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釋氏本怖死生
注+朱子曰 老氏는 欲保全其身底意思多하고 釋氏는 又全不以其身爲事하야 自謂別有一物이 不生不滅이라하니라 歐公이 嘗言 老氏貪生하고 釋氏畏死라하니 其說亦好니라하야 爲利
하니 豈是公道
리오
釋氏謂 有生則有滅
이라 故有輪廻
注+問 輪回之說은 是佛家自創否잇가 朱子曰 自漢書載鬼處로 已有此話模樣了니라 問 或傳范淳夫是鄧禹後身이라하니이다 曰 鄧禹亦一好人이나 死許多時니 如何魄識이 乃至今爲他人이리오 王質이 不敬其父母曰 自有物無始以來로 自家是換了幾箇父母了라하니 其不孝莫大於是라 以父母所生之身으로 爲寄寓라하야 譬以舊屋破倒면 卽自跳入新屋이라 故黃蘗一僧이 有偈與其母云 先曾寄宿此婆家라하니라 止以父母之身으로 爲寄宿處하니 其無情義하야 絶滅天理를 可知니라하니 今求不生不滅之理
면 可免輪廻之苦
라하니 此本出於利己之私意也
니라
4-2 惟務上達而無下學하니 然則其上達處豈有是也리오
元不相連屬
注+按 謂釋氏務上達하고 無下學하야 上下本不連屬이니라하고 但有間斷
注+按 謂上下不相連也라하니 非道也
라
道器本不相離어늘 今捨物以明理하고 泯迹以求心하니 豈知道者哉리오
4-3 孟子曰 盡其心者
는 知其性也
라하시니 彼所謂識心見性
이 是也
나 若存心養性一段則無矣
注+朱子曰 明道說盡心知性은 語亦不完이라 二先生語中에 如此處는 必是記者之失이라 伊川云 盡心然後에 知性이라하시니 此不然이라 盡字大하고 知字零星이라 性者는 吾心之實理니 若不知得이면 却盡箇甚이리오 惟就知上積累將去면 自然盡心이니라 人能盡其心者는 只爲知其性이라 此句文義는 與得其民者得其心也로 相似하니 者字를 不可不仔細看이니라 又曰 人之所以盡其心者는 以其知其性故也니 蓋盡心與存心이 不同이라 存心은 卽操存求放之事니 是學者初用力處요 盡心則窮理之事니 廓然貫通之謂라 所謂知性은 卽窮理之事也니 須是窮理라야 方能知性이요 知性之盡이면 則能盡其心矣니라 ○ 問 聖門說知性하고 佛氏亦言知性하니 有以異乎잇가 先生笑曰 也問得好라 據公所見하면 如何오 試說看하라 曰 佛氏之說者는 此一性이 在心에 所發爲意요 在目爲見이요 在耳爲聞이요 在口爲議論이요 在手能持요 在足運奔이니 所謂知性者는 知此而已니이다 曰 若如此見得이면 只是無星之秤, 無寸之尺이라 若在聖門하야는 則在心에 所發爲意니 須是誠이라야 始得이요 在目雖見이나 須是明이라야 始得이요 在耳雖聞이나 須是聰이라야 始得이요 在口談論及在手足之類에 須是動之以禮라야 始得이라 天生蒸民에 有物有則하니 佛氏之說은 只有物無則이라 況孟子所說知性者는 乃是物格之謂니라 ○ 又曰 遺書所云 釋氏有盡心知性이요 無存心養性이라하니 亦恐記者有誤라 要之컨대 釋氏只是恍惚之間에 見得些心性影子하고 却不曾仔細見得眞實心性하니 所以都不見裏面許多道理라 政使有存養之功이라도 亦只是存養得他所見底影子니 固不可謂之無所見이요 亦不可謂之不能養이라 但所見所養이 非心性之眞耳니라 ○ 又曰 近看石林過庭錄하니 載上蔡說호되 伊川參某僧後에 有得하고 遂反之하야 偸其說來하야 做己使하니 是爲洛學이라하다 某嘗疑如石林之說은 固不足信이어니와 却不知上蔡也恁地說이라 但當初佛學이 只是說無요 存養底工夫는 至唐六祖하야 始敎人存養工夫라 當初學者亦只是說이요 不曾就身上做工夫러니 至伊川하야 方敎人就身上做工夫하시니 所以謂伊川偸佛說爲己使니라 ○ 按 以此觀之하면 則不可謂存養一段則無矣니 但彼所謂存養이 與吾儒異耳라니라
釋氏恍惚之間에 略見得心性影子하고 都不見裏面許多道理하니 政(正)使有存養之功이라도 亦只存養得他所見影子라
4-4 彼固曰 出家獨善이라하니 便於道體에 自不足이니라
道本人倫이어늘 今曰出家라하면 則於道體에 虧欠이 大矣니라
4-5 或曰 釋氏地獄之類
는 皆是爲下根
注+按 猶이라之人
하야 設此怖
하야 令爲善
이니이다 先生曰
至誠이 貫天地라도 人尙有不化하나니 豈有立僞敎而人可化乎아
或人이 曲爲之解하야 以爲釋氏心欲勸人爲善이요 而人莫不貪生怖死라
故設爲天堂地獄輪廻因果之類하야 使他知有所懼而爲善하니 是爲下根人說法이어늘
今誠之至者는 往往可以貫天地로되 而不可以格愚頑하니 是人尙有不化於誠者니 豈有心不如是而設敎如是리오
