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1我朝文廟享祀位 :
이 자료는 조선조 문묘에 享祀한 인물을 나열하고 배향한 位次를 나타낸 것이다.
역주2顔子 :
B.C.521~B.C.491. 자는 子淵으로 曲阜 출신이다. 공자보다 30세 연소하였으며 가장 촉망받던 제자였는데, 29세에 요절하였다. 元나라 文宗 때 兗國復聖公으로 추증되었고, 明나라 世宗 때 復聖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3子思 :
B.C.483~B.C.402. 자는 子思이며 子思子라고도 불린다. 공자의 嫡孫이자 孔鯉의 아들이다. 曾子에게 배웠다. ≪中庸≫을 저술하였다. 원나라 문종 때 沂國述聖公으로 추증되었고, 명나라 세종 때 述聖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4曾子 :
B.C.505~B.C.435. 자는 子輿이다. 공자 만년의 제자로 아버지 曾點과 함께 공자 문하에 있었다. 공자가 죽은 후 삼년상을 지냈다. ≪大學≫의 經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나라 문종 때 郕國宗聖公으로 추증되었고, 명나라 세종 때 宗聖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5孟子 :
B.C.372~B.C.289. 자는 子輿 혹은 子居 등이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전국시대 鄒나라 출신으로 子思를 사숙하였다. 제자들에 의해 ≪孟子≫가 전한다. 원나라 문종 때 鄒國亞聖公으로 추증되었고, 명나라 세종 때 亞聖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6閔損 :
B.C.563~B.C.487. 자는 子騫이며, 閔子라고도 불린다. 魯나라 靑州 宿國 출신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덕행으로 안회와 병칭된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南宋 度宗 때 費公에 봉해졌고, 明 世宗 때 ‘先賢閔子’로 칭해졌다.
역주7冉雍 :
B.C.522~? 자는 仲弓이다. 형 冉耕, 이복동생 冉求와 함께 삼형제가 공자의 문하에서 이름을 날려, ‘一門三賢’으로 불렸다. 덕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공자가 ‘南面’을 시킬 만하다고 평하였다. 남송 도종 때 ‘薛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冉子’로 칭해졌다.
역주8端木賜 :
B.C.520~B.C.456. 자는 子貢이다. 춘추시대 衛나라 출신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유세할 때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 함께 천하를 주유하였다. 공자가 ‘瑚璉之器’라고 평한 바 있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역임하였다. 상업에도 능해 부를 축적하여,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부유하다고 일컬어진다. 남송 도종 때 ‘黎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端木子’로 칭해졌다.
역주9仲由 :
B.C.542~B.C.480. 자는 子路 혹은 季路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 제자 가운데 政事를 잘하는 것으로 꼽혔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용기가 있었다. 공자를 따라 천하를 주유하였다. 위나라에 있을 때 내란 중 살해당하였다. 남송 도종 때 衛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仲子’로 칭해졌다.
역주10卜商 :
B.C.507~? 자는 子夏이다. 춘추시대 晉나라 출신이다. 일설에는 衛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문학으로 꼽혔다. 공자가 죽고 문하에 내분이 일어나자 魏國 西河에 가서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길렀다. 남송 도종 때 魏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卜子’로 칭해졌다.
역주11周敦頤 :
1017~1073.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茂叔, 호는 濂溪, 시호는 元公이며, 湖南省 永州 출신이다. 程珦의 추천을 받아 分寧縣의 주부를 거쳐 南安의 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정향의 두 아들 程顥‧程頤 형제를 가르쳤다. 合州判官‧虔州通判‧廣東轉運判官‧知南康軍을 역임하였다. 陳搏의 〈無極圖〉를 참고하여 〈太極圖說〉을 만들었는데, 이는 송대 성리학의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 외에 대표적인 저서로 ≪通書≫가 있다. 宋나라 理宗 때 汝南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元나라 仁宗 때 道國公에 추봉되었다.
역주12程顥 :
1032~1085.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伯淳, 호는 明道, 시호는 純이다. 아버지 程珦이 南安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에게 배웠다. 鄠縣 주부를 시작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理氣一元論’, ‘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대 성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후인들이 그와 정이의 저서를 합편한 ≪二程全書≫가 있다. 송나라 이종 때 河南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원나라 문종 때 豫國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13張載 :
1020~1077.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子厚, 호는 橫渠先生, 시호는 明公이며 大梁 출신이다. 1057년 진사에 급제한 뒤에 祁州司法參軍, 雲岩縣令, 著作佐郞, 簽書, 渭州軍事判官, 崇文院校書 등을 역임했다. 저작으로 후세 사람들이 편찬한 ≪張載集≫이 남아 있다. 송대 理學의 주류 가운데 하나인 關學의 창시자이다. 송나라 이종 때 郿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4冉耕 :
B.C.544~? 자는 伯牛이며, 冉牛라고도 불린다. 덕행으로 안연, 민손과 병칭되었다. 병 때문에 일찍 죽었다. 염옹의 형이다. 남송 度宗 때 鄆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冉子’로 칭해졌다.
역주15宰予 :
B.C.522~B.C.458. 자는 子我이며, 宰我라고도 불린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 제자 가운데 언어를 잘하는 것으로 꼽힌다. 남송 도종 때 齊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宰子’로 칭해졌다.
