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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2)

공자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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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者 皆當時公卿士大夫及七十二弟子之所諮訪交相對問言語也
旣而諸弟子各自記其所問焉하니 與論語孝經竝時
弟子取其正實而切事者하여 別出爲論語하고 其餘則都集錄하여 名之曰孔子家語라하니라
凡所論辯流判較歸 實自夫子本旨也어늘 屬文下辭 往往頗有浮說煩而不要者
亦由七十二子各共敍述首尾하고 加之潤色호대 其材或有優劣故 使之然也
孔子旣沒 而微言絶하고 七十二弟子終 而大義乖
六國之世 儒道分散하니 遊說之士 各以巧意而爲枝葉이로대 唯孟軻荀卿 守其所習이라
當秦昭王時하여 荀卿入秦 昭王從之하여 問儒術한대 荀卿以孔子之語及諸國事 七十二弟子之言으로餘篇 與之
由此 秦悉有焉하니라 始皇之世 李斯焚書어늘 而孔子家語與諸子同列이라 故不見滅이라
高祖克秦하고 悉斂得之하여 皆載於尺竹簡하니 多有古文字
及呂氏專漢하여는 取歸藏之러니 其後被誅亡 而孔子家語乃散在人間이어늘
好事者或各以意 增損其言 故使同是一事而輒異辭
孝景皇帝末年 募求天下禮書한대 于時京師士大夫 皆送官하여 得呂氏之所傳孔子家語러니
而與諸國事及 妄相錯雜하여 不可得知일새 以付掌書하여 與曲禮衆篇亂簡으로 合而藏之祕府
元封之時 吾仕京師할새 竊懼先人之典辭 將遂泯滅이라
於是因諸公卿大夫하여 私以人事하여 募求其副하여 悉得之하고 乃以事類相次하여 撰集爲四十四篇하고
又有曾子問禮一篇 自別屬曾子問이라 故不復錄이라
其諸弟子書所稱引孔子之言者 本不存乎家語 亦以其己自有所傳也 是以皆不取也하니 將來君子不可不鑑이라
孔安國者 字子國이니 孔子十二世孫也 孔子生伯魚하고 魚生子思하니 名伋이라
嘗遭困于宋하여 作中庸之書四十七篇하여 以述聖祖之業하여 授弟子孟軻之徒數百人이라 年六十二而卒이라
子思生子上하니 名白이라 年四十七而卒이라
自叔梁紇始出妻하여 及伯魚亦出妻하고 至子思又出妻 故稱孔氏三世出妻라하니라
子上 生子家하니 名傲 後名求 年四十五歲而卒이라 子家生子直하니 名㯼 年四十六而卒이라
子直生子高하니 名穿이라 亦著儒家語十二篇하니 名曰 이라 年五十七而卒이라
子高生武하니 字子順이요 名微 後名斌이라 爲魏文王相이라 年五十七而卒이라
子武生子魚하니 名鮒 及子襄하니 名騰이요 及子文하니 名祔 子魚後名甲이라
子襄 以好經書博學이러니 畏秦法峻急하여 乃壁藏其家語孝經尙書及論語於夫子之舊堂壁中하니라
子魚 爲陳王涉博士太師러니 卒陳下 生元路하니 一字元生이요 名育이요 後名隨
子文 生㝡하니 字子産이라 後從高祖하여 以左司馬將軍으로 佐韓信하여
破楚於垓下하여 以功封蓼侯 年五十三而卒이라 諡曰夷侯
長子滅嗣하여 官至太常이요 次子襄 字子士 後名讓이라
爲孝惠皇帝博士라가 遷長沙王太傅 年五十七而卒이라
生季中하니 名員이라 年五十七而卒이라 生武及子國이라
子國 少學詩於申公하고 受尙書於伏生하며 長則博覽經傳하여 問無常師 年四十 爲諫議大夫라가 遷侍中博士
天漢後 魯恭王壞孔子故宅이라가 得壁中詩書하여 悉以歸子國한대
子國乃考論古今文字하고 撰衆師之義하여 爲古文論語訓十一篇 孝經傳二篇 尙書傳五十八篇하니
皆所得壁中科斗本也 又集錄孔子家語하여 爲四十四篇이러니 旣成 會値巫蠱事하여 寢不施行이라
子國 由博士하여 爲臨淮太守러니 在官六年 以病免이라가 年六十卒于家
其後孝皇帝 詔光祿大夫劉向하여 校定衆書하니 都記錄하여 名古今文書論語別錄이라하니라
子國孫衍 爲博士 上書辯之하여 曰 臣聞호대 明王不掩人之功하고 大聖不遺人之善이라하니 所以能其明聖也니이다
陛下發明詔하고 諮群儒하여 集其天下書籍 無言不悉하고 命通才大夫校定其하여
