乎神妙之極이니 可謂屈矣나
然凡事斂其精神하야 刻入深思하야 使義理素定於心이면 則推之於身에 無不順理而裕하리니 如是면 乃求利吾外也라
又曰 利用安身이라하니 乃利於推行事理하야 使吾身各適其所安이니 可謂伸矣나
然凡事沛然肆應하야 從容恬適이면 則吾身之德이 愈覺光明而日休리니 是는 所以致養吾內也니 無非屈之機也라
然則寂守而不足以利用이면 是遺外也니 非所謂學也요 徇物而不足以養心이면 是遺內也니 亦非所謂學也니라
79-2 窮神知化는 乃養盛自至요 非思勉之能强이라
故崇德而外
엔 君子未或致知也
注+按 繫辭曰 精義入神은 以致用也요 利用安身은 以崇德也니 過此以往은 未之或知也라 窮神知化는 德之盛也라하니라 朱子曰 精硏其義하야 至於入神은 屈之至也나 然乃所以爲出而致用之本이요 利其施用하야 無適不安은 信(伸)之極也나 然乃所以爲入而崇德之資니 內外交相養하고 互相發也니라 ○ 朱子曰 橫渠云 陰陽二氣 推行以漸을 謂化요 闔闢不測을 謂神이라하시니 伊川說神化等이 却不似橫渠說得分明이니라 ○ 橫渠曰 一故神이요 兩在故不測이요 兩故化라하니 化는 是逐些子挨將去底니 一日復一日하고 一月復一月하야 節節挨將去하야 便成一年이요 神은 是一箇物事 或在彼하고 或在此하야 當其在陰時엔 全體在陰하고 在陽時엔 全體在陽이라 都只是這一物이 兩處都在하야 不可測故로 謂神이니라니라
神者
는 妙萬物而無方
이요 化者
는 著萬物而有迹
注+按 化固有迹이나 然語意似陡하니 如曰變萬物而有漸이라하면 則如何오이라
窮神知化
는 蓋窮理盡性
하야 以至於命
注+說卦라 朱子曰 窮天下之理하고 盡人物之性하야 而合於天道니 此聖人作易之極功也라이니 是則知行交養
하야 德盛所致
니 非思之所能得, 勉之所能至者
注+按 若如此說이면 則學者終不可到窮神知化地位耶아 若曰 非思勉之所能及이라하면 則可也니라라
故君子惟盡力於精義以致其用하고 利用以崇其德이요 自崇德之外엔 則有所不能致其力者라
“
정의입신精義入神(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감)은
사리事理가 나의
내면內面에 미리 정해져서 나의
외면外面을 이롭게 하는 것이요,
이용안신利用安身(致用을 순히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은 본래 나의
외면外面을 이롭게 하여 나의
내면內面을 지극히 기르는 것이다.
注+《주역周易》〈계사繫辭 하전下傳〉에 “의義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감은 씀을 지극히 하고자 해서이고, 씀을 이롭게 하고 몸을 편안히 함은 덕德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구자求字는 병통이 있는 듯하다. 의義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면 자연 나의 밖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어찌 구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마땅히 ‘내 밖을 이롭게 한다〔所以利吾外也〕’고 해야 할 것이다.”
내용이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보인다.
의리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하여 신神의 경지에 들어감은 지知의 공효功效이나 사리事理가 평소(미리) 안에 정定해지면 밖에 베푸는 것이 순하지 않음이 없으며, 치용致用을 순히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은 행行의 공효功效이나 쓰는 바가 이미 밖에 순順하면 안에 기르는 바가 더욱 두터워지니, 이는 내內‧외外가 서로 길러주고 지知‧행行이 서로 자뢰함을 밝힌 것이다.
[張伯行 註] 이는 내內와 외外가 서로 길러주고 서로 발명發明함을 말하여, 〈계사전繫辭傳〉에서 말한 학문하는 자연自然의 기틀을 밝힌 것이다.