역주16冉求 :
B.C.522~? 자는 子有이며, 冉有라고도 불린다. 다재다능하였고 理財에 밝았다. 노나라 계씨의 재신을 역임한 바 있다. 염옹의 이복동생이다. 남송 도종 때 徐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冉子’로 칭해졌다.
역주17言偃 :
B.C.506~B.C.443. 자는 子遊이며, 叔氏라고도 불린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常熟 출신으로, 72제자 가운데 유일한 남방 출신이다. 노나라 武城宰를 역임하였다. 남송 도종 때 吳公에 봉해졌고, 명 세종 때 ‘先賢言子’로 칭해졌다.
역주18顓孫師 :
B.C.504~? 자는 子張이며, 춘추시대 陳나라 출신이다. 세속에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송 도종 때 陳國公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陳公으로 개칭되었고, 명 세종 때 ‘先賢顓孫子’로 칭해졌다.
역주19程頤 :
1033~1107.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正叔, 호는 伊川, 시호는 正公이며, 洛陽 출신이다. 형 정호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고, 형과 함께 ‘二程子’라 불리며 程朱學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國子監敎授‧秘書省校書郞‧崇政殿說書를 역임하였다. ≪周易≫에 연구가 깊어 ≪易傳≫을 남겼다. 송나라 이종 때 伊川伯에 추봉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원나라 문종 때 洛國公에 추봉되었다.
역주20邵雍 :
1011~1077.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堯夫, 호는 安樂先生, 시호는 康節이다. 李之才로부터 圖書‧天文‧易數를 배웠다.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易哲學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數理哲學을 만들었다. 벼슬을 사양하고 평생 낙양에 은거했다. ≪皇極經世書≫, ≪伊川擊壤集≫ 등을 남겼다. 송 휘종 때 新安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21朱熹 :
1130~1200.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元晦‧仲晦이며, 호는 晦庵‧晦翁‧雲谷山人‧滄洲病叟 등이다. 시호는 文公이다. 복건성 尤溪 출신으로, 24세 때 李侗을 만나 배우면서 유학에 전념하였다. 19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관직을 거치기도 하였으나 거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朱文公文集≫, ≪朱子語類≫ 등을 남겼으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남송 이종 때 信國公에 봉하였다가 徽國公으로 개칭하였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역주22澹臺滅明 :
B.C.512?~? 자는 子羽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武城 출신이다. 子遊가 武城의 邑宰로 있을 때 등용했던 인물로, 공자의 문하에 들어갔다. 후에 楚國으로 내려가 제자를 기르고 그곳에서 죽었다. 宋나라 眞宗 때 金鄕侯에 봉해졌고, 明나라 世宗 때 ‘先賢澹臺子’로 칭해졌다.
역주23原憲 :
B.C.515~? 자는 子思이며, 춘추시대 송나라 출신이다. 평생 안빈낙도하며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공자가 魯나라 司寇를 지낼 때 家宰를 맡은 바 있다. 공자 사후 衛國에 은거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任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愿子’로 칭해졌다.
역주24南宮适 :
?~? 자는 子容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의 학생이었다. 후에 조카사위가 되었다. 송나라 진종이 龔丘侯로 봉하였는데 휘종 때 汝陽侯로 개봉되었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南宮子’로 칭해졌다.
역주25商瞿 :
B.C.522~? 자는 子木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易經≫을 좋아하여, 공자가 그에게 전수한 바 있다. 송나라 진종 때 須昌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商子’로 칭해졌다.
역주26漆彫開 :
B.C.540~B.C.489. 자는 子開 또는 子若이다. 일설에 子修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 문하에서 덕행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에 ≪漆雕子≫ 13편이 있다. 송나라 진종 때 汝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漆雕子’로 칭해졌다.
역주27樊須 :
B.C.505?~? 자는 子遲이며, 樊遲라고도 불린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益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樊子’로 칭해졌다.
역주28公西赤 :
B.C.509?~? 자는 子華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의 제자로, 그의 가신으로 있었다. 공자의 상례 때 기물제도는 그에 의해 배치된 것이다. 송나라 진종 때 鉅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西子’로 칭해졌다.
역주29梁鱣 :
B.C.522~? 자는 叔魚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千乘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粱子’로 칭해졌다.
역주30冉孺 :
B.C.501~? 자는 子魯, 혹은 子曾이다. 冉求의 둘째 아들이다. 송나라 진종 때 臨沂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冉子’로 칭해졌다.
역주31伯虔 :
B.C.501~? 자는 子哲, 혹은 子折, 子晳이다. 공자의 만년 제자로, 儒行으로 이름이 났다. 송나라 진종 때 沭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伯子’로 칭해졌다.
역주32冉季 :
B.C.498~? 자는 子産이며, 冉雍의 둘째 아들이다. 공자 제자 가운데 가장 연소하다. 공자가 처음 그를 보고 대성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제자로 삼았다. 송나라 진종 때 諸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冉子’로 칭해졌다.
역주33漆彫哆 :
?~? ‘漆雕侈’로 기록된 곳도 있다. 자는 子斂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濮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漆雕子’로 칭해졌다.
역주34漆調徒父 :
?~? 漆雕從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文, 子有, 子友, 子期 등으로 알려졌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으로, 덕성으로 이름이 났다. 송나라 진종 때 高苑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漆雕子’로 칭해졌다.