欲上達而適見其怖死하고 欲愚人而適以自愚하야 抛自家之心性하고 覬無端之私利라
4-1 〈
명도선생明道先生이 말씀하였다.〉
“
석씨釋氏는 본래 죽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여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노씨老氏는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하는 뜻이 많고, 석씨釋氏는 또 전혀 자기 몸을 일삼지 아니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따로 한 물건이 낳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구양공歐陽公(歐陽修)이 일찍이 말하기를 ‘노씨老氏는 생명을 탐하고 석씨釋氏는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또한 좋다.” 이롭게 하였으니, 어찌
공정公正한
도道이겠는가.
석씨釋氏는 태어남이 있으면 없어짐이 있으므로
윤회輪廻注+“윤회설輪回說은 불가佛家에서 스스로 창안創案한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말씀하기를 “《한서漢書》에 귀신鬼神을 기재한 곳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었다.” 하였다. “혹자或者는 송宋나라의 범순부范淳夫(范祖禹)가 후한後漢의 등우鄧禹의 후신後身이라고 합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등우鄧禹 또한 한 훌륭한 사람이나 죽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떻게 넋과 지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왕질王質이 그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물건이 일찍이 없었을 때부터 이래로 자신은 몇 번이고 부모를 바꿨다.’ 하였으니, 그 불효不孝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부모가 낳아주신 몸을 가지고 임시로 붙여 있는 것이라 하여, 옛집이 부서지고 넘어지면 즉시 뛰어서 새집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황벽黃蘗의 한 승려가 게偈를 남겨 그 어미에게 주기를 ‘내 일찍이 이 노파老婆의 집에 기숙寄宿하였다.’ 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부모의 몸을 기숙寄宿하는 곳으로 여겼으니, 정의情義가 없어서 천리天理를 끊어 멸함을 알 수 있다.”가 있으니, 이제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이치를 구하면
윤회輪廻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본래 자기를 이롭게 하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4-2 오직 상달上達(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함)만을 힘쓰고 하학下學(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움)이 없으니, 그렇다면 상달上達하는 부분도 어찌 옳음이 있겠는가.
원래 서로
연속連屬되지 않고
注+살펴보건대 석씨釋氏는 상달上達을 힘쓰고 하학下學이 없어서 상하上下가 본래 연속連屬되지 않음을 말씀한 것이다. 다만
간단間斷注+살펴보건대 상하上下가 서로 연속連屬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함이 있으니, 이는
도道가 아니다.
