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畢云 偃은 呂氏春秋에 作椻한대 高誘注에 云 尙은 魏公子牟之後이니 魏得中山以邑之하다 義와 長은 其二臣이라하다
蘇云 中山은 爲魏之別封이니 非春秋時之鮮虞也라 魏文侯가 滅中山而封其少子摯러니
至赧王二十年하여 爲趙武靈王所滅하니 其君이 有武公桓公이니 見世本이라 此名尙者는 當爲最後之君이라하다
案 中山은 卽春秋之鮮虞이니 左傳定四年에 始見於傳이라 其初에 亡於魏하니
文侯十七年에 使樂羊圍中山하고 三年滅之하여 以其地封子擊하며 後擊立爲太子라가 改封次子摯하다
後中山復國하고 又亡於趙하니 則惠文王四年滅之하니 竝見史記魏趙世家及樂毅傳하다
據水經滱水
注
와 及太平御覽百六十一引十三州志
에 竝謂中山桓公
이 爲魏所滅
하니
則尙은 或卽桓公이며 墨子猶及見之라 高蘇는 以爲魏別封하니 非也라
至列子仲尼篇과 莊子讓王篇과 呂氏春秋審爲篇과 淮南子道應訓하여 竝云 魏中山公子牟라하며
高誘와 張湛이 皆謂魏伐中山하여 以邑子牟라하다 然이나 魏牟는 與趙平原君과 秦魏冄范睢와 同時요
其時中山入趙가 已久니 安得尙屬魏리오 則牟所封이 必非鮮虞之中山이며 而尙亦必非牟後가 殆無疑義라
張湛又以子牟爲魏文侯子한대 蓋掍牟與摯爲一人하니 其說尤謬라
注
畢沅:‘偃’은 ≪呂氏春秋≫에 ‘椻’으로 되어 있는데, 高誘의 注에 “尙은 魏나라 公子 牟 의 후손이니, 魏나라가 中山을 획득하고 그에게 食邑으로 주었다. 魏義와 偃長은 그의 두 신하이다.”라 하였다.
蘇時學:中山은 魏나라의 別封이니, 春秋시대의 鮮虞가 아니다. 魏 文侯가 中山을 멸망시키고 少子인 摯를 그 땅에 봉해주었는데,
周 赧王 20년에 이르러 趙 武靈王에 의해 멸망하였으니, 그 임금이 武公과 桓公이었다. ≪世本≫에 보인다. 여기에서 이름이 ‘尙’인 자는 응당 中山의 最後 임금일 것이다.
案:中山은 곧 春秋시대의 鮮虞이니, ≪春秋左氏傳≫ 定公 4년 조의 傳에 처음으로 보인다. 中山이 처음에는 魏나라에게 멸망하였으니,
文侯 17년에 樂羊(악양)에게 中山을 포위하게 하고 3년 만에 멸망시켜 그 땅을 아들 擊에게 봉하였으며, 나중에 擊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가 다시 次子인 摯에게 봉하였다.
이후에 中山이 나라를 收復하였다가 다시 趙나라에게 망하였으니, 趙 惠文王 4년에 중산을 멸망시켰다. 위 내용이 모두 ≪史記≫ 〈魏世家〉와 〈趙世家〉 및 〈樂毅傳〉에 보인다.
酈道元의 ≪水經注≫ 〈滱水〉 및 ≪太平御覽≫ 161에서 ≪十三州志≫를 인용한 곳에 모두 中山 桓公이 魏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니,
尙은 곧 中山 桓公인 듯하며 墨子도 오히려 생전에 그를 보았을 것이다. 高誘와 蘇時學이 中山을 魏나라의 別封이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
심지어 ≪列子≫ 〈仲尼〉와 ≪莊子≫ 〈讓王〉과 ≪呂氏春秋≫ 〈審爲〉와 ≪淮南子≫ 〈道應訓〉에 모두 ‘魏나라 中山 公子 牟’라 하였고,
高誘와 張湛이 모두 ‘魏나라가 中山을 정벌하여 아들 牟에게 食邑으로 주었다.’라 하였다. 그러나 魏나라의 牟는 趙나라의 平原君과 秦나라의 魏冄 및 范睢와 동시대에 살았고,
그때는 中山이 趙나라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이니, 어떻게 尙이 魏나라에 속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牟가 封해진 곳이 분명 鮮虞의 中山은 아니며, 尙도 결코 牟의 후손은 아닐 것임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張湛이 또 公子 牟를 魏 文侯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牟를 摯와 같은 사람이라고 혼동하였으니, 그 說이 더욱 잘못되었다.
이것을 楊倞은 이미 의심했는데도 畢沅은 高誘의 說을 끌어다 쓰며 그 시대를 제대로 校勘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엉성하다 하겠다.