역주35商澤 :
?~? 자는 子季이다. 송나라 진종 때 鄒平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商子’로 칭해졌다.
역주36任不齊 :
B.C.545~B.C.468. 자는 子選이며, 춘추시대 초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當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任子’로 칭해졌다.
역주37公良孺 :
?~? 자는 子正, 혹은 子幼이다. 公良儒, 公襄儒라고도 불린다. 춘추시대 陳나라 출신으로, 송나라 진종 때 牟平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良子’로 칭해졌다.
역주38秦冉 :
?~? 자는 子開로, 춘추시대 蔡나라 출신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나 ≪孔子家語≫에는 실려 있지 않다. 송나라 진종 때 新息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秦子’로 칭해졌다.
역주39公肩定 :
?~? 公堅定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仲, 혹는 子中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혹은 晉나라, 衛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문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송나라 진종 때 梁父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肩子’로 칭해졌다.
역주40鄡單 :
?~? 자는 子家이다. 송나라 진종 때 聊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鄡子’로 칭해졌다.
역주41罕父黑 :
?~? 자는 子索, 혹은 子素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祁鄕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罕父子’로 칭해졌다.
역주42公祖句玆 :
?~? 公祖玆라고도 한다. 자는 子之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卽墨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祖子’로 칭해졌다.
역주43縣成 :
?~? 懸成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祺, 혹은 子橫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으로, 송나라 진종 때 武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縣子’로 칭해졌다.
역주44燕伋 :
B.C.541~B.C.476. 燕級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思이다. 춘추시대 秦나라 출신이다. 노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22세 때 공자를 따라 배우기 시작하였고, 장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私塾을 일으켰다. 송나라 진종 때 汧源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燕子’로 칭해졌다.
역주45顔之僕 :
?~? 자는 子叔으로, 곡부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宛句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46樂欬 :
?~? 자는 子聲으로,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秦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진종 때 建成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樂子’로 칭해졌다.
역주47顔何 :
?~? 자는 子冉.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孔子家語≫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송나라 진종 때 堂邑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48狄黑 :
?~? 자는 子皙, 혹은 皙之이다. 송나라 진종 때 林慮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狄子’로 칭해졌다.
역주49孔忠 :
?~? 자는 子蔑로, 공자의 형 孟皮의 아들이다. 송나라 진종 때 鄆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孔子’로 칭해졌다.
역주50公西蒧 :
?~? 자는 子上, 혹은 子尙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徐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西子’로 칭해졌다.
역주51施之常 :
?~? 자는 子恒, 혹은 子常이다. 魯 惠公의 8세손이다. 송나라 진종 때 臨濮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施子’로 칭해졌다.
역주52秦非 :
?~? 자는 子之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華亭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秦子’로 칭해졌다.
역주53顔噲 :
?~? 자는 子聲.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 송나라 진종 때 ‘濟陰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54高堂生 :
?~? 전한 때 곡부 사람이다. 자는 伯이다. 今文禮學을 최초로 전한 경학자이다. 당나라 때 萊蕪伯에 봉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역주55毛萇 :
?~? 전한 때 度 출신이다. 고문경학인 毛詩學의 초기 전수자로 전해진다. 스승 毛亨에게 ≪毛詩詁訓傳≫을 배워, ≪詩經≫에 뛰어났다. 송나라 휘종이 樂壽伯에 봉하였다.
역주56劉向 :
B.C.77~B.C.6. 전한의 학자이다. 자는 子政으로, 한나라 종실 출신이다. 宣帝 때 諫大夫에 기용되어, 수십 편의 賦頌을 지었다. 재차 선제에게 기용되어 石渠閣에서 오경을 강의하였다. ≪說苑≫, ≪新序≫, ≪列女傳≫, ≪戰國策≫, ≪別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역주57鄭衆 :
?~83.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仲師, 河南 開封 출신이다. 中郞將과 大司農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鄭興의 춘추좌씨학을 계승하였으며, ≪周易≫과 ≪詩經≫, ≪周禮≫, ≪國語≫ 및 曆算에도 밝았다. ≪周禮鄭司農解詁≫, ≪鄭衆春秋牒例章句≫, ≪鄭氏婚禮≫, ≪國語章句≫ 등을 남겼다. 송나라 진종 때 中牟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58盧植 :
?~192.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子幹, 涿縣 출신이다. 靈帝 때 박사가 되었고, 九江太守, 北中郞將, 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董卓이 少帝를 폐위할 것을 거론하자 귀향하여, 上谷에 은거했다. ≪尙書章句≫, ≪三禮解詁≫ 등을 저술하였으나 일실되었고 ≪小戴禮記注≫가 전한다. 송나라 진종 때 良鄕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59服虔 :
?~? 후한의 경학자이다. 자는 子愼, 河南의 滎陽 출신이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九江太守를 지냈다. ≪春秋左氏傳解≫를 저술하여, 그의 주석이 東晉 및 남북조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滎陽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60韓愈 :
768~824. 당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退之, 호는 昌黎, 시호는 文公이며, 懷州 修武縣 출신이다. 792년 진사에 급제하여, 監察御史‧陽山縣令‧刑部侍郞‧潮州刺史‧吏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문학사에서 문체개혁을 통한 고문운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사상면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배격하여, 송대 성리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 ≪韓昌黎集≫ 등을 남겼다. 송나라 신종 때 昌黎伯에 봉해져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61楊時 :
1053~1135. 북송 때의 학자이다. 자는 中立, 호는 龜山, 福建의 將樂 출신이다. 程顥‧程頤 형제에게 수학하였다. 이들의 도학을 전파하여 洛學의 大宗으로 추앙받았다. ≪龜山集≫, ≪龜山語錄≫, ≪二程粹言≫ 등을 남겼다. 명나라 효종 때 將樂伯에 봉해졌다.
