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曰 孟子는 醇乎醇者也요 荀與揚은 大醇而小疵라하시니 三子는 皆大賢이라
祖六藝而師孔子하니 孟子好詩書하고 荀子好禮하고 揚子好易하여 古今之人이 共所宗仰이라
監於二子而折衷於聖人하여 潛心以求道之極致하여 至于白首然後著書라
雖未能無小疵나 然其所潛最深矣니 恐文公所云이 亦未可以爲定論也라
孟子之文은 直而顯하고 荀子之文은 富而麗하고 揚子之文은 簡而奧하니 唯其簡而奧也라 故難知라
學者多以爲諸子而忽之러니 晉祠部郞中李軌始爲之註하고 唐柳州刺史柳宗元이 頗補其闕이라
景祐四年에 詔國子監하여 校揚子法言하여 嘉祐二年七月에 始校畢上之하고
又詔直祕閣呂夏卿校定하여 治平元年上之하며 又詔內外制看詳하여 二年上之하니
光少好此書하여 硏精竭慮하여 歷年已多러니 今老矣라 計智識所及컨대 無以復進이로되
竊不自揆하고 輒采諸家所長하여 附以己意하고 名曰集註라하니
凡觀書者는 當先正其文하고 辨其音이니 然後可以求其義라
故相宋公家에 有李祠部註本及音義하니 最爲精詳이라
音義은 多引天復本하니 未知天復何謂也나 諸公校法言者 皆據以爲正이라
宋著作과 吳司封이 亦據李本이나 而其文多異同하고 音義皆非之하여 以爲俗本이라
今獨以國子監所行者로 爲李本하고 宋著作, 吳司封本을 各以其姓別之하며
或參以漢書하여 從其通者하여 以爲定本호되 先審其音하고 乃解其義라
한문공韓文公(한유韓愈)이 순자荀子를 칭찬하여 “맹가孟軻와 양웅揚雄의 중간에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맹자孟子는 순수하고 순수한 자이고, 순자荀子와 양자揚子는 크게는 순수하나 작게는 하자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세 사람은 모두 대현大賢이다.
육예六藝(육경六經)를 근본으로 삼고 공자孔子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맹자孟子는 《시詩》‧《서書》를 좋아하고, 순자荀子는 《예禮》를 좋아하고, 양자揚子는 《역易》을 좋아하였으니, 옛사람과 지금 사람들이 모두 종주로 삼아 우러러보는 분들이다.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진실로 감히 그 등급을 논할 수 없으나 양자揚子가 가장 늦게 태어나 〈맹자와 순자〉 두 분을 보았고,
성인聖人(공자孔子)에게 절충折衷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도道의 극치를 찾아 백발에 이른 뒤에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므로 터득한 것이 많으니, 후세에 글을 쓴 자 중에 이보다 더한 자가 없다.
비록 작은 하자가 없지는 못하나 몰두하여 연구한 것이 가장 깊으니, 한문공韓文公이 말한 것은 또한 정론定論이 될 수 없을 듯하다.
맹자孟子의 문장은 직설적이면서 드러나고, 순자荀子의 문장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고, 양자揚子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심오하니, 간결하면서도 심오하기 때문에 〈양자揚子의 글은〉 알기가 어렵다.
배우는 자들이 대부분 제자諸子라 하여 소홀히 여겼는데, 진晉나라 사부낭중祠部郞中 이궤李軌가 처음 주註를 내고 당唐나라 유주자사柳州刺史 유종원柳宗元이 그 부족한 부분을 상당히 보충하였다.
경우景祐 4년(1037)에 국자감國子監에 명하여 《양자법언揚子法言》을 교정하게 해서 가우嘉祐 2년(1057) 7월에 비로소 교정을 마쳐 올렸고,
또 직비각直祕閣 여하경呂夏卿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해서 치평治平 원년元年(1064)에 올렸으며, 내제內制와 외제外制에게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여 치평治平 2년(1065)에 올렸으니,
그런 뒤에 국자감國子監에 명하여 판각해서 인쇄하게 하였다.
옛 저작좌랑著作佐郞 송함宋咸과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오비吳祕가 모두 일찍이 《법언法言》에 주를 내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이 책을 좋아하여 전심專心으로 연구하고 힘을 다해 생각하면서 보낸 햇수가 이미 많은데, 지금은 늙어서 지혜와 식견이 미치는 바를 헤아려보면 더 이상 진전된 것이 없다.
그러나 외람되이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번번이 제가諸家들의 장점을 채택하여 나의 뜻을 붙이고 ‘집주集註’라고 이름하였다.
무릇 책을 보는 자는 마땅히 먼저 그 글자를 바로잡고 그 음을 분별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옛 정승인 송상 공宋庠 公의 집안에 이사부李祠部(이궤李軌)의 주본註本과 음의音義가 있으니, 가장 정밀하고 상세하다.
음의音義는 대부분 천복본天復本을 인용하였는데 천복天復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공諸公 중에 《법언法言》을 교정하는 자들이 모두 이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송저작宋著作(송함宋咸)과 오사봉吳司封(오비吳祕)도 이본李本에 근거하였으나 그 글에 이동異同이 많고 음音과 의義가 모두 잘못되어 속본俗本이라 하였다.
이제 다만 국자감國子監에서 간행한 것을 이본李本으로 삼고, 송저작宋著作과 오사봉吳司封의 본本을 각각 그 성姓으로 구별하였으며,
혹 《한서漢書》를 참고하여 통하는 것을 따라 정본定本을 만들되 먼저 그 음을 살피고 비로소 그 뜻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어리석은 나의 마음에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고 반드시 다 옳지는 않으니, 후생들이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원풍元豐 4년(1081) 11월 기축己丑에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은 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