使遐載之文으로 以大著於今日이라 立言之士 垂於不朽하니 此則蹈明王之軌 遵大聖之風者也
雖唐帝之煥然 周王之彧彧이라도 未若斯之極也 故述作之士 莫不樂測大倫焉이니이다
臣祖故臨淮太守安國 建仕於孝武皇帝之世러니 以經學爲名하고 以儒雅爲官하여 讃明道義하여 見稱前朝니이다
壞孔子故宅이라가 得古文科斗尙書孝經論語한대 世人莫有能言者러니
安國爲之今文讀하여 而訓傳其義하며 又撰次孔子家語한대
旣畢訖 會値巫蠱事起하여 遂各廢하여 不行于時 然其典雅正實 與世所傳者 不可同日而論也니이다
光祿大夫向 以爲其時所未施之故 尙書則不記於別錄하고 論語則不使名家也하니 臣竊惜之니이다
且百家章句無不畢記어든 況孔子家古文正實而疑之哉잇가 又戴聖 皆近世小儒 以曲禮不足이라하여
而乃取孔子家語雜亂者及子思孟軻荀卿之書하여 以裨益之하고 總名曰禮記라하니이다
見其已在禮記者則便除家語之本篇하니 是爲滅其原而存其末也 不亦難乎잇가
臣之愚以爲宜如此爲例하여 皆記錄別見이라 故敢昧冒以聞하노이다
奏上하니 天子許之러니 未卽論定而遇帝崩하고 向又病亡하여 遂不果立하니라


孔子家語≫는 모두 당시 大夫 및 72제자가 공자를 찾아가서 서로 묻고 대답한 말이다.
제자들이 각기 자신이 물은 것을 기록하였으니 ≪論語≫, ≪孝經≫과 기록된 시기가 같다.
제자들이 正實하면서도 일에 절실한 것을 모아서 따로 ≪論語≫로 편찬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모아 기록하여 ≪孔子家語≫라고 이름을 붙였다.
무릇 의논하여 변론하고 분류하여 판단하고 비교하여 하나로 모은 것은 실로 夫子의 본래 뜻인데, 엮고 지은 文辭가 왕왕 근거가 없는 말로서 번다하여 긴요하지 않은 내용이 많은 것은,
또한 72제자가 각기 전체를 함께 서술하고 윤색까지 하는 과정에서 그 재주가 더러 우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공자가 돌아가신 뒤에 隱微한 말이 끊겼고 72제자가 죽은 뒤에 큰 義理가 어그러졌다.
六國의 시대에 儒道가 나뉘자, 遊說하는 선비들이 각기 교묘한 뜻으로 枝葉적인 것을 만들었지만 孟軻荀卿만은 전수받은 것을 지켜 보존하였다.
昭王 때에 荀卿나라에 들어가서 昭王이 그와 從遊하면서 儒術에 대해 묻자 순경이 공자의 말과 여러 나라의 일과 72제자의 말을 가지고 모두 백여 을 지어서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나라에 이에 대한 기록이 모두 남아 있게 되었다. 始皇의 시대에 李斯書籍을 불태웠지만, ≪공자가어≫는 諸子書와 같은 반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았다.
高祖나라를 이기고 모두 거두어 모아서 3竹簡에 실어 기록하였는데 古文이 많았다.
呂氏나라의 국정을 專橫할 때에 미쳐서는 모아서 숨겨 두었는데 그 후 주벌되어 죽은 뒤로 ≪공자가어≫가 세상에 흩어지자,
好事家가 더러 각자 자신의 뜻에 맞게 글을 보태거나 빼버렸기 때문에 똑같은 하나의 일인데 글이 달라지게 되었다.
孝景帝 말년에 천하의 禮書를 모으고 구하자 이때 京師의 사대부들이 모두 서적을 에 보냈으므로 呂氏가 전한 ≪공자가어≫를 찾았는데,
여러 나라의 일과 70제자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掌書에게 맡겨 曲禮에 관한 여러 중에서 어지러운 簡冊들을 합하여 祕府에 보관하게 하였다.
武帝 元封 年間(B.C.110~B.C.105)에 내(孔安國)가 京師에서 벼슬하면서 선인들의 典籍이 장차 泯滅될까 염려되었다.
孔安國孔安國
그래서 여러 公卿大夫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내 副本을 구하여 모두 얻은 다음 유사한 일끼리 편차하여 44편으로 撰集하였다.