역주62胡安國 :
1074~1138. 북송 때의 학자이다. 자는 康侯, 시호는 文定이며, 福建 崇安 출신이다. 程頤를 私淑하여 居敬窮理의 학문을 중히 여겼다. ≪春秋胡氏傳≫, ≪資治通鑑擧要補遺≫ 등을 남겼다. 明나라 憲宗 때 建寧伯에 봉해졌다.
역주63張栻 :
1133~1180.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敬夫, 호는 南軒, 四川 廣漢 출신이다. 胡宏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나라 湖湘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주자는 장식의 학문이 높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고 칭송하였으며, 유고집인 ≪南軒集≫을 편찬하였다. 南宋 理宗 때 華陽伯에 봉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역주64黃幹 :
1152~1221.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直卿, 호는 勉齋, 시호는 文肅이며, 福州 閩縣 출신이다. 젊어서 주희에게 배웠는데, 주희가 딸을 시집보냈다. 주희가 위독했을 때 자신의 저서를 모두 그에게 남겨 학문을 잇도록 했다. 처음엔 스승의 학설을 고수했지만, 나중에는 陸學과 조화시키려 했다. 저서에 ≪書說≫과 ≪勉齋集≫, ≪六經講義≫, ≪禮記集注≫, ≪論語通釋≫, ≪論語意原≫, ≪中庸總論≫, ≪中庸總說≫, ≪經解≫, ≪聖賢道統傳授總敍說≫ 등이 있다. 淸나라 世宗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65眞德秀 :
1178~1235. 남송 때 학자이다. 자는 景元 또는 希元인데, 나중에 景希로 고쳤다. 호는 西山, 시호는 文忠이며, 建寧府 浦城 출신이다. 1199년 진사로 급제하였고, 泉州와 福州의 知州‧戶部尙書‧翰林學士‧知制誥‧參知政事 등을 역임했다.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시정에 대해 자주 건의했고, 奏疏는 수십만 자에 이르렀다. 저서에 ≪大學衍義≫, ≪唐書考疑≫, ≪西山讀書記≫, ≪文章正宗≫, ≪西山甲乙稿≫, ≪西山文集≫ 등이 있다. 明나라 憲宗 때 浦城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66薛聰 :
655~? 신라시대의 학자로, 자는 聰智이다. 아버지는 元曉, 어머니는 瑤石公主이다. 경주 설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經史에 박통했으며, 우리말로 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쳤다. 強首‧崔致遠과 더불어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설총의 문장으로는 〈花王戒〉가 ≪三國史記≫ 〈薛聰列傳〉에 전한다. 高麗 顯宗 때 弘儒侯에 봉해졌다.
역주67安珦 :
1243~1306. 본관은 順興, 자는 士蘊, 호는 晦軒, 시호는 文成이며, 경상도 興州 출신이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校書郞‧監察侍御史‧左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289년 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朱子書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1230년에 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303년 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祭器‧樂器 및 六經‧諸子書‧史書‧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1304년에 대성전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先聖들의 화상을 모셨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자,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받는다. 1319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68金宏弼 :
1454~1504. 본관은 瑞興, 자는 大猷, 호는 簑翁‧寒暄堂, 시호는 文敬이다.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小學≫을 배웠고,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자칭하였다. 1494년 遺逸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감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고, 1504년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복권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157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묘종사를 하자는 건의가 꾸준히 이어져오다가 선조 때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景賢錄≫, ≪寒暄堂集≫ 등을 남겼다.
역주69趙光祖 :
1482~1519. 본관은 한양, 자는 孝直, 호는 靜菴, 시호는 文正이다. 17세 때 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戊午史禍로 熙川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5년 별시문과에 급제, 成均館典籍‧監察‧禮曹佐郞‧經筵侍讀官‧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의 신임 하에 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고, 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하여 혁파하였다.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여, 신진사류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훈구대신들의 탄핵으로 유배되었고, 기묘사화 때 賜死되었다. 선조 때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靜菴集≫이 있다.
역주70李滉 :
1501~1570. 본관은 眞寶, 자는 景浩, 호는 退溪‧退陶‧陶叟, 시호는 文純이다.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고,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副正字‧弘文館修撰‧成均館司成을 역임했다. 을사사화 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에 전념하였다. 풍기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紹修書院으로 개창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였다. 68세의 노령에 大提學‧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 ≪退溪集≫, ≪聖學十圖≫, ≪自省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영남을 배경으로 퇴계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 崎門學派 및 熊本學派의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주71李珥 :
1536~1584. 본관은 德水, 자는 叔獻, 호는 栗谷‧石潭이며, 시호는 文成이다. 1558년 별시에서 장원하였다. 과거에서 아홉 번 장원하여 ‘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이 있다. 吏曹佐郞‧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주자학의 근본 문제를 논의하였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聖學輯要≫를 편찬하고, 1577년 아동교육서인 ≪擊蒙要訣≫을 편찬했다.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과의 당쟁을 조정하려 하였으나 성과 없이 동인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탄핵을 받자 사퇴하였고, 49세에 병사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숙종 때 성혼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己巳換局 때 출향되었다가, 甲戌換局 이후 다시 종사되었다.