배움을 끊어버리고 돈오頓悟를 구하므로 하학下學의 공부가 없는 것이다.
도道와 기器는 본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데, 이제 사물事物을 버리고 이치를 밝히며 자취를 없애고 마음을 구하니, 어찌 도道를 아는 자이겠는가.
4-3
맹자孟子가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는 자는
성性을 안다.’하셨으니, 저들이 말하는 ‘마음을 알아
성性을 본다.’는 것이 이것이나 마음을 보존하여
성性을 기르는 한 단락으로 말하면 없다.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명도明道가 진심盡心과 지성知性을 설명한 것은 말씀이 또한 완전치 못하다. 두 정선생程先生의 말씀 가운데에 이와 같은 곳은 반드시 기록하는 자의 잘못일 것이다. 이천伊川께서 ‘마음을 다한 뒤에 성性을 안다.’고 말씀하였으니, 이는 옳지 않다. 진자盡字는 뜻이 크고 지자知字는 뜻이 작다. 성性은 내 마음의 진실한 이치이니, 만약 이것을 모른다면 무엇을 다할 수 있겠는가. 오직 지식상知識上에 나아가 공부를 많이 쌓아가면 자연히 마음을 다하게 되니, 사람이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다만 그 성性을 알기 때문이다. 이 구句의 글뜻은 《맹자孟子》의 ‘그 백성을 얻었다는 것은 그 마음을 얻은 것’이라는 말과 서로 유사하니, 자자者字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말씀하였다. “사람이 그 마음을 다하는 까닭은 그 성性을 알기 때문이니, 진심盡心과 존심存心이 똑같지 않다. 존심存心은 바로 마음을 잡아 보존하여 방심放心을 구하는 일이니 배우는 자가 처음에 힘을 쓰는 곳이요, 진심盡心은 궁리窮理의 일이니 환하게 관통貫通함을 이른다. 이른바 지성知性은 바로 궁리窮理의 일이니, 모름지기 이치를 연구하여야 비로소 성性을 알 수 있고 성性을 알기를 극진히 하면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 “성문聖門에서도 지성知性을 말하고 불씨佛氏도 지성知性을 말하였는데, 차이가 있습니까?” 하고 묻자, 주선생朱先生은 웃으며 말씀하기를 “이 질문도 좋다.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한 번 말해보라.” 하였다. “불씨佛氏의 학설學說은 이 한 성性이 마음에 있어 발하면 의意가 되고 눈에 있으면 봄이 되고 귀에 있으면 들음이 되고 입에 있으면 의논이 되고 손에 있으면 능히 잡는 것이 되고 발에 있으면 움직이고 달려가는 것이니, 이른바 지성知性이란 이것을 알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선생朱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이는 단지 눈금이 없는 저울이요 치수가 없는 자인 것이다. 만약 성문聖門에 있어서는 〈이 성性이〉 마음에 있어서는 발하는 바가 의意가 되니 의意는 모름지기 성실하여야 비로소 되고, 눈에 있어서는 비록 보나 모름지기 분명하게 보아야 비로소 되고, 귀에 있어서는 비록 들으나 모름지기 귀밝게 들어야 비로소 되고, 입에 있어서 담론함과 수족手足의 따위에 있어서도 모름지기 동動하기를 예禮로써 하여야 비로소 되는 것이다.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심에 사물事物이 있으면 법칙法則이 있으니, 불씨佛氏의 말은 다만 사물事物만 있고 법칙法則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맹자孟子께서 말씀한 지성知性은 바로 물격物格을 말씀한 것이다.”
○ 주자朱子가 또 말씀하였다. “《이정유서二程遺書》에 이른바 ‘석씨釋氏는 진심지성盡心知性만 있고 존심양성存心養性은 없다.’ 하였으니, 이 또한 기록하는 자가 잘못 적은 것인 듯하다. 요컨대 석씨釋氏는 다만 황홀恍惚한 사이에 이 심성心性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이요 일찍이 진실한 심성心性을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면裏面에 있는 허다한 도리道理를 보지 못한 것이다. 참으로 가령 존양存養의 공부工夫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단지 그들이 본 바의 심성心性의 영자影子만을 존양存養했을 뿐이니, 진실로 본 바가 없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존양存養하지 못한다고 이를 수 없으나 다만 본 바와 존양存養한 바가 심성心性의 진실함이 아닐 뿐이다.”
