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然則是一擧而霸王之名을 可成也요 四隣諸侯可朝也어늘 而謀臣不爲하고 引軍而退하야 復與荊人爲和하야
注
○王先謙曰 史記秦紀昭王二十九年에 取郢爲南郡하고 王與楚王會襄陵이라하니 此所謂軍退復和也라
楚世家襄王二十三年
注+六國表에 昭王三十一年이라에 襄王收東地兵得十餘萬
하야 復西取秦所拔江旁十五邑以爲郡
하야 距秦
이라하니 下文所謂與秦爲難也
라
그렇게 하였다면 이는 일거에 패주霸主나 제왕帝王의 공명功名을 이룰 수 있고, 사방 제후를 조현朝見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모신謀臣이 이렇게 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여, 다시 초나라 사람과 화친하여
注
○왕선겸王先謙:≪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의 소왕昭王 29년에 “영도郢都를 점령하여 남군南郡을 만들고 소왕이 초왕楚王과 양릉襄陵에서 회합하였다.”라 하였으니, 이 일이 이른바 ‘군대가 퇴각하여 다시 화친했다.[군퇴복화軍退復和]’는 것이다.
≪사기≫ 〈
초세가楚世家〉의
양왕襄王 23년에
注+≪사기史記≫ 〈육국표六國表〉에 소왕 31년이라 하였다. “양왕이 동쪽 지역의 군사를 거두어 10여만 명을 얻어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秦나라가 함락시킨
강방江旁의 15
읍邑을 취해
군郡을 만들어 진나라의 군대를 막았다.”라 하였으니, 아래 글의 이른바 ‘진나라와 맞서게 하였다.[
여진위난與秦爲難]’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