역주72金長生 :
1548~1631. 본관은 光山, 자는 希元, 호는 沙溪, 시호는 文元이다. 宋翼弼과 李珥의 문하에서 배웠다. 15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昌陵參奉이 되고, 敦寧府參奉‧定山縣監‧刑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송시열, 송준길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저서로 ≪喪禮備要≫, ≪家禮輯覽≫, ≪近思錄釋疑≫, ≪經書辨疑≫ 등이 있다. 숙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73宋浚吉 :
1606~1672. 본관은 恩津, 자는 明甫, 호는 同春堂, 시호는 文正이다. 이이를 사숙했고,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 받아 1630년 洗馬에 제수되었다. 司憲府執義‧大提學‧兵曹判書‧右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慈懿大妃의 服喪問題로 禮訟論爭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를 주장해 관철시켰으나 남인들의 공격을 받아 벼슬을 사퇴하였다. 1674년 仁宣大妃가 죽은 후 다시 예송논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관직을 삭탈 당했다가 1680년 庚申換局 때 복권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兩宋’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 西人 山林의 영수 역할을 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74(禽)[金] :
底本에는 ‘禽’으로 되어 있으나, ≪宋史≫에 의거하여 ‘金’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5(恩)[息] :
底本에는 ‘恩’으로 되어 있으나, ≪宋史≫에 의거하여 ‘息’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6(沂)[祁] :
底本에는 ‘沂’로 되어 있으나, ≪宋史≫에 의거하여 ‘祁’로 바로잡았다.
역주77(眞)[愼] :
底本에는 ‘眞’으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에 의거하여 ‘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8(向)[珦] :
底本에는 ‘向’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에 의거하여 ‘珦’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9宓不齊 :
B.C.501?~B.C.445. 자는 子賤으로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공자가 군자답다고 칭찬한 바 있다. 송나라 진종 때 ‘單父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宓子’로 칭해졌다.
역주80公冶長 :
?~? 자는 子長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계씨의 일족인 季冶의 후손이다.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송나라 진종 때 高密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冶子’로 칭해졌다.
역주81公晳哀 :
?~? 자는 季次, 혹은 季沈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여항 출신으로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송나라 진종 때 北海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子’로 칭해졌다.
역주82高柴 :
B.C.521~B.C.393. 자는 子羔, 또는 子皐, 子高, 季高, 季臯, 季子臯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으로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여, 공자 제자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벼슬한 제자이다. 송나라 진종 때 ‘共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高子’로 칭해졌다.
역주83有若 :
B.C.508?~? 자는 子有, 또는 子若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言偃, 卜商, 曾參, 顓孫師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만년 제자이다. 송나라 진종 때 平陰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有子’로 칭해졌다.
역주84巫馬施 :
B.C.521~? 자는 子期,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陳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기 전에 문하에 들어간 제자로, 單父宰를 맡아 치적을 낸 바 있다. 송나라 진종 때 東阿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巫馬子’로 칭해졌다.
역주85顔辛 :
B.C.505~? 顔幸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柳,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덕성으로 이름을 남겼다. 송나라 진종 때 陽穀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86曹恤 :
B.C.501~? 曹卹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循. 춘추시대 曹나라 출신으로, 조나라 종실의 후예이다. 역사에서 ‘樂道明義’라 평가되었다. 송나라 진종 때 上蔡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曹子’로 칭해졌다.
역주87公孫龍 :
B.C.498~? 公孫寵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石이며, 춘추시대 초나라 출신이다. 衛나라 사람이며, 혹은 趙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학문을 구하여 노나라로 와서 공자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공자의 학문이 남방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송나라 진종 때 枝江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孫子’로 칭해졌다.
역주88秦商 :
B.C.547?~? 자는 子彊 혹은 子丕, 子玆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아버지 堇父는 공자의 아버지 叔梁紇과 더불어 용력으로 이름이 났던 사람으로, 진상 역시 용력이 컸으나 공자에게 수행의 방도를 물어 제자가 되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송나라 진종 때 鄄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秦子’로 칭해졌다.
역주89顔高 :
B.C.501~? 顔産, 顔刻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驕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곤액을 당할 때 수행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雷澤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90壤駟赤 :
?~?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穰駟赤’으로 되어 있다. 자는 子徒. 子從이며, 춘추시대 秦나라 출신이다. 독서를 잘 했다고 한다. 송나라 진종 때 上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壤子’로 칭해졌다가 청나라 때 와서 ‘先賢壤駟子’로 개칭되었다.
역주91石作蜀 :
B.C.519~B.C.479.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石子蜀’으로 되어 있다. 자는 子明, 호는 卓子, 춘추시대 秦나라 출신이다. 노나라에서 공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유가의 학설을 전파하여, 후세 사람들이 石夫子라 불렀다. 송나라 진종 때 成紀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石子’로 칭해졌다.
