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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集解(2)

근사록집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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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問邢七 久從先生이로되 想都無知識하야 後來 極狼狽니이다 先生曰
謂之全無知則不可
只是義理不能勝利欲之心注+益軒曰 愚謂 學者當使義理勝利欲之心이니 義理勝利之心 是學問之功也 不然이면 說話而已니라하야 便至如此니라
邢恕事 見國史及語錄하니라
[張伯行 註] 邢恕事 見國史及語錄이라
他且勿論이요 卽如 盡棄所學하고 又從而讒搆之
程子編管涪州 謝良佐以爲族子公孫及邢恕之所爲라하니 狼狽極矣
或問從學已久어늘 何至於此니잇고 想其從學時 都無知識하야 敎無所施 故有後來之狼狽耳니이다
程子謂非全無知 緣他知得不眞切하야 易爲利欲所汨沒하야 而本來義理之心 不足以勝之
是以 天理日消하고 人欲日長하야 便至如此하니
聖門所以重克治也니라


29. “형칠邢七(邢恕)이 오랫동안 선생先生을 따라 배웠으나 생각하건대 전혀 지식이 없어서 뒤에 지극히 낭패한 것입니다.” 하자, 〈이천선생伊川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전혀 지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다만 의리義理이욕利欲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注+익헌益軒이 말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의리義理로 하여금 이욕利欲의 마음을 이기게 하여야 하니, 의리義理이욕利欲의 마음을 이기는 것이 바로 학문學問의 공효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설화說話일 뿐이다.” 곧 이와 같음에 이른 것이다.”
형서邢恕의 일은 국사國史와 《어록語錄》에 보인다.
[張伯行 註]형서邢恕의 일은 나라 《국사國史》 및 《어록語錄》에 보인다.
딴 것은 막론하고 예컨대 낙당洛黨가 일어나자, 그는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또 따라서 모함하여 죄에 얽어 넣었다.
정자程子부주涪州로 유배갈 적에 사양좌謝良佐가 말하기를 “족자族子공손公孫형서邢恕가 이렇게 만들었다.” 하였으니, 낭패가 지극하다.
혹자或者가 묻기를 “형서邢恕는 학문에 종사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생각건대 그가 학문에 종사할 때에 전혀 지식이 없어서 가르침을 베풀 곳이 없었기 때문에 후래後來에 낭패한 듯합니다.” 하였다.
정자程子는 말씀하기를 “전혀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앎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이욕利欲에 빠져 본래 가지고 있는 의리義理양심良心이욕利欲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천리天理가 날로 사라지고 인욕人欲이 날로 자라서 곧 이와 같음에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문하門下에서 사욕私欲을 이겨 다스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洛黨禍興 : 洛黨은 程伊川을 가리킨다. 北宋 哲宗 때에 3개 당파가 있었으니, 곧 洛陽 부근에 살던 伊川을 領袖로 하는 洛黨과 蜀지방 출신인 東坡 蘇軾을 영수로 하는 蜀黨과 朔州 출신의 劉摯를 영수로 하는 朔黨이 있었는 바, 伊川이 당쟁에 휘말리게 되자, 그의 제자인 邢恕는 禍를 두려워한 나머지 伊川을 모함하여 涪州로 귀양가게 하였다.

근사록집해(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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