또 〈曾子問禮〉 한 편은 〈曾子問〉에 따로 소속시켰으므로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글에서 공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인용한 것이 ≪공자가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또한 자신이 개인적으로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취하지 않은 것이니 훗날의 군자들은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孔安國子國으로 공자의 12세손이다. 공자가 伯魚를 낳고 伯魚子思를 낳았는데 이름이 이다.
이〉 일찍이 나라에서 곤란한 일을 당하자 ≪中庸≫ 47편을 지어 聖祖功業을 서술하여 제자인 孟軻의 무리 수백 인에게 전수하였다. 62세에 졸하였다.
子思子上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다. 47세에 졸하였다.
叔梁紇이 처음으로 를 내쫓았는데 伯魚도 처를 내쫓았고 子思도 처를 내쫓았으므로 ‘孔氏三世出妻’라고 하였다.
子上子家를 낳았는데 이름이 이고 後名이다. 45세에 졸하였다. 子家子直을 낳았는데 이름이 (개)이다. 46세에 졸하였다.
子直子高를 낳았는데 이름이 穿이다. 또한 儒家와 관련된 내용 12편을 짓고 ≪≫이라 하였다. 57세에 졸하였다.
子高를 낳았는데 자는 子順이며 이름은 이고 後名(빈)이다. 文王 때에 재상을 지냈고 57세에 졸하였다.
子武子魚를 낳았는데 이름이 이고, 또 子襄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고, 또 子文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다. 子魚後名이다.
子襄은 경서를 좋아하고 박학하였으나 나라의 법이 매우 가혹한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家語≫, ≪孝經≫, ≪尙書≫, ≪論語≫를 夫子의 옛집 벽에 숨겼다.
子魚나라 王涉博士太師로 있었는데 陳下에서 죽었다. 元路를 낳았는데 또 다른 자는 元生이며 이름은 이고 後名이다.
子文(최)를 낳았는데 자가 子産이다. 〈子産은〉 뒤에 高祖를 따랐고 左司馬將軍으로서 韓信을 보좌하여
垓下에서 楚軍을 격파하여 그 공로로 蓼侯(요후)에 봉해졌다. 53세에 졸하였다. 시호는 夷侯이다.
子産長子는 환관이 되어 벼슬이 太常에 이르렀고, 次子은 자가 子士이고 後名이다.
孝惠皇帝博士로 있다가 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다. 57세에 졸하였다.
季中을 낳았는데 이름이 이다. 57세에 졸하였다. 子國을 낳았다.
子國은 어려서 申公에게서 ≪詩經≫을 배웠고 伏生에게서 ≪尙書≫를 전수받았으며, 커서는 경전을 두루 보았고 물음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40세에 諫議大夫가 되었다가 侍中博士로 옮겨졌다.
天漢( 武帝의 연호) 후기에 魯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허물다가 벽 속에서 ≪詩經≫과 ≪尙書≫를 발견하고는 모두 子國에게 보내자,
子國古今文字를 고찰하여 논의하고 여러 뛰어난 사람들의 뜻을 뽑아서 ≪古文論語訓≫ 11편, ≪孝經傳≫ 2편, ≪尙書傳≫ 58편을 지었는데,
모두 벽 속에서 발견된 科斗文字(蝌蚪文字)로 된 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또 ≪孔子家語≫를 集錄하여 44편을 만들었는데 완성한 뒤에 마침 이 일어나 폐기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자국은 博士로 있다가 臨淮太守가 되었는데 관직에 있은 지 6년이 지나 병으로 免職되었고 60세에 자신의 집에서 졸하였다.
그 뒤에 孝成皇帝光祿大夫 에게 조칙을 내려 수많은 책을 校定하게 하니 모두 기록하여 ≪古今文書論語別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子國의 손자 孔衍이 박사로 있을 때에 “신은 듣건대 明王은 남의 공로를 가리지 않고 大聖人은 남의 작은 도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니, 이 때문에 明聖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밝은 조서를 내리고 여러 儒者에게 자문하여 천하의 서적들을 모을 적에 간곡하게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通明하고 재주 있는 大夫에게 그 뜻을 校定하도록 명하여
옛날 기록된 글을 오늘날 크게 그 의미를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立言하는 선비들이 不朽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으니 이는 명왕의 법도를 따르고 대성인의 풍모를 따른 것입니다.