역주92公夏首 :
?~?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公夏守’로 되어 있다. 자는 子乘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鉅平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夏子’로 칭해졌다.
역주93后處 :
?~?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石處’로 되어 있다. 자는 子里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膠東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后子’로 칭해졌다.
역주94奚容蒧 :
?~? 자는 子偕, 또는 子楷, 子皙이다. 송나라 진종 때 濟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奚子’로 칭해졌다.
역주95顔祖 :
?~? 자는 子襄, 子商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富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顔子’로 칭해졌다.
역주96句井彊 :
?~?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勾井疆으로 되어 있다. 자는 子疆. 혹은 子界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衛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滏陽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句井子’로 칭해졌다.
역주97秦祖 :
?~? 자는 子南으로, 춘추시대 秦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馮翊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秦子’로 칭해졌다.
역주98榮旂 :
B.C.542~B.C.470.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는 ‘榮祈’로 되어 있다. 자는 子祈, 子祺. 子顔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衛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이른 나이부터 공자를 따라 배웠고 六藝에 정통하였으며, 공자를 도와 ≪詩經≫, ≪書經≫, ≪易經≫, ≪禮記≫를 산삭, 찬술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厭次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榮子’로 칭해졌다.
역주99左人郢 :
?~? 자는 子行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성으로 이름이 났다. 송나라 진종 때 南華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左子’로 칭해졌다.
역주100鄭國 :
?~? 자는 子徒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에 “薛邦, 자는 子從”이라고 한 인물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司馬貞에 따르면 ‘薛’자와 ‘鄭’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이고 ‘國’은 漢 高祖 劉邦의 이름을 避諱하여 바뀐 것이라 한다. 송나라 진종 때 朐山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鄭子’로 칭해졌다.
역주101原亢 :
?~? 原桃라고도 한다. 자는 子籍, 또는 子杭이다. 錢穆은 ≪論語新解≫에서 原亢과 陳亢을 동일인이라고 하였으나, 문묘 배향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본다. 송나라 진종 때 樂平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原子’로 칭해졌다.
역주102廉潔 :
?~? 자는 子庸, 子曹이다. 춘추시대 衛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胙城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廉子’로 칭해졌다.
역주103叔仲會 :
B.C.501~? 자는 子期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또는 晉나라 출신이라고도 한다. 붓을 들고 공자를 모셨다. 송나라 진종 때 博平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叔仲子’로 칭해졌다.
역주104邽巽 :
?~? 邽選, 邦選, 國選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斂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高唐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邽子’로 칭해졌다.
역주105公西輿如 :
?~? 公西與라고도 한다. 자는 子上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臨朐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公西子’로 칭해졌다.
역주106蘧瑗 :
?~? 자는 伯玉이며, 춘추시대 衛나라 대부로, 세 公을 섬겼다. 공자가 존경하던 벗이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도가에서는 ‘無爲而治’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시호는 成子이다. 원나라 때 內黃侯에 봉해졌다.
역주107林放 :
?~? 자는 子邱이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이다. ≪史記≫와 ≪孔子家語≫에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 임방이 예를 묻는 내용이 ≪論語≫ 〈八佾〉에 보인다. 송나라 진종 때 長山侯에 봉해졌다. 명나라 때 鄕祀로 내려 보냈다가 청나라 때 다시 문묘에 입사되어, ‘先賢林子’로 칭해쳤다.
역주108陳亢 :
B.C.511~B.C.430. 자는 子亢, 또는 子禽이다. 춘추시대 陳나라 출신으로, 陳胡公의 20세손이자 제나라 대부 子車의 아우이다. 單父邑宰에 있을 때 백성에게 덕행을 베풀었다. 형이 죽었을 때 순장에 반대하였다. 송나라 진종 때 南頓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陳子’로 칭해졌다.
역주109琴張 :
?~? 琴牢라고도 한다. 자는 子開, 子張이다. 춘추시대 衛나라 출신이다. 공자에게 ‘狂者’로 평가받은 바 있다. 송나라 때 頓丘侯로 봉해졌다가 후에 陽平侯로 다시 봉해졌다. 명나라 세종 때 ‘先賢琴子’로 칭해졌다.
역주110步叔乘 :
?~? 자는 子車로, 춘추시대 제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진종 때 博昌侯에 봉해졌고, 명나라 세종 때 ‘先賢步叔子’로 칭해졌다.
역주111公羊高 :
?~? 子夏의 제자이다. ≪春秋公羊傳≫을 저술하였는데, ≪春秋左氏傳≫, ≪春秋穀梁傳≫과 함께 春秋三傳이라 불린다. 청나라 때 莊存與가 ≪춘추공양전≫을 학문으로 일으켜 공양학이 번성하였다. 당나라 태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송나라 진종 때 臨淄伯에 봉해졌다.
역주112伏勝 :
B.C.264~B.C.170. 자는 子賤이며, 濟南 출신으로 秦나라 때 박사를 지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벽 속에 ≪尙書≫를 숨겼다가 한나라 초기에 꺼냈는데, 이를 今文尙書라 한다. 복승은 금문상서를 보존하여 전수한 사람이다. 당나라 태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송나라 진종 때 乘氏伯에 봉해졌다.