○ 또 말씀하였다. “근간에 《석림과정록石林過庭錄》을 보니, 여기에 사상채謝上蔡(謝良佐)의 말이 실려 있는 바, ‘이천伊川이 아무 승려를 만난 뒤에 진리眞理를 깨닫고 마침내 돌아와서 그 말을 도둑질하여 자기 것으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낙학洛學이다.’ 하였다. 내 일찍이 의심하기를 ‘석림石林의 말 같은 것은 굳이 믿을 것이 없으나 상채上蔡가 어찌하여 이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당초當初에 불학佛學은 단지 무無만을 말하였고 존양存養하는 공부는 당唐나라 때 육조六祖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존양공부存養工夫를 가르쳤다. 당초當初에 배우는 자들 또한 단지 입으로만 말하고 몸에 나아가 공부하지 않았는데, 이천伊川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몸에 나아가 공부할 것을 가르치시니, 이 때문에 이천伊川이 불가佛家의 말을 도둑질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고 말한 것’이다.”
○ 살펴보건대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존양存養의 한 단락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으니, 다만 저들이 말하는 존양存養이 우리 유가儒家와 다를 뿐이다.
“석씨釋氏는 황홀한 사이에 심성心性의 영자影子(그림자)만 대략 보고 이면裏面에 있는 허다한 도리道理를 전혀 보지 못하니, 진실로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다만 저들이 보는 영자影子를 존양存養할 뿐이다.
4-4 저들은 진실로 말하기를 ‘집을 나가 홀로 자기 몸을 선善하게 한다.’ 하니, 도체道體에 자연 부족한 것이다.”
도道는 인륜人倫에 근본하는데 이제 집을 나간다고 말하면 도체道體에 이지러지고 부족함이 큰 것이다.
4-5 혹자가 말하기를 “
석씨釋氏의
지옥地獄이 있다는 따위는 모두
근기根機가 낮은
注+살펴보건대 하근下根은 하질下質과 같다. 사람을 위하여 이러한 두려운 말을 만들어서
선善을 하게 한 것입니다.” 하자,
명도선생明道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지성至誠이 천지天地를 꿰뚫어도 사람 중에는 오히려 교화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어찌 거짓 가르침을 세워서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킬 수 있겠는가.”
[張伯行 註]정자程子가 석씨釋氏를 물리친 것이 지극하였다.
이에 혹자或者가 왜곡하여 해명解明하기를 “석씨釋氏가 마음에 사람들이 선행善行하는 것을 권하고자 하였고 사람들은 누구나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천당天堂과 지옥地獄, 윤회輪廻와 인과因果 따위를 가설하여 만들어서 저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바가 있음을 알아서 선善을 하게 하였으니, 이는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을 위하여 설법說法한 것이다.
어찌 깊이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하자, 정자程子가 또 배척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천하에는 오직 성誠만이 사람을 교화할 수 있으니,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이치가 서로 감동시켜 믿는 것이다.
지금 성誠이 지극한 자는 왕왕 천지天地도 꿰뚫을 수 있으나 어리석고 완고한 자를 감동시키지는 못하니, 이는 사람도 오히려 성誠에 교화되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이니, 어찌 마음은 이와 같지 않으면서 설교說敎하기를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거짓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는데, 사람을 교화할 수 있겠는가.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고자 하면서 다만 죽음을 두려워함을 볼 뿐이요, 남을 어리석게 만들고자 하다가 다만 자신을 어리석게 하여, 자신의 심성心性을 포기하고 끝없는 사리私利를 엿보게 한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석씨釋氏의 본말本末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