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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2)

공자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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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記解 第四十注+言夫子終事 因以名篇하니라
孔子蚤作注+夫子早起하여 負手曳杖注+以手搭肩曰負 曳者 拖其杖也하여 逍遙於門注+徜徉於門前이라하여 而歌曰 泰山其頹乎注+歌曰 泰山將傾崩이라인저 梁木其壞乎注+柱上梁木將損이라인저注+ 與哲同이라人其萎乎注+明哲之人 其困頓乎인저인저
旣歌而入注+歌畢入門去이어늘 子貢聞之注+子貢聞其歌曰 泰山其頹 則吾將安仰注+子貢曰 泰山已崩 我何所仰望이리오이리오 梁木其壞 吾將安杖注+梁木旣壞 我何所倚賴리오이리오
哲人其萎 吾將安放注+哲人已死 我何所倚放이리오이리오 夫子殆將病也注+夫子將有疾이라로다하고 遂趨而入注+遂入見夫子한대
夫子歎曰 賜 汝來何遲注+夫子歎息하여 謂子貢曰 爾何來之遲 予疇昔 夢坐奠於兩楹之間注+我昨夜 夢坐兩楹之中하여 受人祭奠이라호니
夏后氏 殯於東階之上하니 則猶在阼注+夏時死者 置柩於東階主位 殷人 殯於兩楹之間하니 卽與賓主夾之
殯於西階之上하니 則猶賓之注+殷人死者 置柩在賓主兩柱之中하고 在西階之上客位로대 而丘也 卽殷人注+夫子曰 我殷人也이라 夫明王不興이어니 則天下孰能宗余注+言當時無明王하니 天下之人 孰能尊吾道리오리오 余逮將死注+我次第死라하고
遂寢病七日而終하니 時年七十二矣注+夫子遂寢疾한대 七日而死하니 年七十二러라 葬於魯城北泗水上注+葬夫子於泗水上이라하니 二三子三年喪畢注+群弟子三年喪已終矣호대 惟子貢廬於墓六年注+獨子貢結廬於夫子墓傍六年이라이라
自後群弟子及魯人處於墓如家者 百有餘家注+自後衆弟子及魯國人居於夫子墓側者 百有餘家하니 因名曰孔里焉注+名其地爲孔里이라하다


제40편 죽음을 기록한 것에 대한 해설注+부자가 임종할 때의 일을 말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편명을 붙인 것이다.
공자가 臨終할 때의 정황과 哀公誄文을 기록한 편이기에, 편명을 ‘終記解’로 삼았다. 공자는 王道를 숭상하고 로써 다스릴 것을 주장하면서 천하를 周遊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공자가 죽자 哀公이 공자를 위해 誄文을 지었는데, 子貢은 살아서는 등용하지 않다가 죽은 뒤에야 글을 짓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에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을 깊이 존경하여 心喪 三年을 하였고, 공자의 무덤 근처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공자가 일찍 일어나注+부자가 일찍 일어난 것이다. 지팡이를 끌면서注+손을 등 뒤로 지는 것을 라고 한다. 는 지팡이를 끄는 것이다. 문에서 배회하면서注+문 앞에서 배회한 것이다. 노래하였다. “泰山이 무너지려나 보다.注+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보다.”라고 한 것이다. 들보가 부러지려나 보다.注+기둥 위 들보가 부러지겠다는 것이다. 哲人注+頭註:(밝다)은 과 같은 뜻이다. 衰落하려나 보다.”注+명철한 사람이 困乏하겠다는 것이다.
노래를 마치고 들어가자,注+노래를 마치고 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자공이 이 노래를 듣고注+자공이 이 노래를 들은 것이다. 말하였다. “태산이 무너지면 내가 무엇을 우러러 보겠는가.注+자공이 말하기를 “태산이 무너진 뒤에는 내가 무엇을 우러러 보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들보가 부러지면 내가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注+들보가 부러진 뒤에는 내가 어디에 의지하겠느냐는 것이다.
철인이 쇠락하면 내가 누구에게 기대겠는가注+철인이 죽은 뒤에는 내가 누구에게 기대겠느냐는 것이다. 부자께서 아마도 병이 나시려나 보다.”注+부자께서 병이 나시겠다는 것이다. 마침내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는데,注+마침내 들어가 부자를 뵌 것이다.
부자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야! 너는 어찌 이렇게 늦게 왔느냐?注+부자가 탄식하면서 자공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늦게 왔느냐?”라고 한 것이다. 내가 어제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祭需를 받는 꿈을 꾸었다.注+내가 어젯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남에게 祭需를 받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夢奠兩楹夢奠兩楹
夏后氏는 동쪽 계단 위에 빈소를 차렸으니 오히려 阼階에 두어注+ 하나라 때에 죽은 사람은 동쪽 계단의 주인 자리에 靈柩를 둔 것이다. 〈주인으로 대우한 것이고,〉 은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으니 바로 賓客과 주인의 중간으로 대우한 것이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 위에 빈소를 차리니 오히려 빈객으로 대우하는 것이다.注+은나라 사람으로 죽은 자는 빈객과 주인의 두 기둥 사이에 靈柩를 두고, 〈주나라 사람으로 죽은 자는〉 서쪽 계단 위 빈객 자리에 둔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은나라 사람이다.注+부자가 말하기를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훌륭한 임금이 나오지 않으니 천하 사람들 중 누가 나의 도를 높일 수 있겠느냐.注+지금 훌륭한 임금이 없으니 천하 사람들 중 누가 나의 도를 높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注+내가 곧 죽겠다고 한 것이다.
마침내 병석에 누웠는데 7일 만에 죽으니, 이때 나이가 72세였다.注+부자가 마침내 병석에 누웠는데 7일 만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노나라 성 북쪽 가에서 장례를 치렀는데,注+泗水 가에 부자를 장사 지낸 것이다. 제자들은 삼년상을 마치고 떠났지만注+제자들이 삼년상을 다 마친 것이다. 자공만은 묘소 곁에 廬幕을 짓고 6년 동안 거처하였다.注+자공만은 부자의 묘소 곁에서 여막을 짓고 6년을 거처한 것이다.
이후로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집에서 거처하듯 묘소 곁에서 거처한 家戶가 100여 였다.注+이후로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 중에 부자의 묘소 곁에 거처한 가호가 100여 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 마을을 孔里라고 하였다.注+그 지역을 孔里라고 한 것이다.
心喪廬墓心喪廬墓


역주
역주1 40-1 : 저본의 표제에 “두 기둥 사이에서 祭需를 받는 꿈을 꾸다.[夢奠兩楹之間]”, “공자가 죽을 때 나이가 72세였다.[孔子死年七十二]”라고 하였다.
역주2 뒷짐을 지고 : 원문의 ‘負手’는 뒷짐을 지는 것을 뜻한다. ≪禮記集說大全≫ 〈檀弓 上〉의 주석에 ‘負手’를 ‘손을 뒤집어 뒤로 하는 것[反手却後]’이라고 풀이하였다.
역주3 泗水 : 山東省 曲阜縣을 지나는 강 이름으로, 공자의 고향이다. 공자가 泗水와, 사수의 지류인 洙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학문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후에 두 강을 합하여 儒家를 일컫게 되었다. ≪禮記≫ 〈檀弓 上〉에 “내가 그대들과 洙水와 泗水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겼다.”라고 한 曾子의 말이 보인다.
역주4 [周人] : 저본에는 없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周人’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공자가어(2) 책은 2020.11.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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