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有
者,
홍정洪亭民耳, 頗善
文, 殊工草隷,
효원제孝元, 一皆使之。
時云:“
十紙, 不敵
。” 吾雅愛其手迹, 常所寶持。
효원제孝元嘗遣
혜편惠編送文章示
소자운蕭좨주酒,
좨주祭酒問云:“君王比賜
, 及寫
, 殊爲
, 姓名爲誰?
소자운子雲歎曰:“此人後生無比, 遂不爲世所稱, 亦是奇事。”
及
陷歿, 簡牘湮散,
정첨丁亦尋卒於
양주揚州, 前所輕者, 後思一紙, 不可得矣。
양梁 효원제孝元帝가 전에 형주荊州에 있을 때 정첨丁覘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홍정洪亭 지방의 평민일 뿐이었으나 글을 상당히 잘 지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효원제孝元帝는 글씨 쓰는 일을 모두 그에게 시켰다.
그러나 군부軍府에서는 출신이 미천하다고 그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으며, 자제들로 하여금 그의 글씨를 본으로 삼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당시에 “정군丁君의 글씨 열 장이 왕포王褒의 글씨 몇 자字를 못 당한다.”라고 했지만, 나는 평소 그의 글씨를 애호하여 늘 소중하게 간직했다.
효원제孝元帝가 일찍이 전첨典籤이었던 혜편惠編을 시켜 좨주祭酒인 소자운蕭子雲에게 문장을 보냈는데, 좨주祭酒가 묻기를 “군왕께서 근자에 내려주신 서한書翰과 시문詩文을 쓴 글씨가 참으로 뛰어난 솜씨인데, 그분의 성명이 어떻게 되시오?
어떻게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가 있소?”라 하였다.
소자운蕭子雲은 탄식을 하면서 “이 사람은 후인들이 견줄 수가 없을 텐데, 끝내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 별난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점차 정첨丁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이 상서의조랑尙書儀曹郞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진안왕晉安王의 시독侍讀이 되어 왕王을 수행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江陵이 함락될 때 〈정첨丁覘이 쓴〉 편지나 문서들은 다 없어져버렸고 정첨丁覘 역시 얼마 후에 양주揚州에서 죽었으니, 예전에 얕보던 이들은 뒤에 〈그의〉 글씨 한 장을 얻고 싶어도 얻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