역주113戴聖 :
?~? 전한 때의 학자로, 자는 次君이다. 숙부 戴德과 함께 后蒼에게 배웠고, 小戴로 불린다. 今文禮學인 小戴學의 개창자다. ≪小戴禮記≫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禮記≫이다. 남송 도종 때 考城伯에 봉해졌다.
역주114董仲舒 :
B.C.179~B.C.104. 前漢의 학자로 廣川縣 출신이다. 일찍부터 ≪春秋公羊傳≫을 공부하여, 景帝 때 박사가 되었다. 무제가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董子文集≫, ≪春秋繁露≫ 등을 남겼다. 명나라 헌종 때 廣川伯에 봉해졌다.
역주115孔安國 :
B.C.264?~B.C.170? 전한의 학자로 자는 子國이며, 曲阜 출신이다. 공자의 12세손이며, 博士‧諫大夫를 지냈다. 魯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헐었을 때 蝌蚪文字로 된 ≪古文尙書≫, ≪禮記≫, ≪論語≫, ≪孝經≫이 나왔는데, 今文과 대조, 고증, 해독하여 주석을 붙였다. 이것에서 古文學이 비롯되었으므로, 고문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송나라 진종 때 曲阜伯에 봉해졌다.
역주116杜子春 :
?~? 후한 때 학자이다. 河南 緱氏 출신이다. 劉歆에게 ≪周禮≫를 배우고, 太中大夫를 지냈다. 그가 주를 단 ≪주례≫는 鄭玄이 채용했으며, 鄭衆, 賈逵 등에게 ≪주례≫를 전수해주었다. 송나라 때 緱氏伯에 봉해졌다.
역주117鄭玄 :
127~200. 후한의 학자이다. 자는 康成이며, 北海 高密 출신이다. 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로 있다가, 낙양에 올라가 태학에 입학하였다. 馬融 등에게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44세에 ‘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평생을 학문에 바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訓詁學‧經學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周易≫, ≪尙書≫, ≪毛詩≫, ≪周禮≫, ≪儀禮≫, ≪禮記≫, ≪論語≫, ≪孝經≫ 등을 주석하였다. 송나라 때 高密伯에 봉해졌다.
역주118范寗 :
339~401. 동진의 학자이며, 자는 武子이다. 孝武帝 때 中書侍郞이 되었으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학교를 세우고 경학에 힘썼다. ≪春秋穀梁傳≫의 집해를 저술하였다. 송나라 때 新野伯에 봉해졌다.
역주119司馬光 :
1019~1086.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君實이며, 호는 迂夫‧迂叟, 시호는 文正이다. 山西 涑水 출신이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翰林學士‧樞密副使를 역임하였다. 1084년 편년체 역사서인 ≪資治通鑑≫을 완성하였다. 철종 즉위 후 재상이 되어 구법당의 수령으로 활약하였다. ≪涑水紀聞≫, ≪司馬文正公集≫ 등을 남겼다. 죽은 후 溫國公에 봉해졌다.
역주120羅從彦 :
1072~1135. 북송의 학자이다. 자는 仲素, 시호는 文質이며, 豫章先生이라 불린다. 福建 南劍 출신이다. 楊時의 가르침을 받았고, 李侗에게 전수하였다. 1130년 博羅 主簿로 임명되었으나, 퇴직한 후 羅浮山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豫章文集≫, ≪遵堯錄≫ 등을 남겼다. 명나라 신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1李侗 :
1093~1163.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愿仲, 호는 延平, 시호는 文靖이며, 연평선생이라 불린다. 福建 劍浦 출신이다. 나종언에게 程子의 理學을 배웠다. 楊時, 羅從彦과 함께 ‘劍南三先生’으로 불렸다. 그의 문하에서 朱熹와 羅博文, 劉嘉 등이 배출됨으로써 二程의 학문이 주희에게 이어지는 교량적 역할을 했다. ≪李延平集≫을 남겼다. 명나라 신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2呂祖謙 :
1137~1181.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伯恭, 호는 東萊先生이며, 婺州 金華 출신이다. 林之奇와 汪應辰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주희, 장식 등과 교유하였다. 著作郞 겸 國史院編修官을 거쳐 ≪徽宗實錄≫ 중수에 참여하고, ≪皇朝文鑑≫을 편찬, 간행했다. ≪東萊博議≫, ≪呂東萊先生文集≫ 등을 남겼으며, 주희와 함께 ≪近思錄≫을 저술하였다. 원나라 인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3蔡沈 :
1167~1230. 남송의 학자이다. 자는 仲默, 호는 九峰先生, 시호는 文正이다. 蔡元定의 둘째 아들로, 젊어 가학을 이었고, 朱熹에게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道州로 유배를 갔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九峰에 은거하면서 주희의 명령으로 ≪尙書≫에 주를 달아, ≪書集傳≫을 완성했다. ≪洪範皇極≫, ≪蔡九峰筮法≫ 등을 남겼다. 명나라 헌종 때 崇安伯에 봉해졌다.