천하天下의 이치가 본래 내內‧외外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도道가 굴屈‧신伸을 떠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 “의리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神妙한 경지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의리義理를 연구함을 정밀하게 해서 신묘神妙함의 지극함에 통하는 것이니, 굴屈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 그 정신精神을 거두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여 의리義理가 평소 마음에 정해지게 하면 몸에 미루어 감에 이치를 따라 여유가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함은 바로 나의 외면外面을 이롭게 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계사전繫辭傳〉에 또 “씀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사리事理를 미루어 행함에 이롭게 해서 내 몸으로 하여금 각기 그 편안한 바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신伸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 패연沛然히 응하여 여유롭고 편안하여 맞으면 내 몸의 덕德이 더욱 광명하여 날로 아름다움을 깨달을 것이니, 이는 나의 내면內面을 기르기를 지극히 하는 것이니, 굴屈의 기틀이 아님이 없다.
그렇다면 고요히 지키기만 하고 씀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이는 밖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이 아니요, 사물을 따르기만 하고 마음을 기르지 못하면 이는 안을 버리는 것이니 또한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이 아니다.
신묘神妙한 이치를 궁구하고 조화造化를 아는 것은 바로 기름이 성대하여 저절로 이르는 것이요, 생각하고 힘써서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德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군자君子가 혹 알려고 하지 않는다.”
注+살펴보건대 〈계사전繫辭傳〉에 “정의입신精義入神은 씀을 지극히 하려는 것이요, 이용안신利用安身은 덕德을 높이려는 것이니, 이 이상은 혹 알 수 없다. 궁신지화窮神知化는 덕德의 성함이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그 의리義理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름은 굽힘이 지극한 것이나 이는 바로 나가서 씀을 지극히 하는 근본이요, 시용施用을 이롭게 하여 가는 곳마다 편안하지 않음이 없음은 폄이 지극한 것이나 이는 바로 들어가서 덕德을 높이는 자료가 되니, 내內와 외外가 서로 길러주고 서로 발명發明하는 것이다.”
○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횡거橫渠가 ‘음양陰陽 두 기氣가 미루어 행하여 점점함을 화化라 이르고, 열리고 닫혀 측량할 수 없음을 신神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천伊川이 신神과 화化 등을 설명한 것은 횡거橫渠의 말씀처럼 분명하지 못하다.”
○ 횡거橫渠가 말씀하기를 “한결같기 때문에 신묘하고, 두 가지에 모두 있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고, 두 가지이기 때문에 화化하다.” 하였으니, 화化는 작은 것을 따라 미루어 가는 것이니, 하루를 하고 또다시 하루를 하며 한 달을 하고 또다시 한 달을 하여 절절節節이 미루어 가서 곧 1년을 이루는 것이요, 신神은 하나의 사물이 혹 저기에도 있고 혹 여기에도 있어서, 음陰에 있을 때를 당해서는 전체가 음陰에 있고 양陽에 있을 때를 당해서는 전체가 양陽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다만 이 한 물건이 〈음陰과 양陽〉 두 곳에 모두 있어 측량할 수 없으므로 신神이라 한 것이다.
신神은
만물萬物을
묘妙하게 하여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고,
화化는
만물萬物에 드러나 자취가 있다.
注+살펴보건대 화化는 진실로 자취가 있으나 말뜻이 너무 동떨어진 듯하니, 만일 ‘만물을 변화함에 점점함이 있다’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신묘神妙한 이치를 궁구하고
조화造化를 아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여
천명天命에 이르는 것이니,
注+궁리진성窮理盡性 이지어명以至於命은 〈설괘說卦〉에 보인다.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천하天下의 이치를 다하고 인人‧물物의 성性을 다하여 천도天道에 부합하는 것이니, 이는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은 지극한 공이다.” 이는
지知와
행行이 서로 길러져서
덕德이 성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생각하여 얻을 수 있고 힘써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注+살펴보건대 만약 이 말과 같다면 배우는 자는 끝내 궁신지화窮神知化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단 말인가. 만약 ‘생각하고 힘써서 능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오직 의義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씀을 지극히 하고, 치용致用을 순히 하여 덕德을 높임에 힘을 다할 뿐이요, 덕德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힘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난 이후(이 이상)로는 혹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