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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集解(1)

근사록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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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집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84. 仲尼絶四注+論語子罕篇曰 子絶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라하니라注+論語本註 曰 絶 無之盡者 史記作無하니 是也 私意 期必이요 執滯 私己니라 ○ 無意者 渾然天理하야 不任私意 無必者 隨事順理하야 不先期必也 無固者 過而不留하야 無所凝滯也 無我者 大同於物하야 不私一身也 意是始 我是終이며 固必 在中間하니 一節 重似一節也 自始學으로 至成德 竭兩端之敎注+按 論語曰 我叩其兩端而竭焉이라한대 兩端 猶兩頭 尹氏曰 聖人之言 上下兼盡하야 卽其近이면 衆人皆可與知 極其至 則雖聖人이라도 亦無以加焉하니 是之謂兩端이니라
有思也注+按 思者 人之所不能無者 安得絶之리오 橫渠此語 恐有病이니라 有待也注+按 此與朱子所謂期必也 必欲其成之意 少異 不化也 有方也 四者 有一焉이면 則與天地爲不相似矣니라
84. 意必固我 蓋私意見於應事接物之間이로되 自始至終 有此四者
橫渠先生
故以此爲聖人設敎之道라하시니
謂自始學으로 以至於成德 其所以克治融釋注+按 克治 始學也 融釋 成德也者 不外乎此하니 所謂竭兩端之敎也
意者 萌心之始 故曰有思 必者 期望於終注+按 此等語 從橫渠意解之故 自與朱子說不同이니라이라 故曰有待 固者 滯於已往이라 故曰不化 我者 成於己私注+按 己私 卽是我也 成於二字未穩이라 故曰有方注+沙溪曰 方 方所也 滯而有方所也이니라
○ 朱子曰
起於意하야 遂於必하고 留於固而成於我하니 意必 常在事前이요 固我 常在事後니라
或問 四者相爲終始어늘 而曰有一焉 何也잇가
人之爲事 亦有其初未必出於私意로되 而後來固執而不化者하니 若曰絶私意則三者皆無인댄 則曰絶一이면 斯可矣 何用更言絶四리오
以此 知四者又各是一病이니라


횡거선생橫渠先生이 말씀하였다.〉
중니仲尼절사絶四注+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에 “공자孔子는 네 가지를 완전히 끊어버리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하는 뜻이 없고 고집함이 없고 가 없으셨다.” 하였다.注+논어論語》의 본주本註에 “은 없음이 다한 것이다. 는 《사기史記》에 로 되어 있으니 옳다. 는 사사로운 뜻이요, 은 기필함이요, 집체執滯함이요, 사기私己이다.” 하였다.
무의無意혼연渾然천리天理여서 사사로운 뜻에 맡기지 않는 것이요, 무필無必은 일에 따라 이치를 순히 하여 먼저 기필하지 않는 것이요, 무고無固는 지나가면 마음 속에 머물러 두지 않아 응체凝滯하는 바가 없는 것이요, 무아無我는 남과 크게 같이 하여 자기 한 몸을 사사로이 하지 않는 것이니, 가 시작이고 가 끝이며 은 중간에 있으니, 일절一節일절一節보다 더하다.
처음 배움으로부터 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양단兩端을 다하신 가르침이다.注+살펴보건대 《논어論語》에 “나는 그 양단兩端(양끝)을 다 말해준다.” 하였는데, 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단兩端양두兩頭(두 끝)라는 말과 같다.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말씀은 가 겸하여 극진해서 그 천근淺近한 데에 나아가면 중인衆人들도 모두 참여하여 알 수 있고, 그 지극함을 다하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으니, 이것을 일러 양단兩端이라 한다.’ 하였다.”
는 생각함이 있는 것이요,注+살펴보건대 는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끊어 없앨 수 있겠는가. 횡거橫渠의 이 말씀은 병통이 있는 듯하다.은 기대함이 있는 것이요,注+살펴보건대 이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기필期必함이니,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는 뜻과 조금 다르다.변화變化하지 못하는 것이요, 방소方所가 있는 것이니,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천지天地와 서로 같지 못하게 된다.”
는 사사로운 마음이 사물을 응접하는 사이에 나타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횡거선생橫渠先生를 모두 금지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푼 라고 한 것이다.
처음 배움으로부터 을 이룸에 이르기까지 이겨 다스리고 풀리게 하는 것注+살펴보건대 극치克治는 처음 배우는 것이고 융석融釋을 이룸이다.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씀하였으니, 이른바 양단兩端을 다하신 가르침이란 것이다.
는 마음에 싹트는 시초始初이므로 ‘생각함이 있다’고 하였고, 종말終末에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므로注+살펴보건대 이러한 말은 횡거橫渠의 뜻을 따라 풀이하였으므로 자연 주자朱子의 말씀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기대함이 있다’고 하였고, 는 지나간 일에 막혀있는 것이므로 ‘변화變化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기사己私에 이루어지므로注+살펴보건대 기사己私가 바로 이니, 성어成於 두 글자는 온당치 못하다.방소方所가 있다’注+사계沙溪가 말씀하였다. “방소方所이니, 막혀서 방소方所가 있는 것이다.”고 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에서 시작되어 에서 이루어지고 에서 머물러 에서 완성되니, 은 항상 일의 앞에 있고, 는 항상 일의 뒤에 있다.”
혹자가 “네 가지는 항상 가 되는데,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있다고 말함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이 일을 할 때에 또한 처음에는 반드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 아니나 후래에 고집固執하여 변화變化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만약 ‘사의私意를 없애면 세 가지가 모두 없어진다’고 말할진댄 절일絶一(하나를 없앰)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니, 어찌 절사絶四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로써 네 가지가 각각 한 가지 병통임을 알 수 있다.”


역주
역주1 [譯註]解絶毋皆爲禁止之意 : 朱子는 絶은 ‘無之盡者’라 하여 완전히 없는 것으로 보고 毋 역시 無와 같은 字로 보아 없는 것으로 해석하였는 바, 끊으려고 노력함과 알려고 하는 것은 모두 금지의 뜻이며, 無는 힘쓰지 않고 저절로 없음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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