비록 이라도 이처럼 지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선비들이 모두 大倫의 뜻을 헤아리기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의 조부 臨淮太守 安國孝武皇帝 때에 벼슬하였는데, 經學으로 이름이 났고 儒學으로 관리가 되어 道義를 도와서 밝혀 前朝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당시 魯恭王이 공자의 옛집을 허물다가 古文科斗文字로 기록된 ≪尙書≫, ≪孝經≫, ≪論語≫를 발견하였는데, 세상 사람들 중에 능히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안국이 이 때문에 今文으로 판독하여 또 ≪공자가어≫를 撰次하였습니다.
일을 다 마쳤는데 마침 巫蠱의 사건이 일어나 결국 각기 폐기되고 당시에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典雅하고 正實한 내용은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같은 수준으로 놓고 논할 수 없습니다.
光祿大夫 劉向은 당시에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尙書≫는 ≪別錄≫에 기록하지 않고 ≪論語≫는 一家로 명명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이 점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百家의 글들은 모두 다 기록하였는데 하물며 공자 집안에 보관된 책들이 古文正實임을 의심하겠습니까. 또 은 모두 근세의 보잘 것 없는 儒者曲禮의 내용이 부족하다고 하여
≪공자가어≫에서 어지럽게 뒤섞인 글과 子思, 孟軻, 荀卿의 글을 모아서 보태고는 ≪禮記≫라고 총칭하였습니다.
이제 오히려 이미 ≪禮記≫에 실려 있는 것을 보니, 바로 ≪공자가어≫에 있는 본래 내용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는 그 근원을 없애고 지엽을 남겨두는 것이니 또한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마땅히 이러한 것을 본보기로 삼아 모두 기록하여 별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몽매함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렇게 上奏하자 천자가 허락하였는데 즉시 論定하지 못하다가 孝成皇帝가 붕어하고 유향 또한 병으로 죽어 결국 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는 ‘百’으로 되어 있다.
역주2 (子) : 저본에는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역주3 :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는 ‘二’로 되어 있다.
역주4 七十子 :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는 ‘七十二子’로 되어 있다.
역주5 巫蠱 사건 : 漢 武帝 때에 있었던 옥사이다. 武帝가 晩年에 병치레를 많이 하여 혹시 누가 저주한 소치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던 차에, 江充이 태자의 궁중에 木人이 많이 묻혀 있다고 무함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겁이 나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을 하고, 그 후유증으로 승상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만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漢書≫ 〈武帝紀〉, 〈江充傳〉)
역주6 劉向 : 前漢 말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자는 子政이다. 황실의 宗親으로 漢 宣帝 때 名儒로 선발되어 궁중 내에 설치된 궁중도서관인 石渠閣에서 五經을 강의하였으며, 흩어져 있던 先秦의 古籍들을 수집하여 자신이 직접 교감,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들 劉歆과 함께 ≪七略≫을 저술하여 목록학의 비조로 추앙되었다. 각 시대의 고사와 설화를 모은 ≪新序≫와 ≪說苑≫을 지었다.
역주7 (武)[成] : 저본에는 ‘武’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成’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글을……변론하였다 : 이 내용은 ≪御選古文淵鑑≫ 권16 〈上書辨明家語〉에 보인다.
역주9 唐帝(堯)의……文章 : 堯의 찬란한 事業이란 ≪論語≫ 〈泰伯〉에 堯임금의 德을 칭송하면서 “높고 큰 그 공이여, 찬란한 그 문장이여![巍巍乎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라고 한 말을 가리키고, 周나라의 성대한 文章이란 ≪論語≫ 〈八佾〉에 “周나라는 夏나라와 殷나라의 두 왕조를 본받았으니 그 문물이 성대하구나. 나는 周나라의 예법을 따르겠다.[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역주10 (議)[義] : 저본에는 ‘議’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義’로 바로잡았다.
역주11 그……달았으며 : 공안국이 古文으로 된 ≪尙書≫와 ≪論語≫ 등을 今文으로 풀어 읽었으므로 칙명을 받아 ≪書傳≫ 58편과 ≪孝經傳≫, ≪論語解≫를 지은 일을 말한다.
역주12 (共)[恭] : 저본에는 ‘共’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戴聖 : 前漢 때 사람으로, 漢 宣帝 때 博士가 되었다. 戰國시대 때부터 漢나라 초기까지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禮에 관한 논저들을 모아 오늘날의 ≪禮記≫로 불리는 ≪小戴禮記≫를 편찬하였다. 여기에서는 ≪大戴禮記≫를 편찬한 숙부 戴德까지 아울러 가리킨다.
역주14 (向)[尙] : 저본에는 ‘向’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尙’으로 바로잡았다.

공자가어(2) 책은 2020.11.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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