역주125許衡 :
1209~1281. 원나라 때 학자이다. 자는 仲平, 호는 魯齋, 시호는 文正이며, 懷孟 河內 출신이다. 蘇門에 살면서 姚樞와 함께 강습하면서 도학을 실천하였다. 憲宗 4년 忽必烈의 초빙으로 京兆提學과 國子祭酒 등의 요직을 맡았다. 集賢殿大學士‧領太史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讀易私言≫, ≪魯齋心法≫, ≪魯齋遺書≫, ≪許魯齋集≫ 등을 남겼다. 원나라 인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6崔致遠 :
857~? 본관은 경주, 자는 孤雲‧海雲이며, 6두품 출신이다. 12세 때 唐나라에 유학을 떠나, 18세의 나이로 賓貢科에 합격하였다. 876년 당나라의 宣州 漂水縣尉가 되었고, 877년 淮南節度使 高騈의 추천으로 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4년간 고변의 군막에서 表‧狀‧書啓‧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都統巡官에 승차되었다. 당시 지은 〈討黃巢檄文〉을 통해 文名을 날렸다. 신라에 돌아온 뒤에 憲康王에 의해 侍讀兼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진성여왕에게 時務策을 올리는 등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저술로 ≪桂苑筆耕≫ 등이 있다. 고려 현종 때 文昌候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7鄭夢周 :
1337~1392. 본관은 迎日, 자는 達可, 호는 圃隱, 시호는 文忠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成均館大司成‧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명나라에 書狀官으로서 다녀왔으며, 1378년 왜구 단속을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성과를 올렸다. 당시 풍속이 모든 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士庶로 하여금 ≪朱子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하였다. 서울에는 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水站을 설치해 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져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결국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태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8鄭汝昌 :
1450~1504. 본관은 河東, 자는 伯勗, 호는 一蠹‧睡翁이며, 시호는 文獻이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거정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理學으로 추천되었다. 1490년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侍講院說書가 되었다. 戊午史禍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고, 甲子士禍 때 부관참시 되었다. 저서로 ≪一蠹集≫이 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29李彦迪 :
1491~1553. 본관은 驪江, 자는 復古, 호는 晦齋‧紫溪翁, 시호는 文元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正郞‧司憲府掌令‧弘文館校理‧應敎‧吏曹判書‧左贊成 등을 역임하였다. 乙巳士禍 때는 判義禁府事의 중책을 맡아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로 화를 입게 되었다.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되었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다가 죽었다. 1556년 복권되었고, 1567년 왕이 내탕금을 내려 그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저서로, ≪求仁錄≫, ≪大學章句補遺≫, ≪中庸九經衍義≫, ≪奉先雜儀≫ 등이 있다.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30金麟厚 :
1510~1560. 본관은 蔚山, 자는 厚之, 호는 河西‧湛齋, 시호는 文正이다. 김안국에게 ≪小學≫을 배웠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博士兼世子侍講院說書‧弘文館副修撰 등을 역임하였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玉果縣監으로 나가기도 했다. 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죽을 때까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기대승 등의 학문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河西集≫, ≪周易觀象篇≫, ≪西銘事天圖≫, ≪百聯抄解≫ 등이 있다. 정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31成渾 :
1535~1598. 본관은 昌寧, 자는 浩原, 호는 默庵‧牛溪, 시호는 文簡이다. 1551년에 생원‧진사의 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白仁傑의 문하에서 배웠고,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李珥와 교유하였다. 이이와 9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1581년 왕의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고, 이듬해 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자를 보필하여 군무를 도왔으며 해주에서 중전을 호위하였다. 왜와의 許和를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고, 1594년 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 ≪牛溪集≫, ≪朱門旨訣≫, ≪爲學之方≫ 등이 있다. 1602년 기축옥사로 인해 삭탈관직 되었다가 인조 때 복권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숙종 때 이이와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1689년에 한때 출향되었으나 1694년에 다시 陞廡되었다.
역주132宋時烈 :
1607~1689. 본관은 恩津, 자는 英甫, 호는 尤菴‧尤齋, 시호는 文正이다.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김장생 사후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배웠다.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師傅로 임명되어, 이후로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효종 즉위 후 世子侍講院進善‧吏曹判書‧左議政 등을 역임하였고,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효종 사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현종 때 여러 차례 초빙이 있었으나 재야에 머물렀으나 막대한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에 패하여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 때 풀려났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 때 신원되었다. 정치적으로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고, 학문적으로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자학에 전심하여, ≪朱子大全箚疑≫,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영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33朴世采 :
1631~1695. 본관은 潘南, 자는 和叔, 호는 玄石‧南溪, 시호는 文純이다.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 이이‧성혼의 문묘종사에 대해, 영남유생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 상소의 부당함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에 실망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51년 金尙憲과 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59년 천거로 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자의대비 복상 문제 때 송시열과 송준길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1674년 남인이 집권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생활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때 다시 등용되어 司憲府執義‧大司憲‧吏曹判書‧右參贊 등을 역임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 때에 재야로 물러나 右議政‧左議政을 두루 거치며 소론의 영수 역할을 하였다. ≪範學全編≫, ≪詩經要義≫, ≪春秋補編≫, ≪大學補遺辨≫, ≪心經要解≫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예학에 큰 업적을 남겨, ≪南溪先生禮說≫‧≪六禮疑輯≫ 등에서 예학의 새 국면을 개척하였다. 영조 때 문묘에 종사되었다.
역주134(牟平侯)[枝江侯] :
底本에는 ‘牟平侯’로 되어 있으나, ≪宋史≫에 의거하여 ‘枝江侯’로 바로잡았다. ‘牟平侯’는 公良孺의 봉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